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435)
성황의 아이들-435화(435/469)
435. 불로불사의 비서 (8)
아이가 큰 충격을 받았으리라. 어쩌면 가족이라 믿고 따랐던 이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마사인은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다.
하나 정작 그가 모레스의 눈동자에서 발견한 것은, 지금껏 애써 숨기려 해왔던 스스로의 두려움과 어리석음, 그리고 무능함이었다.
마사인은 그 불가해한 시선 속에서 철저하게 해체되었다.
절대자의 심판대에 선 하찮은 영혼이 된 느낌.
자신의 나약한 본질이 하나도 남김없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느낌.
끝없는 심연에 빠져, 종국에는 완전히 어둠 속에 삼켜질 것만 같은 막막한 느낌…….
“…….”
깜박.
그 마법과도 같은 기묘한 시간은, 아이가 눈을 한 차례 깜박이는 순간 사라져 버렸다.
모레스는 꾸물꾸물 자리에서 혼자 일어나더니, 이내 아무런 말 없이 바닥에 놓인 장난감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저하.”
“응? 왜?”
“…….”
아무렇지도 않은 반문에 오히려 마사인은 말문이 막혀왔다.
다행히 어색한 순간은 금세 지나갔다. 잠시 후 로건이 좋은 향이 나는 찻잔들을 들고 놀이방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모레스를 발견하곤 눈이 동그래졌다.
“너 왜 그러고 있어? 모레스. 어디 아파? 오러가 많이 흐트러졌는데?”
이제 막 여섯 살이 되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예리함이었다. 그러자 모레스가 조금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아닌데?”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너 지금 분명 어딘가가 안 좋아.”
로건은 찻잔을 내려놓고서 황급히 모레스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날카로운 눈으로 동생의 상태를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뭐야? 너 머리에 혹이 났잖아. 무슨 일 있었어?”
“몰라. 아무 일 없었어.”
그 고집스러운 대답에서 미약한 떨림을 감지한 마사인은, 그제야 아이가 잔뜩 동요한 감정을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신이시여, 맙소사!’
어처구니가 없었다. 비루한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정작 아이가 받았을 상처와 충격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니!
“…그래.”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느낀 걸까. 로건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모레스의 뒤통수에 신성력을 흘려주었다.
그렇게 해서 모레스는 겉으로는 꽤나 멀쩡한 모습으로 자장차를 마신 뒤 잠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곧바로 차를 모조리 토해냈다.
“웩!”
뇌진탕이었다.
* * *
그 일이 있고 난 뒤, 마사인의 얼굴은 갈수록 어두워졌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내고자 부단히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모레스의 몸에는 때때로 붉은 저주의 글자들이 출몰했고, 마사인은 점점 아이의 곁으로 다가가는 것이 두려워졌다.
모레스 또한 마사인의 그러한 변화를 눈치챈 것이 분명했다. 그가 청장미궁에 들어설 때면 평소처럼 밝은 얼굴로 반겨주었지만, 더 이상은 전처럼 덥썩 안겨 오거나, 거리낌 없이 팔에 매달리는 일이 없어졌으니까.
‘역시 근무지 변경을 신청해야 할까…….’
잠시 그런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어설픈 상태가 계속되는 것이 결코 서로에게 좋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마사인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러다 정작 필요할 때 호위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한데 그즈음에 이르러, 모레스의 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지금껏 아이를 방치하다시피 하던 리자베스 황비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갑자기 청장미궁에 드나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엄마마마라니, 그게 뭐냐! 제대로 어마마마라고 불러 보거라. 어서!
-아직도 아이가 예법 수업을 듣지 않는다고? 시종장은 지금껏 뭘 하고 있었는가!
-듣자 하니 로건은 벌써 오러 입문에 들었다지? 모레스, 너도 성황가의 아이이니, 분명 로건처럼 검술에 뛰어난 소질을 보일 게다.
-신성력이 없으면 뭐 어떠냐. 대신 더욱더 신학 공부에 매진하려무나.
