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426)
성황의 아이들-426화(426/469)
426. 거래 (4)
“…아버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오웬이 곁에 앉은 소년을 돌아보았다.
모레스는 아까부터 램프를 끌어안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뭔가 꿈이라도 꾸는 듯 미약하게 눈썹을 찌푸려 댔다.
‘잠자리가 편치 않나?’
오웬이 발치에 굴러다니는 짐짝들을 옆으로 치워주자, 소년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렇게 감쪽같이… 인식… 피하면…….”
…깨워야 하나?
고민하고 있자니, 그의 생각을 짐작한 듯 마사인이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그냥 잠꼬대하시는 겁니다.”
“잠꼬대요? 혹시 악몽이라도 꾸는 거 아닙니까?”
“그건 아닐 겁니다. 매번 그러시니까요. 단지 낮잠을 주무시면서 잠꼬대하시는 건 처음 보는군요. 애초에 낮잠을 주무시는 일도 잘 없습니다만.”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구나.
조금 안심한 오웬이 낡은 망토를 벗어 어깨 위로 둘러주자, 모레스가 재차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작작 좀… 이 양반아…….”
* * *
에디스와 바르토자가 계곡을 따라 하염없이 걷는 동안, 어느새 해가 져 어스름한 저녁이 찾아왔다.
흠흠흠, 흠흠~
신성력 덕에 쌩쌩해진 에디스가 이따금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하지만 바르토자의 경우는 그녀와 사정이 좀 달랐는데, 에디스를 애절한 눈으로 힐끔거리며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중이었다.
‘저기… 여자, 큰일 났소! 아까부터 이치가 숨을 쉬지 않소!’
하나 제국어를 모르니 말을 전할 방법이 없다.
바르토자는 이를 딱딱 맞부딪히며, 짊어지고 있는 괴물을 조심스레 더듬어 보았다. 안 그래도 활기가 아예 없어 무서웠는데, 이제는 그에 더해 맥박도 호흡도 완전히 사라진 상태다!
‘…역시 이자는 저세상에서 올라온 악령이구나!’
그럼에도 바르토자가 걸음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괴물이 마지막으로 당부한 한마디 때문이었다.
-알현이 있어 잠시 다녀오마. 쉬지 말고 물길을 따라 쭉 걸어라. 해가 지면 너희들을 마중 나온 이와 만나게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바르토자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목이 부러져도 되살아나는 괴물 아닌가. 세상 끝까지 날 쫓아오겠지…….’
다행히도 바르토자의 고뇌는 길지 않았다. 완전히 해가 지기 전, 그들은 새 포장이 덮인 짐마차 하나와 그 앞에서 타고 있는 작은 모닥불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아! 근처에 일행이 있을 거라더니, 바트 사제님의 말씀이 맞았어요!”
에디스가 반색하며 모닥불을 향해 다가갔다.
불을 지키고 있던 자는 어딘가 피로해 보이는 인상의 젊은 남자였다. 농부들이나 입을 법한 허름한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날카로운 눈빛이나 입가에 길게 아로새겨진 흉터를 보건대 평화롭게 농사나 짓는 인간 같지는 않았다.
그는 에디스 일행을-정확히는 바르토자가 들쳐 업은 피투성이의 사제를-발견하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페하?!”
그러곤 앗 하는 사이에 바르토자에게로 다가와, 어느새 그로부터 사제의 몸을 빼앗다시피 받아들고 있었다.
“대체 이 피가 다……!”
“저기, 바트 사제님께서는 괜찮다고 하셨어요. 저희를 치료하시려다 피가 묻었다고…….”
에디스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남자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
순간 바르토자는 남자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비록 제국어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둘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일단 이쪽으로 오십시오.”
대충 사제를 눈으로 훑어 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남자는, 그제야 진정한 기색으로 그들을 짐마차로 데려갔다.
“사제님께 들으셨겠지만, 이제부터는 제가 여러분을 인근 마을까지 안내할 겁니다.”
마치 그들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는 듯한 태도.
보통은 이상하다고 생각해야 마땅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초면인 데다, 정작 연결 고리가 되어주어야 할 사제는 깊은 잠에 빠져 침묵하는 중이었으니.
그러나 다행히도 그들 중 하나는 별생각이 없었고, 하나는 아예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일단 가져온 물건들은 이 마차에 실으세요”
“아? 네.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이건 잠시 여기에 두겠습니다.”
쿠웅!
에디스가 워해머를 거칠게 내려놓자, 이번에도 남자는 그녀를 향해 묘한 시선을 던졌다.
“한데 폐… 바트 사제님께서 뭐라고 하지 않으시던가요? 안 그래도 손이 모자라는데, 대체 그 쓸데없는 짐은 왜 가져 온 겁니까?”
“이건 쓸데없지 않아요. 중요한 물건이거든요.”
“당신은 제국인 아닙니까? 하지만 그 무기는 아무리 봐도 바르샤의 물건처럼 보입니다만.”
