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412)
성황의 아이들-412화(412/469)
412. 이성진 탐구 일지 (1)
숙소에 도착한 이후에도 성진의 멍한 상태는 계속되었다. 마치 기면증처럼 깜빡 의식이 멀어졌다가, 눈을 뜨고 보면 어느 순간 주위 풍경이 바뀌어 있는 식이다.
“저하, 저하!”
옆에서 에디스가 연거푸 성진을 부르며 정신을 일깨우려 노력한다.
[이성진, 왜 그래? 이성지이인!]“저하. 지금 바로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드문드문 마왕과 마사인 경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다들 놀라겠다. 어서 괜찮다고 말해 줘야…….’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제대로 입을 움직일 정신이 없었다.
‘아직 안심하긴 일러. 조금만 더.’
그렇게 흐린 정신으로 휘청휘청 걷고 있자니, 옆에서 누군가가 팔을 붙들며 부축하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성진은 그 사람이 마사인 경인지 에디스인지 구별할 정신도 없는 상태였지만.
그 와중에 쥐고 있던 마왕의 램프를 바닥에 떨구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일까.
‘다 끝나지 않았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내가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 금방이다.
그렇게 스스로도 의미 모를 생각을 되뇌며, 성진은 마사인 경과 에디스의 인도에 따라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파파파팍!
또 깜박 흐려진 시야가 이리저리 파헤쳐지는 흙더미로 가득 찬다. 얼핏 부지런히 땅을 파고 있는 개의 앞발이 보인 듯도 했다.
좋아. 잘 하고 있어, 막스. 바로 거기니까…….
“…모레스?”
한데 바로 그때, 성진의 집중을 갑자기 방해하는 녀석이 있었다.
먼저 들어가 숙소를 잡고 나온 오웬 녀석이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녀석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성진의 어깨를 세차게 흔들어 집중을 단번에 흩뜨려 버렸다.
“너 왜 그래? 괜찮냐? 또 어디가 아파?”
“어. 시끄러워… 멍청아.”
성진은 인상을 쓰며 손을 휙휙 휘저어 보였다. 아직 집중해야 하니까 옆에서 말 걸지 좀 말라고.
“야! 어디 아프면 차라리 아프다고 얘기를 해! 답답하게 혼자서 그러지 말고!”
“호들갑 떨지 마.”
성진은 인상을 쓰면서 그를 향해 한 손을 쓱 내밀어 보였다. 예전에 오웬이 귀찮게 징징거릴 때마다 효과적으로 써먹곤 했던 방법이었다.
“뭐……!”
순간 오웬이 과하게 움찔 놀라며 물러났지만, 지금의 성진은 그의 상태를 세심하게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이제 거의 끝나간다. 다 끝나가니까…….
“이야기는 내일, 하자고. 아무 것도 아니니까. 가서 잠이나 자.”
어떠냐! 네 취향의 귀여운 발굽 스킨이 여기 있다. 그러니까 어서 진정하고 얌전히 내 말 들어. 잘 때 수면 안대 잊지 말고.
오웬 녀석이 갑자기 조용해지자, 성진의 정신은 다시 급격하게 현실에서 멀어졌다.
휘익- 휘익-
눈앞의 풍경이 이리저리 바뀐다.
그렇게 뭔가를 물고 부지런히 어딘가를 달리던 성진은, 마침내 그가 찾던 믿음직스러운 신형을 발견했다.
-…막스! 또 어디로 사라졌다가 이제야……!
멀리서 그를 부르는 흰 정복의 성기사를 향해, 성진은 꼬리를 흔들며 소리 높여 화답했다.
컹!
‘…컹?’
뭐야. 내 목소리가 왜 이래?
강렬한 위화감을 깨닫는 순간, 정신은 급격하게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다.
깜박.
멍하니 자리에 서서 눈을 깜박이던 성진은, 맑아진 시야로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곤 이내 오웬의 잔뜩 얼어붙은 얼굴과, 마사인 경의 걱정스러운 얼굴, 그리고 에디스의 맹한 얼굴을 차례로 마주하게 되었다.
“어라……?!”
또한 자신이 괜히 애먼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잠깐만.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성진은 얼른 팔을 회수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입을 열었다.
“다들 왜 그래? 난 괜찮아. 어서 숙소로 들어가지.”
“…저하!”
“아아…….”
한데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는 두 사람과 달리, 오웬은 여전히 뭔가에 크게 충격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뭐야? 이 성가신 녀석.
“뭐? 왜? 뭐?”
“…으응?”
“너는 왜 거기 그러고 있냐고.”
그러자 오웬은 그제야 움찔 놀라더니.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괴상한 비명을 질렀다.
“어헉?!”
그러더니 성진이 더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슬슬 뒷걸음질 치며 멀어지는 게 아닌가!
“응? 아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너 지금…….”
“그럼 피곤한 거 같은데, 이만 푹 쉬라고! 내일 보자!”
