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458)
성황의 아이들-458화(458/469)
458. 카야의 숨결 (7)
21호가 수상쩍은 제단을 때려 부쉈을 때. 그리고 올리비에가 이끄는 암살자들 절반이 막 의식을 잃고 고꾸라졌을 때-
같은 시각, 성진과 대치하던 암살자에게도 비슷한 변화가 일어났다.
털썩, 챙그랑!
검을 맞대고 치열하게 대치하던 여자가 갑자기 힘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푸욱!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목에 호두까기를 박아 넣은 성진은, 잠시 가쁜 호흡을 가다듬으며 여자의 눈에서 서서히 생명이 꺼져 가는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21호가 어떻게든 해낸 건가?’
꽤 만만찮은 상대였다. 이들의 몸을 조종하던 영혼의 정체가, 일평생 암살 기술만 갈고닦은 노익장인 건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하지만 본신이 아닌 만큼, 오러 층의 한계 역시 명확했어.’
피차 엇비슷한 오러 양이라면, 오러 운용의 노련함에 있어서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물론 상대가 두 번째를 넘어, 세 번째, 네 번째까지 몸을 교체해 가며 달려들었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근방에 더 이상 적대적인 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후, 성진은 21호의 기척을 따라 지하실로 걸음을 옮겼다.
‘이건… 꽤 제대로 정비된 거점 같은데?’
길게 이어진 복도의 양옆으로, 식량 창고며 무기고, 숙소 따위가 눈에 들어온다. 시설의 오랜 사용감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이들은 아마 옛날부터 이곳에 터를 잡고 활동하던 세력일 터.
이들의 정체에 대해 조금은 감이 잡히는 것도 같다.
‘카야의 숨결.’
언젠가 다샤로부터 대륙에서 암약하던 암살 집단의 계보에 대해 자세히 배운 적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카야의 숨결’은, 오르토나를 포함한 북부 지방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집단이다. 스틸레토를 주로 사용하며, 한때 ‘오베론의 손’과 비등한 세력 균형을 이루었던 유서 깊은 암살 집단.
자연히 또 다른 의문이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대체 이들은 자유 지하도와 무슨 관계인가.
‘북부 도처에 은밀한 거점을 만들고 움직인다 치면, 필연적으로 자유 지하도와 세력 반경이 겹치는 수밖에 없어.’
조반니를 만날 당시부터 그를 호위하고 있었으니, 아마도 서로 대립하는 관계일 리는 없겠지.
그렇다면 ‘카야의 숨결’은 자유 지하도의 산하 조직이 된 건가? 아니면 그저 도움을 주고받는 협력 관계 정도?
거기까지 생각하던 성진은, 어느 커다란 방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아까부터 줄곧 수상쩍은 기척이 감지되던 장소였다.
빼꼼 방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어 보니-
‘…….’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잠행복을 입은 여남은 명의 남녀가 조용히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단체로 가사 상태에 빠지기라도 한 걸까? 오러 활성이 바닥을 기는 꼴을 보건대, 아무래도 다들 정상적인 몸 상태는 아닌 듯했다.
‘…딱히 의식이 있는 것 같진 않군.’
그중에서 상당수의 인원이, 아까 달려들었던 암살자와 비슷한 또래의 여성이라는 점도 특이한 사항이었다.
그리고-
‘염상 결정……!’
그들의 머릿속에서 하나같이 빛나고 있는 돌의 존재를 확인한 성진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건 의외의 성과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나 거창하게 테오신테 론칭 쇼를 벌이고도, 테레에서 제대로 된 염상 결정을 가진 인간을 찾지 못했었지. 한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이렇게나 많은 염상 결정을 한꺼번에 발견하다니?
‘이들도 오랜 기간 각성차를 복용한 걸까?’
하지만 성진의 예감은 곧바로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염상 결정이라 보기에는, 그들 모두가 완전히 동일한 부위에 염상 결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왼쪽 두개골. 그것도 두정부와 측두부의 중간 지점에서 빛나고 있는, 획일적인 크기의 염상 결정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다키아누스의 비서에 따르면, 다키온의 생성 위치나 크기를 예측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탕약의 농도나 복용 기간과는 전혀 상관관계 없이, 철저하게 개체의 특성에 따라 결정될 뿐이라고.
따지고 보면 회색 역병 환자들도 그러지 않았던가. 대뇌 여기저기에 결정이 무작위로 생성되는 통에, 병이 진행됨과 동시에 대부분의 환자가 목숨을 잃고 말았지.
