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43)
성황의 아이들-43화(43/469)
043. 예감 (1)
“나머지 일은 내게 맡기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폐하의 몸이 갑자기 힘없이 쓰러졌다.
“……!”
옆에 서 있던 21호가 재빨리 그를 받아 들었다. 갑자기 의식을 잃고 축 늘어진 모습이 언뜻 보기에도 대단히 위중한 상태다.
한발 늦게 그에게 달려가 약제사의 습관으로 맥을 짚던 아슬란의 얼굴이 곧 새파랗게 질렸다.
“맥박이……!”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소년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바트… 폐하의 매, 맥박이 멈췄는데요?”
이건 그냥 기절한 게 아니라 죽…….
아슬란은 손을 벌벌 떨었다.
21호 또한 조금 당황한 듯 보였지만, 곧 침착한 목소리로 일행을 안심시켰다.
“잠시 영혼이 어딘가로 떠나신 것뿐입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바트 폐하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이것은 본신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분이 원래 영혼만 돌아다니며 시체 놀이를 좀 잘 하십니다.
그렇게 덧붙이며 21호는 여장을 대충 정비한 후 가뿐하게 폐하의 몸을 둘러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짐이라도 나눠 들겠다는 아슬란의 제안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호문클루스는 사람의 몸과 달리 매우 가볍습니다.”
그의 말대로 바트 폐하를 짊어진 상태로도 21호의 몸놀림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일행은 또다시 그의 인솔하에 관도 분기점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폐하가 부재한 일행의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쳐 버린 막스 영감의 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지기 시작했던 것.
설상가상으로 산 아래를 돌아다니는 수색조와 마주치는 빈도는 점점 늘어났다. 아슬아슬하게 그들의 눈을 피하던 것도 잠시, 결국은 미처 몸을 숨기지 못하고 수색조 2인에게 발각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21호가 바람처럼 달려들어 그중 한 놈의 경동맥에 비수를 그었지만, 남은 놈이 주춤 뒤로 물러나며 비상용 호각을 꺼내 물었다.
삐이익-
날카로운 호각 소리와 함께 이내 가슴에 단도가 꽂히며 산적은 쓰러졌다. 그러나 이제부터의 도주는 촌각을 다투는 양상으로 바뀌게 될 것이었다. 일행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급히 자리를 뜨려 했으나, 곧 막스 영감의 상태를 깨닫고는 숨을 들이켰다. 그는 이미 녹초가 되어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허억! 나는… 달리지는 못하겠네. 이제 틀렸어. 헉! 나를 두고 가게.”
21호는 막스 영감과 폐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잠시 갈등했다. 그러나 곧 무언가를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영감님은 제가 업을 테니 폐하를 이곳에 두고 최대한 빨리 자리를 뜹시다.”
네에? 아슬란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
“그러면 폐하는 어떻게 합니까? 제가, 제가 폐하를 업고 갈게요!”
“그래서는 이도 저도 안 됩니다. 지금부터 전속력으로 아세인의 관문으로 달릴 겁니다. 짐을 지고 갈 수는 없어요.”
“하지만…….”
“속도를 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에게는 저들의 시선을 잡아둘 무언가가 필요해요.”
일행은 기함했다. 폐하를 버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지금 산적들에게 미끼로 던져 주자는 소리를 하는 건가.
“그분도 어느 정도는 그럴 가능성을 점치고 계실 겁니다. 굳이 버리라고까지 언급하신 것은 단순한 당부가 아닙니다.”
높은 확률로 그리된다고 했지.
“어차피 본신이 아니시니 위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당장은 위험이 없더라도 결국 이 몸으로 다시 돌아오는 거 아닌가요?”
아슬란은 울고 싶었다.
왜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나.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도적단이 카르타고와 내통하고 있었다는 것을 내부자이면서도 미리 알지 못한 것이 잘못인가. 아니면 그들도 다급한 처지에 괜히 막스 영감을 데려가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이 잘못인가.
아니, 로한에서 질기게 목숨을 건져 이 빌어먹을 화전촌에 온 것부터가 잘못일지도 모른다. 아, 모든 것이 아슬란 그의 탓이었다.
후회하지 않겠느냐고 바트 폐하는 물었었다. 아슬란은 이제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그가 한 모든 것들을 후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사이 길옆에 있는 바위에 폐하를 조심스럽게 기대 앉힌 21호는, 아직도 어찌할 바를 모르며 울먹거리고 있는 아슬란에게 다가오더니 그의 어깨를 세게 움켜쥐었다.
