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410)
성황의 아이들-410화(410/469)
410. 머리 탑 (8)
본래라면 신성제국의 토벌대는 지금쯤 먼 대양으로 나가 있어야 했다. 키프로스에 도착하자마자, 그곳의 해군과 합류하여 바로 출항할 예정이었으니.
하지만 당장 토벌대를 보내지 못해 안달하던 것도 잠시-
평의원들은 첫날과 달리 계속해서 출항을 지연시키기 시작했다. 작전의 중심이 될 예정이었던 비밀 병기, [고대의 불]에 대한 심각한 안전성 문제가 제기된 것이 그 이유였다.
일단 키프로스 해군이 보유한 선박의 재질이 죄다 나무인 데다, 먼 대양에서는 급히 피신할 섬도 마땅치가 않다.
한데 관리를 잘못하여 선박 하나에 불이라도 났다 해 보자. 물 위에서도 급속하게 번지는 [고대의 불] 특성상, 주위의 다른 배들도 모조리 화재에 말려들어 갈 게 빤했다.
기껏 모아놓은 대군을 깊은 바다에 수장시키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칫 잘못하면 성황가의 귀중한 황자와 황녀까지 잃게 될 판인 거다.
만약 이런 일이 실제로 발생할 경우, 해군 자체의 손실은 차치하고라도, 이만큼 심각한 외교 문제도 다시없으리라.
“리산드로스 장군. 애초에 해군을 이끌고 물에 쉽게 번지는 화공을 쓴다는 작전 자체가 문제 아닙니까?”
로건은 초조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물었다. 평의회의 논쟁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이 순간에도, 키프로스 시민들과 오르토나 난민들의 고통은 나날이 커져만 갈 테니.
그러자 질문을 받은 리산드로스가 조금 착잡한 눈빛으로 대꾸한다.
“그 외에는 달리 해양 마수들을 상대할 뾰족한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하.”
헬리오스의 리산드로스.
그는 키프로스 해군의 총지휘관으로, 지금까지 여러 차례 해양 마수들과 조우, 이들을 토벌한 경험이 있는 노장이었다.
“단언컨대 그것들의 가죽은 세상의 어느 고래보다도 질기며, 뱃전을 휘갈기는 지느러미는 한 번의 타격으로 어선을 침몰시킬 정도입니다. 창과 작살만 가지고는 도저히 제대로 된 피해를 입힐 수가 없습니다.”
“…….”
“그나마 다행히도, 그놈들은 우리 군의 선박 이상으로 화공에 취약합니다.”
하지만 로건이 정말로 조바심을 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가 보기에, 이 [고대의 불]에 대한 논쟁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다는 것.
지금까지 평의회의 회의를 빠짐없이 참관하며 로건이 받은 인상은 다음과 같았다.
‘꼴좋다. 그러게 저것들이 고대의 불 제조법을 쥐고서 혼자 잘났다고 설치는 게 영 꼴사나웠어.’라며 비방하는 파와-
‘그래서 뭐 어쩔 건데? 네들이 이제 와서 우리의 비밀 병기를 써먹지 않겠다는 거냐?’라며 배짱부리는 파의 싸움.
그리고 지금 그 논쟁은, 서서히 ‘안전을 위해 고대의 불 제조법을 만천하에 공유해라! 아니면 대신 우리에게 뭐라도 하나 내놔 보든지.’파와-
‘지금 이게 누구한테 강짜냐? 이대로 상단 활동이 위축되고 어업이 중단되면, 여기서 누가 제일 먼저 말라죽을 거 같아? 어?’ 파의 대립으로 변모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는 키프로스가 통일된 하나의 국가가 아닌, 어디까지나 이익을 위해 뭉친 ‘도시 연합’이라는 특수성에서 기인한 문제였다.
당장의 어업 손실에 연연하기보다는, 지금의 상황을 기회 삼아 다른 도시보다 상대적인 우위를 점하는 쪽이 장기적으로 자신들의 도시에 이익이 되는 것이다.
