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415)
성황의 아이들-415화(415/469)
415. 이성진 탐구 일지 (4)
일행이 묵는 숙소는 레지나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여관이다.
자연히 식당은 아침 식사를 위해 몰려온 사람들로 붐볐는데, 그중에서도 모레스는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 녀석이었다.
언제나처럼 뚱한 얼굴은 오늘따라 유독 비밀스러운 카리스마에 휩싸인 것처럼 보였다. 레지나에서는 그리 드물지 않게 보이는 엑소시스트의 정복 역시 모레스의 몸에 걸쳐지니, 괜히 더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모레스가 정말 난놈은 난놈이구나.’
새삼 오웬이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자, 모레스가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핀잔을 준다.
“늦었잖아. 잠을 못 잤으면 식사라도 빨리 할 것이지. 설마 잠자리 가리는 걸로 모자라, 밥투정까지 할 생각은 아니지?”
그의 입이 열리자, 주위에 흩어져 식사하고 있던 사람들이 아닌 척 이쪽으로 귀를 쫑긋 세우는 것이 느껴졌다.
그저 앉아서 차를 홀짝이는 것만으로도 모두의 관심을 집중시키다니, 그야말로 엄청난 존재감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나 모레스의 곁에는, 어딜 가나 녀석의 머리 위를 환하게 비추는 작은 불꽃이 딸려 있었다.
“와아. 저것이 소문의 요정…….”
“쉬잇! 들리겠네. 목소리를 좀 줄여.”
붉은 불꽃은 경쾌한 움직임으로 모레스의 주위를 맴돌다가, 이따금 녀석이 던져주는 다과들을 날름날름 집어삼키곤 했다. 완전히 길든 그 모습은, 고대의 요정이라기보다 차라리 녀석이 키우는 애완조에 가까워 보인다.
오웬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뉴비도 저런 적이 있지 않았나? 우리 파티가 모인 식당에서 갑자기 작은 불꽃을 불러낸 적이 있어. 크기가 딱 저만큼 작았는데, 거기에 휘말린 구릅의 다리 하나가 순식간에 사라질 정도로 강력한 불꽃이었더랬지.’
그때 쿠르트 경이 다가와 두 사람에게 가볍게 묵례한 후 물었다.
“저하. 오늘 하루는 예정대로 레지나에 머뭅니까?”
“그래, 쿠르트 경. 나는 이런저런 볼일이 있으니까, 자네는 그동안 상주기사들을 데리고 도시 관광이라도 하게.”
“목적지를 알려 주시면 곁을 수행하겠습니다.”
“어, 괜찮아. 마사인 경이 쭉 함께 있을 거니까. 앞으로 줄곧 야영하는 날이 이어질 텐데, 레지나에 온 김에 다들 즐길 수 있는 건 즐겨 두라고.”
“네,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하.”
쿠르트 경이 담백하게 예를 취하고는 자리에서 물러난다. 모레스의 지시를 받는 것에 꽤나 익숙해 보인다.
“아, 그리고 로베르 경?”
“네, 저하.”
“시간이 나면 자네는 교외에 있는 교회에 한번 들러 주게.”
레지나의 교회는, 북부를 순회하는 엑소시스트들과 인퀴지터들이 반드시 한 번은 거쳐 가는 곳이다. 자연히 그들이 모아온 정보들이 한데 모이는 장소가 될 수밖에.
“그러잖아도 제 쪽에서 말씀드리려던 참입니다. 어떤 것을 중점적으로 알아보면 되겠습니까?”
“일단 벤소 후작령의 분위기가 어떤지 궁금해. 겸사겸사 참회 교단에 대한 전반적인 동향도 알고 싶고.”
“네, 잘 알겠습니다.”
리베르 경 역시 자연스럽게 예를 갖춘 후 자리를 뜬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오웬은 또다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뉴비도 저러곤 했지. 다들 깨닫지 못하는 사이, 어느새 당연하다는 듯 모두의 리더가 되어 척척 지시를 내리곤 했어. 그 조그만 녀석이 어찌나 당차고 위압감이 넘쳤는지,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하단 말이야.’
