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407)
성황의 아이들-407화(407/469)
407. 머리 탑 (5)
부르르르…….
바깥쪽 팽이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와중에도, 내부의 바늘은 꼿꼿하게 자기주장을 펼치고 있다. 민망하게도 성황가의 황자를 똑바로 겨냥하면서.
멍하니 바늘을 바라보던 로베르 경은, 순간 흠칫 놀라며 자이로컴퍼스를 가방 안으로 후다닥 집어넣어 버렸다.
“큼큼. 이게 왜…….”
첫인상부터 유독 딱딱하고 건조해 보이던 로베르 경이었다. 한데 그런 그가 갑자기 눈에 띄게 당황하며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그, 변변찮은 물건을 보여드리게 되어… 송구합니다, 저하. 아마도 고장… 아니, 오염되었나 봅니다. 최근에 제가 축성을 좀 소홀히 했더니…….”
어, 괜찮아, 로베르 경. 빤히 보이는 상황을 무마해 보려고 굳이 애쓸 필요 없어.
“기자재 부서에도 제대로 항의하겠습니다. 내지 근무가 길어지다 보니, 이 친구들이 다들 기강이 빠져 가지고…….”
괜히 엄한 부서를 족칠 생각도 말고. 그 자이로컴퍼스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건 그대도 알고 나도 아니까.
“어쩌면 불의, 요정님이 내린 축복…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오해의 시련’이라더니 과연, 주신의 사도가 받는 시험이라는 것은 만만치가 않군요.”
“…….”
성진은 달리 대꾸하지 않고 찬찬히 로베르 경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이 친구는 내 옆에서 직접 이질적인 기운을 느낄 텐데, 그게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신성력이 딱히 강하지 않은 프란시스조차, 최근에는 날 볼 때마다 매번 움찔거리고 있는데.’
하지만 성진은 곧 그 해답을 알 수 있었다. 로베르 경이 연이어 이런 제안을 해왔기 때문이다.
“저하. 자이로컴퍼스를 사용할 수 없다면, 순수하게 신성력만으로 마기를 감지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이참에 마물 전담반에 다른 성기사를 하나 더 초빙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른 성기사를?”
“예. 이번에 편성하신 인원들을 보면, 저하와 저를 빼고는 성기사가 전무하지 않습니까?”
물론 성진을 제대로 된 ‘성기사’라 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으니, 실질적으로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로베르 경이 전부다.
“그런데 하필 제 쥐꼬리만 한 신성력은 그나마도 [멸악]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제가 퇴마 도구 사용에 남들보다 능숙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죠.”
시력이 나쁘지 않은 그가 굳이 축성 받은 안경을 쓰고 다니는 것도 마찬가지. 마기를 감지하는 능력이 워낙 미약하다 보니, 특수 처리된 감지 안경으로 보조를 받아야 한다나?
“그렇군.”
어쩐지. 이 친구의 진주궁 출입 허가가 웬일로 순순히 났나 싶었어.
“마침 얼마 전 파견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동기 엑소시스트가 하나 있습니다. 추적 실력이 무척 뛰어난 친구인데, 그녀를 데려오는 것은 어떨지요?”
“흠, 글쎄?”
성진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럴 필요 없지 않을까? 굳이 다른 성기사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참회 교단을 추적하는 방법은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 얼마 전까지 거기서 교구장을 지내던 사람이 지금은 내 권속이 되었거든.
오히려 마물 전담반과 관계도 없는 자를 달고 다녔다가, 괜히 정보의 출처를 의심받을 수도 있잖나.
아니면 이쪽을 퇴치하겠다고 덤벼들지도 모르지. 신성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성진으로부터 꺼림칙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고 하니까.
“일단은 이대로 간다.”
우리가 찾는 건 어디까지나 자코모 밀로지, 그와 계약한 악마가 아니잖아?
“지하에 숨어 있는 암흑 교단을 뒤지는 일이야. 조촐한 인원으로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
성진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로베르 경은 더는 증원을 권유하지 않았다. 단지 조금 푸석해진 얼굴로 작게 우려의 한숨을 쉬었을 뿐.