당연히 이들의 대표인 평의원들은, 담장 밖의 적들보다는 자신의 발아래 있는 한 줌 땅을 빼앗는 데 혈안이 될 수밖에.
돌아가는 상황을 묵묵히 바라보던 로건의 안색이 날이 갈수록 해쓱해졌다.
“오라버니…….”
시슬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로건을 올려다보았다. 토벌대를 이끌고 키프로스로 오는 중에도, 그가 얼마나 조바심을 억누르려 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다행히도, 로건은 그 상황에서 용케 평정을 유지해냈다.
“…지금까지 몇 차례에 걸쳐 서둘러 달라 건의를 했지만, 저들을 완전히 설득할 명분이 마땅치 않다. 출항에 앞서 화기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니까.”
꾸욱.
아르쥬나의 손잡이를 말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래도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아직은 헬리오스를 중심으로 한 자들의 목소리가 더 큰 것 같군. 이대로 두면 크뤼세스 원로를 중심으로 무난하게 출항하게 될 가능성이 커. 외부인인 우리가 저들을 재촉해 봤자, 괜한 경계와 반감으로 저들의 결정을 늦추게 될지도 모른다.”
로건에게는 목소리만 큰 공화파의 인원들을 이끌고 실질적으로 전선을 책임졌던 오랜 경험이 있다.
그러니 잘 알고 있었다. 저들은 떠들고 싶은 대로 떠들게 놔두고, 차라리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백번 낫다는 사실을.
“발레리 경.”
“네, 저하?”
“예정되어 있던 교회 감사의 순서를 조금 바꿔줄 수 있겠나? 본래는 헬리오스부터 북서쪽 도시들을 향해 차근차근 진행할 예정이었겠지만, 차라리 인원을 분산하여 여러 도시를 동시다발적으로 감사하는 게 어떨까 싶군.”
로건은 싸우느라 한창인 평의원들의 시선을 다른 곳에 집중시키기로 했다.
‘너희들. 적당히 하고 끝내지 않으면, 이단재판부의 감사에 제대로 준비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을 거다’라는 위기감을 조성할 계획이었다.
“물론 분산된 인원으로는 당장 강도 높은 감사를 진행하기 힘들 테지. 그러니 일단은 분위기만 좀 잡아주게. 우리가 출항하고 나면, 그 이후에는 다시 모여서 저들의 교회 기둥까지 하나하나 가루로 분해해도 말리지 않겠다.”
그러자 발레리 경이 대단히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걸 왜 저에게 말씀하십니까, 저하? 이번 감사의 책임자는 따로 있습니다만.”
“…….”
로건은 물끄러미 발레리 경을 바라보았다.
매번 이성진에게 호구라고 놀림받기는 하지만, 그도 눈치가 전혀 없지는 않은 터. 매번 그의 형제와 발레리 경의 말싸움을 듣고 있다 보면 절로 깨달아지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단재판부에 전해, 발레리 경.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돌았던 건 단순한 역병이라고. 괜히 인퀴지터들을 파견해서 아픈 사람들을 잡아들이지 말고.
-아니, 그런 걸 왜 저에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하?
-그야, 아마도 자네가 이단재판부에서 제법 입김이 세니까?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저는 말단 인퀴지터에 불과합니다. 절대 저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빨간머리 인퀴지터가 질색하며 대꾸하는 말이 거짓임을, 감정에 따른 오러 변화에 민감한 로건이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그래. 발레리 경은 생각보다 성 마르시아스 기사단 내에서 입김이 세단 말이군.’
그리고 로건의 판단은 적절했다. 그렇게 부탁한 바로 다음날, 감사를 위해 헬리오스에 모였던 사제단과 인퀴지터들이 각자 여러 도시로 흩어지기 시작했으니까.
“고맙네, 발레리 경.”
“그러니까 오해십니다, 저하. 저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거짓.
