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436)
성황의 아이들-436화(436/469)
436. 불로불사의 비서 (9)
그날, 카트리나와의 짧은 대화가 마사인에게 시사하는 바는 컸다.
‘나는 머저리인가! 저하의 마음에 상처를 드릴까 두려워, 아예 임무를 저버리겠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다니! 이 얼마나 무의미한 고민이었단 말인가!’
조금 어색할지언정 곁에 계속 남는 것과, 보이지 않는 곳으로 멀리 떠나버리는 것. 어느 쪽이 아이에게 더 큰 상처가 될지는 불 보듯 빤한 일이다.
안 그래도 최근 모레스를 향한 고위사제들의 시선이 갈수록 흉흉해지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때야말로 마사인은 모레스의 곁에서 파도를 막아내는 든든한 둑이 되어야 했다. 성황에게 독을 건네는 끔찍한 실수를 하고도, 카트리나가 꿋꿋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킨 것처럼.
물론 감히 카트리나와 같은 존재가 되기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저 모레스가 그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미약하게나마 힘이 되어 주는 것. 그것이 마사인이 바라는 전부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강해져야 하겠지!’
호위 임무가 한가해진 틈을 타, 마사인은 수련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흔들리는 정신을 다잡고, 더는 잡다한 생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또 자신의 무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악마종의 저주 앞에서도 조금은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물론 아직은 붉은 저주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감추기는 어렵다. 하면 적어도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만큼은, 반사적으로 저하를 도울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겠어!’
그래서 틈틈이 부웅 연습도 시작했다. 모레스가 처할 만한 가장 빈번한 위기 상황이라면, 아무래도 낙상 사고 외에 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었으니까.
“…마사인, 너는 또 무슨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냐.”
훈련용 모래 자루를 허공에 던졌다 받는 연습을 반복하고 있으려니, 마침 곁을 지나가던 프란시스가 혀를 차며 묻는다.
그는 마사인의 아카데미 동기생으로, 최근 성 아우렐리온 기사단에 입단한 덕에 황궁에서 빈번하게 마주치는 중이었다.
“아카데미에서도 제일 미련하고 효과 없는 수련만 골라서 하더니만, 이번에는 또 혼자서 무슨 우스꽝스러운 훈련이냐?”
“부웅 연습을 하는 중이다.”
꽤나 무례한 핀잔을 받았지만, 마사인은 개의치 않고 대꾸해 줬다. 프란시스가 저러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그는 마사인이 멀쩡히 황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던 시절에도 건방지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침 훈련용 모래주머니가 딱 모레스 저하의 몸무게와 비슷하더군. 그러니 아무 생각 없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일 때까지 떨어지는 저하를 받는 연습을 하려고 한다.”
“…뭐?”
어처구니없는 답변을 들은 프란시스는 답지 않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더니 곧 거세게 콧방귀를 뀌었다.
“잠깐만. 그 부웅이 뭔지는 모르겠다만, 기껏 모래주머니의 무게에 익숙해져 봐야 무슨 소용이지? 어차피 모레스 황자님은 앞으로도 쑥쑥 자라실 거 아냐? 체중이 두 배가 되는 것도 금방이잖나.”
“그, 그런가?”
허를 찔린 마사인은 충격받은 표정으로 프란시스를 돌아보았다. 정처 없이 흔들리던 그의 눈동자가, 이내 강렬한 깨달음의 빛과 함께 단단해진다.
“그렇군!”
그때 프란시스는, 마사인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곧바로 훈련을 그만두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날이 되어 또다시 근위대 훈련장을 찾은 그는, 이번에는 모래 자루 두 개를 한꺼번에 던졌다 받았다 하고 있는 마사인을 발견했다.
“…이 자식, 정말로 바보 아냐?”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다행히도 모레스의 몸을 침범한 저주는 조금씩 약해지는 양상을 보였다.
선명한 붉은빛을 띠던 문자열들은 어느새 희미한 빛으로 바뀌었다. 문자가 피부 표면으로 떠오르는 횟수도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저주의 효용이 다하여 사라지는 것인지, 아니면 시간 경과에 따라 저주가 약해지는 것인지.
어쨌거나 마사인은 내심 안도했다.
‘이대로라면, 조만간 저주가 완전히 사라지길 기대해도 되겠어.’
한데 그와 동시에, 모레스의 행동에도 조금씩 달갑지 않은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자면, 어느 순간부터 모레스는 더 이상 붉은 망토를 두르지 않았다.
