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433)
성황의 아이들-433화(433/469)
433. 불로불사의 비서 (6)
돌이켜보건대, 그 당시는 마사인의 인생에서 가장 한가로운 나날이었다.
“마사인 형님! 왔구나?”
교대 시간에 맞춰 청장미궁에 들어서니, 그를 기다리고 있던 모레스가 장난감 목검을 들고서 팔짝팔짝 뛰어온다. 언제나처럼 빛바랜 붉은 천을 목에 두른 채였다.
“저하! 그렇게 뛰시면 넘어지십니다!”
도도도 달려오던 모레스가 막 장난감에 채여 넘어지기 직전, 마사인은 번쩍 그를 위로 들어 올리며 주의를 줬다.
그러자 아이는 그것 역시 놀이라고 생각했는지 꺄륵 웃음을 터뜨리며 팔을 바동거렸다.
“근데 형님, 로건은?”
“로건 저하는 지금 수업 중이십니다.”
“수업?”
“네, 아마 저녁까지는 많이 바쁘실 겁니다. 최근에는 새로 검술 수업도 시작하셨으니까요.”
당시 1황자였던 로건은 이미 여러 방면에서 남다른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기세가 등등해진 황후가, 그의 교육에 점점 열을 올리기 시작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으리라.
반면에 리자베스 황비는 이상할 정도로 모레스를 방치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아이의 교육을 신경 쓰기는커녕, 어째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꺼리는 눈치였다. 이따금 친정인 아세인 공국으로 떠나 오랜 시간 황궁을 비우는 일도 잦았지.
황비의 태도가 이 지경이니, 황도의 유력 인사들도 자식을 모레스 황자의 배동으로 보내길 꺼렸다. 그렇다고 신분이 한참 낮은 시종들이 그의 격한 놀이에 어울려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성황이 되도록 시간을 낸다고는 하지만, 한창 활동적인 아이에게는 턱없이 부족할 따름이었다.
덕분에 모레스는 어느새 놀이방에서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데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
보다 못한 마사인이 결국 근무 시간에 호위를 빙자한 놀이 상대가 되어주곤 했다.
문제는 그것들이 하나같이 기사의 본분과는 거리가 먼 행위라는 거겠지.
지금만 해도 그렇다. 가상의 적을 상정하고서 열심히 베개를 합공하는 따위의 어수선한 놀이라니!
귀한 성유물인 미스라가 한낱 베개의 먼지를 터는 데 사용되다니, 만일 아카데미의 학장 아르망이 알았다면 눈물을 쏟으며 땅을 쳤으리라.
“에잇!”
퍽퍽!
놀이 상대가 생긴 모레스가 신이 나서 베개를 두드려댔다.
“천사를 괴롭히지 마! 이 못된 마녀야!”
“네? 저하, 지금 우리가 무찌르는 것이 악마가 아니라 마녀였습니까?”
“응!”
철없는 어린아이의 놀이일 뿐이었지만, 거기에도 나름의 구체적인 설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얏! 내 호두까기를 받아랏!”
옆에서 엇박자로 베개를 구타하던 마사인이 또다시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런데 저하, 목검에 이름도 지으셨습니까?”
“응!”
“하지만 호두까기는 폐하의 애검이 아닙니까. 이름이 똑같으면 나중에 헷갈리지 않으실까요?”
“음……?”
그러자 모레스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더니, 이내 마사인을 향해 해맑게 웃어 보였다.
“몰라. 하지만 형님, 그래도 내 검은 호두까기야!”
“그, 그렇습니까?”
“응!”
퍽! 퍼벅! 퍽!
두 사람의 열띤 공격에, 로한산 고급 오리털 베개는 이내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쩍 갈라진 베갯잇에서 터져 나온 하얀 깃털들이 마치 눈처럼 사방으로 흩날린다.
“…….”
마사인은 짐짓 걱정스러워졌다.
엉망이 된 놀이방을 본 사용인들이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할까. 황자가 성황가의 체통을 지키도록 곁에서 돕지는 못할망정, 함께 사고나 치는 못난 황족이라 흉을 보지는 않을까?
하지만-
“아하하하하!”
흩날리는 깃털 속에서 모레스가 밝게 웃는 모습을 보니, 남들의 시선이야 어떻든 무슨 상관인가 싶기도 했다.
“마사인 형님! 이제 우리 수련 놀이해!”
그러고도 기운이 남았는지, 모레스는 이후 한동안 마사인과 투닥투닥 목검을 맞부딪쳤다.
탁! 타닥!
