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453)
성황의 아이들-453화(453/469)
453. 카야의 숨결 (2)
오르토나 망국 이전, 그레타는 수도 브린디시의 한 평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지런한 부모님 덕이었을까, 그녀의 가정은 어릴 때부터 크게 빈곤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그녀는 다른 아이들처럼 일찍부터 노동에 내몰리는 대신, 틈틈이 시간을 내 책을 펼칠 만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약간의 노력만으로 아카데미 장학생에 선발될 정도의 재능 또한 있었고.
-잘했다, 그레타! 아카데미를 졸업하기만 하면 분명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거야!
-우리 집안도 이제 신세 좀 피겠구나!
그렇게 기뻐하시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아카데미에 입학했던 날, 그녀는 처음으로 베니시오 왕자와 가엘 장군을 만났다. 장차 그녀의 인생은 물론이거니와, 나라의 운명조차 송두리째 뒤바꿔 버릴 두 사람을.
-네가 장학금을 받은 그 평민이라고? 입학을 환영하네! 앞으로 오르토나를 떠받치는 든든한 인재가 되어 줄 거라 믿고 있어! 그러니 어떤가? 오르토나의 미래를 위해 밤낮으로 토론하는, 건실한 우리 모임에 들어오지 않겠나?
꿈꾸는 듯 맑은 눈동자를 빛내는 베니시오 왕자. 그리고-
-그레타라고 했나? 왕자님의 말씀은 아직 깊이 담아 둘 필요 없다. 이제 막 입학한 신입생이잖나? 그러니 일단은 학업에 충실하면서, 미래에 도움이 될 더 좋은 모임을 찾아보는 것도 괜찮겠지.
-잠깐만, 가엘! 지금 신입생 영입을 방해하는 건가?
-하지만 사실이 아닙니까? 왕자님께서 가만히 내버려둬도 이 친구의 미래는 탄탄하게 열려 있습니다. 귀족 가문에서 앞다투어 높은 임금으로 데려가려 들 테고, 그냥 왕궁 행정관이 되어도 제법 높은 자리까지 출세할 수 있을 테죠.
사려 깊은 눈빛을 가진, 베니시오 왕자보다 오히려 더 커다란 존재감을 뿜어내는 선배를.
-그러니 왕자님의 번드르르한 말은 신경 쓰지 말고, 어디까지나 자네를 위한 선택을 하도록 해, 그레타.
-어이, 이봐! 가엘! 자네 정말 이러기야?
가엘 베르트란. 그 존경해 마지않는 이를 만난 날부터, 그레타의 삶은 온전히 그를 위한 것이 되었다.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가려 했고, 그가 가진 열정을 함께 느끼려 했다. 그의 손발이 되어 언제까지고 그의 행적을 따라가고 싶었다. 그의 모든 행동과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에게는 마치 사제 나부랭이의 설교보다도 한층 신성한 교리처럼 여겨졌으니까.
그렇게 그레타의 삶은 격동의 시간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출세한 딸 덕분에 말년은 좀 편하겠구나, 그런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던 부모님을 왕당파의 손에 무참히 잃고, 그러고도 마지막 순간까지 공화파의 참모진으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했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야, 그레타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당시의 자신은, 정말로 공화정의 가치를 진심으로 마음에 두고 있었는가? 어쩌면 실제로는, 오르토나에 새로운 바람을 가져올 희대의 영웅, 가엘 베르트란의 광휘에 넋을 빼앗겼을 뿐은 아닐까?
-실은 공화파의 정신적 지주 따위가 되지 않아도 좋네. 그냥… 이 친구가 남은 인생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게.
그날, 베니시오 왕자 일행을 용병단의 손에 맡기며, 가엘 장군은 마지막으로 그레타에게 그렇게 당부했다. 공화파의 핵심 인물인 베니시오를 몰래 빼돌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장차 공화파를 지탱하는 굴지의 정신이 되어야 한다는 핑계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전선을 홀로 지탱하고 있던 거목은,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겨우 그녀에게 자신의 무거운 진심을 내비쳤다.
-당대에 나라를 재건한다는 불가능한 목표를 일부러 떠안을 필요는 없다고 전해 주게.
-장군……!
-그리고 자네 역시 마찬가지네, 그레타. 괜히 공화정의 망령으로 남으려 하지 말고, 이제부터라도 정말로 자네를 위한 삶을 살도록 해.