“저하, 오늘은 렉스를 어디에 두셨습니까?”
의아해진 마사인이 조심스레 모레스에게 묻자-
“응? 렉스? 그게 뭐야?”
“……!”
너무나도 천진한 반문이 되돌아온다.
티 없이 말간 아이의 눈동자를 마주하자, 마사인은 충격으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설마 저주로 인해 저하의 기억이 점점 사라지는 건가?’
물론 그것이 정말로 저주 때문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모레스가 보여준 독특한 행동이나 말들은, 현실보다는 그저 아이 특유의 꿈이나 상상에 기반을 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어쩌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이가 조금씩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마사인은 묘한 쓸쓸함을 느끼며, 방구석에 내팽개쳐진 낡은 태피스트리를 챙겨 자신의 숙소에 보관해 두었다.
한데 문제는 단순히 사리지는 기억들뿐만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레스의 표정 역시 점차 우울해진다는 것이었지.
매일 밝게 웃으며 아침을 맞던 아이는, 언제부터인가 무표정한 얼굴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버릇이 생겨났다.
로건이나 마사인을 만나도 전처럼 반가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때로는 그들을 피하는 듯 보이기도 하고, 간혹 외진 장소에 숨어 혼자 훌쩍거리는 일도 다반사!
“형님. 아무래도 리자베스 어마마마께서 모레스에게 너무 가혹하신 것 같습니다. 아바마마께 말씀드려서 지금이라도 모레스의 수업을 모두 없애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쯤 되니 로건 역시 눈에 띄게 초조해했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모레스의 곁을 맴돌며 설득하려 들지언정, 섣불리 제3자의 힘을 빌려 그들 모자의 사이를 간섭하려 들지는 않았다. 이 모든 일들은, 결국 모레스 스스로의 의지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아이는, 기껏 되찾은 리자베스 황비의 관심을 잃지 않고자 어린 마음에도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고 있었던 것이다.
“…….”
마사인 역시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속수무책인 것은 마찬가지.
그래서 그 모습이 지나치게 보기 괴로워질 때면, 그는 고이 보관해 둔 낡은 태피스트리를 이따금 꺼내 보며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지곤 했다.
‘황비의 횡포는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하다. 악마의 저주와 함께하는 한, 앞으로도 모레스 저하에게는 점점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생겨날 테지. 그러나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만은 끝까지 저하의 곁에서 그분을 지킬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마사인은 조금도 알지 못했다.
아무리 혼자 거듭해서 마음을 다잡아본들, 정작 예상을 아득히 넘어서는 이변 앞에서는 어떠한 굳은 각오며 맹세도 그저 무의미할 뿐이라는 것을.
운명은 때때로 감당 불가능한 현실 앞에 당돌하게 인간을 내던지고, 그의 의지나 신념의 뿌리마저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것을 즐거워하며 지켜본다는 것을.
“……!”
악마종이 어떤 지독한 수작을 벌이든, 모레스 저하의 곁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그분을 지켜 내리라.
그것만이 오랜 시간 마사인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대전제였다.
그러나 그날.
강력한 폭풍우가 휘몰아쳐 공교롭게 아세인 대공의 저택에 발이 묶였던 날.
마사인은 꿈에서조차 상상해 본 적 없는 비현실적인 광경을 마주하곤, 순식간에 정신의 균형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저게… 뭐지?’
그때 그의 눈앞에는 분명 모레스가 있었다. 아니, 방금까지도 모레스였던 ‘것’이 서 있었다.
한데 빤히 눈으로 보고도 ‘저것’이 무엇인지 쉽게 이해할 수가 없다. 이성과 감정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복잡하게 뒤얽힌다.
미스라를 거머쥔 두 손이 사정없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저하…….”
신음처럼 흘러나온 목소리는 부르는 이에게 닿지 못하고 공허하게 허공으로 흩어진다.
아아, 나는 지금까지 뭘 했던 거지? 대체 ‘무엇’으로부터, ‘누구’를 지키려 노력했던 거야?
[아하하하!]혼란에 빠진 그의 귀에, 유난히도 친숙하게 느껴지는 밝은 웃음소리가 들러왔다. 아니, 귀에 들렸다기보다는 직접 소리가 머릿속에 때려 박히는 듯한 기이한 감각.
그리고 그 어두운 역광 속에, 유난히 밝은 빛을 발하는 은빛의 눈동자가 있었다.
[괜찮아. 이제 뭘 하든 변하지 않아. 형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 *
“그날 저는… 저하의 믿음을, 그리도 쉽게 저버렸습니다!”
