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446)
성황의 아이들-446화(446/469)
446. 다키온 (3)
멸망하기 전, 이오니아에는 다양한 종족들이 살고 있었다.
인간족인 코른시임 일족을 비롯해, 라이칸스로프, 드라코니언, 거인족, 나무족에 이르기까지. 언뜻 보기에는 생물학적 유사성이 없어 보이는, 꽤나 다채로운 형태와 특징을 갖춘 종족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델크로스 차원의 생물과 구별되는 단 한 가지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두개골 내에 자리하고 있는 염상 결정이었다.
결정의 위치나 구조는 종족에 따라 판이하게 달랐다. 그러나 아무리 조악한 염상 결정을 가진 종족이라 해도, 각각의 개채는 이 염상 결정을 통해 종족 [정수]와 연결, 집단 이성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정수]는 종족의 모든 것이 되었다. 개체의 감정과 지식을 공유하는 단계를 넘어 문화와 사상을 보존?발전시키는 것은 물론, 그들 모두의 의식을 한층 고차원적인 정신세계로 이끌어 주는 소중한 유산이었으니까.
한데 종족들 중 유일하게, 일족에서 가장 뛰어난 개체에게 종족 정수의 역할을 맡기는 이들이 있었다.
오라클.
코른시임 일족의 살아 있는 종족 정수이자, 가장 고도로 발달한 염상 결정을 지닌 자.
‘완벽하다!’
어느 날, 우연히 한 오라클의 이정표를 접한 다키아누스는 영혼을 뒤흔드는 강한 충격에 빠져들었다.
‘살아 있는 종족 정수가 만들어 낸 [이정표]는 이리도 아름다운 것이구나. 그 속에 능히 우주를 품고 있음이다!’
코른시임 일족은 본래 다른 종족에 비해 영적 발달이 탁월한 자들이었다. 체외에 또 다른 성질의 염상 결정, 즉 영혼의 단말을 만드는 비술이 당시에도 이미 대중적으로 퍼져 있을 정도였으니까.
가장 어린 코른시임들마저 비술을 통해 손쉽게 영혼 단말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영혼 단말에 자신들의 의식을 싣고서, 공간의 제약을 넘어 자유자재로 돌아다니곤 했지.
만일 영안을 가진 누군가가 코른시임의 주거지를 바라본다면, 그는 아마도 하늘 위로 온갖 크기의 구슬들이 날아다니는 장관을 볼 수 있었으리라.
하나 그중에서도, 오라클이 만들어 낸 영혼의 단말은 특별했다.
이정표.
선천적으로 타고난 염상 결정과도 다르고, 비술을 통해 만들어진 영혼의 단말과도 다른, 본상세계의 법칙과 규상세계의 법칙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는 존재.
‘참으로 놀랍구나. 오롯이 정신 능력으로 창조한 것임에도, 이토록이나 뚜렷한 실체를 지닐 수 있다니!’
다키아누스는 오라클의 이정표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염상 결정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 이정표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야말로 고도로 완성된 정신을 지닌 이의 증거라 여기게 되었지.
자기애가 지극히 강했던 그가 자신만의 이정표를 만들어 내는 일에 심취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으리라.
그는 이정표를 포함한 염상 결정 전반에 ‘다키온’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곤, 이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염상 결정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표본이 필요하다. 더욱 다양한 종류의 염상 결정이 필요해. 아니, 아예 염상 결정이 생성되는 과정을 곁에서 직접 관찰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서 다키아누스는 델크로스 차원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델크로스는 이오니아에 비해 미개한 데다, 염상 결정을 지닌 종족조차 없어 새로운 염상 결정의 탄생을 관찰하기에 적당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방랑 마법사 행세를 하며, 자신이 만든 탕약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러다가 어느 샌가 자리를 잡아, 오르토나 한가운데에 자신의 가문을 남기기에 이른 것이다.
* * *
“다키아누스는 ‘영혼의 성벽’을 만들어 불로불사를 이룰 것이라 했습니다. 한데 그의 진정한 목적이 실은 불로불사 따위가 아니었다면…….”
성진의 말에 성황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본래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추정하는 것에는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결과가 같다고요?”
화르륵!
어디선가 불어온 산들바람에 램프의 마왕이 흔들거린다. 성진은 조용히 눈치를 보는 마왕에게 작은 빵 조각을 던져 주며 다시 물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결과적으로 그자는 같은 것을 만들었을 테니까.”
성진이 멀뚱히 눈을 깜박거리고 있으려니, 성황이 비식 입꼬리를 올리며 설명을 이었다.
“알고 있느냐, 모레스? 염상 결정을 가진 이가 사망에 이르면, 그의 결정 또한 빠르게 기능을 잃어 버린다는 사실을.”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 시절, 수없이 많은 마물들을 해치우며 직접 눈으로 보기도 했으니까.
