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423)
성황의 아이들-423화(423/469)
423. 거래 (1)
성진 일행이 탄 마차는 동틀 녘부터 쉬지 않고 달려, 정오가 될 무렵 폐허가 된 어느 마을에 이르렀다. 아마도 이곳이 마부들이 언급한 ‘베르드론’이리라.
“…제대로 거주민이 있는 곳 같지는 않군요.”
마사인이 황량한 마을 풍경을 바라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확실히 주변에는 멀쩡히 남아 있는 건물이라곤 없었다. 지붕 없는 집터에는 무너진 벽돌들이 쌓여 있고, 잡초가 무성한 길 곳곳에는 부서진 오크 통이 굴러다닌다.
단지 광활한 폐허의 규모만이, 한때 이곳의 번영과 영광을 짐작게 할 뿐.
“제국인들은 모르겠지. 이 마을에서 빚은 술이 그렇게나 끝내줬는데 말이야…….”
여태껏 침묵을 지키던 마부가, 연초 연기를 후욱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모는 짐마차는 그대로 폐허 사이를 달려, 마침내 어느 커다란 헛간 앞에 정차했다. 그나마 마을에서 유일하게 지붕이라 부를 만한 것이 남아 있는 건물이었다.
삐걱.
다 부서져 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성긴 지붕 사이로 듬성듬성 새어드는 햇살 아래에 웬 초로의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귀한 분께서 친히 자유 지하도를 이용해 주시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사교적인 미소와 함께 건네는 정중한 인사.
그가 이 모든 여정을 지시한 장본인임을 성진은 직감할 수 있었다. 딱 봐도 어디서든 한자리해 먹을 것 같은 관록이 느껴졌으니까.
희끗희끗 새어 가는 머리와 뺨을 가로지르는 긴 흉터, 거칠게 주름진 피부를 보건대 지금껏 제법 만만찮은 시간들을 헤쳐 온 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외관과 대비되는 어딘가 가벼운 분위기가 공존했다. 그의 의복은 정갈함에도 자유분방해 보였고,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에서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명랑한 총기가 반짝였다.
그리고 그는 성진 일행에게, 자신을 ‘자유 지하도의 총책임자’이자 ‘푸른 공화혁명전선의 수장’이라고 소개했다.
“제 이름은 조반니라고 합니다. 이리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가명.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든 성진은, 별다른 대꾸 없이 주변에 숨어 있는 암살자들의 기척을 살폈다.
‘넷, 다섯… 아니, 총 여섯인가?’
헛간을 에워싸고 있는 생소한 ‘오러 은폐’의 기척.
다샤는 아예 근처에 다가올 엄두도 내지 못하는 듯 희미한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저하…….”
이렇게 암살자들이 한곳에 몰려 있다 보니, 오웬과 마사인 역시 그들의 존재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잔뜩 긴장하며 성진의 곁으로 붙어 섰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좀 이상한데?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뉴… 모레스.”
불안한 듯 소곤거리는 오웬에게 간단히 눈짓한 후, 성진은 꽤 여유로운 태도의 ‘조반니’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 정도의 준비라면, 만일의 사태에도 충분히 제 한 몸 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 건가?’
안타깝게도 그는 성진의 전력을 계산에 넣지 못한 실수를 저질렀다. 물론 대화가 잘 끝난다면 그 실수를 영영 깨닫지 못하겠지만.
“총책임자? 수장? 그대가?”
딱히 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성진이 ‘조반니’에게 물었다.
물론 그 또한 성진으로부터 딱히 자기소개를 기대하지는 않는 듯 보였다. 이미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으며, 그것을 조금도 숨길 생각이 없다는 뜻이리라.
“네. 그렇습니다.”
“아무리 ‘특송’이라고 해도, 설마 자유 지하도의 총책임자가가 마중 나올 줄은 몰랐는데.”
