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462)
성황의 아이들-462화(462/469)
462. 축언 (2)
성황이 어떠한 질문도, 질책도 하지 않았기에 성진의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
하지만 그는 곧이어 또 다른 난관에 봉착해야 했는데, 바로 밤새 한잠도 자지 못해 안색이 꺼멓게 죽은 마사인 경이었다.
“…괘, 괜찮아? 마사인 경?”
성진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무리도 아니었으리라. 잠시 바람 쐬러 나갔다는 황자가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질 않으니 긴장으로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갈 밖에.
때문에 그는 기감을 곤두세우고 마을 어귀를 서성이다가 끝내 밤을 꼬박 새고 말았다는 모양이었다.
“저하! 대체 지금까지 어디에……!”
마사인은 성진을 보자마자 여느 때처럼 버럭 소리를 지르려 했다.
그러나 채 말을 끝내지 못하고 배를 움켜쥐었는데, 극도의 긴장이 풀리는 순간 위산이 왈칵 쏟아져 내렸기 때문이다.
“헉?”
기겁한 성진은 그를 다짜고짜 성황 앞으로 데려갔다.
“아니, 저하. 저는 정말로 괜찮습… 잠깐! 그것보다 어서 대답 좀 해 보십시오! 도대체 밤새 말도 없이 어딜 다녀오신 겁니……!”
…쿨.
놀랍게도 성황이 이마에 손을 대자마자 마사인은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다. 아마 지난번처럼 영혼을 강제로 다른 차원에 날려 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모레스. 마사인이 일어나거든 제대로 그를 마주하고 대화해야 할 것이다.”
잠잠해진 기사의 머리 위로 신성력을 쏟아 내며 성황이 나직하게 충고했다. 대단히 난감한 요구였다.
“으음, 아버지. 근데 그게 조금…….”
“…….”
“…네, 알겠습니다.”
향후 마주해야 할 마사인의 반응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어쩌겠는가, 지은 죄가 있으니 고분고분 대답할 밖에.
그 외에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마사인과 마찬가지로, 성진과 21호 역시 성황에게 듬뿍 신성력 치료를 받았다. 그리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자잘한 생채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밤새 암살자들을 패고 다니느라 은근히 피로가 쌓이기도 했고.
다샤 역시 성황에게 제대로 치료받았다. 다행히 그녀의 부상 자체는 그리 심하지 않았는데, 대신에 수일간 지속된 허기와 수면 부족으로 몸이 많이 축나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다샤는 성황의 치료가 끝나고도 바로 눈을 뜨지 못했다.
“아마 정신적 피로 때문인 듯합니다. 요 며칠간 잠시도 긴장의 끊을 놓지 않고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였을 테니까요.”
21호의 말에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다샤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레지나로 떠나지.”
자코모 밀로도 잡았고 아버지도 무사히 만났다. 그럼 더 이상 급한 일은 없잖아? 그래서 성진은 다샤가 깨어나길 기다리며 차분히 서류 작업을 시작했다.
“뉴비야, 그건 뭔데?”
그새 또 판게아 크로니클에 다녀왔는지, 오웬이 먹거리들을 잔뜩 짊어지고서 성진의 방을 기웃거렸다.
“사업 계획서를 좀 손보고 있어.”
“사업 계획서?”
“응. 올리버의 ‘준 상단 사업자증’을 반납하고 정식으로 황궁 투자를 받아야 하니까.”
황궁이 직접 투자하는 사업의 기준이란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비록 아멜리아 누님이 절차를 간소화해서 효율성을 대폭 높였다곤 하나, 그 내용까지 부실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니까.
한데 시골 촌놈인 올리버가 어느 세월에 모든 절차를 끝낼지 누가 알겠는가.
“올리버는 한시라도 빨리 어엿한 사업체를 차려서, ‘마사인 농법’으로 길러낸 테오신테를 온 대륙에 공급해야 한단 말이야.”
이건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올리버는 별 힘 안 들이고도 황궁 투자를 따낼 테고, 성진은 겸사겸사 자문료를 왕창 챙겨먹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오웬의 귀를 사로잡은 것은 어째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단어였다.
“…마사인 농법? 그게 대체 뭔데?”
“어, 앞으로 올리버는 마사인 경이 제공한 방법으로 테오신테를 재배할 거거든. 그리고 판매 수익을 빠짐없이 그와 나누게 되겠지. 일종의 농업 기술료랄까.”
그러자 오웬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해? 마사인 형님은 지금까지 농사라곤 지어 본 적이 없을 텐데?”
그 순진한 물음에 성진이 사악하게 이를 드러냈다.
“물론 세상에 그런 농법은 없어. 전부 사기 계약이지.”
“…엥?”