하지만 진정 그녀가 원하는 삶이란, 바로 가엘 베르트란의 뜻을 이루는 삶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사후에도 그레타는 여전히 그의 의지를 이어가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아득바득 일해서 길드의 요직에 오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가엘 장군이 누구보다도 지키고 싶어 했던 친우, 베니시오 왕자의 뒤를 봐주기 위해. 그리고 가엘이 무엇보다도 사랑했던 조국, 오르토나의 재건을 이루기 위해.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지금, 가엘 장군의 뜻을 함께 이어가야 할 오르토나의 미래가, 그녀를 향해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설마, 길드장님. 결국 제국을… 성황 폐하를 완전히 등지기로 결심하신 겁니까?”
마치 본인이 배신당한 것처럼 허망해하는 21호를 바라보며, 그레타는 문득 쓴웃음을 흘렸다. 저 아이는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기는 할까?
“…그것도 참 새삼스러운 질문이구나, 21호. 애초에 우리가 제국을 위해 길드에 투신한 것은 아니잖니?”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너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었던가? 네가 성황의 곁에 머무는 이유는, 언제든 기회만 되면 그의 목을 베어 오르토나의 복수를 이루기 위함이잖아.”
“…….”
21호가 입을 꾹 다물며 조금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확실히 말해 둘게.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딱히 성황의 뜻에 반하는 게 아니야. 길드는 북부의 정보망을 온전히 자유 지하도에 내어 주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관리를 포기한 것은 아니니까. 따라서 내가 베니시오 님의 활동에 관여하는 건, 어디까지나 길드장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세력 조율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그 ‘조율’에 대해, 폐하께 제대로 보고하지는 않으시겠죠.”
“후후, 순진한 질문이구나, 21호. 설마 너는 성황이 정말로 내가 하는 일들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레타는 비소를 지으며,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는 21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날 길드장으로 임명한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성황, 본인이야.”
성황이 그레타의 출신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애초에 남부로 향하려던 애스트로스 용병단을 설득해, 베니시오 왕자 일행을 내전으로부터 빼돌린 장본인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는 길드의 활동에 비교적 자유로운 재량을 부여했지. 황가의 정보를 관리하는 ‘원숭이 망루’를, 길드로부터 떼어 내 아예 중앙정보부 소속으로 만들어 버린 걸 생각해 보렴.”
그래. 그레타는 그 일을 통해 성황이 길드와 어느 정도 선을 그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간혹 반제국적인 활동을 하는 것도 이미 그의 예상 아래에 있을 터.
근거 없는 억측은 아니었다. 만일 성황의 암묵적인 허락이 없었다면, 과연 자유 지하도가 이렇게까지 단기간에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을까?
“그러니 안심하렴, 21호. 이 그레타는 아직은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지 않았어.”
“…….”
“그리고 나는 현재 길드를 통솔하는 장으로서, 곤경에 빠진 길드원을 돕기 위해 이곳에 왔을 뿐이란다.”
그레타가 천천히 팔을 들어 오두막 너머의 어딘가를 가리켰다.
21호는 그녀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최대한 안력을 집중했다. 그리고 이내 조금 멀리 떨어진 들판에, 한 쌍의 노새가 이끄는 작은 짐마차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해했다면 저걸 타고 지금 당장 테레를 떠나는 걸 추천하마.”
“어째서입니까?”
“네가 성황의 전속 정보원이라는 사실을 베니시오 님은 이미 알고 계신단다. 하면 네가 지금 황도를 떠나 누구의 곁을 지키고 있는지도 능히 짐작하시지 않겠니?”
그리고 현재 베니시오가 사적으로 부리고 있는 북부 암살 집단, ‘카야의 숨결’ 또한 상황은 마찬가지일 터.
“나나 베니시오 님이나, 두 집단 사이에서 큰 소란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아. 그저 이대로 세력의 균형을 유지한 채, 안정적으로 오르토나 재건의 토대를 쌓아 가고 싶을 뿐이지.”
거기까지 말한 그레타의 눈빛이 이내 어둡게 침잠했다.
“하지만 과연 ‘카야의 숨결’에서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장담할 수 없겠구나.”
“……!”
* * *
21호는 미친 듯이 여관을 향해 달렸다.
‘젠장! 잠시라도 그 사람의 곁을 비워서는 안 되는 거였다!’
상급 기사인 마사인, 그리고 무력이 출중한 황자들이 함께하기에 잠시 방심하고 말았다. 이대로 하루를 무사히 여관에서 보낸 후, 마차를 얻어 안전하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줄 알았지.
