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429)
성황의 아이들-429화(429/469)
429. 불로불사의 비서 (2)
핑-!
눈앞에 작은 빛기둥이 솟아오른다. 상태창 씨가 표시해 주는 목적지다.
오웬은 잔뜩 들뜬 마음으로 그 빛을 향해 달려 나갔다.
‘역시 모레스가 이성진이었어! 모레스가 그 뉴비였다고!’
이런 정 없는 자식 같으니! 알았으면 진작 말을 할 것이지, 왜 지금까지 모른 척하고 있었던 거야?
그때 뒤에서 빠른 속도로 마사인이 따라붙어 왔다.
“…마사인 형님?”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돕겠습니다, 저하!”
“…….”
순간 잔뜩 흥분했던 기분이 가라앉으며, 서서히 머릿속이 맑아졌다.
아마 형님의 자발적인 조력이 아닐 거다. 분명 모레스가 시킨 일이겠지.
‘그러고 보니, 이 타이밍에 퀘스트가 나온 것도 어쩌면…….’
모레스의 판단에 따른 변화가 아니었을까? 오웬은 막연히 그런 생각을 했다.
딱히 근거는 없다. 하지만 어쩐지 상태창 씨가 계속 모레스를 쫓으며, 그의 의도에 맞춰주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거다.
[긴급 퀘스트 ? 중요한 문서를 찾아 손에 넣어라! new!] [퀘스트 등급 : A] [중부의 한 영주가 오랜 시간 보관했던 귀한 문서를 손에 넣으십시오. 그 문서는 한때 인간을 미혹케 한다는 미명하에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저자의 후손에게조차 철저히 외면 받았지만, 사실 거기에는 마법사들이 오랜 시간 찾아 헤매던 귀한 진리가 숨어 있답니다. 어쩌면 그 문서의 발견으로, 의외의 부가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보상 : 500P 캐시] [*본 상품은 판게아 클로니클 상점 창에서 사용 가능합니다.]‘상태창 씨치고는 보상이 엄청 후한데?’
조금 긴장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오웬은 허리춤의 한손도끼를 뽑아 들었다.
찌직-! 찍!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예상치 못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쥐?’
지하도에 씨가 마른 듯했던 쥐들이 어째 모조리 이곳에 몰려 있는 것 같았다.
악취 역시 심해졌다. 안 그래도 축축한 공기에, 뭔가 썩어가는 냄새가 어우러지며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이윽고 도착한 곳은, 수로와 수로가 교차하는 제법 넓은 공간. 오웬과 마사인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일순 침음을 흘렸다.
“이게 다…….”
이곳은 사악한 마법사의 연구실이었다.
한쪽에는 책이며 문서가 빼곡히 꽂힌 낡은 책장이,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여러 동물들이 갇힌 크고 작은 우리들이 쌓여 있다.
지저분한 이물질로 가득한 벽에는, 또 알 수 없는 도료로 그린 빽빽한 마법진이 보인다. 한눈에 봐도 사악한 이단의 술법, 혹은 악마 숭배의 증거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그 중앙에,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서 있었다.
“…침입자?”
그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자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후드로 얼굴을 모조리 가리고 있어 표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당신들, 대체 어떻게 아무 일 없이 이곳까지 들어왔소? 중간에 침입을 대비한 함정들이 많았을 텐데.”
“함정?”
순간 오웬의 머릿속에, 간혹 곧은길을 빙글빙글 우회하던 모레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아! 그게 함정을 죄다 피한 거였나?
‘아무렴! 그 녀석은 뉴비니까!’
‘오크왕의 미로’를 공략하던 당시, 함정과 알람을 귀신같이 피하던 그 솜씨가 어디 가지는 않았단 말이지.
잠시 뿌듯해하던 오웬은, 마사인의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하! 저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은 전부 죽은 것들입니다!”
마사인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심지어는 저 사악한 술수를 사람에게까지……!”
‘사람?’
움찔 놀란 오웬의 시선이 안쪽에 있는 커다란 우리 하나에 멈췄다. 그곳에는 다른 것들에 비해 유난히 덩치가 큰 동물들이 갇혀 있었다.
까드득, 까드득.
이지를 잃고 창살을 물어뜯는 모습은 일견 짐승과도 같다. 하나 찬찬히 살펴보니, 그것들은 분명 팔다리가 멀쩡히 달린 인간의 형상.
“……!”
오웬과 마사인은 동시에 깨달았다.
설마 저 마법사가, 이런 열악한 환경에도 굳이 난민촌 아래 자리 잡은 이유가……!
“후우…….”