로건은 더는 이 일에 관해 언급하지 않고, 그저 부루퉁한 인퀴지터의 어깨를 정답게 툭툭 두드렸다.
이것이 로건이 할 수 있는 외부인으로서의 역할의 전부일 것이다. 다음은 평의회 의원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질 때까지, 최대한 인내하며 그의 ‘개인적인’ 구호 활동을 하는 수밖에.
이 과정에서 로건의 늘어난 ‘용돈’이 제법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주신이시여, 정말 감사합니다.”
“델크로스에서 오셨다고 했소? 제국에도 아직 당신과 같은 사람이 있다니…….”
“…도움에는 감사드리오.”
간단한 식료품을 건네받은 오르토나의 난민들은, 대단히 어색한 표정으로 로건에게 감사 인사를 보내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슬레는 몇몇 사제들을 이끌고 와서 아예 직접 팔을 걷어붙였다. 오랜 시간 봉사 활동을 해 온 성녀의 짬이었다.
“아마 토벌대의 성기사들을 데리고 오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을 거야, 오라버니.”
“그건 힘든 일이겠구나, 시슬레. 성기사들을 움직이는 것은 명백한 군사적 행동이다. 아무리 시민들을 위한 구호 활동이라 해도, 눈치껏 하지 않으면 결국 평의회의 반발을 사게 될 거야.”
그렇게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니, 로건은 때때로 이런 정보도 주워들을 수 있었다.
“이봐, 언제까지 배가 뜨기를 기다려야 하나? 이제는 끼니를 때우기도 어려우니, 우리도 이참에 북부로 가는 건 어떤가?”
“북부? 거기 가서 뭘 하는데?”
“소문 못 들었나? 듣자 하니, 북부로 가면 어느 상단에서 일자리를 주선해 준다고 하더군. 오르토나 난민들을 차별하지도 않는 데다 임금도 나쁘지 않아서, 최근에는 사람들이 북쪽으로 제법 몰린다나 봐.”
“응? 거기에 뭐가 있다고 그 많은 사람들에게 임금을 줘? 어느 상단인데?”
“요즘 소문이 자자한 ‘베르트란 & 리’가 사람을 고용한대. 알아보니 큰 갱도를 보수하는 사업 때문이라더구먼. 그게 끝이 아니야. 갱도 보수가 끝나면, 인부들을 그대로 광부로 써 주겠다고 약조까지 했다던데?”
“광부라…….”
“그쪽이 내키지 않으면, 북서쪽 상류에 새로 생긴 큰 벌목장도 괜찮고.”
그런 이야기들이 들려올 때마다, 로건은 그의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장담하던 모레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알겠어? 이 ‘베르트란 & 리’는 오르토나 최북단과 황도를 이어주는 물류 이송의 통로가 되는 거야!
-오르토나 북부?
-그래! 이 ‘베르트란 & 리’를 기점으로, 오르토나의 경제를 서서히 자생하게 만드는 거야!
당시에는 그 녀석이 워낙 열렬하게 설명하기에 얼떨떨하게 호응했을 뿐이다. 설마 그렇게까지 될까 하는 생각이 더 컸지만.
‘그래, 모레스. 어쩌면 정말 네 말대로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대로 낙관하기는 아직 힘들었다. 로건은 마냥 희망을 품기에는 너무나도 절망적인 시간들을 경험해오지 않았던가.
평의원인 암브로시우스가 이런 제안을 던져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마도 며칠 후면 토벌대가 무사히 출항하게 될 것 같소. 그 전에 나와 함께 키프로스를 둘러보며 명소 구경이나 하지 않겠소?”
* * *
헬리오스의 암브로시우스.
키프로스의 실세인 크뤼세스의 아들이자, 평의회의 최연소 의원. 세간에는 ‘키프로스의 왕자’라 더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얼마 전 일어난 불의의 화재에 휘말린 후, 그는 어딘가 묘한 행동을 보였다.