굳이 따지자면 모레스는 정말로 이 일행의 총책임자였다. 모두에게 명령하는 것이 당연한 위치였지만, 오웬은 그러한 사실을 가뿐히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정말로 모레스가, 이성진이란 말인가…….’
지금까지는 왜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까. 보면 볼수록 모레스는 뉴비와 비슷한 구석이 많은데.
사람의 마음이란 이리도 간사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온 힘을 다해 부정해 왔지만, 어렵게나마 가능성을 인정하고 나니, 이제는 마치 거짓말처럼 모레스의 모든 행동에서 이성진이 보이는 것 같지 않은가.
“아, 그리고 오웬.”
“…응?”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터라 대답이 한 박자 늦었다. 그러자 부하들에게 대강의 지시를 끝낸 모레스가 호록, 멜보른을 들이킨다.
“너는 오늘 나랑 같이 물류 중계소에 좀 가자.”
“물류 중계소?”
“그래. 너 자금에 여유가 좀 있지? 마침 엄청 좋은 투자 상품이 있는데, 함께 사업 좀 해 보지 않을래?”
“…사업?”
“어. 내 장담하건대 투자금의 두 배, 아니 세 배는 가뿐히 벌 수 있는 사업이야. 네가 허락만 하면, 슈미트 지부장이 곧바로 계약서를 챙겨줄 거야.”
멍청하게 눈만 끔벅이는 오웬에게, 모레스가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해 줬다. 현재 ‘베르트란 & 리’라는 중소 상단을 운영하며, 바닥에서부터 북부 유통망을 힘겹게 개척하는 중이라고.
전망은 밝았다. 하지만 아직은 이익보다 초기 자금이 더 많이 들어가는 시기라, 여유 있는 새 투자자를 찾고 있다는 거였다.
“이미 로건은 자기 용돈의 대부분을 상단에 투자했어.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진, 명실상부 상단의 최고 대표라 할 수 있지.”
다 식은 스튜를 입에 떠 넣던 오웬은 무심코 코를 찡그렸다.
상단의 최고 대표인 동시에 명실상부한 델크로스 최고의 호구이기도 하지. 로건 녀석이 대표라니, 과연 그 상단은 괜찮은 걸까?
오웬의 떨떠름한 기색을 알아차린 모레스가 재빨리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나도 꽤 지분이 커. 그리고 비교적 소량이긴 하지만, 아멜리아 누님과 시슬레도 이미 용돈 일부를 투자했다고.”
“…아멜리아와 막내가?”
“그래. 넌 여태껏 누님이 허튼짓을 하는 걸 본 적 있냐?”
하긴, 아멜리아라면 믿을 만하지. 오웬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꽤 괜찮게 들리네. 하지만 난 돈이 없는데? 너도 알다시피, 여태 남부 전선에 매여 있느라 딱히 돈 모을 기회가 없었단 말이야.”
그러자 모레스가 대단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매달 네 앞으로 나온 용돈이 하나도 남김없이 헤이든 은행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고 들었는데.”
“…용돈?”
“그래. 네가 도통 쓰질 않으니 몇 년간 이자만 고스란히 붙고 또 붙었대. 이제는 제법 무시 못 할 금액이 되었다더라.”
아,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아버님께서 매달 큰돈을 주신다고 시종장에게 얼핏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워낙에 쓸 일이 없어서 지금까지 완전히 잊고 있었지만.
“…….”
오웬은 식기를 멈추고는 묘한 감상에 젖어 들었다. 어리석게도 지금껏 자신이 온전히 손에 쥔 것이라곤 [판게아 클로니클]에서 모은 것들이 전부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선물이든 뭐든 캐시를 벌어서 해결하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았던가.
‘한데 생각해 보니, 지난 몇 년간은 돈이 필요하다고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군.’
전장에서조차도 비교적 풍족했다는 뜻이다. 그가 제국의 황자로서 얼마나 많은 혜택들을 누려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내가 그 돈의 존재를 잊어버리든 무시하든, 아버님은 그저 묵묵히 내게 지원을 이어주셨던 거다. 마땅히 내가 받아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셨을 테니까.’