마사인은 무릎을 꿇은 채 정신없이 그의 잘못을 털어놓았다.
“모든 것은 저의 탓입니다! 그날 만일 제가 끝까지 저하의 곁을 지켰다면, 그랬다면! 분명 저하께 그런 일이 닥치는 걸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그 두서없는 고백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성진은, 역시나 크게 당황하고 있는 오웬과 시선이 마주쳤다.
‘야, 지금 마사인 경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 혹시 알아?’
‘아니? 몰라. 나도 금시초문인데?’
‘그래?’
음.
성진은 조금 난감해졌다. 아까부터 마사인이 횡설수설 뭔가를 계속 사과하고는 있는데, 문제는 대체 그게 무슨 일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대체 경이 나한테 뭘 잘못했다는 건데? 어차피 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그렇다고 진정하고 차근차근 설명해 보라고 다그치기도 뭣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마사인 경은 완전히 정신을 놓은 것처럼 보였으니까.
성진의 어지간한 말썽에도 여간해서는 평정심을 잃지 않는 마사인 경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 오랜 시간동안 극복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하, 저는… 역시나 형편없는 겁쟁이였던 겁니다!”
한편, 마사인은 오랜 시간 가슴속에 억누르고 외면해 왔던 두려움에 완전히 매몰되어,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의 일을 후회한다. 지금도 끔찍하게 후회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사인에게는, 그때와 같은 상황을 마주했을 때 또다시 동일한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이것 봐. 역시 꿈이잖아? 마사인 형님이 아직 곁에 남아 있는데.
그리고 같은 과오를 반복할지도 모른다는 그 케케묵은 두려움은, 그날의 일을 기억하는, 그때와 같은 ‘모레스’의 앞에 서자 선연한 현실이 되어 그를 무자비하게 덮쳐온 것이다.
‘모든 것이 허사였다! 그 오랜 시간을, 그렇게나 노력했음에도, 나는 아무것도 극복해내지 못한 거야!’
아마 이런 상태로 저하의 곁에 남아 있다가는, 끝내 이전처럼 모든 것을 망치게 되겠지.
그렇다면 나는, 나는 이제 어찌해야…….
“크크크크…….”
그때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자코모 밀로가 음침한 실소를 흘렀다.
“봤구먼.”
“…뭐라고?”
오웬의 물음에, 자코모 밀로는 어딘가 고약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마도 저 젊은이에게는 처음이 아닌 모양이지! 주인께서 이 세상에 임하시는 광경을 아까 자네도 보지 않았던가? 그것이야말로 진정 세상이 감추고 있는 지고한 신비이지!”
“…신비?”
“그렇소! 저치는 분명 거기에 큰 충격을 받은 걸게요! 그 무한한 가능성이 주는 경의의 감정을, 감히 평범한 인간의 정신으로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크크크큭!”
그 말을 내뱉는 당사자가 이미 반쯤 맛이 가 있다는 점에서, 자코모 밀로의 말은 어느 정도 신빙성을 얻었다고 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의 헛소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성진이 순간 대단히 살벌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러니까 나는… 뭐, 그렇다는 거요…….”
자코모는 그 말을 끝으로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 버렸다.
“에휴…….”
성진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마사인을 향해 다가갔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저 양반을 언제까지 저대로 둘 수는 없으니까.
“마사인 경.”
묘할 정도로 차분하게 울리는 목소리.
오웬은 무심코 성진을 돌아봤다가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마사인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성진의 얼굴이 어딘가 냉정해 보였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저하. 저하, 저는…….”
“좀 진정해 봐. 마사인 형님.”
흠칫!
생각지도 못한 호명에, 마사인이 움찔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를 향해, 성진이 입꼬리를 비틀며 어딘가 기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 지금 경이 마음 써 봤자 이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
“마사인 경이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경이 가진 영향력은 자의식에 비해 생각보다 크지 않아. 알겠어? 마사인 경 따위는 결국 내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마사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언뜻 매정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한데 신기한 것은,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마사인의 눈에 서서히 초점이 되돌아오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을 그렇게 후회하고 내게 잘못을 비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때 경이 바꾼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그러니 뭔가를 망칠 수도 없었겠지. 내 장담하건대, 경이 내게 했다는 잘못도 생각보다 별것 아닐걸?”
“진정…….”
마사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정 그러합니까, 저하?”
“그래.”
성진은 아무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진짜고 말고. 적어도 지금 내가 가진 기억 내에서는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