“하지만 때는 늦었어. 마사인 경은 이미 내가 준 서류에 서명을 해 버렸거든! 그러게 나중에 후회할 일 하지 말고 진작 조심해야 하는 거라니까.”
성진이 깃펜을 살랑살랑 흔들며 턱을 치켜세웠다. 알겠어, 오웬? 너도 잘 새겨들으라고. 마사인 경이나 로건 같이 잘 모르는 문서에 함부로 서명하면 인생 망치는 것도 순식간이란 말이야.
“한번 상상해 봐. 이후 얼마나 끔찍한 일들이 벌어질지. 마사인 경이 모르는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팔며 대륙에서 돈을 마구마구 벌어들이는 만행을 저지를 거야.”
“……?”
“그리고 마사인 경이 방심하는 사이에, 그 파렴치한 작자는 몰래 은행으로 숨어들어 마사인 경의 통장에 차곡차곡 출처 모를 돈을 쌓아 버리겠지.”
“……?”
“사업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액수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어. 그때가 되면 더 이상 손을 쓸 방도가 없다고. 마사인 경은 점점 높아져 가는 돈 방석에 올라 극도의 어지러움을 호소할 테지만, 이미 까마득히 멀어져 버린 그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 주는 이는 아무도 없을 거야.”
“……?”
“결국 죄 없는 마사인 경은 서명 한 번 잘못한 대가로 평생 돈방석에서 내려오지 못한 채 끔찍한 비명을 지르게 되겠지. 그것 참 무시무시하지 않아?”
크크큭!
성진이 음험하게 숨죽인 웃음을 흘리자, 작은 놋쇠 그릇에 앉아 있던 마왕이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이성진, 너 지금 뭐 하냐?]닥쳐! 이럴 땐 그냥 옆에서 같이 사악하게 웃으면 되는 거다. 이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마왕 놈아!
“음…….”
오웬은 대단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역시 일전에 성진의 요구로 잘 모르는 서류에 무지성 서명한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일이 만만찮아 보이네.”
“맞아. 완전 귀찮아 죽겠어.”
“근데 네가 괜히 여기서 바쁘게 일할 필요 있냐? 어쨌거나 우리는 곧 레지나로 돌아갈 거잖아. 그럼 전처럼 슈미트 지부장에게 맡기라고. 사업에 관해서라면 아무래도 그가 너보다는 전문일 거 아냐?”
“글쎄…….”
성진이 깃펜을 내려놓으며 슬쩍 미간을 구겼다.
“사실 그럴까도 생각해 보긴 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요즘 슈미트 지부장을 너무 부려먹는 것 같아서 말이지.”
이미 참연어 사업은 물론, 북부 경제 재건 사업까지 모두 그에게 일임한 상태다. 게다가 최근에는 성진의 알리바이가 되어 주는 등 개인 비서 노릇까지 수행하는 중이지.
아무리 ‘악마의 명부’로 목줄을 틀어쥐었다지만, 더 이상 그의 업무를 늘리는 건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였다.
“레지나로 돌아가면, 이참에 새로운 비서라도 하나 고용해 볼까.”
곁에서 성진 대신 일차적인 정보들을 취합하고, 사람들을 이리저리 굴려 줄 이가 있으면 좋을 텐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성진은, 곧 턱을 괴며 깃펜을 집어 들었다.
“뭐, 나중에 생각해 봐야겠다. 어쨌거나 다샤가 푹 쉴 수 있게 오늘 하루는 여기 머물 거니까. 그동안 쉬엄쉬엄 일이나 하지 뭐.”
* * *
[네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단다.]다샤는 지금 꿈을 꾸고 있었다.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 이제까지 완전히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꿈을.
[만약 네가 이곳에서 두각을 드러내면 그리 오래지 않아 프림로즈 환락가로 팔려가게 될 거야. 초반에는 그곳에서 제법 고생하겠지만, 그래도 너라면 점점 아세인의 지하 세계에 영향력을 넓혀갈 수 있을 테지.]그래, 생각났다.
그것은 다샤가 수도원이 운영하는 한 고아원에 들어간 날의 일이었다. 의기소침하게 앉아 담당 사제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처음 보는 여자가 방안으로 들어와 그녀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누구지? 이곳의 사제님인가?’
어린 마음에도 다샤는 여자가 몹시 의심스러웠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온통 검은색 일색인 옷차림에 심지어 머리에도 검은 베일을 뒤집어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게는 재능이 있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은밀하게 약점을 파헤쳐, 종국에는 그들 모두를 휘두르기에 충분한 재능이. 너를 모질게 착취하던 자들은 머지않아 하나둘 네 발아래에 무릎을 꿇게 될 거란다.]“…….”