문득 오웬은, 자신이 예전과는 달리 무척 편안한 마음으로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오웬은 이제 더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과분하다 여기지 않는다. 그저 손아귀에 쥔 것을 충분히 누리는 것만이, 자신에게 베풀어진 사랑과 배려에 대한 온전한 보답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소중한 선물들을 죄다 가족에게 쏟아붓는 것 역시 헛되다 여기지 않는다. 어차피 자신이 하는 모든 일들은 가족들을 위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모레스에게 가볍게 대꾸했던 것이다.
“그렇군. 나 돈 많구나. 그럼 투자니 이익이니,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할 설명을 자세히 할 필요는 없어. 어쨌거나 모레스 너, 지금 돈이 필요하다는 말이구나?”
“뭐……?”
“그래, 얼마나 주면 될까? 이대로 너랑 같이 물류 중계소로 가서, 계약서에 서명만 하면 되는 거지?”
그러자 모레스가 갑자기 미간을 와락 찌푸리며 오웬을 노려보았다. 뭔가 그의 대답이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다.
“…너 말이야, 어디서 함부로 서명하지 말라는 말, 들어 본 적 없어?”
“응? 글쎄…….”
어렴풋한 기시감을 느끼며, 오웬은 잠시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랬나?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왜? 왜 그래야 하는데?”
그러자 휘익-!
뭘 하려는 건지 재빠르게 팔을 치켜들던 모레스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는 주먹을 꾸욱 말아 쥐는 것이 아닌가!
“아, 이 멍청이가!”
난데없는 인신공격에 오웬은 적잖이 당황했다.
“뭐? 뭐가 문제야! 왜 또 멀쩡한 사람더러 멍청이래?”
“이 세상 어느 누가 투자하라는 말만 듣고 돈을 그냥 줘? 제대로 알아볼 생각은 들지 않냐? 내가 전부터 정신 좀 똑바로 차리고 살라고 했어, 안 했어? 어?”
오웬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야, 그게 화내는 이유야? 도통 알 수가 없네! 그럼 아예 처음부터 돈을 달라고 하질 말든지!”
“너 인마, 지금 전혀 이해를 못 하고 있잖아! 내가 돈을 달라고 한 게 문제가 아니라, 네가 아무 생각 없이 막 퍼주는 게 문제라고! 그걸 아직 모르겠냐?”
“아니, 그게 대체 무슨 억지……!”
지지 않고 버럭 마주 화를 내던 오웬은,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어라? 이것 좀 보라지.
해달라는 대로 다 해 줘도 뜬금없이 짜증을 내는 걸 보면, 역시 모레스는 뉴비와 정말 많이 닮았잖아?
* * *
이른 아침 햇살이 흐트러진 은빛 머리카락 위에 희미한 빛무리가 되어 내려앉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햇살은 작은 소녀의 흰 볼과 그녀의 목에 걸린 분홍색 안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이윽고, 소녀의 곁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소드 마스터의 발치에까지 힘겹게 기어온다.
“…….”
로건은 그렇게 완전히 날이 밝을 때까지 미동도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 손은 아르쥬나의 손잡이를 쥐고, 또 다른 한 손은 납작한 돌멩이 하나를 움켜쥔 채로.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똑똑.
“저하. 오토 경이 잠시 저하를 뵙길 청합니다.”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젊은 인퀴지터 하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최근 시슬레의 호위를 도맡곤 하는 보리스 경이었다.
“평의회 일로 급히 보고드려야 할 게 있다고 합니다. 이제 성녀님의 곁은 제가 지킬 테니, 부디 염려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
로건은 일견 순박해 보이는 인퀴지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이단 재판부의 일원임에는 변함이 없으리라.
하지만 최근 시슬레를 대하는 보리스 경의 태도는 언제나 깊은 진심이 느껴지곤 했지. 그래서 로건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래, 시슬레를 잘 부탁하네, 보리스 경.”