갑자기 수업 시간이 대폭 늘어난 모레스는, 곧 로건보다도 훨씬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자연히 마사인이 모레스를 마주하는 시간도 줄어들게 되었고.
‘모레스…….’
마사인은 심히 아이가 걱정스러웠다. 멀리서 보기만 해도, 아이가 갑작스러운 수업들을 얼마나 힘겨워하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한데 리자베스 황비의 간섭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들었습니까? 글쎄 황비께서 성황 폐하께 새로운 별궁을 지어 달라고 요구했답니다. 오로지 모레스 황자만을 위한 완벽한 별궁을요!”
“네에? 아니, 폐하께서 그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셨답니까?”
“폐하께서 언제 황후마마나 황비마마들의 부탁을 거절하신 적이 있답니까? 거기다 리자베스 황비의 친정이 그 대단한 아세인 대공가입니다. 대공이 투자하는 금액도 제법 만만치 않다던데요.”
“저런! 황후마마의 심기가 무척 불편하시겠군요. 당분간은 우리도 그분의 눈치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황비가 모레스를 몇 날 며칠 루비궁에 붙잡아 두는 일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니 자연히 마사인의 호위 업무도 대폭 줄어들 수밖에.
“…….”
이제 마사인의 고민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더는 둘의 서먹해진 관계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으니까.
‘모레스가 황비의 과도한 간섭으로 허덕이는 게 빤히 보이는데, 그걸 이대로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마사인은 성황의 집무실을 찾았다. 그라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나름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모레스의 몸을 침범한 그 불길한 저주의 문자들.
‘숙부님에게 해결하지 못할 저주는 없어. 그날 관문 요새에서도 내게 쓰인 끔찍한 저주를 말끔히 없애 주셨지 않았던가!’
그러니 모레스를 저대로 내버려두는 데는 분명 합당한 이유가 있으리라.
마사인은 그런 생각을 하며 쭈뼛쭈뼛 본궁 앞을 서성거렸다. 물론 당장 알현하겠노라 정식으로 기별하지는 못했는데, 클라노스의 성을 받은 후에는 되도록 성황가의 일원으로서 사사로운 편의를 취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사인 님?”
한데 그런 마사인을 발견한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폐하를 뵈러 오셨습니까? 마침 폐하께서는 지금 집무실에 안 계십니다만.”
희고 붉은 성기사단 정복을 단정히 갖춰 입은 온화한 인상의 여인.
바로 성황의 가장 튼튼한 방패라고도 불리는, 카트리나였다.
* * *
카트리나 벨파인.
마사인이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한때는 평기사로서 황궁 근위대에 복무했다는 것. 성황이 아직 어리던 시절에는 그의 곁을 충직하게 보필하였으며, 후에는 뒤늦게 신성력이 발현되는 드문 사례로 성 아우렐리온 기사단에 입단했다는 것.
그리고 현재는, 비교적 젊은 나이로 기사단의 부단장 지위를 꿰찼을 정도로 성황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것.
“미리 기별을 주셨으면, 폐하께서 기쁘게 시간을 내셨을 텐데요.”
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철혈의 이미지와는 달리, 막상 마주한 그녀는 무척 호감 가는 미소를 짓는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카트리나는 주저하는 마사인을 본궁의 작은 응접실로 안내했다. 이어 거기서 들은 뜻밖의 소식은, 최근 성황이 홀로 어딘가에 틀어박혀 기도를 드리는 일이 잦아졌다는 사실이었다.
“기도요? 폐하께서요?”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다. 신의 대리자라는 이명에도 불구하고, 마사인은 그의 숙부가 그리 신실한 정교회 신자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네, 아마 오늘도 늦게까지 기도실에 계실 것 같습니다. 그러니 혹여 마사인 님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먼저 용건을 듣고 폐하께 전해드리면 어떻겠습니까?”
“…….”
마사인은 잠시 고민하며 카트리나를 마주 보았다.