그러자 조반니는 부드럽게 입매를 휘며 제법 호감 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이 자유 지하도의 입구를 방문했을 때, 마침 그곳에 제 유능한 부하 하나가 시찰을 나가 있던 참이었습니다. 저는 또 우연찮게 이 근방에 있었지요. 덕분에 기적적으로 이 자리가 성사된 겁니다. 서로가 운이 좋았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군요.”
순간 성진의 뇌리에 한 여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문지기에게 ‘짐’을 인계받고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을 건초 마차로 인도했던 왜소한 여인.
설마 그녀인가? 저자의 부하라는 게?
“…솔직히 예상치 못했네. 내 예정이 꽤나 어긋나 조금 당황스럽군.”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드립니다. 뭐,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이제는 그게 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저 이 우연한 만남을, 우리가 더욱 뜻깊은 자리로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지요.”
“……,”
역시나 어딘가 기묘한 느낌이 드는 자다.
겉모습만 보면 오랜 세월의 풍파가 느껴지는데, 언행은 젊은이 같은 데다 목소리 역시 청년처럼 깨끗하다. 허름한 차림새에 어울리지 않게, 행동거지에는 묘한 기품이 배어 있고.
“그대가 총책임자라면, 이곳이 바로 자유 지하도의 본부인가?”
“본부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겠군요. 자유 지하도는 딱히 한곳에 구심점을 둔 조직은 아닙니다. 그저 사상의 자유를 꿈꾸는 철없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서로를 도와가며 조금씩 얽어낸 성긴 그물에 불과하지요.”
“그래도 나름의 위계질서가 있으니, 그대 같은 책임자도 있는 거겠지.”
“하하. 총책임자라고는 하지만, 제가 하는 일은 보잘것없습니다. 그저 외부 세력과 조직을 조율하거나, 자금 융통을 도맡는 정도에 불과하죠.”
…그거야말로 조직의 실세 아닌가. 이 자식이 뭘 아무것도 아닌 척을 하고 있어?
성진의 험악한 표정을 눈치챘는지, 그가 멋쩍게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이곳이 자유 지하도에서도 제법 중요한 거점 중 하나라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사방으로 괜찮은 길이 나 있으니까요. 당신은 이 베르드론이, 한때 오르토나에서 가장 거대한 양조 마을이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건 몰랐던 사실이군.”
성진은 대충 대꾸하며 잠시 생각했다.
굳이 몰락한 양조장에 관해 들먹거리다니, 지금 이 모든 게 제국의 탓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흠잡을 데 없는 제국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저 작자는 아마도 오르토나인이겠지.’
조반니는 일행의 정체를 이미 짐작하고 있고, 성진을 들어 ‘귀한 분’이라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딱히 존칭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칭호를 고집하고 있지.
그렇다면-
‘오르토나 내전 당시 공화정의 편에 섰던 자거나, 혹은 내색하지 않아도 제국에 꽤나 깊은 반감을 가진 자일 거야.’
그럼에도 굳이 자신과 푸른 공화혁명전선의 관계를 밝혀가면서까지 성진의 앞에 직접 행차하셨다. 그 말인즉, 저자는 지금 성진에게 분명한 용건이 있고, 그것은 십중팔구 ‘푸른 공화혁명전선’에 관한 일일 터.
‘뭐, 본인에게 직접 들을까.’
성진은 더는 시간 끌지 않기로 했다.
“잡담은 이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조반니. 그대가 우리를 곧바로 이곳으로 안내한 이유가 있겠지?”
“네, 그렇습니다.”
조반니는 웃음기를 거두고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빙 둘러말하지 않겠습니다. 당신 같은 이가, 제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만이 찾아드는 이 자유 지하도를 방문한 목적을 알고 싶습니다.”
“왜? 알면 도와 줄 건가?”
“조직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그 목적 여하에 따라서…….”
“그럼 기꺼이 그 도움을 받지. 우리는 이곳에 숨어든 자코모 밀로를 검거하려 한다. 그 외에 딱히 다른 이유는 없고, 자유 지하도의 운영을 방해할 생각도 없어. 아마 그대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겠지?”
