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438)
성황의 아이들-438화(438/469)
438. 불로불사의 비서 (11)
마르타는 언제나 폭력 앞에 무력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대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폭력에 노출되는 일에도 꽤 익숙해져 있었지.
완전한 절망을 겪은 인간은 무감각해진다. 이것을 마르타는 살아생전 그리 달갑지 않은 방법으로 몸소 깨우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곳, 안식의 영역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모든 영혼은 원하는 만큼 휴식을 취할 수 있었고, 잠에 빠진 동안에도 주인의 비호 아래 절대적인 안전이 보장되었다.
마르타는 여전히 폭력 앞에 무감각했지만, 이는 생전과 같은 절망이 아닌, 견고한 안정감에서 기인한 반응이었다. 그래서 저렇게 천지가 뒤흔들리는 소란이 일더라도 그녀는 전과 달리 담담할 수 있는 것이다.
휘리릭-
털썩! 털푸덕!
폭발에 휩쓸린 주검들이 낙엽처럼 하늘하늘 날아간다. 그러곤 이내 깨어진 비석들과 함께 바닥에 거세게 내동댕이쳐졌다.
아아, 안식이시여! 다행히도 그 연약한 영혼들은 아직까지는 무사한 채 평온한 잠에 빠져 있었다.
하나 소동이 길어지게 되면, 결국은 저들도 휴식을 방해받아 깨어나게 되리라. 둘의 충돌이 지속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었다.
[…이제 슬슬 그분들이 나타나겠지.]마르타는 숨을 죽이고는, 잠시 후 나타날 거대한 영혼을 기다렸다.
지금이야 헤이즈나 벨린다처럼 어중간한 영혼들이 서로 잘났다며 싸우고 있지만, 마르타가 알기로 주인의 정말 강한 종복들은 따로 있었다. 그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하위 마왕에 맞먹는 엄청난 전력들이다.
그들은 평소 주인처럼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안식의 영역에 소요가 생기면 휴식으로부터 돌아와 손쉽게 상황을 정리하곤 하는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우우우우우…….
모골이 송연해지는 울림과 함께, 비쩍 마른 거인의 시체 하나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마른 고목 같은 팔에 휘감긴 고풍스러운 레이스는, 지나온 세월을 나타내듯 잿빛으로 바랬다. 이어서 먼지로 뒤덮인 모슬린 드레스와 희게 분칠한 거무스름한 얼굴이 드러난다.
군데군데 썩어들어 가는 살점 아래로, 딱딱하게 굳은 근육과 밀랍처럼 말라붙은 지방이 보인다. 마치 죽음 그 자체가 형상화된 듯 음산하고 소름 끼치는 모습.
끼이익.
거인은 말라붙은 안구를 굴려 잠시 주위를 둘러보는가 싶더니, 뼈마디가 드러난 양손을 세게 맞부딪쳤다.
쩍-!
순간 엄청난 압력이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밀어닥쳤다.
[……!] [……!]헤이즈와 벨린다의 영혼은 그대로 납작하게 찌그러졌다. 그러곤 부서진 비석들 사이에 처박혀 그대로 조용히 침묵에 잠겼다. 본의 아니게 강제적인 휴식에 처해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이 깨어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리라. 그때쯤에는 두 사람의 머리도 조금은 식어 있겠지.
[…이제야 좀 조용해졌구려.]드드드드…….
거대한 철골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거인의 시체는 다시 천천히 바닥에 몸을 누인다.
[이 처량한 노파를 봐서라도 소란은 그쯤 해 두게들. 영혼의 일부가 계속해서 어딘가로 소환되기 때문인지, 이 늙은이는 자도 자도 영 몸이 개운하지 않다네.]처량함과는 거리가 먼 위용이었지만, 누구도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잠시 눈치를 보던 마르타는, 휘리릭 영혼을 날려 거대한 여인의 앞으로 날아갔다. 주인으로부터 절대적인 안전을 보장받았기에 보일 수 있는 적극성이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흐음?] [지금까지 저는 이곳에서 종종 용맹한 늑대왕과 현명한 오크왕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당신 같은 분이 깨어나신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그러자 거대한 시체 여인은 주름진 눈꺼풀을 조금 치켜올렸다.
[오, 인간! 생전 육신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걸 보니, 그대는 필시 본상 세계로부터 흘러 들어온 영혼이군! 혹시 델크로스 차원의 인간인가?] [네, 맞습니다.] [참으로 기이하구려. 그대처럼 무고하고 순수한 영혼은 이곳에서는 극히 보기 어렵건만. 부디 내게 그대의 이름을 알려 주겠소?]고풍스럽다 못해 구닥다리 같은 어투였지만, 그녀의 사념에서는 마르타를 향한 진한 호의가 전해졌다. 흉하게 탁해진 각막에 가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타가 그녀의 시선으로부터 미묘한 다정함을 느끼는 것처럼.
[물론입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제 이름은 마르타입니다.] [마르타! 이렇게 보게 되어 반갑구려. 이 보잘것없는 늙은이는 헥센자바트라 하오.]헥센자바트.
