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421)
성황의 아이들-421화(421/469)
421. 자유 지하도 (3)
레지나를 벗어나자 제대로 된 길은 끊기고, 이내 황량한 황무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건초 마차는 그 어둡고 거친 들판을 쉬지 않고 달렸다.
덜컥덜컥.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메마른 땅에서 메케한 흙먼지가 일었다.
“상단이 주로 오가는 경로가 아니군요. 변변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데, 과연 저 마부가 길을 제대로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사인이 주변을 경계하며 나직하게 속삭인다.
그의 말대로, 불야성의 도시를 빠져나오자마자 거짓말처럼 인적이 증발했다. 작은 마을들이 들어서 있던 자리는 이미 허물어져 집터조차 남지 않았고, 한때 길이 나 있었을 땅은 버석한 풀과 자갈들이 마구잡이로 뒤얽혀 있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 마사인 경.”
“하지만 북부는 이미 무법 지대가 아닙니까?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사방이 훤히 트여 있는 길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흠.”
성진은 적당히 달궈진 마왕의 램프를 끌어안고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마사인 경. 저기 저, 마차 모서리에 새겨진 표식이 보이나? 작은 점 네 개가 삼각형 모양으로 찍혀 있을 거야.”
마사인은 성진이 가리키는 곳을 돌아보았다. 오러로 안력을 돋워 한참을 살피자, 어렴풋이 중앙에 점이 있는 삼각형 비슷한 낙서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냥 얼룩 같기도 합니다만. 저것이 의미가 있습니까?”
“있고말고. 저게 있는 한, 우리는 안전하다는 뜻이니까.”
“…어째서 그렇습니까?”
“이 마차가 자유 지하도 소속이라는 표식이라서 그래. 약탈을 시도해 봐야 썩 재미없다는 걸 산적들도 잘 알고 있거든.”
자유 지하도의 마차는 상단과 달리 가치 있는 물건을 옮기지 않는다. 그들이 ‘배달’하는 것이라곤 제국에서 발을 붙일 수 없는 흉악범, 아니면 지하 교단의 광신도들뿐이지. 그러니 어느 쪽을 건드리든, 산적들에게는 좋을 것이 없었다.
그 설명에 마사인은 대충 납득했지만, 어쩐지 또 다른 의문이 생긴 것 같았다.
“한데 저하. 저하께서 대체 그것을 어찌…….”
마사인은 질문을 던지려 했다. 하긴, 아까부터 뭔가 묻고 싶은 것이 많은 표정이긴 했지.
하지만 성진이 시선을 돌려 먼 곳을 바라보자, 그도 황자가 표하는 무언의 거절을 깨닫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심심해, 이성진. 나 주변을 조금 산책하고 오면 안 될까?]“그만둬, 마왕아. 네가 갑자기 막 허공을 날아다니면, 저 마부가 널 뭐라고 생각하겠어?”
[그냥 마차째 다 태워 버리면 안 될까?]“안 돼.”
[쳇!]밤의 시간은 무척 느리게 흘러갔다.
그동안 성진은 별도 없는 흐린 밤하늘을 멀뚱히 올려다보기도 하고, 때로는 소리 죽여 마왕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몇 번이고 성가시다고 눈치를 주던 마부는, 성진과 몇 차례 더 말씨름을 겪은 후에는 아예 뒤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괜히 입을 열어봐야 엉뚱한 타박만 들을 뿐, 얻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겠지.
그러다 새벽녘이 될 무렵, 그들은 황무지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작은 오두막에 도착했다.
“여어!”
마침 문 앞에 앉아 파이프를 태우던 중년의 여자가, 마차를 발견하자 모자를 쓱 들어 올리며 인사를 건넸다. 대단히 질 나쁜 연초를 피우는지 멀리서도 지독한 연기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봐. 댁이 왜 이렇게 멀리까지 와? ‘건초’ 배달은 루벨 쪽이라고.”
그러자 마부는 마부석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아아, 이번 배달은 ‘특송’이야. 이대로 짐들을 인수해서 베르드론까지 수송해 주게.”
“특송? 그래애?”
여자는 의아한 눈빛으로 잠시 성진 일행을 훑어보았다. 자세히 보니 확실히 허름한 옷가지와 검댕으로는 숨길 수 없는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긴 했다.
“드문 일이군. 오늘은 좀 쉬나 했더니 다 텄구먼.”
대화는 그것이 끝이었다. 마부는 그대로 건초 마차를 내버려둔 채 오두막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는 동안 여자가 또 다른 마차 하나를 털털 끌고 왔다. 오크통이 잔뜩 들어차 있는 작은 짐마차다.
“들었지? 어서 ‘짐’들을 이쪽으로 실어.”
그 말을 들은 성진이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를 옮겨 탔다. 그 뒤를 따라 오웬과 마사인이 엉거주춤 자리를 옮기자, 지켜보고 있던 여자의 눈에 작은 이채가 일었다.
“호오.”