검은 로브의 마법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한숨 같은 탄식을 내뱉었다.
“겨우 성과를 보는 줄 알았건만, 끝내 귀중한 표본들을 이렇게 소모하게 되다니. 하나-”
번쩍!
어두운 로브 사이로 섬뜩한 안광이 빛을 발했다.
“이것을 봤다면 더는 당신들을 살려둘 수 없소!”
그 말과 동시에-
따앙!
수많은 우리가 일제히 열리며, 반쯤 썩어가는 동물들이 한꺼번에 두 사람을 향해 쏟아져 나왔다.
* * *
“그만 안심해. 당장 해칠 생각은 없어.”
같은 시각, 성진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코모 밀로를 달래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와 계약한 악마 쪽을.
자포자기 끝에 또 다른 죄를 서슴지 않고 저지를 정도로, 임의적인 계약 파기가 불러올 인과는 두려운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악마는 어지간해서는 인간 쪽에서 파탄의 책임을 져 주길 바란다는 뜻일 터.
‘이제 막 찾아냈을 뿐인데 갑자기 계약을 팽개치고 도주하려 들다니. 대체 저 악마는 뭐에 겁을 먹은 거지?’
어쨌거나 실낱같은 가능성만 던져준다면, 악마는 계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터다. 그래서 성진은 악마를 포섭하기로 결정하고 조심스레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약속하겠어. 너희들의 계약을 보호해 주지.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지금 이 자리에서 네 계약자를 죽이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악마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그저 자코모 밀로만이 겁에 질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릴 뿐.
“거, 거짓말 마시오!”
이윽고 자코모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계약을 보호하다니, 그건 다 거짓이잖소?”
“아니, 난 정말로 여기서 널 죽이지 않는다니까.”
“그건 다 말장난이오! 내게는 이미 사형선고가 내려졌소! 그러니 당신이 인적 없는 곳으로 날 유인해, 언제든 다른 이를 시켜 내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는 뜻 아니오? 내가 속을 줄 아시오?!”
흠. 그야 그렇지. 이미 처참한 끝이 예정된 녀석을 뭐라 설득하겠어.
성진이 딱히 부정하지 않자, 자코모 밀로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진다. 그는 잔뜩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샐로스! 듣고 있습니까? 어서 나를 지켜주십시오! 그렇게만 해 준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에게 내 몸을 내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계약대로, 눈앞의 적을 물리칠 힘을 내려 주십시오! 계약자의 위험을 방기하는 것 역시 중차대한 계약 위반이 될 겁니다!”
그러자 여태껏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던 악마가 마지못해 응답했다.
[자코모…….]“샐로스!”
[이것 봐. 지금 계약 운운할 상황이 아니라고. 이제 와서 네 몸을 얻어 뭘 어쩌란 거야? 위대한 군주들의 대리자 앞에 직접 강림하라니, 지금 날더러 흔적도 없이 소멸하라는 말이냐?]아아, 그래.
당장이라도 계약자의 몸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를 두고도, 악마가 굳이 몸을 사릴 이유는 달리 없었다.
차라리 계약 파기의 죄를 받더라도, 계약자를 내팽개치고서 도망칠까 고민할 정도로 가시화된 공포.
‘예비된 자…….’
자코모는 눈앞의 소년을 망연히 올려다보았다. 허름한 행색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금까지 봐 왔던 어느 누구보다 무거운 존재감을 드러낸 이를.
[하나만 묻겠소.]자코모의 정신이 위태로이 흔들리는 사이, 샐로스는 그의 몸을 빌려 입을 열었다.
[정말로 우리의 계약을 지켜 주시겠소? 설마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마계까지 날 쫓아오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거요?]…뭐? 그게 무슨 개똥 같은 소리야?
“마계로 쫓아가다니, 내가 무슨 수로?”
성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자코모 밀로, 아니, 악마는 어딘가 불편한 기색으로 침음을 흘렸다.
[그야 그대는 예비된… 크흠…….]잠시 우물쭈물 거리던 악마는, 마음을 정한 듯 이번에는 쩔쩔 매며 성진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부디, 부디 약조해 주시오! 감히 계약으로 명시하기를 바라지는 않소! 그저 이번 일을 문제 삼지 않겠다, 그 한마디만 내게 해 주면 안 되겠소?]악마가 생각보다 저자세로 나오자, 성진은 잠시 생각했다.
뭐야? 이 정도면 그냥 계약을 파기하고 도망치게 뒀더라도 괜찮지 않았을까? 저놈이라면 홧김에 마기를 풀어버리는 깽판을 치지 않고도 그냥 조용히 물러났을 거 같은데.