그렇게 건성으로 저녁 인사를 내뱉은 오웬은, 그대로 몸을 돌려 부리나케 복도 너머로 내빼고 말았다.
“……?”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성진이 와락 미간을 구겼다.
대체 뭐야? 저놈, 갑자기 왜 저러는 거람?
한편. 당황한 나머지 꼴사납게 방으로 도망친 오웬은, 안 그래도 부스스한 머리를 미친 듯이 헤집으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설마 설마 했는데… 혹시, 정말인가?”
* * *
지금으로부터 수일 전.
처음 전담시녀에게 출장 소식을 전했을 때만 해도, 오웬은 그저 가벼운 마음가짐이었다. ‘할 일도 없는데, 겸사겸사 모레스를 도와주고 퀘스트도 수행하면 좋지’ 하는 정도의 생각이었지.
“네에? 모레스 황자님과 여행을 가신다고요?”
전담시녀 캐리도 은근히 반기는 눈치였다.
“아니, 여행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출장인데.”
“여행이든 출장이든 그게 그거 아니우? 뭐든 같이 가신다는 게 중요한 거지.”
늙은 시녀가 흥흥, 코웃음을 흘렸다.
“내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우. 우리 너그러운 오웬 님이라면, 어린 아우와도 금방 화해할 거라 생각했지요. 그래서, 언제쯤 출발하시는 거유?”
“음? 아. 아마 며칠 있으면 금방…….”
“그럼 나도 준비할 것들이 참 많겠수다! 일단 우리 별난 오웬님을 위해 새 셔츠나 몇 벌 더 지어야겠수.”
“그만 둬, 캐리. 얼마 전에도 새 옷을 충분히 짓지 않았어?”
오웬이 대충 옷을 벗으며 대꾸하니, 캐리가 시중을 들기 위해 재빨리 다가섰다.
그러다가-
찰랑!
셔츠 깃에 걸렸던 선홍색 펜던트가 훅 떨어져 내리며 빛을 반사하자, 움찔 놀라며 후다닥 뒤로 물러난다.
“…….”
오웬은 딱딱하게 굳은 캐리를 슬쩍 곁눈질했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늘 저랬었지. 곁에서 살갑게 오웬의 시중을 들어주다가도, 펜던트가 나오면 요령 좋게 손을 피하곤 하지 않았나.
자연히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캐리. 캐리는 이 목걸이에 대해 잘 알고 있나?”
그러자 늙은 시녀는, 이내 푸스스 표정을 풀며 대꾸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않수? 내가 이래 봬도 한창때는, 황비 마마들만 모시던 고참 시녀장 중 하나였다우.”
“그렇군.”
베스세바 선황비의 전담시녀였다 했던가. 언젠가 9호가 ‘정신병자’라고 불렀던, 그리고 오웬에게 이 이상한 단말을 남긴 수수께끼의 여인.
“그 목걸이는 틀림없는 베스세바 님의 유품이우.”
“…….”
“많은 이들이 그분을 오해하고들 있수다. 하지만 이 사람이 본 베스세바 님께서는 보통 분이 아니셨수.”
황비를 떠나보낸 지도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지만, 캐리의 기억에는 아직도 아름답고 우아했던 여인의 모습이 생생히 남아 있었다.
-그걸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거라.
황비의 물품에 멋대로 손을 댄 하녀 하나가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자, 빤히 그녀를 내려다보며 냉막한 목소리로 그런 주의를 줬더랬지.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인과에 한 번이라도 말려들면, 이후로는 더는 돌이킬 수 없으니.
캐리는 감히 그녀의 말을 추호도 의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웬을 섬기는 이 날까지도, 실수로라도 저 목걸이에 닿지 않으려 조심하고 또 조심했지.
“잠시나마 그 훌륭하신 분을 곁에서 모신 것은 내 평생의 자랑이우.”
오웬을 바라보는 캐리의 눈이 아련한 애상에 젖어들었다.
“그리고 이어서 그분의 손자를 보필하게 되다니, 황궁의 시종으로서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수?”
“캐리, 나는…….”
아버님의 친아들이 아니야.
그렇게 대꾸하려던 오웬은 문득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오웬을 보살펴 온 전담시녀는, 그가 차마 내뱉지 못하고 삼킨 말이 무엇인지 훤히 꿰뚫어보는 듯했다.
“뭘 걱정하시든 오웬님의 생각과는 다르지. 잃어버린 베스세바 님의 목걸이가 무사히 오웬 님에게로 흘러갔소. 그건 절대 우연이 아니라우.”
“…….”
“그리고 그 신비한 물건을 매일같이 지니고 계심에도, 오웬 님은 다른 이들과 달리 여전히 멀쩡하시지 않수? 이보다 더 오웬 님의 비범함을, 베스세바 님의 떳떳한 손자임을 나타내는 증거가 또 어디 있겠수.”