아직 짤막한 팔로 열심히 휘두르는 목검이 황궁 기사인 마사인에게 위협이 될 리는 만무했다.
하지만 간혹 예기치 못한 사각을 찔러오는 아이의 솜씨는 보기보다 꽤 매서운 구석이 있었다.
늘 천재라 칭송받는 로건 황자님에 가려 있지만, 어쩌면 모레스 황자님 역시 나름의 천재가 아닐까? 마사인은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해가 저물고 이윽고 어스름한 저녁 무렵이 되자, 모레스는 겨우 지친 기색으로 목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수련 다 했으니까, 이제는 명상할 차례야!”
“하하…….”
그래도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는지, 아이는 명상을 하겠다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물론 데굴데굴 놀이방을 구르며 먼지를 쓸고 다니는 게 제대로 된 명상은 아닐 테지만.
그렇게 두어 바퀴를 굴러다닌 모레스는, 부스스해진 머리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상 끝나신 겁니까?”
“응. 근데 지금쯤이면 로건의 수업도 다 끝났을까?”
“네, 아마 그럴 겁니다.”
“그럼 형님! 우리 지금 로건이 청장미궁에 잘 있는지 살펴보러 가자!”
최근에 아이가 부쩍 로건 황자의 안부를 자주 묻는다 싶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마사인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게나 함께 붙어 다녔으니, 혼자서는 제법 쓸쓸할 법도 하겠거니, 생각하면서.
* * *
황궁 내의 기류는 이토록 평화로웠지만, 대륙의 분위기는 아직까지도 어수선했다.
무려 천년의 성도에까지 그 마수를 들이민 악마종들이다. 그간 암암리에 대륙을 잠식한 놈들은, 젊은 성황이 힘으로 세력권을 넓히기 시작하자 그야말로 미친 듯이 들고 일어났다.
잊을 만하면 지하 교단이 문제를 일으키고, 악마 계약자들이 날뛰었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잔악한 악마 숭배 행위가 이어지고, 대규모의 인신 공양과 함께 강력한 악마종이 연일 소환되었다.
그러니 거기에 휘말린 백성들의 고통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
이제는 망국이 된 오르토나 한복판에, 강력한 1급 악마종이 나타난 것은 그 무렵의 일이었다.
“아바마마! 제국의 힘이 아니면, 그리고 아바마마의 강력한 신성력이 아니라면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없습니다! 비록 제국의 품을 벗어났다고는 하나, 그들 역시 가련한 주신의 백성들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니 부디 불쌍한 그들의 처지를 굽어살펴 주십시오!”
타고난 성정이 정의롭기 때문일까, 로건 황자는 무려 식음까지 전폐하며 절절히 성황에게 읍소했다.
“로건…….”
모든 대소신료들이 어린 황자의 올곧은 기개에 감탄했다.
하지만 마사인이 보기에 성황은 썩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까지 제국의 주변도 완전히 정비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럴 때 제국의 구심점이 되는 이가 어찌 타국을 위해 함부로 자리를 비운단 말인가.
“이는 곧 델크로스의 신민들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아바마마! 저 강력한 악마종이 이대로 아무런 방해 없이 사람들을 집어삼키게 되면, 끝내는 제국을 향해 이를 드러내는 중대한 위협으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로건 황자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늦든 빠르든, 결과적으로 악마는 황도를 향해 움직이게 되겠지.
자신이 직접 성기사단을 이끌어 악마를 토벌하는 것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니, 피해가 커지기 전에 손을 쓰는 것도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
하지만 그럼에도 성황은 한참을 망설였다. 어째서인지 지금은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강력한 예감이 그를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성황은 친정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비탄에 잠겨 있던 로건 황자가,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해 싸우겠노라며 몰래 짐을 싸서 빠져나가려다 그에게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아들아.”
한 손에 잡혀 대롱거리는 아이를 바라보며, 성황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더라도 너는 아직 어린아이다. 홀로 오르토나로 향해본들 지금의 네가 그곳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하오나, 아바마마…….”
드물게 우울한 표정을 드러내는 아들을 가만히 응시하던 성황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로건. 내가 너와 함께 갈 테니.”
그렇게 성황은 1개 성기사단과 1개 기사단을 이끌고는 직접 악마종 토벌을 강행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옳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직접 북부로 나간 성황이 거의 피해 없이 악마종을 잡아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형 악마종 토벌에 갈려 나가는 엄청난 인원을 생각하면, 성황의 업적은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일.
여기에는 또 부가적인 소득도 있었다.
첫째는 제국에 대한 북부의 반감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었다는 것.