그녀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마부석에 오르며, 조금 유쾌한 목소리로 성진에게 말을 건넸다.
“지하도를 이용하는 게 제법 익숙해 보이는데?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보는 얼굴이라 이상하구나. 꼬마야. 너 혹시 ‘특송’이 뭔지 알고는 있니?”
‘짐’들을 아예 무시하던 이전의 마부와 달리, 여자의 태도에는 작게나마 여유가 느껴졌다. 가만히 그녀의 무력 수위를 가늠해 보던 성진이 대꾸했다.
“알아. 중간 경유지 없이 빨리 도착하면 좋은 일이지.”
“하하, 그래. 그럼 유난히 빨리 배송된 짐들이 대개는 영영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사실도 잘 알겠구나?”
움찔.
오웬과 마사인이 그녀의 협박 아닌 협박에 긴장하자, 성진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글쎄, 적어도 이거 하나는 알지. 우리는 아마 꽤 높은 중간 관리자를 대면하게 될 거고, 제일 먼저 그쪽이 ‘배달’ 수칙을 어겼다는 사실을 털어놓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거.”
“…….”
“벧엘라. 자유 지하도에서 해고된 중간책이 대개는 영영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쪽은 알고 있어?”
“…이런, 조금 겁만 주려 한 건데 본전도 못 찾았네.”
여자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고삐를 잡았다.
“그럼 특급 배송을 시작해 볼까? 이럇!”
덜그덕덜그덕.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적재되어 있던 텅 빈 오크통들이 힘없이 툭툭 튀어 오른다. 성진은 대충 그것들을 한쪽으로 밀어내곤, 바짝 긴장한 두 사람에게 말했다.
“아마 이번 마부도 쭉 쉬지 않고 베르드론까지 갈 모양인가 봐. 도착하려면 한나절은 훌쩍 지나야 할 테니, 두 사람 모두 눈이라도 조금 붙여.”
“…….”
오웬과 마사인은 대단히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그러나 성진이 마왕 램프를 끌어안으며 먼저 눈을 감자, 마지못해 각자 오크통 사이로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또다시 침묵 속에서 일행은 한동안 조용히 ‘배달’되기 시작했다. 오웬의 눈앞에 기다리던 텍스트 창이 떠오른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뾰롱!
[돌발 퀘스트 –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완료)]* * *
가을날의 새벽 공기는 무척이나 차가웠다.
꾸벅꾸벅.
따끈한 마왕 램프의 온기에 기대어 잠시 졸고 있던 성진은, 부산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오웬의 기척에 눈을 떴다.
“…왜 그렇게 두리번거려? 잠이 안 오면 눈이라도 감고 있지.”
성진의 목소리는 속삭임처럼 작았다. 다분히 그들을 ‘배달’하는 이를 고려한 조치다. 이전의 마부와 달리, 저 여자는 제법 쓸 만한 오러 활성도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응? 아, 그냥…….”
오웬 역시 그것을 의식했는지, 마부석을 힐긋 곁눈질한 다음 작게 대꾸했다.
“네 정보원이 어디쯤 있나 찾고 있었지. 아무리 살펴봐도 도통 기척이 느껴지질 않는데, 괜찮은 걸까? 지금 잘 따라오고 있는 게 맞아?”
“다샤?”
성진은 잠시 기감을 돋워 다샤의 기척을 살폈다. 엄밀히 말하면 기척이라기보다는, 부자연스러운 오러 흐름의 부재를 감지한 거지만.
곧 그녀의 위치를 특정한 성진이 오크통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걱정 마. 다샤는 최고의 정예 요원이야. 거의 완벽한 수준의 오러 은폐를 익히고 있다고. 네가 쉽게 찾을 수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지.”
“그렇구나. 오러 은폐…….”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오웬의 표정이 침울해진다.
“그러고 보니 너한테 고백해야 할 것이 있어. 뉴… 모레스. 실은 말이지, 아까 내가 보여준 건 제대로 된 오러 은폐가 아냐. 어떻게 성공했는지도 모르고, 또 언제 그걸 다시 할 수 있을지도 절대 장담할 수 없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성진은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러니 만약, 만약에 말이야. 네 변경된 계획에 어떤 식으로든 내 역할이 존재한다면, 미안하지만 내가 아까와 같은 재주를 다시 부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영 기운이 없다 싶더니, 계속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던 건가? 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했다.
“괜찮아. 너한테 딱히 그런 기대는 하지 않았어.”
“그, 그래?”
오웬의 눈썹이 눈에 띄게 축 처졌다. 어이, 잠깐. 왜 표정이 더 나빠지는 거야?
“그러니까, 어차피 넌 이번 ‘배달’의 중심이 되는 이교도잖아? 딱히 기척을 감출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성진은 그가 더욱 침울해지기 전에 재빨리 덧붙였다.
“게다가 오러 은폐는 네 오러 운용 방식과 어울리지도 않아. 아마 너라면, 제대로 오러 은폐를 익히는 것보다 차라리 데카론 나이트가 되는 쪽이 빠를걸?”