“과연 감각도 둔한 제가 악마 계약자 추적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부끄럽게도 엑소시스트들 중에는 신성력이 가장 약한 축에 속하니까요.”
“괜찮아. 그보다는 실적이 더 중요하니까.”
성진은 그의 전입 신고서에 기재된 악마 토벌 이력이 대단히 화려했던 것을 기억했다.
“거기다 레안드로스 경을 보라고. 신성력이 아예 없는 그 양반도 무려 성기사단의 단장을 해먹고 있잖아?”
“그야 그렇습니다만.”
“그런데도 엑소시스트들 중 가장 굵직굵직한 성과를 올리는 것도 전부 그 양반 아냐?”
레안드로스 경은 다섯 성기사단 단장들 중 유일하게 신성력이 전무한 인간이다. 그런 이가 단장의 자리를 꿰찰 정도라니, 대체 얼마나 멸악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걸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자연히 이런 의문이 따라왔다.
“그런데 레안드로스 경은 대체 어떻게 혼자서 악마 토벌을 다니는 거지? 신성력 부재로 마기를 감지하지도 못할 텐데. 그도 자네처럼 여러 가지 추적 도구를 쓰는 건가?”
그 묵직한 인상의 남자가, 로베르 경처럼 퇴마 도구를 바리바리 짊어지고 돌아다니는 모습도 잘 상상이 되질 않는다고.
“글쎄요.”
로베르 경은 보조 안경을 콧잔등 위로 바로잡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분과 함께 외지를 다녀 본 적이 없어, 실제 악마를 상대할 때 퇴마 도구들을 사용하시는지 어떤지는 잘 모릅니다. 단지 기자재 부서에 요청하는 물품은 거의 없으신 듯하더군요.”
“그럼 대체 어떻게?”
“하지만 조금은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다. 레안드로스 단장님은 기사단에 대대로 내려오는 귀한 성유물의 주인이시니까요.”
“…성유물?”
“네, 성 테르바키아께서 친히 휘두르셨다고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쌍둥이 곡검, ‘상현’과 ‘하현’ 말입니다.”
상현과 하현,
그것들은 대륙에 존재하는 몇 안 되는 무기형 성유물이다. 성진도 날림으로 입단식을 치르면서 대충 들은 기억이 있었더랬지.
그것들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당시 성인의 공격을 채 두 합도 버티는 악마가 없었다던가.
그렇다 보니 결국 성 테르바키아 기사단의 상징 같은 존재가 된 거다. 기사단의 문양인 교차하는 은빛 갈고리는, 실제로는 갈고리가 아니라 한 쌍의 쇼텔을 상징하니까.
“쌍둥이 곡검의 힘은 단지 [멸악]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문에는 근방에 악마가 나타나면, 스스로 긴 검명을 울려 주인에게 경고한다고 하더군요.”
대대로 성 테르바키아 기사단 단장에게 전해지는 쌍둥이 쇼텔. 그 전설의 무기들 덕분에, 레안드로스 경은 신성력이 전무함에도 가장 강한 성기사단장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래전 황도가 악마종에게 잠식될 뻔했을 때, 성황의 곁에서 가장 많은 악마들을 베어 넘긴 인물 중 하나가 되었지.
“상현과 하현은 현존하는 성유물들 중 두 번째로 격이 높은 무기입니다. 격은 곧 무기의 강함이니, 레안드로스 단장님께서는 세상에서 두 번째로 강한 ‘멸악’의 도구를 늘 곁에 지니고 계시는 셈이지요.”
“음? 두 번째?”
성진은 눈을 깜박거렸다.
“그럼 첫 번째는? 그걸 쓰는 사람은 누군데? 상현과 하현이 그렇게나 강하다면, 첫 번째 무기 역시 악마 소탕에 엄청 유용할 거 아냐?”
그러자 로베르 경이 되레 의아한 듯 성진을 바라보았다.
“…네?”
“응? 왜? 뭐?”
“아니, 그…….”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로베르 경의 시선이 슬그머니 아래로 이동한다. 성진은 곧 그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있었다.