“…….”
조반니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성진이 조금의 탐색도 없이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던 모양.
“그보다 내가 그대에게 궁금한 건 조금 다른 부분이다. 왜 굳이 우리에게 푸른 공화혁명전선의 수장이라 밝힌 거지? 그게 이번 일과 무슨 상관이 있어서?”
“별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그저 두 단체의 활동은 결코 분리될 수 없기에 미리 말씀드린 것이죠. 짐작하셨을지 모르겠지만, 자유 지하도의 중간책 대부분이 푸른 공화혁명전선의 회원입니다. 애초에 자유 지하도의 유래가, 사상의 자유를 쫓아 공화국으로 망명하려던 사람들을 돕는…….”
성진이 대답 없이 매섭게 노려보았더니, 그는 결국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군요.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 ‘푸른 공화혁명전선의 수장’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다고 보는 쪽이 옳겠습니다.”
푸른 공화혁명전선. 성진이 수년간 출처 모를 자금으로, 자신도 모르는 방법으로 후원하고 있는 이적 단체.
다샤가 진작 조사에 착수했지만 아직까지 뾰족하게 알아낸 것이 없어 이상하다 싶었지. 알고 보니 이들은 자유 지하도를 통해, 주로 북부에서 은밀하게 활동하는 단체였던 거다.
“그래서 예전부터 당신에게 꼭 묻고 싶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우리 단체를 알고, 또 그런 거금을 후원하겠다고 결정한 겁니까?”
수년 전만 해도, 푸른 공화혁명전선은 대단히 영세한 단체였다.
회원을 포섭하고 자금을 융통하기 위해 황도에 발을 뻗고는 있었지만, 이미 온갖 이적 단체가 암약하고 있는 황도에서 어설픈 그들이 살아남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한데 수년 전, 갑자기 아무런 조건 없이 거금의 후원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푸른 공화혁명전선은 이 자금을 바탕으로 조금씩 자유 지하도의 그물망을 회복했으며, 마침내 참회의 교단과도 직접적으로 거래할 수 있는 튼튼한 조직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흠. 참회 교단과 함께 북부를 좀먹는 놈들이다 싶어, 기회가 되면 일단 다 때려잡으려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성진, 그러니까 모레스가 후원한 지원금이, 자유 지하도를 재차 활성화시킨 원인이었다니.
“처음에는 당신이 우리 단체를 후원하겠다 결정한 게 그저 우연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망국 이후에도 오르토나의 사상과 혁신을 그리워하던 이들이, 너도나도 이를 추종하는 단체를 만들었으니까요.”
황도의 젊은이들 사이에는, 이들 단체에 투신하거나 후원하는 것이 일종의 낭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니 철없는 황자가 그 시류에 탑승한다 한들 크게 이상하다고 여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당신의 행보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우리 단체를 선택한 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최근의 행보?”
“베르트란 & 리.”
순간 조반니의 눈이 답지 않게 날카로운 안광을 뿜었다.
“대부분은 그 상단이 부유한 황자의 사업 병에 불과하다 여깁니다. 하지만 상업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이라면 분명 깨달았을 테죠. 당신이 벌이고 있는 모든 사업들은, 사실 난민들의 정착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요.”
거기까지 말한 조반니는,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은 제국의 황자가 아닙니까? 한데 왜 아무 상관 없는 이들을 도우려 합니까?”
하지만 성진은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일순 조반니가 내보인 기묘한 위화감에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다.
“나도 하나만 물어보지. 그러니까 그대는, 지금 우리 상단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가? 그대가 운영하는 단체에 해를 끼치기보다는, 오히려 뜻을 같이하는 쪽이라고 생각하는데. 분명 난민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예정이잖아?”
“마음에 들지 않다니,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당신이 하는 모든 일들이 오르토나 전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러니 저는 먼저 당신의 저의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아냐, 그게 아니야.”