“똑똑히 들으십시오.”
그는 이를 악물고 소년에게 한자, 한자 힘을 주어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짓이 저 인간의 안전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마치 아슬란에게 하는 말이 아닌 스스로를 다잡기 위한 말처럼 절박하게 들려, 아슬란은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얌전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우울한 얼굴을 한 막스 영감을 들쳐업으며 21호는 짤막하게 내뱉었다.
“갑시다.”
일행은 그러고도 수차례 폐하를 돌아보다가, 여기저기서 바쁘게 달려오는 인기척에 그제야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한편, 일행의 타들어 가는 속도 모르고 홀가분하게 호문클루스를 내팽개친 네이트는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빠져나오는데 조금 과한 에너지를 사용해 제법 지치긴 했다. 그래도 오러 없이 조금씩 익사해 가는 기분으로 인형 속에 갇혀 있는 것보다는 한결 편안해진 상태였다.
조금씩 기운을 되찾으며 네이트의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그러나 빛처럼 쏘아져 가고 있음에도 그가 만들어 둔 결계의 기척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어 그는 마음이 다급했다. 대체 저 겁도 없는 녀석은 어디까지 갈 생각인 걸까.
[성황 아빠!]구슬처럼 작은 푸른빛이 갑자기 뿅 하고 나타나더니 네이트의 주위를 빠른 속도로 맴돌았다. 언제나 한발 빨리 움직이는 헤르나다.
[모레스가 디고리 꼬맹이의 벌레를 죽였어! 그런데 걔가 갑자기 열린 채널로 빨려 들어갈 줄은 몰랐어. 미안해!] [누구도 예상 못 한 일이었다. 네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다.]그리고 그 디고리 꼬맹이의 눈에는 네가 꼬맹이란다, 헤르나.
[아빠 폐하! 성 마르시아스 기사단이 오고 있어.]작은 분홍빛의 구슬이 뒤이어 나타나 네이트의 영혼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언제나 한 발 뒤로 물러나는 가데스다.
[듀란드 꼬맹이가 이번에야말로 모레스를 엮으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어. 완전 기세가 등등해.] [그 건이라면 이미 프란시스에게… 그나저나 얘야. 듀란드 경은 아무리 봐도 꼬맹이는 아니지 않느냐?]그에게는 벌써 너만 한 손자가 있다, 가데스.
여러 번 타일러도 도무지 연장자에 대한 예의에 신경 쓰지 않는 쌍둥이들이다.
[인형사, 그놈은 아직 수도에 있어. 로한의 그 느끼한 놈이랑 함께 다니고 있어.] [디고리 꼬맹이와 접점은 없는데, 혹시 몰라 브레만에게 감시하라고 일렀어.]헤르나와 가데스는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듯 네이트의 곁을 빙빙 돌며 따라왔다.
네이트의 아이들 중에서 채널을 열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사람뿐. 그래서 그들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그와 비교적 많은 정보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성황 아빠, 우리는 여기까지야.] [아빠 폐하, 무사히 돌아와야 해.]그러나 아직은 어린아이들이라 채널링을 길게 유지할 수는 없었다.
네이트는 행성계 끝자락에서 배웅하듯 깜박깜박 빛나는 작은 쌍둥이의 빛을 일별하고는, 곧 속도를 올려 외부 성운을 향해 날아들었다.
결계의 기척은 이제 지극히 희미해져, 극도로 집중하지 않는 한은 감지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성운과 성운 사이를 흘러가는 다섯 개의 선율을 넘어가고 있는데, 어느 순간 동그란 회색의 반짝거리는 구슬 같은 것이 그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맑고 투명한 회색은 누군가의 눈동자를 닮기도 했다.
[폐하.]코른시임.
네이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필이면 이럴 때 보기 싫은 놈의 등장이다.
코른시임의 수장이 흘리는 사념파는 지극히 메마른 음색이었다. 듣기만 해도 그 딱딱한 얼굴과 인간미 없는 목소리가 떠올라 네이트는 대단히 불쾌해졌다.
그는 더욱 속도를 올리며 짧은 사념을 내뱉었다.
[꺼져라.] […폐하의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그와 동시에 그의 주위로 하나둘 회색의 구슬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일족들이 동시에 접속을 시도한 것이다.