그리고 둘째는, 어지러운 정세를 틈타 소요를 일으키려던 이들을 일시에 잠재우는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델크로스의 성황은 진정 괴물인가!’
1급 악마종을 단칼에 처단하는 그 엄청난 무위를 직접 목도하게 되면, 아무리 강렬하게 불타는 투쟁 의지라 할지라도 일시에 싸늘하게 식어 버리기 마련.
무엇보다, 북으로 움직이는 과정에서 성황은 예상치 못한 정보를 얻기도 했다. 어쩌면 죽은 그의 첫 번째 연인인 마리가, 그의 아이를 세상에 남기고 갔을지도 모른다는 엄청난 정보를.
“저하… 아니, 마사인 님. 그 해수의 뿔은 대체 왜…….”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단장님. 그저 모레스 저하의 당부가 있어서요.”
“모레스… 저하께서 말입니까?”
그리고 이번 토벌대에는 의외로 마사인도 끼어 있었다. 언제 또다시 오르토나로 탈주할지 모르는 로건을 곁에서 늘 감시해 달라고, 모레스로부터 직접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님. 북부로 가는 김에 거기에 까만 렉스가 있나 찾아봐 줘.
-…까만…? 뭐요?
-렉스. 까만 렉스야. 막 하늘을 날아다니니까, 형님도 놈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 해!
마사인은 모레스의 당부를 무심코 웃어넘겼다. 이제는 머릿속으로 없는 해수까지 만들어 내다니, 어린아이의 상상력이란 매번 예상을 초월하며 사람을 놀라게 만들지 않는가.
하지만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가 아이를 실망시킬 수도 없는 일. 그래서 마사인은 렉스를 찾는 대신, 오가는 길에 잡은 해수의 뿔을 조금 잘라서 챙겨 두었다.
‘놈을 만났는데 멀리 날아가 버렸다고 해야겠군. 이 정도면 모레스 저하께서도 좋아하시려나?’
하지만 뿔 조각을 고이 가지고 돌아온 마사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모레스 황자가 아닌 난데없는 그의 실종 소식이었다.
* * *
황궁은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물 샐 틈 없이 돌아가는 경계 속에서, 어떻게 귀한 황자가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어!
-소문 들었습니까? 평소 저하를 탐탁잖아하시던 리자베스 황비께서, 직접 아들을 데리고…….
-쉬잇! 이보게, 제발 근거 없는 억측은 삼가게!
-네.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듣자 하니 실은 모레스 저하께서 스스로 빠져나가셨다더군요. 경비들을 몰래 따돌리고, 유유히 청장미궁 밖으로 걸어 나가셨다는…….
-아니,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어린아이가 어떻게 혼자 황궁의 경비를 따돌릴 수 있어? 모레스 저하는 이제 고작 다섯 살이네!
-하지만 청장미궁 경비를 섰던 기사가 직접 그렇게 증언했다고 합니다.
남겨진 단서 하나 없이, 사건은 그대로 오리무중에 빠지는 듯했다.
하지만 성황이 직접 나서자 역시나 일은 금방 해결되었다. 물론 그 과정이 그리 평화적이지는 못했지만.
서늘한 기세로 지하 회랑으로 내려간 성황은 금방 사라진 모레스 황자를 찾아냈다. 그리고 마침내 두 팔로 아이를 단단히 끌어안고 황궁으로 되돌아왔다.
“……!”
“……!”
하지만 그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일제히 비명을 집어삼켜야 했다. 성황의 하얀 법복 자락이 질퍽한 핏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철퍽!
그의 걸음걸음마다, 길게 끌리는 피의 길이 펼쳐진다.
“폐하……!”
심지어는 성황의 충실한 시종장, 루이스조차 감히 그의 곁으로 다가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금 그를 조금이라도 건드렸다가는, 그대로 모든 것이 끝장나고 말 것 같다는 본능적인 위기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성황이 내뿜는 기세는 차갑고도 또 살벌했다.
마사인 역시 사람들 틈에 섞여 그 모습을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피에 젖은 성황과, 검은 천에 둘둘 감싸인 작은 아이의 신형, 밖으로 조금 삐져나온 창백한 아이의 손을.
그리고-
촤르르르르…….
그 위를 빠른 속도로 기어다니는 괴상한 형태의 붉은 문자열을.
“……!”
마사인의 손끝이 긴장으로 차갑게 식어 들어갔다.
그것은 그가 꿈에라도 다시 볼까 두려워하던, 악마가 남긴 붉은 저주의 흔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