오웬은 말없이 선홍색의 펜던트를 만지적거렸다. 흐릿한 달빛 아래에서 요사스러운 붉은빛을 뿜어내는 보석.
오웬에게 퀘스트를 주고, 판게아 클로니클에 접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신비로운 단말이다.
‘베스세바 선황비라…….’
자연히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것의 본래 주인이었다는 선황비는, 대체 뭘 하는 인간이었을까.
* * *
9호로부터 뜻밖의 보고를 받은 것은 그날 밤의 일이었다.
“뭐? 이손진? 그게 모레스의 애칭이라고?”
“네, 그렇다고 함다, 저하.”
오웬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 자식은 애칭이 왜 그 모양이야? 모레스와 이손진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고.’
잠시 생각이 잠겼던 오웬은, 기대로 한껏 상기되어 있는 9호를 내려다 보았다.
“그래서 9호. 네가 하고 싶은 말은, 그 이손진이 바로 ‘뉴비 이성진’이라는 뜻이냐?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그러자 9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심 임무를 수월하게 마쳤다고 안심하던 중이었으니까.
“그럼 아님까?”
“아마 아니지 않을까? 발음이 미묘하게 좀 다른데?”
“네?”
“달라.”
“…네에?”
처음 가르쳐 줬을 때는 곧잘 따라하는 것 같다니, 어느새 9호는 이름의 발음이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뭐, 무리도 아니지. 아무리 생각해도 델크로스식 이름이 아니니까.’
오웬도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는, 세상에 뭐 이런 이름이 다 있나 생각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그가 아직까지 제대로 된 발음을 기억하는 이유는, 이성진의 이름을 여러 차례 사념으로 정확히 전달받았기 때문이었다. 침묵 빌런들과 대화할 때는 늘 사념을 이용해야 했으니까.
‘사념은 본질을 정확하게 전달해 준다. 그래서 내가 그 구릅?바… 뭐, 그 괴상한 구릅의 이름도 제대로 알고 있는 거지.’
하지만 설령 모레스가 정말 뉴비라고 가정해도, 오웬이 알기에는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이 전혀 달랐다.
“뉴비는 황도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살고 있다고 했어. 절대 모레스일 리가 없다.”
오웬은 처음 뉴비를 만났던 날의 일을 떠올렸다. 꽃잎 같은 발굽을 내보이며, 애잔하게?아마도 오웬의 왜곡된 기억이리라-말하던 아기 산양을.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살던 동네가 본래 좀 험한 곳이었어.
그 작은 산양 친구는 깔끔하게 플레이어들을 학살하고선, 오웬에게 그렇게 자신의 사정을 설명했었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생존을 위해 이런 기술들을 익혀야 했어. 네 눈에 내가 능숙해 보였다면 기쁜 일이지. 그것이야말로 내가 지금까지 홀로 살아남은 완벽한 증거가 될 테니까.
오웬은 아기 산양의 말을 굳게 믿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린 친구답지 않게 숙련된 살인 기술을 설명할 방도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모레스는 황궁에서, 아버님의 보살핌 속에 편히 지내고 있지 않은가.
“가능성은 열어 두셔야 함다. 이참에 모레스 황자님 곁에서 좀 더 조사를 해 보는 건 어떠심까? 그러려면 일단 제가 저하를 따라서…….”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오웬은 단언했다.
“게다가 모레스라면 앞으로도 내가 옆에서 지켜볼 수 있지 않나? 그러니 9호, 너는 이대로 황도에 남아 계속 뉴비를 탐색해 줘.”
“하지만…….”
“이참에 이름도 좀 제대로 외우고. 그 중요한 걸 헷갈리면 어쩌나? 자, 제대로 다시 발음해 보게. 이.성.진.”
“이, 성…진.”
“그래. 바로 그거야, 9호!”
“…….”
9호는 결국 축 처진 표정이 되어 원숭이 망루로 돌아갔다. 그렇게 그날 밤의 일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어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알고도 모를 일이다. 퀘스트를 위해 매일같이 모레스 곁에 붙어 있게 되다 보니, 오웬은 아무래도 점점 9호의 말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로건은 저 녀석을 이손진이라고 부르는 거지? 본래 둘은 애칭을 주고받을 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었잖아? 정작 모레스와 친한 아멜리아는 잘 모르는 거 같은데…….’
그렇다고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자니, 그것도 영 마뜩잖았다.
로건과 서로 무슨 애칭으로 부르건, 그걸 대체 오웬이 왜 궁금해한단 말인가.
‘…아, 미치겠네!’
그렇게 황도를 떠나기 전. 성황과의 마지막 알현 시간까지도, 오웬은 혼자서 끙끙대느라 영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성황이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다른 아이들을 이끌어야 할 맏이가 되어선, 이렇게까지 눈치가 없어서야…….”
“네? 아버님. 방금 소자에게 뭔가 하명하셨습니까?”
“아니, 아니다. 무사히 잘 다녀오거라, 오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