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45)
성황의 아이들-45화(45/469)
045. 예감 (3)
[하하하하.]네이트가 검을 치켜들다 갑자기 멈춘 채 나직하게 웃기 시작하자, 문어 녀석이 어리둥절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형편없이 부어오르고 찌그러진 눈동자가 불안한 듯 이리저리 흔들거린다.
네이트는 호두까기를 그대로 흩트려 버린 후 천천히 기형 문어에게 다가갔다. 마치 산책을 하는 듯 여상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는데, 그것이 오히려 [재앙]을 휘두를 때보다 위압적으로 보여 문어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말해 보라.]그가 손을 뻗어 놈의 눈알에 가만히 가져다 댄다. 문어는 감히 눈꺼풀을 내리지도 못하고 그저 한차례 울컥 진물을 토해낼 뿐이었다.
[너의 왕이 너를 버림패로 쓰는 이유가 무엇이냐?]어째서 자신이 직접 이놈의 숨통을 끊지 못했는가.
이놈을 그냥 놓아주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문어를 이곳으로 보낸 [기아]의 꿍꿍이와 관련이 있으리라 네이트는 짐작했다.
한데 그 말을 들은 기형 문어 놈이 제 처지도 잊고 발끈해서 소리쳤다.
[버림패라니! 이 몸은, 이 몸은 [기아]의 군주께서 친히 내리신 [축복]을 받은 그분의 최측근. 네가 감히 그분의 깊은 뜻을 왜곡하려 하느냐!]그 과민한 반응을 보아하니, 이놈도 은근히 왕의 저의를 의심하기 시작했던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놈의 말에 네이트는 어떤 가능성을 떠올렸다.
[축복.]그래, 축복인가.
네이트의 눈이 천천히 놈의 영혼을 훑는다. 그의 시선을 마주한 기형 문어는 순간 찔끔 놀라더니 그 기세가 눈에 띄게 수그러들었다.
네이트의 영안은 잠시 후 문어의 영혼 구석에 새겨진 축령을 발견해 냈다. 지극히 은밀하게 새겨져 있어 여간해서는 알아보기 어려웠을 작은 구절.
-내 너를 몹시 아끼노니, 너의 적이 나의 적이요, 너를 해치는 자는 나의 복수를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네이트는 혀를 찼다.
[얕은수를…….]단순한 축언인 것 같아도 무려 한 차원의 왕이 새긴 축령이다. 거기다 차원의 경계에서는 그 효과 또한 가감 없이 고스란히 보존될 것이었다.
당장은 네이트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겠지만 복수를 피하지 못한다는 인과만은 남아, 언젠가 [기아]가 델크로스의 차원에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하는 구실이 되었으리라. 하마터면 대단히 귀찮은 일을 만들 뻔했다.
한편 문어는 네이트의 시선에 잡혀 꼼짝달싹 못 하는 상태로 조용히 식은땀만을 흘리고 있었다.
어째서 이자를 단순히 격이 조금 높은 인간의 영혼이라 생각했던가. 위대한 군주이신 [기아]의 최측근이자 한 염상 차원의 마왕인 자신을 이렇게 간단하게 제압하다니, 실로 왕이라는 명칭에 걸맞은 힘이 아닌가.
가까이에서 본 이자의 황금 관은 너무나 눈이 부셔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거기다 마왕인 자신의 본신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 듯한 저 무서운 눈은 또 무언가.
그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던 것이 분명했다. 공을 세워보지 않겠냐는 장난 같은 왕의 말씀에 무턱대고 달려 나온 것이 그렇게 후회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문어의 수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서서히 자신을 향해 감겨 들어오는 무시무시한 인과의 흐름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건… 이건 또 뭔가!]어쩔 줄을 몰라 하며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던 문어는 순간 네이트의 서늘한 눈을 보고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절대 거부해서는 안 되는 명령, 마왕의 운명조차 좌지우지할 강력한 축언이 자신의 몸을 옭아매고 있었다.