“데카론 나이트?”
“그래. 오러 활성을 보면, 너도 대충 9층 정도는 쌓은 거 아냐? 그러니 조금만 더 수련하면 금방일 거라고.”
그러자 오웬은 잠시 성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빈말인지 아닌지 가늠이라도 해 보는 모양새였다.
“왜?”
“아니, 내 오러층은 9층이 맞아. 하지만 데카론 나이트라니, 그건 아무나 가능한 경지가 아니잖아. 뉴… 모레스 너는, 내가 언젠가 정말로 데카론 나이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성진이 눈썹을 휙 치켜 올렸다. 뭐야, 새파랗게 젊은 놈이 왜 이리 패기가 없어?
“그럼, 안 할 생각이었어?”
“아니, 그게 생각한다고 쉽게 되는 것도 아닌…….”
“왜 안 돼? 너는 인마, 잡생각 지우고 더 정진해도 모자랄 판에 왜 자꾸 그런 힘 빠지는 소리를 하고 있어? 어느 정도 강해졌으니 이제는 슬슬 게으름 부려도 되겠다, 싶어?”
로건을 좀 본받아 봐라. 걘 이미 옛날 옛적에 데카론 나이트가 되었지만, 아직도 릴리움 기사들과 매일같이 수련에 매진하고 있다고!
성진의 잔소리에, 잠시 멍해져 있던 오웬이 가볍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한데 웃음소리에도 영 매가리가 없다. 어쩐지, 아까부터 상태가 좀 이상하다 싶었던 게 그저 착각이 아니었나?
성진이 미간을 슬쩍 구기며 오웬을 살피자, 그는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무릎에 턱을 괴었다.
“게으름이라… 어쩌면 네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네. 예전부터 이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거든. 전선에 제법 도움이 될 정도로 활약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너무 두드러지지는 않는 정도의 무력이니까.”
“그게 어째서 적당하다는 거야?”
성진의 물음에, 오웬이 잠시 주저하며 맞은편에 앉은 마사인을 돌아본다.
그가 눈을 감고 고른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오웬은 소리를 죽여 나직하게 대답했다. 이 자리에서는 성진 외에 알아들을 사람이 없는 바르샤어였다.
“만일 그게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내가 데카론 나이트가 돼서 제국에 좋을 게 뭐가 있겠어?”
“……!”
그 한 마디로, 성진은 오웬에 대해 제법 많은 것들을 유추할 수 있었다. 오웬이 유독 침울해 보였던 이유. 그리고 아까도 굳이 성진의 공격을 피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진짜 이유를.
어쩌면 성진의 검이 눈앞에 쇄도했을 때, 오웬은 먼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치열한 황위 쟁탈전의 전조를 보았다고 여겼을지도 몰랐다.
오웬은 그의 인생에 갑자기 찾아든 생각지도 못한 행복을, 혹시나 빼앗길까 두 손으로 꽉 움켜쥐려 발버둥 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행복이 약간의 균열만으로도 송두리째 사라져 버리리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는 거다.
“…오웬.”
언제나 마음 한편에 작은 불안감을 지닐 수밖에 없는 처지. 성진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오웬의 심정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아까 나는 널 공격하려 했던 게 아냐.”
“그래, 알아. 오러 은폐 중이라 내 정체를 몰랐잖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내가 없애려 했던 건, 어디까지나 그 시답잖은 은폐 현상의 중심에 있는 강한 이질감의 매개체였어.”
“응? 매개……?”
오웬이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아니,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흠.”
고민하던 성진은 잠시 마사인 경을 눈에 담았다.
한 손에 금빛 미스라를 거머쥔 채, 잠을 자는 척 성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충직한 기사의 모습을.
자연스레 성진의 입에서 바르샤어가 튀어나온다.
“뭐, 적어도 이거 하나는 알아 둬. 앞으로도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 오웬.”
어째서일까. 적어도 지금만큼은, 마사인이 이 대답을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가족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서로에게 검을 겨누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말한 성진은 어딘가 미묘한 감상에 젖어 입가를 어루만졌다.
이미 내뱉은 뒤였지만, 아직도 그 대답이 남긴 작은 울림이 계속 입가를 맴도는 것만 같았다.
* * *
한편, 그때까지 성진과 오웬이 완전히 잊고 있던 자가 있었으니. 바로 오웬이 숙소에서 사라진 것을 깨닫고는, 엄청난 충격에 빠진 바르샤 전사였다.
“크으…. 델크로스인들은 이리도 신의가 없는 자들이로다!”
푸르마의 바르토자.
그는 지저분한 손톱을 물어뜯으며 후다닥 황실 마차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제국인들의 시야로부터 되도록 몸을 숨기고자 하는 본능이었다.
“오웬이여! 델크로스 부족장의 장자여! 그대는 이 바르토자를 홀로 사지에 던져두고서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에 답하듯, 마차 뒤쪽에 있던 상자 하나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심지어는 바로 아래에 있던 바르토자마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덜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