-여담이오만, 두 분께는 제대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소. 그대들이 아니었다면 내가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나 있었겠소? 그러니 부디 오늘 저녁은 내 아버지의 저택에서 머물러 주지 않겠소이까? 조금이나마 이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셨으면 하오만.
명분은 그럴듯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라면 모를까, 온몸에 화상을 입은 중환자 본인이 할 만한 제안은 아니지 않은가.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정작 로건과 시슬레를 초대했던 주제에, 이야기가 무산되자 그 역시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평의회 건물에 계속 머문다는 것.
“그는 어째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걸까? 헬리오스의 크뤼세스는 키프로스 제일의 권세가잖아. 분명 그의 집에는 이곳보다 더 좋은 약재와 훌륭한 의원들이 많을 텐데.”
불편한 장소에서 고된 치료를 이어가는 그를 보고서, 시슬레가 강한 의문을 표했다.
“어쩌면 자신의 저택이 그리 안전하지 않다는 뜻인지도 모르지.”
로건의 대답은 씁쓸했다. 지금으로부터 꽤 오랜 과거. 완전히 갈라서기 전의 오르토나 국왕과 친우 베니시오 왕자의 관계를 떠올리고 말았으니까.
“세상에는 부모와 자식이 가장 큰 정적으로 대립하는 경우도 아예 없지는 않아, 시슬레.”
“…응, 그렇구나.”
시슬레의 얼굴 역시 어두워진다. 자신이 끝내 성황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델크로스 연대기]의 내용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된 암브로시우스가 제안을 해 왔다. 자신과 함께 키프로스를 둘러보지 않겠냐는 것.
역시나 그다운 뜬금없는 제안이었지만, 로건은 내심 좋은 기회라 여겼다.
개인적인 구호 활동에는 한계가 있고, 그렇다고 타국 황자의 신분으로 키프로스 구석구석을 혼자 휘젓고 다닐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
‘그렇다면 차라리 평의원인 암브로시우스와 함께 다니며, 키프로스에 있는 오르토나 난민들의 실태를 자세히 파악하는 쪽이 좋겠지.’
시슬레 역시 순순히 동의했다.
물론 곁에서 쓸모없는 식충이 하나가 마구 날뛰기는 했지만.
[아니, 후손아! 지금까지 내 말을 뭘로 들은 거냐! 저 음흉한 자와는 가급적 마주하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로건은 그의 말을 가뿐하게 무시했다.
설령 암브로시우스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다 하더라도, 겨우 병석에서 일어난 그가 소드 마스터 앞에서 무슨 수작을 부릴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해서 로건과 시슬레는, 암브로시우스와 함께 작은 유람선을 타고 브리즈 강을 따라 하구까지 흘러오게 된 것이다.
“자, 이제 다 왔습니다. 로건 님, 시슬레 님. 저 건물이 키프로스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지, 바로 암브로시아의 ‘머리탑’입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커다란 회색 탑을 가리키며 미소 지었다.
아직은 몸 여기저기 붕대를 감고 있는 데다 다리 하나를 절기도 했지만, 그는 오늘 하루 남매를 위해 훌륭한 안내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마지막 명소로 꼽은 장소가 바로 저 회색의 을씨년스러운 ‘머리탑’이다.
“고대에는 정말로 죄수들의 머리가 쌓여 있었다는 괴담이 전해집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낡고 보잘것없는 유물에 지나지 않지요.”
암브로시우스는 대수롭지 않게 설명을 덧붙였지만, 로건은 그의 발언에서 미묘한 감정의 편린을 느끼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진실… 그리고 거짓? 대체 무엇이?
바로 그때였다! 멀뚱히 회색 탑을 바라보던 시슬레가, 뭔가에 놀란 듯 갑자기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 것은.
“오라버니!”
깜짝 놀란 로건이 그녀를 부축하자, 시슬레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의 소매를 마주 잡아왔다.
“저기, 저기에 머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