[비록 경계에 불과하긴 하나 내 영역 안으로 들어왔으니, 나 역시 너에게 [축복]을 내려주겠다.]이런 것이, 이런 것이 인간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인가?
문어는 지금껏 느껴본 적 없던 극심한 두려움에 정신이 잠식되어 가는 것을 느끼며 멍하니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영혼 위로 담담한 선언이 떨어진다.
-네놈이 다시 한번 더 나의 영역을 밟는다면, 너는 영혼마저 불사르는 겁화 속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것이다. 너의 왕은 끝내 잡아먹으려던 자에게 잡아먹혀, 그 이름은 물론 한 줌의 흔적조차 남기지 못할지어다.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문어의 영혼 한쪽에 빛의 문자가 아로새겨진다. 충격으로 벌벌 떨고 있는 놈의 눈알을 툭툭 건드리며 네이트는 짐짓 다정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알겠느냐?]네이트의 시선을 피할 방법 없이 똑바로 마주 보게 된 놈의 눈알이 극도의 공포감에 바르르 흔들렸다. 오죽했으면 시커먼 놈의 표피가 하얗게 질린 듯 보일 정도다.
[살려 보내주마. 그러나 언젠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면 너는 반드시 죽는다.]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곧 문어의 몸은 무시무시한 구속에서 벗어났다.
스스스스. 작은 구멍으로 물이 빠져나가는 듯 놈의 거대한 몸뚱이가 쓸려나가기 시작했다.
지옥 벽의 파편들과 얼어붙은 영혼들, 그리고 잔류하던 놈의 신체 일부도 곧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쯧. [기아]가 혀를 차며 시선을 돌린다.
저 먼 곳에서는 여전히 그의 영혼을 주시하는 눈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어느 누구도 더는 섣불리 다가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잠시 노려보듯 놈들을 향해 마주 시선을 주던 네이트는, 곧 델크로스로 영혼을 이동시킬 준비를 했다.
이제는 호문클루스의 몸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탕탕탕.
제롬은 부하들이 다급하게 그를 찾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숙취 때문인지 몸에 기운이 없고 어쩐지 머릿속이 멍했다.
‘이렇게 오래 잠을 잤다고?’
까슬해진 얼굴을 쓰다듬으며 제롬은 자리에서 일어나 처소 밖으로 나갔다. 이미 해가 중천을 지나 오후가 되어 있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가 완전히 정신을 차린 것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부하들이 수색 결과를 보고했을 때였다.
아세인의 첩자로 의심하고 있던 그 죄수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미 죽은 상태였다고 한다.
“내부 분열인가?”
빠른 속도로 마을 공터를 향해 걸으며 제롬이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눈에 띄는 외상은 없어 보였습니다.”
“이단 재판을 받은 놈이라지 않았소? 여기 왔을 때부터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겠지. 도주하다가 죽어버리니 버리고 간 게 아니겠소?”
공터에 이르자 부하 놈들이 작은 수레 하나를 둘러싸고 서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수레 위에 누워 있는 죄수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마치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반신반의하며 맥을 짚어보니, 부하 놈들의 말대로 전혀 맥이라고는 잡히지 않는다. 정말로 죽은 것 같기는 한데.
“언제부터 이랬다고?”
“그러니까… 관도 분기점 근처에서 발견했을 때 이미 이 상태였습니다.”
제롬이 인상을 쓰며 부하 놈을 노려보았다.
그곳에서 화전촌까지는 짧지 않은 거리다. 적어도 여기까지 이동하는 데만 몇 시간은 지났을 텐데, 그게 말이 되나.
죄수의 시체는 전혀 창백해 보이지 않았다. 손을 대면 사자 특유의 냉기도 없다. 그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을 뿐, 심지어는 사후 경직의 징후도 보이지 않는데.
팔다리의 관절 굳기를 확인하며 죄수의 몸을 유심히 살피던 제롬이, 순간 무엇을 봤는지 황급히 그의 머리카락을 옆으로 쓸어내며 얼굴 윤곽을 더듬었다.