“호두까기?”
“…설마 정말로 모르셨습니까?”
호두까기.
수천수만의 대가리를 깨고도 흠집 하나 남지 않은 단단한 검.
-이제는 목검 대신 그걸 가지고 놀거라. 무슨 장난을 치건 여간해서는 부러지지 않을 거다.
성황이 직접 성진에게 무기를 건네며 했던 말이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인가?’
무려 신의 대리자가 반평생을 지니고 다녔다는 애검이다. 그 격을 귀함의 기준으로 본다면, 아마도 호두까기는 만고의 보물로써 칭송받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호오…….”
이제는 완전히 손에 익은 호두까기의 손잡이가 착 감겨든다. 그것을 잠시 살갑게 어루만지던 성진의 입가에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이건 뭐든 뜻대로 하라는 아버지의 암묵적인 허락이라 봐도 좋지 않을까?’
무려 대륙에서 가장 강한 성유물이 성진의 손에 있다. 그가 흘리는 기운을 찜찜해할 순 있을지언정, 어느 누가 감히 그의 행보를 방해하려 들겠는가.
게다가 어떤 방식으로, 어떤 고위 악마를 죽이더라도 함부로 의심할 수 없을 테지. 최강의 성유물인 호두까기의 소유자라면, 당연히 그런 이적도 하나둘 정도는 일으킬 법하지 않은가!
‘좋아. 정말 잘 됐어! 안 그래도 최근 거슬리는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지. 이제는 그것들을 하나씩 찾아가서, 마음 편히 대가리를 깨기만 하면 되는 거구나!’
한데 바로 그때였다.
지금까지 성진이 흘리는 기운에도 꿋꿋하게 평정을 유지하던 로베르 경이, 갑자기 새하얗게 질리며 흠칫 뒤로 물러나는 게 아닌가!
‘응? 저 친구가 갑자기 왜 저래?’
그러자 그때까지 유리그릇 위에 조용히 앉아 있던 마왕 놈이, 깊은 한숨과 함께 성진에게 사념을 보내왔다.
[…이성진. 내가 너 제발 그렇게 웃지 좀 말라고 대체 몇 번을 말했어, 응?]* * *
“…음?”
갑자기 묘한 한기를 느낀 파종이 고개를 들었다.
“뭐지? 날씨가 그리 추워진 것도 아닌데…….”
아니, 설령 정말로 기온이 내려갔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고위 마왕인 그가 고작 조금의 온도 차이를 춥다고 느낄 리가.
잠시 의아해하던 파종은 곧 합리적인 결론을 내렸다.
“인형아! 이 그릇의 수명이 다 되어 가는 모양이다. 좀 더 제대로 된 다른 그릇은 없는 거냐?”
그러자 한창 여장을 꾸리던 로메인이 하던 일을 멈추며 순순히 대답했다.
“그 몸을 준비할 때 함께 사로잡은 파종의 형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곳에 두고 갈 테니 부디 마음대로 쓰십시오, 질병의 군주시여.”
“그래? 그거 고맙…….”
무심코 대꾸하던 파종이 갑자기 인상을 와락 구겼다.
“잠깐만. 어차피 파종의 형제들은 모두 내 종들이 아니냐? 네가 내 것을 마음대로 빼돌린 것에 화를 내야 하는 거냐, 아니면 그것들을 도로 내게 고스란히 바친 걸 기뻐해야 하는 거냐?”
“당시는 그 외에 달리 그릇을 구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위대한 군주시여. 부디 저의 무례를 너그러이 용서하시기를.”
“뭐, 그래? 그렇다면야.”
파종은 휑하니 비어 있는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그런데 인형아, 너 어디 멀리 가는 거냐? 갑자기 왜 짐을 모조리 꾸리고 있어?”
아닌 게 아니라, 로메인은 임시로 동굴에 두었던 짐들을-그래봤자 바느질 도구와 몇 개의 손 인형이 다였지만-모조리 등짐에 구겨 넣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껏 준비하던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되지 않았습니까? 다른 길을 모색해야겠지요. 저는 이제부터 키프로스에 가 보려 합니다, 파종이시여.”