하지만 저것들은 모두 일정한 위치에서 빛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동일한 방법으로 외과 시술이라도 한 것처럼.
‘…아니, 아무래도 그건 너무 나갔나.’
이곳은 향수를 뿌려서 방역을 하는 세상이잖아? 체계적인 의학 지식이랄 것도 없는데, 뇌에 뭔가를 삽입하는 의료 기술 따위가 존재할 리가…….
하지만 그런 생각의 흐름과는 달리, 성진은 뭔가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개중 머리를 짧게 다듬은 한 남자의 머리카락을 헤집어, 두피에 나 있는 제법 길쭉한 흉터를 눈으로 확인했다.
‘……!’
성진은 다급히 다른 이들의 두피도 확인했다. 하지만 옆에 누운 여자도, 그 옆에 있는 또 다른 여자도, 머리카락을 들추자 매번 똑같은 위치에 길쭉한 상처가 드러났다.
외부에서 염상 결정이 삽입되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는 결정적 증거.
손끝이 차갑게 식으며, 동시에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한다.
‘이 세계에… 델크로스에… 정말 외과 수술을 대량으로 하는 놈이 있다고? 대체 누가?’
우선 떠오르는 인물이라면 시구르트 시구르슨 정도일까? 천 개의 세계를 거니는 이야기꾼이자, 멀쩡한 사람의 인격을 죽여 자신의 인형으로 부리는 놈이다. 그 자식이라면 동기도 충분하고, 수단도 궁리해 낼 법하지 않나?
-회색 역병에 관해 내가 아는 것들을 자세히 말해 줄 수는 없소. 그것 역시 어디까지나 시구르트 시구르슨의 향후 계획과 긴밀하게 맞닿아있기 때문이오. 그러나…….
얼마 전 만났던 레이디 이사벨라는 성진에게 그렇게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적어도 사람에게 직접 마물의 알을 심는 무식한 짓은 그의 소행이 아니었다오.
그녀의 말은 아마도 사실이리라. 즉 시구르트 시구르슨에게는 회색 역병을 일으키는 것보다 염상 결정을 만들어 내는 더욱 세련된 방법이 있다는 뜻이다.
성진은 지금껏, 그것이 대륙에 약차를 장기적으로 보급하는 일일 거라고 막연히 짐작해 왔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다면 어떨까? 그보다 더욱 깔끔하고도 확실한 방법이…….
‘…아냐, 그놈은 아닐 거야.’
잘은 몰라도 시구르트 시구르슨은 어딘가 탐미적인 구석이 있는 놈이었지.
하면 그놈은 로페룸의 알을 이식하는 것보다는, 사람의 두개골을 직접 여는 쪽을 훨씬 무식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성진은 시구르트 시구르슨이 이사벨라의 몸에서 도망칠 당시, 그의 영혼이 그리는 궤적을 눈으로 좇은 적이 있었다.
‘그때 놈에게는 그리 많은 선택지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어.’
다시 말해 시구르트 시구르슨은 한꺼번에 이렇게나 많은 수의 인형들을 만들어 낼 방법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다음으로 떠오르는 것은…….
‘다키아누스.’
흠, 놈이라면 제법 말이 되지 않나?
굳이 미개한 델크로스 차원으로 넘어와, 오랜 시간 대륙을 떠돌며 염상 결정의 생성에 대해 연구했다니까.
영혼의 성벽이 형성되는 과정을 관찰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사비로 사람들에게 탕약을 나눠 준 괴짜기도 하고.
만약 그 다키아누스였다면, 자신이 만들어 낸 염상 결정을 어떻게든 이용하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법도 한데.
‘물론 다키아누스는 수백 년 전의 인물이야. 이미 죽은 지 오래일 가능성이 높지만…….’
만에 하나, 그가 오랜 탐구 끝에 마침내 이정표에 가까운 다키온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면? 그로 인해 자신의 영혼을 무사히 보존하고, 또 염원하던 불로불사를 손에 넣었다면?
‘그렇다면, 아버지가 무리해서 내게 그에 대한 정보를 넘겨주었던 이유도…….’
성진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이성지이이인!]멀리서 마왕의 불꽃이 헐레벌떡 그를 향해 날아왔다.
[너도 알아챘지? 저쪽에 정말 엄청난 것이 있었어! 규상 세계의 법칙을 쉽게 이끌어 내도록 고안된 이상한 장치였다고!]아아, 그래. 그럴 것 같긴 했어. 이 차원에서 마법처럼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 생기면, 그 이면에는 반드시 규상 세계의 법칙이 숨어 있더라고.