성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조반니의 말을 끊었다.
“그대는 아까부터 내게 화를 내고 있다고. 대체 어째서지?”
“…네?”
조반니가 어리둥절해하며 반문했다. 하지만 이어서 성진이 내뱉은 말에,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완전히 사라진다.
“베르트란 & 리.”
“……!”
“우리 상단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그대의 기분이 급격하게 나빠졌잖아. 그렇지 않아?”
언어는 어디까지나 표면에 불과하다.
그 말을 하는 이의 목소리 톤과 시선의 방향, 잠시 떠올랐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미세 표정, 그리고 잘게 동요하는 오러의 움직임까지.
기감이 극도로 예민한 성진에게는, 그 누구도 무의식중에 내비치는 본심을 온전히 숨길 수 없는 것이다. 특히나 오러 연공에 입문하지 못한, 조반니 같은 일반인의 경우에는 더더욱.
“숨길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그거 자네 얼굴에서 다 드러나거든.”
성진의 지적에, 조반니는 잠시 말이 없었다.
“…확실히 그 문제도 있었죠. 네, 그렇습니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뒤.
이윽고 입을 연 조반니의 눈에서, 일순 무의식 속에 깊이 감춰져 있던 날 선 적의가 번뜩였다.
“사실 제가 당신에게 가장 궁금했던 건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이 운영하는 상단, 그것의 이름이 어째서 하필 [베르트란]인 것인지요?”
* * *
베르트란은 대륙에서 아주 드문 성은 아니다. 같은 성이 브르타뉴에도, 또 남부 아나톨리아에도 있다고 했던가.
예를 들자면 브르타뉴 출신의 유명 배우 ‘알랭 베르트랑’을 꼽을 수 있다. 수백 년 전 황도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그는, 말년에 황도 한쪽에 커다란 극장을 세웠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주로 활동하던 거리의 이름은 그대로 베르트랑 거리가 되었지.
하지만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베르트란이라고 하면, 뭐니 뭐니 해도 그를 꼽을 수밖에 없다. 바로 동부 최후의 검, 가엘 베르트란 장군.
다행히도 거기에 대해서 성진에게는 할 말이 있었다.
“그거야, 우리 로건이 베르트란 장군의 열렬한 팬이라서 그래.”
“…네?”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던 모양이다. 조반니의 무표정에 금이 가며 일순 당황한 기색이 드러난다.
“그대도 알다시피 베르트란 & 리 상단의 최고 대표는 로건이지. 그런데 로건이 그 가엘 베르트란 장군을 우상으로 여기고 있거든.”
“…….”
“사실 우리 상단이 오르토나 경제 부흥 사업을 벌이는 것도 다 그 녀석 때문이지. 걘 완전히 오르토나에 미쳐 있다고.”
“…….”
“정말이라니까?”
성진은 당당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의 말을 완벽하게 증명할 수단이 있었으니까.
“로건은 정말이지 가엘 베르트란 장군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고. 그의 가족관계, 그의 인간관계, 그의 어린 시절…. 심지어는 그가 생전에 야식으로 뭘 좋아했는지까지 다 알걸?”
어디 그뿐이야? 오르토나어도 능숙하고, 오러 연공이나 검법도 오르토나식으로만 쓴다고. 그리고 가엘 베르트란의 애검을, 가엘 베르트란처럼 능숙하게 다루지.
이런데도 그 녀석이 장군의 광팬이 아니라면 대체 뭐겠어?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한번 그대와 함께 로건과의 자리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군. 보아하니 그대도 가엘 베르트란 장군을 몹시 흠모하는 모양인데, 아마 둘이 만나면 동일한 관심사에 대해 대화하며 무척이나 뜻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야.”
어째 뒤통수에서 오웬과 마사인의 경악한 시선들이 느껴진다.
뭐? 왜? 뭐?
아, 진짜라니까? 다들 못 믿겠으면 나중에 로건에게 직접 물어들 보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