“…약속해 주면?”
[그리만 해준다면! 그러면 나는 계약을 유지한 채, 이후로는 당신의 뜻을 절대 거스르지 않겠소!]“…샐로스?!”
갑작스러운 악마의 태세 전환에, 자코모 밀로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당신은 저 말을 믿습니까?”
[자코모. 일단 지금 상황은 네게 있어서 큰 위기가 아닌 듯하다. 그러니 딱히 내가 나서지 않아도 계약 위반은 아닌 거야. 게다가…….]“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어쨌거나 예비된 자는 나를 끌어내어 형을 치르게 할 셈입니다! 결과적으로 내 목숨을 노리는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건…….]그래도 악마가 도통 움직일 기색이 없자, 자코모는 절박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좋습니다! 정 당신이 날 돕지 않는다면, 차라리 스스로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어버리겠습니다! 그가 나를 바로 베지 않고 구슬리려 드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궁지에 몰린 것치곤 제법 예리한 판단이었다.
“자, 이건 어떻겠소? 내게는 다 썩은 시체도 걸어 다니게 만드는 비장의 무기가 있소!”
자코모는 검은 비약을 세게 움켜쥐며 성진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이대로 내가 죽어 시체가 침식되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소? 제국은 영원히 멈추지 않고 마기를 퍼뜨리는 공포를 맞이하게 되는 거요! 그 또한 세상을 향한 복수로는 나쁘지 않을 터!”
성진의 시선이 잠시 자코모 밀로의 손아귀에 머물렀다.
과연, 썩어서 움직이던 쥐도 모두 이 작자의 수작이었나? 믿는 구석은 있었다는 말이군.
하지만 협박도 상대를 봐가며 해야지.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사제나 성기사만 있다면, 너 하나 정화하는 건 금방이지.”
“이곳 자유 지하도의 거점에서, 멀쩡한 사제나 성기사를 찾을 수 있으리란 기대는-”
“왜? 당장 여기에도 하나 있는데. 이래 봬도 나는 엑소시스트, 그러니까 성기사거든?”
“…뭣?”
악에 받쳐 있던 자코모의 눈에 조금은 불손한 빛이 떠올랐다.
‘당신이? 엑소시스트? 지금 어디서 약을 파는 거요?’ 이런 뜻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눈빛이다.
“흠, 못 믿는군. 역시 증거를 보여줘야 하나…….”
성진은 품속에 갈무리하고 있던 성수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손에는, 날리기 좋은 비표까지 뽑아 들었지. 모두 로베르 경으로부터 받은 물건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퇴마 도구들을 놓지 않는다. 그야말로 준비된 엑소시스트의 자세 아니겠는가.
“근처에 사람들이 너무 밀집해 있으니 신중을 기하는 것뿐이지, 침식으로 죽은 자가 흩뿌리는 마기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들었어. 이 도구들로 간단한 결계를 만들면, 정화해 줄 사제를 부를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지.”
물론 블러핑이었다. 움직이는 대상을 상대로 결계가 과연 어느 정도 효과를 보일지는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거기다 자유 지하도의 거점에 멋대로 다른 성기사를 부르면, 그날로 푸른 공화혁명전선과의 관계는 끝장이라 봐야겠지.
“설마 그런…….”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자코모 밀로에게는 그 정도의 언질만으로도 충분했다.
연이어 그의 악마가 도구들에 깃든 신성한 기운까지 확인해 주자, 자코모는 그제야 솔깃해지는 모양이었다.
“…이럴 수가!”
그는 완전히 절망하여 절규했다.
“내가, 내가 왜 죽어야 한다는 말이오? 나는 그리 큰 죄를 짓지 않았소!”
“악마와 계약하고, 사익을 위해 사람들에게 해를 가했지.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한가?”
“악마와의 계약? 그게 어쨌다는 거요! 상인으로 살아남으려면, 다른 경쟁자들의 마수로부터 버텨내려면, 스스로가 악마 계약자가 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방법이 없단 말이오! 그게 과연 모두 내 탓이라 할 수 있소이까?”
자코모 밀로는 번쩍 고개를 들어 성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공포와 절망으로 잔뜩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는, 내재된 분노와 뒤틀린 희열이 한데 뒤섞여 들끓고 있었다.
“나는 대륙을 크게 어지럽히지 않았소! 다른 이들처럼 마구잡이로 살육을 벌인 것도 아니란 말이오!”
“너 때문에 많은 이들이 마계수에 희생되었잖아.”