성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같이 가 보자. 그전에 일단 이것들부터 처리하고.”
[…응?]그제야 주위를 둘러본 마왕이, 화들짝 놀라며 불똥을 사방으로 흩날렸다.
[헉! 이것들은 다 뭐야? 설마, 저게 전부 염상 결정들이야?]“그래, 마왕아. 저들을 잘 살펴봐.”
[뭐, 뭘…….]“어때? 저들에게 제대로 된 영혼이 남아 있는 걸로 보여?”
순간 무엇을 보았는지, 마왕 놈이 움찔 놀라며 불꽃을 동그랗게 말고 쪼그라진다. 그러더니 잠시 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을 내놓았다.
[…아니.]“그래.”
성진은 마지막 남은 스틸레토를 꺼내 들었다. 이미 영혼을 완전히 빼앗긴 이들이라면, 더 이상 농락당하지 않도록 여기서 끝장을 내 주는 쪽이 좋겠지.
* * *
성진은 방을 벗어나 21호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하?”
21호는 성진이 풍기는 지독한 피비린내에 잠시 당황한 듯했으나, 곧 표정을 가다듬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다치셨습니까? 그 습격자는 어찌되었습니까?”
“갑자기 쓰러졌어. 네 덕이다.”
“네?”
“네가 녀석을 조종하던 장치를 부순 것 같아. 잘 했어, 21호.”
성진이 생각보다 스산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뭔가를 더 보고하려고 입을 달싹이던 21호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래. 여기에 정확히 뭐가 있었지?”
성진은 엉망으로 부서진 제단과, 바닥에 굴러다니는 작은 구슬들을 눈에 담았다. 어딘가 눈에 익은 듯한 저 모양, 혹시 영혼석인가?
그러자 21호는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제 눈에는 마치 악마 숭배자들의 제단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부쉈다?”
“예. 일단 대단히 불길해 보였던 터라.”
“…….”
성진은 새삼 21호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정보원치곤 어린 나이다 싶긴 했는데, 거 은근히 막 나가는 놈일세. 다행히 이곳이 마기에 오염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정말로 악마 소환진이라도 있었다면 건드리는 즉시 침식이 일어났을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저 제단이 규상 세계의 법칙을 델크로스 차원으로 이끌어 내는 장치였던 말이군.’
21호가 열심히 때려 부숴 준 덕분에, 이제는 뭔가 의미 있는 정보를 알아내기는 힘들어 보인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구슬들 역시 대부분 금이 가거나 박살 나 있었다. 성진은 그것들 중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초록색의 구슬을 하나를 주워들며 생각했다.
‘또 이것들이 영혼석의 일종이라면, 여기에 깃든 영혼들이 염상 결정에 빙의해서 암살자들을 움직였을 테고…….’
바로 그때, 성진은 고도로 정제된 기도를 가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빠르게 이곳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지금까지 손쉽게 해치워 온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닌, ‘카야의 숨결’의 진정한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헉? 저 녀석들도 모조리 염상 결정을 가지고 있다고?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마침내 열댓 명이 조금 넘는 암살자들이 지하실에 모습을 드러내자, 마왕의 불꽃이 당황하며 성진의 머리 위를 빠르게 맴돌았다.
그 말대로, 암살자들의 측두부에는 동일한 크기의 염상 결정이 선연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오직 한 사람, 모두를 통솔하고 있는 민짜 눈썹의 여자만이, 염상 결정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
여자는 망연한 표정으로 엉망이 된 제단을 훑어보았다. 아마도 저 제단의 기능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던 거겠지.
‘근데 저 여자,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지 않나?’
성진은 묘한 기시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 이상하네. 저런 강렬한 인상을 가진 얼굴을 내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예상했던 대로랄까, 뒤쪽에는 다샤의 모습도 눈에 보인다. 그녀는 정신을 완전히 잃은 듯 보였는데, 온몸이 밧줄에 칭칭 감겨 마치 번데기 같은 꼴이 되어 있었다.
다샤에게 별다른 외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성진은 조금 너그러운 마음이 되었다. 다짜고짜 호두까기를 휘두르기 전에, 적어도 몇 마디 말은 섞어 볼 생각이 들었다는 뜻.
그래서 정겹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그러자 민짜 눈썹의 여자가 흠칫 몸을 떨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내 얼굴을 아나?’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지만, 성진은 일단 차분히 자신의 방문 목적을 먼저 밝혔다.
“내 일행을 돌려받으려 왔어.”
“…….”
“겸사겸사 너한테 몇 가지 물어볼 것도 있고.”