물론 이 워해머는 모레스 황자의 짐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저하께서는, 제가 피치 못한 사정으로 저하의 물건을 한둘 잃어버린들 크게 신경 쓰지 않으실 거예요. 하지만 이 무기는 저하의 것이 아닌, 오웬 황자님의 물건이죠.”
그러니 모레스 황자는 다른 물건들보다 이걸 우선적으로 챙기길 바랄 것이다, 에디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중이었다.
“…….”
물론 일반적인 사용인의 태도는 아닐 것이다.
남자는 잠시 생각했다. 이 여자는 생각이 깊은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고.
“그런데, 당신은 누구신가요?”
“…21호라고 불러 주십시오.”
한참 늦은 질문에 괴상한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짐마차 한쪽에 마련된 침상에 바트 사제의 몸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사제님은 주무시는 건가요? 왜 계속 안 일어나시죠?”
“이곳에 또다시 임하시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마 내일 오전 정무회의를 끝내야 다시 오시지 않겠습니까.”
“네?”
알아듣지 못하는 시녀와, 아예 제국어를 모르는 바르샤인. 21호는 어쩐지 두통이 이는 것을 느꼈다.
“일단 당신들은 냇가에서 좀 씻으십시오.”
아무리 북부가 무법 지대가 되었다 한들, 피투성이 상태로 계속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21호는 그들에게 대충 갈아입을 옷가지를 내밀었다. 보통의 평민들이 입을 만한 허름한 옷들이었다.
“다 끝나면 모닥불에 몸을 말리고 계십시오. 폐… 사제님을 봐 드리고 나면, 간단히 요기할 거리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세 사람은 모닥불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불 위에는 어느새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작은 스튜 냄비가 걸려 있었는데, 먹음직스러운 음식 냄새가 퍼지자 두려움에 질려 있던 바르토자도 눈에 띄게 안정을 되찾았다.
“아, 맞다! 이것도 상하기 전에 얼른 구워 먹죠.”
식사를 하던 에디스가 뒤늦게 생각난 듯 수상한 꾸러미 하나를 내민다. 꾸러미에 피가 흥건히 배어 있는 것을 확인한 21호가 움찔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건 뭡니까?”
“말고기예요.”
말?
일순 멍해졌던 21호는, 겨우 마차 추락 사고와 말고기의 상관관계를 깨달을 수 있었다.
“말들은 황실의 재산이 아닙니까? 그런 걸 당신 마음대로 도축해도 되는 건지…….”
“귀한 말들이니 고기라도 챙겨야죠. 외딴 장소에 떨어졌는데 언제 식량을 또 구할 줄 알고요. 그대로 뒀으면 어차피 산짐승들이 뜯어 먹었을 거예요.”
그건 그렇지만.
잠시 맹한 에디스의 얼굴을 살피던 21호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이 여자는 생각이 없는 쪽인 것 같다.
21호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에디스는 소매를 걷어붙이고는 말고기를 불 위에 올렸다. 곧 모닥불 주위로 고기 익어가는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어디에도 수상한 점은 없다.’
요리하는 에디스로부터 묘하게 활발한 오러 활성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뿐. 그녀는 폐하께서 이미 신원을 보증해 주신 자가 아닌가.
21호는 별다른 의심 없이 그녀가 내민 고기를 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흠칫.
미뢰가 맛을 감지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고기를 바닥에 뱉어냈다.
“앗, 왜 그러세요?”
“…왜 이리 씁니까? 대체 도축하면서 고기에 무슨 짓을 한 거죠?”
“쓰다고요?”
그 말에 에디스가 조심스레 고기 한 점을 베어 물더니 와락 인상을 쓴다.
“흠, 실망인데? 혈통 좋은 군마라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근육이 많아서 고기가 질긴가 봐요”
“아니, 이건 질긴 수준이 아니라, 마치 쓸개즙이라도 묻은 듯 이상한…….”
“담낭은 안 터뜨렸어요! 아마 별로 맛이 없는 품종인가 보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입니다만, 전 당신들을 돕기 위해 온 사람입니다. 설마 독을 탄 것은…….”
“아니, 독이라니요! 절 뭘로 보고 그런 말을!”
잠시 옥신각신하긴 했지만, 두 사람에게는 그저 가벼운 해프닝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끔찍하게 쓴 고기를 뱉어낸 바르샤인은, 돌아가는 상황을 몰라 또다시 엄청난 불안에 떨어야 했다.
‘사악한 제국인들! 결국은 음식을 주는 척 조용히 나를 독살하려는 거구나!’
그가 이대로 뜬눈으로 밤을 새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어느 누군가가 그 소소한 괴롭힘에 흡족해 하리라는 것도.
* * *
꼬르륵.
성진은 심각한 허기를 느끼며 눈을 떴다.
“배고파…….”
생각해 보면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단 말이지.
그러자 마사인이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작은 육포 한 조각을 건넸다. 다샤로부터 건네받은 비상식량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저하. 주무시는 동안, 마부가 한 번 더 바뀌었습니다.”
성진이 육포를 받아들자, 그는 이어서 작은 수통을 내민다.
“말을 걸어봤지만 아예 대답하지 않더군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마차를 멈출 생각도 없어 보입니다.”