군집 마물의 머릿속에서 발견되는 바로토시는, 외부에 노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일쑤였다.
간혹 고스란히 남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는데, 그때는 빠르게 빛을 잃어 단단한 뼛조각처럼 변해 버리곤 했지.
때문에 과학자들이 바르토시의 기능을 깨닫는 데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영혼을 잃은 염상 결정은 그저 작은 돌멩이 외엔 아무것도 아니니라. 하여 처음에는 염상 결정을 채취해 가며 연구하던 다키아누스도, 그 사실을 깨닫고는 급히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완성된 결정을 조사하기보다는, 만들어지는 과정에 더욱 집중하게 된 것이다.
“그건 다행이었군요.”
만일 사후에도 염상 결정이 고스란히 기능했다면, 연구에 심취한 다키아누스가 사람들의 머리를 마구 쪼개며 돌아다녔을지도 모르잖아? 하마터면 대륙에 희대의 잔혹 살인마가 탄생할 뻔했다.
“거기다 자칫 잘못하면 코른시임 일족 전체가 표적이 될 수도 있었고요.”
“…그렇구나.”
성황의 대꾸는 한 발짝 늦게 돌아왔다.
‘어어? 잠깐. 이 양반이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왜 저렇게 뭔가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는 거지?’
순간 성진은 섬뜩한 가능성 하나를 떠올렸지만, 이내 머리에서 그 생각을 애써 떨쳐 버렸다.
“하지만 다키아누스는 이미 알고 있었느니라. 간혹 특수한 경우, 제작자의 사후에도 제대로 기능하는 염상 결정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휘이익-
또다시 바람 한 줄기가 성진의 볼을 스친다. 방문이 닫혀 있는데, 아까부터 자꾸 어디서 바람이 불어오는 거람?
“특수한 경우요?”
성황은 이번에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저 물끄러미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 묘한 시선 속에서, 성진은 이내 수수께끼의 답을 잡아낼 수 있었다.
“이정표군요.”
“…….”
“그래서 결과가 같다고 하신 거예요. 다키아누스가 만약 정말로 이정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면, 사후에도 자신의 영혼을 지킬 수 있는 완벽한 ‘다키온’을 만든 셈이 되니까요.”
이정표를 만드는 데 성공한 시점에서, 이미 그의 불로불사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화르륵!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마왕을 바라보며, 성진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얻은 정보만으로도 추론할 거리는 많다.
육체가 죽고 영혼이 몸을 떠나는 시점에서 염상 결정은 서서히 기능을 잃게 된다. 염상 결정의 본질은 오직 영혼을 위해 존재하는, 영혼을 위한 기관이니까.
한데 어째서 오라클의 이정표만은 멀쩡하게 남아 있는 것일까? 이정표나 염상 결정이나 다키온이나, 본질적으로는 다 같은 것 아닌가?
‘설마, 이정표에 아직도 영혼 일부가 남아 있다거나……?’
잠시 그런 생각을 하던 성진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에이, 설마. 조모님이 남기신 이정표만 해도 벌써 몇 갠데. 사람의 영혼이 그렇게 여러 갈래로 조각나는 것도 아니고.
휘이이이-
“그런데 아버지.”
세찬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성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부터 자꾸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옵니다.”
아니, 이걸 정말로 바람이라 해야 할지.
[이, 이성진…….]불안해하는 마왕을 램프째 끌어당기며, 성진은 겉보기에는 조용하기만 한 방 안을 조심스레 둘러보았다.
‘이건…….’
분명 언젠가 경험했던 감각이다. 무언가가 세차게 끌려오는 느낌. 온 세계가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는 느낌.
바로 [인과]가 움직인 감각이었다.
“그래, 그럴 수밖에.”
공간이 잘게 진동하고, 시간 축이 조금씩 삐거덕거린다.
한데 상황이 점점 심상찮게 변해 가고 있음에도, 성황의 표정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아마도 내게 허용된 인과를 조금 초과하고 만 것 같구나. 일전에 종족 대표들로부터 빼앗아 온 터라 조금은 여유가 있었다만, 아무래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네?”
“이제 세계는 서서히 기울다가 점점 빠른 속도로 비틀리겠지. 조만간 델크로스 차원은 이대로 종말을 맞을 게다.”
“네에에?”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아, 그 전에 세계의 틈을 비집고 [재앙]이 쏟아지는 것이 먼저일지도 모르겠다.”
“……?!”
사람이 하도 어이가 없으면 화도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성진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 깨닫게 되었다. 이 양반의 말대로라면, 지금 정말로 큰일이 난 거 아닌가!
“이, 일단 안전한 곳으로 피해야 합니다, 아버지!”
성진은 램프를 붙잡은 채, 다른 한 손으로 다급히 성황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모레스.”
“아래층으로 갑시다! 거기서 마사인 경과 멍청이를 데리고서 우선 이 마을을 빨리 벗어나야……!”
“모레스.”