마르타가 속으로 되뇌자, 거인의 시체로부터 씁쓸한 울림이 전해졌다.
[안타깝게도 내 진명은 긴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티끌처럼 허무하게 스러졌소. 지금 남은 것이라곤 사후에도 모두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살벌한 이명뿐이지.] [하면 헥센자바트가 당신의 진짜 이름이 아니란 말인가요?] [아니고말고. 그리 아름답지도 않은 것이, 내게는 썩 어울리지 않잖나?]시체가 마르타를 향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해 보였지만, 검게 꺼진 눈매가 더욱 음산해지는 효과를 낳았을 뿐이다.
[그래서 내 영혼의 주인께서는 종종 나를 ‘회한’이라고도 부르신다네. 그 흉흉한 이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대 역시 나를 그리 불러도 좋다오.]거기까지 말한 여인은, 바닥에 머리를 누이며 천천히 메마른 눈꺼풀을 닫았다.
마르타는 의아해하며 썩어가는 여인의 얼굴을 향해 다가갔다.
이곳의 영혼들은 모두 원하는 만큼 자유로이 휴식을 취한다. 지금까지 마르타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한데 어째서인지 저 거인은, 마치 자신에게 휴식이 강제되어 있다는 듯 말하고 있지 않은가.
[잠시만 제게 시간을 허락해 주실 수는 없나요? 당신에 대해, 이곳에 대해, 그리고 우리의 주인에 대해 얘기해 주세요.]마르타는 자신의 내면에 이러한 열의가 잠재해 있는 것을, 죽은 이후에야 처음으로 깨달아가고 있었다.
[저는 육신의 굴레를 벗어나고도 아직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장벽을 넘었지만, 그 앞에는 또 다른 성벽이 저를 가로막고 있어요. 그러니 지금이라도 더 많은 것들을 배워 언젠가 한계를 뛰어넘고 싶습니다.]그러자 거인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마르타를 내려다보았다. 정작 되돌아온 것은 완곡한 거절이었지만.
[그것은 불가능할 것 같구려. 나는 이곳에 수감된 죄인이며, 따라서 내게 선고된 ‘안식’에 마음대로 저항할 수 없소.] [죄인…이라고요?]의외의 정보에 마르타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렇다오. 나는, 그리고 그대가 앞서 만났다는 늑대왕이나 오크왕은, 오래전 불로불사가 되고자 하는 욕망에 혹해 끔찍한 죄를 저지른 자들이지.] […….] [그러니 ‘안식’은 내 영혼을 위한 휴식이나, 동시에 내 죄를 사하기 위한 감옥이기도 한 것이오.]거인의 의식이 점차 깊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이미 죽은 시체임에도, 그녀의 영혼은 더욱더 깊은 죽음을 향해 추락하며 하얗게 질려간다. 마치 심해로 침몰해 가는 거대한 유령선처럼.
마르타가 알 수 없는 애틋함을 느끼며 거인의 눈꺼풀을 쓰다듬자, 처음보다 부쩍 희미해진 사념이 또다시 뇌리에 들려왔다.
[그러나 상냥한 영혼이여, 나를 위한 걱정은 마시게. 자비로운 안식께서는 이런 우리들마저 구원해 주겠노라 하셨으니.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가 그저 두려움으로부터 기인한 것이기에 동정의 여지가 남아 있노라 말씀하셨소.] […두려움이요?] [그래요…….]서서히 잠에 빠져드는 거인으로부터 마지막 사념이 한숨처럼 전해졌다.
[그렇다오. 두려움이오. 우리의 영혼이란 어찌 이리도 연약하기만 한 것인지…….]* * *
-영혼이란 어찌 이리도 연약하기만 한가.
육신의 모습을 닮은 그 형상은 실로 허깨비에 지나지 않으나, 동시에 마치 실체를 가진 것처럼 철저하게 육신에 의해 존재하며 또 속박된다.
하나, 육신은 완벽한 영혼의 성벽이 되지 못하니, 이는 육신이 마침내 쇠락할 수밖에 없으며, 육신이 받은 상처를 영혼 또한 결코 피하지 못하는 까닭이라.
하면 영혼이 육신의 굴레를 벗어난다면 어떨까.
영혼을 감싸는 더 단단한 물질을, 육신을 능가하는 견고한 보호막을 쌓을 수만 있다면. 그 굳건한 성채에 영혼을 고정하고, 더 나아가 여기에 육신을 완전히 동조시킬 수만 있다면!
아아, 만약 그리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불멸하는 몸을 가지는 것도 결코 헛된 꿈은 아니리라!
대충 책장을 넘기던 성진은, 조금 심드렁한 표정으로 낡아빠진 책 표지를 확인했다.
-<다키아누스의 비서>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비서 좋아하시네. 금서 목록에서도 본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아마 성회에서 제대로 취급도 하지 않는 일반 잡서라는 말일 텐데.