“뭐, 그렇겠지. 그게 자유 지하도의 배송 방식이니까.”
성진은 물 한 모금을 들이켠 후, 육포의 반을 갈라 그중 하나를 마왕의 램프에 던져 주었다.
화르륵!
붉은 불꽃이 날름날름 마지막 비상식량을 먹어 치운다. 잠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오웬이 투덜거렸다.
“그걸 또 아깝게 요정에게 나눠주고 있냐. 네 또래는 잘 먹어야 잘 큰다고.”
“시끄러워, 멍청아. 그나저나 넌 뭐 먹을 거 가진 거 없어?”
“아니, 내가 여기까지 올 줄 어떻게 알고 미리 그런 걸 준비했겠……?”
퉁명스럽게 대꾸하던 오웬이, 갑자기 뭔가를 떠올렸는지 눈이 동그래진다.
“어라…? 잠깐만 기다려 봐. 간단한 먹거리라면, 왠지 나한테 방법이 있을 것도 같은데?”
그러더니 오웬은, 목에 걸려 있는 선홍색 펜던트를 꼬옥 거머쥐며 눈을 감았다.
“상태창 씨.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제발 부탁합니다!”
모두가 그의 기행을 지켜보는데-
도로롱.
신기하게도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웬이 그대로 고개를 툭 떨구더니 깊이 곯아떨어지는 게 아닌가!
“……?”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녀석이 순식간에 의식을 잃은 듯 보이자, 마사인이 조금 당황하며 성진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정상적인 상태로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요? 오러 활성이 괜찮은 걸 보면 몸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 텐데요.”
물론 성진은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이 녀석, 잠시 판게아 클로니클에 다녀 올 생각이구나.
‘그런데 성격 나쁜 상태창이 녀석을 쉽게 돌려보내 줄까?’
다행히 상태창은 심술을 부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웬이 무사히 눈을 떴으니까. 그러고는 무척 밝은 얼굴이 되어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자자, 우선 이거라도 먹자고!”
그가 내민 손 위에는 성진에게는 이미 익숙한 어묵 몇 개가 놓여 있었다.
“…그게 뭡니까?”
생전 처음 보는 음식에 마사인이 잔뜩 경계하며 묻자, 오웬이 싱글벙글 대답했다.
“네. 먹을거립니다, 형님.”
저 어묵은 성진도 예전에 얻은 적이 있었다. 그린 존에서 식료품점 일일 퀘스트를 하면 주는 거였지.
가격은 저렴하지만 난이도가 쉽고 맛도 나쁘지 않아, 침묵 빌런들도 간혹 간식 삼아 퀘스트를 수행하곤 했었다.
물론 그러한 배경을 모르는 마사인에게는 수상하기 짝이 없는 음식이었겠지만.
“먹을거리라니, 보기에도 썩 제대로 된 음식처럼 보이지는… 저하?!”
그는 성진이 아무 말 없이 어묵을 받아 드는 것을 보고는 기함했다.
“먹을래. 배고파.”
“그, 그럼! 외람되오나 제가 먼저 먹어보겠습니다!”
마사인은 눈을 질끈 감고서 어묵 한 조각을 삼켰다. 그리고는 이내 눈이 휘둥그레져서 성진을 돌아본다.
거봐. 이거 맛있다니까.
잊지 않고 램프 안에도 하나 넣어주자, 마왕 역시 만족스러운 듯 어묵을 살라 먹는다.
[이건 뭐야? 뭔가 새로운 맛이네?]그렇게 잠시 급한 허기를 채우는 동안에도, 마차는 덜컹덜컹 흔들리며 쉬지 않고 달렸다.
“근데 오웬. 너, 빵 가진 건 없어?”
“응? 빵?”
성진의 뜬금없는 요구에 잠시 어리둥절하던 오웬은, 곧 뭔가를 떠올렸는지 환한 얼굴이 되었다.
그래, 식료품 가게 옆에 있는 교회 아르바이트를 잊으면 안 돼. 거기 빵도 꽤 먹을 만했다고.
“잠깐만 기다려!”
오웬은 또다시 이정표를 쥐고는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러고는 제법 오랜 시간이 흘러 의기양양한 얼굴로 눈을 뜬다.
“자, 여기 빵이랑, 어묵도 조금 더 가져왔다! 뉴… 모레스, 너 이거 좋아하지?”
성진은 냉큼 그 음식들을 받아 들었다. 오직 마사인만이 눈을 비비며 황당한 얼굴로 오웬과 음식들을 번갈아 바라볼 뿐.
“아니, 저하. 대체 이것들이 다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괜찮아, 마사인 경. 일단 먹고 보자고.”
냠냠.
“근데 오웬, 마실 만한 건…….”
“응? 아! 그러고 보니 잡화점 저녁 퀘스트가…! 잠깐만 기다려 봐!”
그렇게 밤새 오웬이 조달해 온 음식을 이것저것 주워 먹는 사이-
성진 일행은 ‘특송’의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했다. 바로 오르토나에서 두 번째로 큰 난민촌, 푸리아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