멈칫.
지나치게 평온한 태도에, 성진은 천천히 성황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의 차분한 눈동자로부터 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은 목소리를 전해 들었다.
괜찮다.
소맷자락을 거머쥔 손에서 스르륵 힘이 풀렸다.
“어…….”
성진은 멍하니 성황을 바라보았다. 뭐지? 아버지가 왜 이러시는 걸까? 물론 나는 아버지를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그러다가 성진은, 아까부터 슬금슬금 숨어들어 와 이제는 머릿속에서 쟁쟁 울려 퍼지는 기묘한 목소리를 자각했다.
‘이 모든 것을 선택한 것이 대체 누구지?’
…혼란스러웠다.
“모레스.”
그때 성황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성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조금만 더 너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었다면 좋았을 게다. 하지만 네가 고심하다가 기껏 얻어낸 인과가 아니더냐? 그러니 다른 기회를 포기하더라도, 다키아누스에 대한 이야기만은 어떻게든 네게 전하고 싶었느니라.”
“다키아누스.”
그제야 이리저리 방황하던 성진의 눈동자가 초점을 되찾았다.
아아.
“지금 이 모든 일들이, 제가 다키아누스의 비서를 얻었기 때문에 벌어진 겁니까?”
“…….”
성황은 딱히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의 시선만은 잠자코 탁자에 놓인 책으로 가닿는다.
성진은 순간 그가 대답하지 않은 답을 완전히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저는 그 책을 얻음으로써…….”
성진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그리고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기에 합당한 인과를 쟁취한 거군요.”
어째서 성황이 여느 때와 달리 다키아누스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 줄 수 있었는가. 성진은 직감적으로 그 이유를 이해했다.
인과.
자신이 이 비서를 얻는 것은, 그 인과를 쌓기 위한 부정할 수 없는 필연이었던 것이다.
“그래, 아들아. 너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
“누군가의 욕망과 시기적인 우연이 복잡하게 얽혀 가는 틈바구니에서, 너는 이 세상에 제대로 간섭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손에 쥐었다.
드드드드드…….
조용한 방 안이 소리 없이 요동친다. 이 세상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격렬한 소요.
성진은 그 뒤틀림의 한가운데서, 망연한 얼굴로 성황을 바라보았다.
‘정말 그렇구나. 모든 게 내 선택이었어.’
‘베르트란 & 리’에 반하기 위해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베르세우스 다시아노를 공략하기 위해-
홀로 커다란 짐을 지고서 어딘가로 떠나야만 했던 루이제를 되찾기 위해-
그리고, 지그스문트령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는 음흉한 핸드릭 변경백을 단죄하기 위해.
하지만……!
“하지만 아버지.”
성황을 부르는 성진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젖어 들었다.
“그것을 위한 대가가 너무나 컸습니다.”
“모레스.”
“무엇보다도, 저 때문에 마사인 경이, 그의 영혼은 이제…….”
성진은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어제 마사인 경에게 일어난 일들은,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영구적인 손상이다. 그리고 그에게 일어난 모든 재난은, 바로 자신의 무의식적인 선택에 의해 발생한 일인 것이다.
‘모두 나 때문에-’
툭!
그때, 성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위로하듯 들려오는 담담한 목소리도.
“그리 자책하지 말거라, 아들아. 네 행동에는 언제나 적절한 대비책이 있었으니.”
“……!”
“그리고 나는 지금, 그런 너를 돕기 위해 이곳에 있느니라.”
기대하지 못한 그의 말에, 성진은 잠시 눈을 깜박였다.
…있어? 마사인 경을 고칠 방법이?
“대체 어떻게요? 아버지! 제가,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진은 저도 모르게 절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까지 계속 신경을 자극하던 불쾌함이 아버지를 마주하자 순식간에 해소된 이유.
그것은 그저, 단순한 안도감이 아니었던 건가?
“그리 조급해할 필요 없느니라.”
짧게 대답한 성황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언젠가 말하지 않았더냐, 모레스. 아직은 네가 그런 선택에 내몰릴 필요가 없다고.”
“아버지.”
“너는 아직 어리다. 그러니 가끔은 그 짐을 다른 이에게 맡겨도 괜찮지 않겠느냐.”
툭툭.
머리를 두드리는 일정한 손짓에, 속에서 격렬하게 들끓어 오르던 감정들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잠시 후, 마침내 성진이 완전한 안정을 되찾자, 성황은 천천히 팔을 내리며 미소 지었다. 급격하게 가라앉아 가는 세상을 등에 진 채, 성진을 향한 그의 눈이 밝은 은빛 안광을 뿜어낸다.
“하면 모레스. 다키아누스가 일평생을 바쳐 얻고자 했던 진정한 ‘다키온’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지금부터 네게 직접 보여주마.”
* * *
이제 모든 것은, 내가 무엇을 보고 싶으냐에 달렸느니라. 모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