[폐하, 폐하, 폐하…….] [폐하, 폐하…….]곧 수십 개의 동그란 구슬들이 네이트의 주위를 에워쌌다. 그것들이 눈동자를 깜박거리듯 일제히 빛을 점멸시킨다. 끔벅끔벅.
폐하, 폐하, 폐하.
속 시원히 말은 하지 않으면서 네이트에게 뭔가를 요구하듯 계속해서 그를 부른다. 여전히 음흉한 것들이었다.
[멋대로 훔쳐보지 마라. 채널을 닫아라. 코른시임.]화악. 그의 의지에 반응하여 영혼을 중심으로 강한 파동이 주변을 휩쓸고 지나갔다. 작은 구슬들이 충격을 받고 일제히 깜박임을 멈추었다.
그렇지 않아도 영혼 상태에서는 본신에 있을 때와는 달리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아니, 감정의 변화를 부러 제어하지 않는 것에 가까우리라. 지금도 역시 그가 불쾌감을 느끼기 시작하자 그의 영혼으로부터 흉흉한 기세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작은 구슬들은 겁먹은 듯 잠시 네이트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윽고 하나둘 꺼져가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것은 제일 처음 나타났던 무리의 수장 하나뿐이다.
[폐하.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가야 합니다. 이미 떠난 것을 더 이상 잡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네이트의 오른손에 빛무리가 모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기다란 막대기 모양을 만들어 낸다. 그의 검 호두까기가 형상화된 것이다.
이 다음은 경고조차 없을 것이다. 그의 의사를 확실하게 알아들은 코른시임의 수장은 작은 한탄을 남기며 사그라졌다.
[부디 예감을 맹신하지 마소서…….]그가 사라짐과 동시에 네이트는 아득한 외우주에 홀로 남게 되었다.
다시 최대한 감각을 곤두세워 봤지만 더 이상 결계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코른시임 무리에게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아들의 영혼은 이미 까마득하게 멀어져 버렸던 것이다.
아무튼 쓸데없이 방해를 하다니, 인퀴지터들이 쓸어버리도록 그냥 내버려 뒀으면 좋았을 것을.
네이트는 별수 없이 마지막으로 감지했던 기척의 방향을 가늠하며 무작정 나아가기 시작했다.
조금 불안했지만 그래도 믿는 구석이 없지는 않았다. 만약 그의 아들이 한 번이라도 자신을 부른다면, 네이트는 그 목소리를 절대 놓칠 리가 없었으니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처 없이 무작정 밖으로, 밖으로 나아가던 네이트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시간의 감각이 모호한 곳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들의 기척을 놓친 지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느냐…….]도무지 그 아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지경이 되었으면 적어도 한 번 정도는 아비를 불러야 하지 않는가.
그 아이는 대체 자립심이 강한 건가, 아무 생각이 없는 건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버지, 성황 폐하…….
그것은 일순 스치는 듯한 희미한 사념이었다.
그를 불렀다기보다는 잠시 떠올린 것에 불과했지만…….
네이트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사념파가 들린 방향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가 자신의 아들을 발견한 곳은 거의 차원의 경계에 이르렀을 때였다. 예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들놈은 태평한 얼굴로 부스러기 영혼 하나를 끌어안고 동동 어둠 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네이트는 영혼에는 존재할 리 없는 뒷골이 쑤시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차원을 보살피는 신은, 저런 놈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걸 그대로 보고 있는 걸까?]하찮은 영혼 따위는 당장에라도 얼어붙어 부스러질 것 같은 추위 속에서 고작 한다는 소리가 저것이다. 네이트는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이 녀석은 늘 궁금한 것은 많다면서, 막상 본인이 공부할 생각은 전혀 없는 듯 보였다.
[그것은 델크로스를 보살피는 주신이 인격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들아.]네가 신학 개론 1장만이라도, 아니 하다못해 머리말만 제대로 읽어봤어도 그런 소리는 하지 않을 거다. 그렇게 매사에 농땡이라니, 넌 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느냐.
물론 그의 아들 역시 성황을 일 안 하고 농땡이 부리는 양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네이트는 그것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뭐, 알았다고 하더라도 어쩌겠는가. 자신이 하지 못한 일을 자식에게 강요하는 것이 이른바 부모의 특권이라는 것이다.
눈이 동그래져서 이쪽을 바라보는 아들을 빛으로 감싸 덮으며, 그는 잔소리를 시전할 준비를 끝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