“키프로스에? 갑자기 거기는 왜?”
“이제 황도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 오래전 그곳에 안배해 둔 것들이라도 되찾으려 함입니다.”
키프로스에는 예전에 로메인이-엄밀히 말하면 인형사로 지내던 시절-준비해 둔 몇 개의 기물들이 남아 있었다.
준비하던 계획 대부분이 무용지물이 된 지금, 그것들은 어쩌면 성황에게 대항할 마지막 패가 되어 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키프로스의 대양에는 경계의 종족 하나가 숨어 있지. 지금쯤이면 그들의 지도자는 한낱 미물로 전락했을 테니, 잘하면 그것으로부터 손쉽게 [종족 열쇠]를 빼앗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본래라면 진작 그곳으로 향할 예정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차질이 생겨 조금 늦어졌습니다만.”
레오나드 왕자가 호언장담한 대로 제때 황녀를 꾀어낼 수 있었다면.
계획대로 황도 여기저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게이트가 열렸다면.
그리고 [인형사]가 모종의 이유로 갑자기 몸을 피해, 키프로스에 남겨 둔 마지막 인형에게로 도망치지만 않았다면.
하지만 로메인은 이제 모든 것을 잃은 채로, 과거의 자신이었던 인형사와 경쟁하여 모든 안배를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일이 잘 풀린다면 곧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질병의 군주시여. 부디 다음에는 기아의 군주와 함께 아세인에서 뵐 수 있기를.”
로메인은 정중하게 예를 취해 보인 후 천천히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다.
“…….”
파종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했다.
‘정말 가버리네? 귀찮은데 저놈, 지금 죽여 버릴까?’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저 인형은 본체가 아니라고 했지. 지금 저것을 죽여 봤자, 진짜 몸은 어딘가에 멀쩡히 살아남아 이후에는 [파종]을 지극히 경계하게 되리라.
놈은 이오니아의 잃어버린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코드]를 직접 짜는 능력은 그냥 보면 별것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 간혹 대단히 성가신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탐욕도 그렇게 말했어. 저놈은 [미궁]의 숨겨진 입구를 알고 있다고.’
그렇다면 조금은 더 지켜볼까?
그렇게 결정한 파종은, 동굴 구석으로 들어가 인형이 두고 간 새로운 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최근 몸을 보살피지 못해 깡말라버린 체격에 덥수룩하게 수염까지 자라 있는, 참으로 볼품없어 보이는 남자였다.
‘클레멘스라…….’
파종은 슬쩍 훑어본 것만으로 남자의 이력을 알아낼 수 있었다.
본래 자신의 품에 들겠다고 서약한 파종의 형제이니, 그가 마음대로 기억을 엿보고 조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지금 쓰고 있는 그릇과 함께 오래전 황도에 숨어들었던 또 다른 파종의 형제였다.
어쩌다 운 나쁘게 인형에게 사로잡힌 후, 이지를 잃은 상태로 계속 그들을 따라다니는 중이었지. 이제 더는 예전의 신실하던 모습을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 딱하긴 했지만 거기까지. 파종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
‘이것도 저것도 다 변변찮다. 최근에는 마력 소모도 컸겠다, 그냥 지하 교단으로 돌아가서 한동안 편히 쉬어야겠어.’
마음을 정한 파종은 미련 없이 노인의 몸을 떠났다.
털썩!
그러자 통제를 잃은 노인의 몸이 그대로 숨이 끊어지며 바닥으로 쓰러진다.
이미 노인의 영혼은 고위 마왕에게 치여 소멸된 지 오래. 몸을 지켜주던 마왕의 기운마저 사라지자, 군데군데 번져 있던 검버섯이 급격히 확장되기 시작했다. 마기로 인한 침식 현상이었다.
파스스…….
잠시 후, 노인의 몸은 때 묻은 사제복만을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
그러자 그때까지도 멍하니 서 있던 클레멘스의 눈에서, 눈물 한 줄기가 천천히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