그러고도 로건은 잠시 시슬레의 곁에 서서, 잠든 동생의 오러 상태가 지극히 평온하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서야 겨우 방을 나섰다.
“저하, 평의회에서 드디어 결단을 내릴 모양입니다.”
오토 경은 로건에게 예를 취하자마자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결단이라 함은?”
“출항입니다. 총지휘관 리산드로스 장군이 방금 전 병력의 소집을 명했다고 합니다.”
“…그렇군.”
발레리 경을 움직여 교회 감사를 서두른 보람이 있다.
로건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며, 오토 경과 빠르게 논의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각 기사단의 편제는 일전에 논의한 대로 가지. 릴리움 역시 그에 맞춰 세 팀으로 나누는 것이 좋겠네.”
“[고대의 불] 안정성 문제는 어찌합니까?”
“리산드로스 장군은 그것들을 편대 중앙에 적재할 계획인 것 같더군. 우리 토벌대는 주로 외곽에 배치될 테니, 아마도 직접적으로 그 까다로운 화공 병기를 다룰 일은 없을 걸세.”
그렇게 그들이 한창 평의회 안뜰을 가로지르던 중이었다. 예민한 로건의 감각은, 저 멀리서 일어나는 평소와 다른 공기의 소요를 감지했다.
“…저하?”
갑자기 황자가 걸음을 멈추자, 오토 경이 의아한 듯 돌아본다. 하지만 로건은 그에게 작게 손을 저어 보인 후, 가만히 어딘가로 감각을 집중했다.
평의회 건물 바로 밖, 해변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높은 담벼락 아래로.
“…….”
그곳에는 마침 몇 명의 인부들이 모여, 포대에 지고 온 돌들을 한창 바닥으로 쏟아내는 중이었다.
우르르르…….
“이것들이 다 뭔가?”
“아아, 암브로시우스 평의원님이 시키신 일입니다. 갑자기 머리탑의 보수 공사를 하신다나 봐요.”
“보수 공사? 갑자기 왜?”
“요즘 해풍의 저주를 불러온다는 머리탑 이야기가 유명하잖습니까? 그러니까 토벌대가 출항하기 전에, 탑을 말끔하게 재정비하고 사제들을 불러 축성도 하신대요.”
암브로시우스.
그의 이름이 나오자, 로건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렇군. 그런데 해체한 돌들을 왜 모조리 여기로 가져오나?”
“그, 뭐라더라? 탑 남동쪽 아랫단에 있던 돌들은 일단 전부 가져오라고 지시하셨답니다. 역사적 사료로 보존할 가치가 높다고 했다던가요?”
“별일이구먼. 보존하면 전부 보존하는 거지, 남동쪽만 콕 찍을 건 또 뭐래.”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로건은, 저도 모르게 정복 코트의 안쪽을 더듬었다.
그 속에는 어젯밤, 모레스의 늑대개가 물어온 납작한 돌덩이 하나가 고이 숨겨져 있었다.
* * *
악마 글럼고스, 아니 슈미트 지부장은, 기다리던 황자 일행을 맞이하자마자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어찌나 놀랐던지 적절한 예를 갖출 정신도 없었지.
바로 모레스 황자의 머리 위를 맴도는, 심상치 않은 불꽃 때문이었다.
“저하, ‘그것’은 대체……?”
그러자 빨간 불꽃이 위협하듯 슈미트 지부장 주변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것’이라는 지칭에 대한 강력한 항의의 뜻이 분명했다.
“그것이라니, 제대로 예의를 갖춰 주게, 지부장. 내게 주신의 시련이자 축복을 나눠 준 고대의 요정님이다.”
“…고대의… 요정?”
모레스 황자의 대꾸에, 슈미트 지부장은 채 말을 잇지 못한 채 멍청하게 입을 뻐금거렸다.
아니, 농담이시겠지요, 저하? 저건 어느 모로 보나, 마기를 지닌 훌륭한 악마가 아닙니까?
한데 왜 악마가 신성 결계를 두르고서, 사람들 눈앞에서 멀쩡하게 날아다니고 있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