한데 상대의 반응이 의외다. 민짜 눈썹 여자가 잠시 주춤거리더니, 제법 공손한 어투로 되물어온 것이다.
“물어보다니… 뭐, 뭘 말입니까?”
“……?”
성진은 눈을 깜박거렸다. 첫 인상이 워낙 강렬해서 막무가내로 달려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정중한 태도로 나오는데?
“일단 내 일행부터 돌려줘. 대화는 그 뒤의 일이다.”
그러자 여자가 힐끔 성진의 눈치를 보며 항변했다.
“그, 그건 조금 무리한 말씀이 아닐깝쇼?”
“어째서?”
“그야… 저 애는 우리가 잡은 전리품이니까요. 만일 인질을 돌려받기를 바라신다면, 저희에게 그에 합당한 대가를 제시하셔야…….”
하하.
성진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퍼져 나갔다.
“잘도 지껄이는구나. 대가 좋아하네. 애초에 우리를 이곳에서 싹 없앨 셈이었으면서.”
“…헙!”
뒤에 서 있던 21호와, 민짜 눈썹의 여자가 동시에 헛숨을 들이켰다.
‘저, 저하! 제발 더 이상 저들을 자극하지 마십시오!’
21호는 애가 타서 죽을 지경이었다. 자신의 실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들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
반면 여자 쪽은 정곡을 찔려서 당황한 경우였다. 그녀는 불안한 듯 성진과 21호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곧 버럭 큰소리를 쳤다.
“그, 그렇다면 어쩔 겁니까? 전력은 어디까지나 우리 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합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위층에서 성진과 대등하게 겨뤘던 이와 엇비슷한 수준의 암살자들이 이곳에만 열 명이 넘어가니까.
애초에 테레로 우르르 몰려가 성진 일행을 싹 쓸어 버리려 했다는 것도 납득이 갈 지경.
‘근데 왜일까…….’
성진은 느긋한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대단히 절망적인 상황. 한데 성진의 예감은 모든 것이 어떻게든 잘 해결될 거라 말하고 있다.
전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민짜 눈썹이 섣불리 덤벼들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성진의 그 여유롭기 짝이 없는 태도 때문이리라.
“…….”
“…….”
그렇게 두 사람이 잠시 말없이 대치를 이어가고 있을 때였다.
“이거, 그냥 보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지?”
“맞아, 두고 보자니 조마조마해 죽겠어.”
침묵을 깨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다샤를 둘러매고 있는 덩치 큰 남자 암살자였다.
“……?!”
민짜 눈썹의 여자가 경악하는 가운데, 남자는 다샤를 멘 채 삐그덕 삐그덕 괴상한 움직임으로 성진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쟤는 정말 대책 없이 무모한 걸까, 아니면 용기가 넘치는 걸까?”
“둘 다일지도 몰라. 난 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고.”
“뭐, 그건 그래. 모레스는 모레스니까.”
“맞아. 모레스는 다름 아닌 모레스니까.”
남자는 마치 문답이라도 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일견 괴이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지만, 성진에게는 어째 익숙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말투.
‘…헤르나? 가데스?’
그때, 멍하니 그가 하는 양을 보고 있던 민짜 눈썹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마르코스? 대체 어떻게 말을 하는 거야? 그 ‘의식’을 받고 나면 절대로 말을 못 한다고 들었는데?”
“미안, 말 하는데.”
“그래, 할 수 있어.”
“너… 마르코스 선배가 아니구나! 대체 정체가 뭐냐?”
여자가 품에서 스틸레토를 뽑아내며 으르렁거린다.
그러자 마르코스라 불린 남자는 삐걱삐걱 괴상한 동작으로 뒤를 돌아보며 히죽 입꼬리를 찢었다.
“아, 걔는 쫓아냈지.”
“응, 멀리 쫓아냈어.”
“하나 알려 주자면, 말을 못 하는 건 육체 장악력이 너무 약해서야.”
“애초에 들어 있던 녀석이 완전 어설프게 만들어진 단말이었다고.”
“그렇다고 우리가 조종하기 편하다는 뜻은 아니고.”
“응, 우리도 나름대로 많은 불편을 감수하고 있어.”
거기까지 말한 남자는, 마침내 성진의 앞에 다샤의 몸을 털썩 떨구며 눈을 반짝였다.
“그러니까, 모레스. 우리의 도움을 절대 잊으면 안 돼. 알겠지?”
“맞아. 돌아오면 이번에야말로 함께 체스를 두는 거야. 알았어?”
이런 상황에서조차, 변함없이 체스에 미쳐 있는 녀석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