“그것이야말로 누명이오! 마계수를 불러낸 것은 어디까지나 암흑 교단의 소행! 오히려 모든 것을 잃은 내가 그 사건의 최대 피해자란 말이오! 한데 어째서 내가 그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거요?”
크흐흐흑!
자코모 밀로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솟구친다.
“지그스문트령의 약차 건도 마찬가지요! 나는 그저 돈이 되는 물건들을 팔았을 뿐이란 말이오! 북부를 좌지우지하는 참회의 세력이 팔길 원했고, 지그스문트령의 가주가 사들이길 희망했소! 대체 그 사이에서 상인인 내게 어떤 선택지가 있단 말이오?”
“…….”
성진은 조금 따분해졌다.
그래. 정상을 참작할 만한 부분이 없다고는 못 하겠다. 그런데 대체 날더러 뭘 어쩌라는 거지? 우리 아버지라면 또 모를까, 나는 살아생전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자가 아니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삐이이-
갑자기 높은 이명이 들리며 언뜻 시야가 흐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는 의아해할 새도 없이 눈앞에 펼쳐지는 생생한 광경.
살아 있는 시체들과, 공포에 질린 사람들. 그리고 불타는 건물들이 보인다. 지옥도와도 같은 처참한 광경이었지만, 성진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곳은 분명 레지나의 거리였다.
이제는 돌아오지 않을, 자신이 지나쳐 버린 가까운 미래.
‘아아, 그래!’
성진은 문득 깨달았다.
‘이번이 다가 아니구나. 이자는 어차피 살아 있는 한, 계속해서 끔찍한 미래를 불러올 이다.’
찰나의 순간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것으로 성진은 완전히 결정을 내렸다.
[히이익! 이봐, 자코모! 계약자로서의 마지막 인정이야. 어쩌면 이건 너에게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지간해서는 그의 말을 듣고, 이제 더는 나를 부르지 마라아아아…….]“샐로스?”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악마가 비명을 지르며 마계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자코모는 당황하며 몸을 일으켰다가 이내 바짝 얼어붙었다. 어둠속에서도 환하게 빛나는 은색의 안광이 그를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었기에.
안 그래도 축축하고 무겁던 공기가, 한층 농밀한 밀도를 가지고서 그의 몸을 내리누른다.
“하소연은 그쯤하고 순순히 그 물건을 내 놔. 그리고 얌전히 날 따라와라.”
“…….”
본래라면 거부하는 것이 옳았으리라. 이 비약은 그가 가진 최후의 보루나 마찬가지니.
하지만 어째서인지 자코모의 몸은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그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영혼에 직접 새겨지는 듯한 추상 같은 한 마디 한 마디에, 그로서는 더 이상 저항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나는……!”
“아직도 모르겠나?”
절망적인 무력함에 허우적거리는 상단주를 향해, 성진은 담담하게 알려 주었다.
“나는 너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거다, 밀로 상단주.”
“기회? 서, 설마 나를 살려 주신다는-”
“아니, 넌 죽을 거야.”
희미한 희망을 짓밟는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네가 하려던 일을 멈춘다면, 적어도 네 영혼에는 한 번의 기회를 주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의 책임을 묻는 것도 꽤나 가혹한 일이다.
그러니 만회할 기회를 주겠다. 죽은 이후에도 영혼이 마계에 끌려가지 않고, 마계보다 더욱 끔찍한 다른 곳으로 빠지지도 않도록.
“……!”
짧은 대답이었지만, 자코모는 악마 계약자로서 그 말이 지닌 무게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주신의 신앙이 지배적인 대륙에, 기이할 정도로 악마 계약자들이 판을 칠 수 있는 이유. 그중 하나가 바로 사후 세계에 대한 깊은 절망이었기 때문이다.
-주신의 구원은 없다. 어차피 너희 인간들이 죽고 나면, 마계의 악마들보다 무서운 고위 마왕들의 손에 끝없이 고통받을 뿐이야.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이라도, 우리의 힘을 빌려 권세를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자코모는 샐로스의 마지막 말도 떠올렸다.
-이봐, 자코모! 계약자로서의 마지막 인정이야. 어쩌면 이건 너에게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는 한때 가문에서 내쳐져, 아무런 기반 없이 중소 상단을 운영하던 자. 본능적으로 어느 쪽이 이익인지를 판단하는 능력만큼은 탁월한 편이었다.
“…당신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때에 조용히 죽겠습니다.”
드디어 복수를 완전히 포기한 자코모는, 떨리는 손으로 비약을 치켜들며 바짝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은 일견 무언가를 열렬히 경배하는 자세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 바라옵건대, 부디 제게 구원의 기회를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