“…이놈이 이렇게 생겼었나?”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봤을 때는 몰랐는데, 왜 눈을 감고 있으니 이렇게 얼굴이 낯익은 느낌이 들지?
제롬은 죄수의 턱을 쥐고 요리조리 돌려가며 얼굴을 꼼꼼하게 살폈다.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들어 쉽사리 그의 얼굴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뒤에서 부하 놈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동안, 결국은 별다른 특이점을 찾아내지 못한 제롬이 포기하고 수레에서 한걸음 물러났다.
“죽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일단은 헛간에 넣어두고 감시해라.”
명령이 떨어지자 곧 부하들이 재빨리 수레에 달라붙는다.
제롬은 아직도 멍한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공터를 벗어났다.
“…어?”
죄수의 시체를 끌어 내리던 산적 한 놈이 잠시 멈칫거렸다.
“왜? 뭔데?”
“이상해서 말이야. 이놈, 왜 이렇게 가볍지?”
수레를 공터 옆으로 밀어내던 동료 놈이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았다.
“뭐가 이상하냐? 사제니 약제사니 하는 놈들은 대체로 비쩍 골은 놈이 많잖아?”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는 이 위화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가벼운 사람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몸의 부피에 준하는 뼈와 살덩어리의 무게라는 것이 있을 터.
한데 이 죄수는 어딘가 느낌이 많이 달랐다. 몸의 재질이 미묘하게 다른 느낌, 사람이 아닌 텅 빈 무언가를 건드리고 있는 느낌이 들어 어쩐지 소름이 돋았던 것이다.
“기분 탓인가…….”
꺼림칙한 느낌을 애써 무시하며 그는 시체를 들고 헛간으로 향했다.
한편, 비틀비틀 오두막을 향해 걷는 제롬을 부하 놈 하나가 불러 세웠다.
“두목.”
그는 뻣뻣한 수염을 제멋대로 기른 장한이었는데, 로한에서부터 그의 밑에 있던 오랜 부하였다.
“저… 마르타 씨의 일은 정말 안되었소. 장례 준비는 잘하라고 일렀으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시오.”
어제는 심상치 않은 기세 때문에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지만, 영 기운이 없는 우두머리를 보니 뭐라도 위로의 말을 해야겠다 싶었던 것이다. 한데 그 말을 들은 제롬의 반응이 어딘가 이상했다.
“…마르타?”
제롬은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렸다.
그게 누구더라? 마르타…….
잠시 눈을 찌푸리며 생각하던 제롬은 겨우 어제 사망한 그의 아내를 떠올리는 데 성공했다.
“아아, 마르타! 그래, 그랬었지…. 네가 알아서 하도록. 수고한다.”
“…두목?”
내심 아내에 대한 그의 마음이 깊은 것을 알고 있던 부하가 의아해하며 불렀으나, 그에게 손을 휘휘 저어준 제롬은 다시 비척비척 오두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만약 그의 부하가 제롬의 영혼을 볼 수 있었다면 아마도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이다. 그의 영혼은 머리가 통째로 뜯겨 나간 채 몸의 반쪽만이 남아 하늘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처소로 돌아와 습관적으로 문을 닫은 제롬은 멍청하게 오두막 안을 둘러보았다.
술이 덜 깼나. 오늘의 그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이상했다.
왜 이렇게 모든 것이 낯설고 무감각하게 느껴질까. 생각을 하려고 하면 머리가 멍해지고,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려 해도 희미하기만 하다.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는 술병이며 가재도구들을 찬찬히 살피던 그의 시선이 문득 오두막 구석에 앉아 눈을 감고 졸고 있는 카이엔에 닿았다. 그 흉흉한 삼백안을 치뜨지만 않으면, 그저 단정하고 예쁘장하기만 한 양아들의 얼굴.
순간 그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떨려오기 시작했다.
저 얼굴……!