‘상태창은 왜 굳이 이런 걸 손에 넣으라는 퀘스트를 준 걸까?’
성진이 오웬으로부터 이 책을 넘겨받은 이유는 무척이나 심심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명상하는 데도 한계가 있지, 따분하게 짐마차에 처박혀 있는 게 벌써 며칠째인가.
-그럼 뉴비야, 이거나 읽고 있을래? 아니, 이참에 그냥 네가 가지고 있든지.
-뭐? 중요한 퀘스트 아이템이라며? 이걸 왜 날 줘?
-어차피 최근의 퀘스트는 전부 널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단 말이지. 그러니까 이건 그냥 네가 간수하는 게 좋을 거 같아.
-?
그래도 사악한 마법사의 연구실에서 챙겨온 서적이었다.
나름 흥미로운 구석은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는데, 이건 웬걸, 그냥 영혼의 구성이 어쩌니 육신의 한계가 어쩌니 하는 헛소리들의 나열일 뿐이다.
“흠…….”
하지만 미련 없이 책을 덮은 것도 잠시, 성진은 다시 낡은 표지를 만지작거렸다.
하루 종일 흔들거리는 짐수레에 앉아 있다 보면, 사람이 전에 없던 활자 중독도 생기는 법이다.
[뭔데? 무슨 내용인데?]결국 성진이 다시 책을 펼쳐 들자, 옆에서 스탠드 역할을 해주던 마왕이 궁금한 듯 불꽃을 거세게 일렁거렸다.
아마도 녀석은 성진보다 더 답답할 터였다. 자유롭게 날아다니지도 못하고, 며칠째 램프에 갇혀 있는 꼴이니.
성진은 글을 읽지 못하는 녀석을 위해 친절하게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잘은 몰라. 영혼을 지키는 단단한 성벽을 만들면, 영원히 불멸하는 육체를 얻을 수도 있대.”
[뭐어? 그게 진짜야?]‘불멸’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흥미를 유발하는 주제임이 분명했다. 마왕의 램프가 순간 활기를 띠고 환하게 빛을 발한다.
“그 준비를 위해서는 먼저 특수한 꽃을 재배할 필요가 있다…….”
[꽃? 꽃이라고?]“응. 추운 지방에 드물게 자생하는 꽃이래. 그걸 잘 말린 다음, 흰주머니너구리의 향낭과 안젤리카 잎, 그리고 몇 가지 허브와 함께 잘 갈아서…….”
[으으음? 그게 영혼의 성벽을 만드는 방법이라고?]“그렇대. 근데 이다음이 더 중요해. 그걸 아교와 함께 잘 섞은 다음, 특수한 비법으로 240일간 숙성시키고 나면 아주 맛있는 탕약이…….”
[으으으음…….]마왕의 흥미가 순식간에 식어가는 것이 눈에 보인다. 아무렴, 램프의 불꽃이 저렇게나 흐려지는 것도 드문 일이지.
[그거 꼭 엉터리 민간요법 같은 같은데? 탕약을 먹어서 영혼을 보강하다니, 그게 말이 돼?]“뭐, 효과는 차치하고라도 장점이 아예 없지는 않아. 일단 맛있다니까.”
[알 게 뭐야! 그따위 것, 아무리 맛있어도 난 모르는 동물의 향낭 따위를 갈아 먹고 싶지는 않다고!]“그야 그렇지.”
성진이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자니,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마도 그 책의 내용은 사실이 아닐 겁니다. 주인이시여, 예비된 분이시여.”
자코모 밀로였다.
그는 여전히 꽁꽁 묶여 있는 신세였지만, 적어도 아까와 달리 약간의 이성은 되찾은 듯 보였다.
“사실이 아니라고?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성진의 퉁명스러운 물음에도, 그는 여전히 다소곳한 태도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야 그 비서는 제가 비약의 대가로 직접 준비한 물건이니까요.”
비약. 하마터면 대륙에 엄청난 재앙을 몰고 왔을지도 모르는 물건.
성진은 잠시 품속에 넣어 둔 작은 약병을 조심스레 더듬어 보았다.
“푸리아노의 마법사와 거래를 하기 전까지는 대대로 밀로가의 서고에 보관하고 있던 고서입니다. 그러니 그 책에 대해 저보다 잘 아는 사람은, 이 대륙엔 없습니다.”
“그래.”
조금 민감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는 예감에, 성진은 힐끗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다행히 짐수레를 모는 마부는 고삐를 느슨하게 쥔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거점을 오가는 데 이력이 난 노새를 완전히 믿고 있는 모양.
오웬 또한 식량을 조달하러 판게아 클로니클에 접속한 채다.
그리고 마사인 경은-
“…….”
고른 숨을 내쉬며 정말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물론 먼저 불침번을 서겠다고 자청한 것은 성진 쪽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말로 황자를 둔 채로 이렇게 순순히 잠들 줄이야.
문득 비서에서 흘려 읽은 문장 한 구절이 뇌리를 스쳐갔다.
-영혼이란 어찌 이리도 연약하기만 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