하지만 그는 모레스 황자가 이미 지나치게 저들의 이목을 끌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황자의 곁에 있어야 할 13호 선배가 하루 종일 눈에 띄지 않았다. 그걸 진작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야 했는데!’
머릿속에서 이미 최악의 가능성을 떠올린 21호는, 저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었다.
‘부디, 부디 제가 도착할 때까지 무사해 주십시오, 폐하!’
한데 사색이 된 21호가 막 여관에 도착했을 때, 막상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의외의 광경이었다.
소리 죽인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뒹굴고 있는 암살자 셋과-
“……!”
그런 그들을 무심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말쑥한 소년.
“늦었잖아.”
소년, 모레스 황자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창백한 달을 등진 소년의 눈동자가, 마치 한 쌍의 작은 달인 양 차갑게 빛난다.
“기왕 사람을 호위할 거면, 좀 신경 써서 제대로 해 보라고.”
눈대중만으로도 암살자들의 실력은 그리 만만해 보이지는 않았다. 한데 저 어린 황자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들을 자신의 발아래에 두고 있는 것이다.
21호는 마음속의 동요를 감추려 애쓰며 물었다.
“설마 암살자들을 이렇게 만든 게… 저하이십니까?”
“응.”
“저하 혼자서, 저들 전부를요?”
“과한 것 같아? 괜찮아. 그래도 죽을 정도로 때리진 않았다고. 만약 내가 함부로 저들의 목숨을 끊어 버리면 아버지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실 테니까.”
21호는 그제야 깨달았다. 저 능청스러운 황자가 처음부터 성황의 정체를 간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치잇-!”
바로 그때였다. 바닥을 기던 암살자들이, 벌떡 일어나 일제히 한 방향으로 몸을 날린 것은.
그들은 껑충껑충 지붕을 건너뛰더니, 순식간에 어둠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
21호가 황급히 그들을 따라 달리려 들자, 모레스 황자가 가볍게 한 팔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그냥 내버려둬.”
“네? 하지만-”
“안 그래도 슬슬 보내 줄 셈이었으니까.”
21호가 멍하니 눈을 끔벅거리자, 모레스 황자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대체 언제쯤 자결을 시도하려나 기다려 봤는데, 놈들은 아까부터 끈질기게 도망갈 기회만 노리더군. 다시 말해 이 자리를 벗어나기만 하면 어떻게든 살아날 방도가 있다는 뜻 아니겠어?”
“…네?”
“너 말이야. 보기에는 꽤 똘똘하게 생겨선 말귀를 영 못 알아듣는구나.”
그래도 21호가 이해하지 못하자, 모레스 황자는 못마땅한 듯 슬쩍 미간을 구겼다.
“즉 이 근처에 다른 믿음직스러운 패거리가 있다는 뜻이잖아. 우리 일행을 말살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인력이.”
“…네?”
“혹여 고문을 당해 약간의 정보를 털어놓게 되더라도, 오늘 내로 이곳에서 우리 모두의 입을 막을 자신이 있다는 거지.”
잠시 황자의 말을 곱씹던 21호의 얼굴이, 서서히 창백한 빛으로 질려갔다.
“네에에?”
“거, 원숭이 망루의 정보원치고는 참 호들갑스러운 녀석일세.”
모레스 황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검을 갈무리했다.
“아니, 잠깐만요, 저하!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그럼 정말로 큰일 난 게 아닙니까?!”
“괜찮아. 다 방법이 있으니까.”
휘익-!
호두까기를 가볍게 털어 피를 흩뿌리는 모습에, 21호는 문득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지금껏 전혀 닮지 않은 부자지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모레스 황자의 모습은, 언젠가 그가 마음속 깊이 동경하고 따랐던 용병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비범함과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던, 마치 신화 속의 영웅과도 같던 소년을.
“그래서 말인데, 난 이제부터 저놈들을 따라갈 건데.”
“…네?”
21호가 바로 이해하지 못해 되묻자, 황자가 뚱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쯧! 그래서 넌 어쩔 거냐고. 나와 함께 갈 건가?”
“네?”
또다시 얼빠진 얼굴로 되물은 21호는, 새삼 경악하며 재차 되물어야 했다.
“네에에에?”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린가?
너무나도 대책 없는 그 제안에, 21호는 재빨리 방금 전의 생각을 머리에서 지워 버렸다.
그럼 그렇지! 저 천하의 개망나니가 성황 폐하를 조금이라도 닮았을 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