“어……!”
제롬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신음 같은 비명을 질렀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마비된 영혼 탓인가, 깨달음이 생각으로 정리되지 않고 말로 구성되어 흘러나오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어눌한 소리를 지르며 몸을 뒤로 질질 끌었을 뿐이다.
“어어……!”
응? 그 소란에 눈을 뜬 카이엔이 잠이 덜 깬 얼굴로 눈을 비비적거렸다. 그는 곧 오두막 바닥에 퍼지고 앉아 벌벌 떨고 있는 제롬을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양반이 왜 이래? 갑자기 영 이상해졌네?”
그냥 머리통을 뜯어냈을 뿐인데.
카이엔은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도 시끄럽게 마르타, 마르타 하면서 울기에 잠 좀 자려고 그랬는데, 좀 성급했다 싶긴 하네. 멀쩡하던 양반이 이렇게 반편이가 될 줄 알았나.”
뭐, 이제는 별 상관도 없나?
조만간 여기도 끝장이고 이제 슬슬 떠날 때가 되었다.
카이엔은 주춤주춤 뒤로 기어가는 제롬에게 다가가 단번에 남은 영혼을 뽑아내었다. 그와 동시에 제롬이 눈을 까뒤집으며 뒤로 넘어간다. 그대로 죽어버린 것이다.
불과 며칠 전, 혀가 잘려 어어 소리를 내는 죄수들이 짜증난다며 한주먹에 때려죽인 제롬이었다. 한데 지금은 그가 그들과 똑같은 꼴이 되어 죽어버렸으니 정말 웃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뜯어낸 영혼 조각을 질겅질겅 씹으며 카이엔은 대충 여장을 챙기기 시작했다. 카르타고 관문으로 떠난 로드리고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더 이상 그를 기다릴 여유는 없어 보였다.
뭐, 그를 시켜 준비해 둔 새로운 신분패도 있으니 혼자서도 그럭저럭 해 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한데 제롬의 영혼이 마지막으로 남긴 강한 사념의 맛이 카이엔의 머리에 선명한 정보 하나를 남겼다. 영혼을 뜯어먹다 보면 이따금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그 내용은 짐을 꾸리는 카이엔의 손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 수상한 악마 숭배자 놈이 지금 화전촌에 있다고?’
* * *
성황, 네이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한 무리의 험상궂은 산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깨닫고는 침울해졌다.
‘역시 그대로 낙오되었나…….’
버리라고 했다지만 정말 미련 없이 던져 버렸구나, 엔리케.
네이트가 눈을 뜨자 처음에는 귀신이라도 본 듯 흠칫 놀라던 산적 놈들이, 이내 흉흉하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두목 말이 맞았군. 역시 살아 있었어.”
몸을 움직여 보려 해도 팔이 뒤로 돌아가 손목이 수갑째 밧줄에 칭칭 감겨 있다. 줄을 푸는 것도 여의치 않을 듯했다.
죽은 것처럼 보였을 텐데 정말 조심성 많은 놈들이었다.
거기다 그를 포위하고 있는 산적 놈들의 머리통에 하나같이 선명한 타박상의 흔적이 보인다는 것도 문제였다. 이마가 찢어진 놈, 머리에 피 묻은 붕대를 감은 놈, 콧잔등이 비틀어져 퉁퉁 부은 놈.
그러니까 그들 모두가 네이트에게 대단히 유감이 많은 상태였던 것이다.
“도망을 가, 이 새끼야? 어서 불어! 배후가 대체 누구냐! 네 놈, 역시 아세인의 첩자냐?”
산적들 중 하나가 그의 멱살을 잡아채자 몸이 속절없이 딸려 올라갔다.
“여기 내통자가 있지? 어서 불지 않으면 결코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거다, 이 자식아!”
놈이 날카로운 단도를 그의 뺨에 툭툭 두드리며 으름장을 놓는다. 네이트는 우울한 얼굴로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진작 엔리케에게 팔을 잘라달라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