그녀는 어딘가 묘한 분위기를 가진 여인이었다. 엄숙하나 완고하지 않고, 정중하나 무겁지 않다. 뭐든 털어놓으면 일단 잘 들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어쩐지 성황 본인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그저 사소한 걱정입니다. 카트리나 님이 굳이 따로 전할 만한 것은 아닙니다만…….”
“하지만 그 일로 무척 고심하고 계시는군요.”
마사인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매가 일순 깊어진다.
“하면, 이건 어떻습니까? 때로는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짐이 훨씬 가벼워질 때가 있답니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저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데는 제법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는 편이지요.”
“아니, 그다지 짐이라 할 것까진…….”
한데 놀랍게도, 잠시 후 마사인은 카트리나에게 미주알고주알 걱정을 털어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별궁 건입니까. 글쎄요. 제가 어찌 폐하의 깊은 뜻을 알겠습니까만-.”
카트리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곁에서 보기에, 아무래도 폐하께서는 외딴 별궁이 하나쯤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듯했습니다.”
“더 필요하다고요?”
이미 황자들을 위한 청장미궁이 있는데, 도대체 왜?
“…글쎄요. 전들 그 이유를 알겠습니까. 하지만 폐하께서 하시는 일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습니다. 그저 저희들이 그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할 뿐이죠.”
과연 성황의 측근이랄까, 카트리나의 마음에는 성황에 대한 한 점의 의심도 없어 보였다.
“그럼…. 그러면 카트리나 님, 혹시나 하는 말입니다만…….”
마사인은 무척 힘겹게 가장 중요한 용건을 끄집어냈다.
“혹시 당신은, 모레스 황자님에게 아직… 일전의 무도한 자들이 남긴, 그, 저주…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걸…….”
물론 제대로 된 대답을 들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한데 놀랍게도, 카트리나가 그에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게 아닌가!
“네, 알고 있습니다.”
“…네?”
그녀의 시원한 대답에, 마사인은 오히려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그, 그럼 왜 폐하께서는 그걸 가만히 내버려두시는 겁니까? 듣자 하니 영혼도 손상시킬 수 있는 무척이나 위험한 저주라고 하던데요!”
그래. 베니투스 추기경도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제물의 몸에 삿된 무언가를 담기 위해, 기존의 인격을 텅 비게 만드는 무서운 저주라고.
한데 다급하게 묻는 마사인에게, 카트리나는 엉뚱한 반문을 했다.
“마사인 님. 마사인 님은 누군가가 스스로를 자기 자신이라고 인식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 보십니까?”
“네? 자신이라고 인식하다니, 그건-”
“저는 그것이 사람의 기억 혹은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카트리나는 성황이 한탄처럼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 감정을 없애고 싶지는 않으니, 결국은 스스로 기억을 지우겠노라 선택한 것이더냐.
늘 성황을 주의 깊게 보필하는 그녀는, 그 한마디를 통해 많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인격을 텅 비게 만드는 저주란, 곧 사람의 기억을 모조리 없애는 저주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진정 모레스 저하께서 원하는 것이었겠지.’
그래. 적어도 그 저주 건에 대해서는, 황자의 의사가 어느 정도 반영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조사에 따르면 그날 모레스 황자는 분명 스스로의 의지로 의식의 현장으로 향했다. 그래서 성황은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저주를 완전히 없애지 않은 것이다. 그는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니까.
“하여 모자란 저의 식견으로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카트리나는 조금 착잡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아마도 모레스 황자님께서는 뭔가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알고 계시는 게 아닐지요. 그러니 굳이 저주를 이용해서라도 그것을 모두 잊고자 하신 것이죠.”
“……!”
“저주를 남기는 것이야말로 모레스 황자님의 뜻이었을 겁니다. 물론 모든 것은 저의 빈약한 추측일 뿐입니다만…….”
그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모, 모레스가…….”
저주를, 그것을 모레스가 스스로 원했다고?
“그, 그럼… 저는, 이제부터 저하를 어찌 대해야만……!”
마사인은 큰 충격이 빠져 말을 더듬었다.
“저, 저는 이제 어찌하는 게 좋겠습니까? 카트리나 님! 그러면 모레스 저하는 이제부터 계속해서 저 붉은 저주와 함께 지내셔야 한다는 말입니까?”
“마사인 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악마종의 저주를 몸에 지닌 채 살아가다니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정신없이 말을 쏟아내던 마사인은, 몹시 괴로워하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카트리나 님! 저는, 저는 그 저주가 너무나 두렵습니다! 그러니 이대로는 안 됩니다! 더는 모레스 저하의 곁에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
“평생 저하를 지키겠다 맹세했습니다! 하지만 그 저주의 흔적을 직면할 때마다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려옵니다! 이런 제가 어찌 감히 그분을 지키는 기사라 자칭할 수 있겠습니까!”
“…….”
“저는 기사의 자격이 없습니다! 카트리나 님, 대답해 보십시오! 진정 제가 저하의 곁을 떠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겁니까?”
카트리나는 지나치게 격앙된 젊은 기사를 잠자코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가 조금 진정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저처럼 모자라는 이가 어찌 감히 함부로 기사의 자격을 논하겠습니까.”
“…….”
“마사인 님. 그것을 아십니까? 지금이야 성황 폐하의 ‘방패’라는 분에 넘치는 이명을 얻었습니다만, 실상 저는 지금껏 폐하를 제대로 지켜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그분께 직접 독약을 먹인 적도 있답니다.”
“…네?”
그 엄청난 고백에, 마사인은 순간 자신의 고민을 깡그리 잊고 말았다.
뭐라고? 독?
마사인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카트리나는 씁쓸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물론 주신께 맹세코,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제법 오래전의 일이었다.
막 별궁으로 임관된 카트리나는 한창 정의감이 넘치는 애송이였다. 그래서 거의 매번 끼니를 거르다시피 하는 어린 황자가 보기 안쓰러워, 외부에서 직접 음식을 사다 나르는 월권행위를 저질렀지.
처음 몇 번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
당시 어린 성황은 그녀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딱히 호위 기사의 정성을 무시하려 들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병약한 황자가 제대로 먹는 모습에 카트리나는 조금 감동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감동의 순간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설마 적들이 황도의 음식점이란 음식점은 모조리 매수했을 줄이야…….”
“……!”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비록 고의는 아니었다지만 호위 기사가 직접 황자에게 독이 든 음식을 먹인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당시 황궁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 일을 문제 삼지 않았다.
덕분에 카트리나는 계속 어린 성황의 호위로 남아 있을 수 있었고, 한동안은 더욱 안전한 먹거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차례고 황자가 중독되는 일이 반복되자, 결국 카트리나는 외부에서 음식을 조달하는 작업을 완전히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데 그것을 아십니까? 마사인 님. 폐하께서는 당시에 단 한 번도 저를 원망하신 적이 없습니다.”
“…….”
“그리고 깊은 죄책감과 자괴감에 빠졌을지언정, 저 역시 폐하의 곁을 떠나지 않았죠.”
황자를 몇 차례나 중독시킨 것이 자신의 실책임은 부정할 수 없다. 당시 카트리나는 너무도 괴로운 나머지 당장이라도 황자의 호위직을 내려놓고 싶었다. 만일 목숨으로 속죄할 수 있었다면, 기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리라.
하지만 카트리나는 동시에 이러한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살벌한 황궁에서 그나마 어린 황자의 힘이 될 사람은 자신밖에 없음을. 자신마저 떠나고 나면, 더는 이곳에서 황자의 편이 되어줄 이가 없으리라는 것을.
그렇게 그녀는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버텨냈다.
“그런 부족하기만 한 저를, 사람들은 이제 ‘성황의 가장 튼튼한 방패’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카트리나는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마사인에게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이제는 압니다. 당시 어렸던 폐하에게, 생각보다 제 존재가 큰 의미가 되었다는 것을요.”
“카트리나 님…….”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모레스 저하께 있어서도 마찬가지겠지요. 마사인 님은 이 세상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진정한 저하의 기사이신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