다샤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에 불과했지만, 적어도 프림로즈 환락가가 대륙에 어떤 악명을 떨치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으니까.
흉흉한 시대였고, 빈곤한 이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었다. 그녀와 같은 고아들은 끊임없이 생겨났고, 그 중 상당수의 아이들이 환락가로 흘러들어 가는 것도 공공연한 사실.
게다가 다샤는 제법 얼굴도 반반한 편이었으니 운 나쁘면 인생이 그런 식으로 흘러갈 수도 있으리라 스스로 상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처음 만난 어린애에게 대놓고 그런 희망 없는 소리를 하다니, 저 사람도 참 배려심 없는 사제님이 아닌가.
[마음에 들지 않니? 그럼 다른 선택지도 있어.]“…그게 뭔데요?”
[되도록 눈에 띄지 말고 조용히 자신을 죽이고 지내렴. 그러면 네가 10살이 되기 전에 ’오베론의 손’에 발탁될 거야. 그들은 네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오랜 시간 공들어 훈련시키겠지. 넌 언젠가 오베론의 손이 배출한 가장 뛰어난 암살자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거란다.]암살자? 그건 상상해 본 적 없는 선택지였다.
[너는 늘 죽음을 몰고 다닐 거야. 네 손에서는 항상 피가 마를 일이 없을 테고, 너의 발걸음 뒤에는 사람들의 주검이 낙엽처럼 쌓여 가겠지. 마침내 너는 더없이 충실한 죽음의 사도가 되어, 온 대륙을 암살의 공포에 떨게 만들 수 있을 거란다.]“와…….”
그 무시무시한 예언에 어린 다샤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스스로 힘을 얻는다는 면에서는 언뜻 환락가보다 나은 선택지 같기도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라면 그 역시 너무나 삭막하고 처절한 인생이 아닌가.
[하지만 네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너는 ‘다샤’라는 본래의 이름으로 살기는 어려울 거야.]…사제님에게 내 이름을 말한 적이 있던가?
언뜻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다샤는 곧 그 의문을 깨끗하게 잊어버렸다. 지금 당면한 선택지가 어린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졌던 까닭이다.
어쩌면 여자의 예언을 단순한 헛소리로 치부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묘하게 뇌리에 파고드는 그녀의 목소리는 어린 소녀의 영혼을 뒤흔들기에 충분한 힘이 있었다.
그래서 다샤는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매달리듯 물었다.
“그럼 전 어떻게 해야 하죠? 사제님이 말한 것과 다르게 살려면, 제 이름을 끝까지 지켜 내려면 앞으로 뭘 해야 하나요?”
[…….]여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샤는 순간 베일에 가려 보이지 않는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고 느꼈다.
[…그래. 그렇구나.]여자가 다샤의 볼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곧이어 그녀로부터 풍기는 짙은 장미향이 가까워지고, 어깨 아래로 사르륵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이 서늘한 마찰음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다샤의 귓가에, 악마의 속삭임처럼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럼 네 힘으로 수도원장을 쫓아내 보이렴. 그럼 너에게 또 다른 새로운 길이 열릴 거야.]…진심인가?
이제 막 수도원에 들어온 작은 고아 소녀가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단 말이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빤히 그녀를 올려다보자, 여자는 우아한 손짓으로 다샤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걱정하지 말렴. 내가 너에게 작은 축언을 내려 줄게. 언젠가 네가 자신의 이름을 무사히 되찾을 수 있도록.]축언?
[다샤. 죽음이 풍기는 향기를 똑똑히 기억하렴. 그리고 너의 운명과, 운명이 점지한 모든 사명들을 그에게 맡기는 거야. 그러면 죽음은 아마도…….]기억은 거기까지였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다샤는 어느새 처음 보는 사제의 손에 이끌려 고아들이 모여 있는 허름한 식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 수도원에 온통 검은 옷을 입고 다니는 사제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 * *
수수께끼의 검은 여자와 나눴던 대화는 점점 다샤의 머리에서 흐릿해져 갔다.
하지만-
‘수도원장을 쫓아내야 해.’
수도원에서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다샤의 머릿속에서는 그러한 생각이 점점 확고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함께 지내는 고아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사제들은 조심스럽게 수도원장의 눈치를 살폈고, 그의 집무실에는 매일같이 수상한 손님들이 드나들었다. 수도원장의 손에 보석 반지가 하나둘 늘어가는 동안, 불쌍한 고아들의 행방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분명했다. 저 수도원장은 뭔가 끔찍한 비밀을 숨기고 있다.
“으와, 무섭다. 다샤 넌 사제님들 말이 맞는다고 생각해? 정말로 걔들이 주신께 기도를 올리지 않아 지옥으로 끌려간 걸까?”
새빨갛게 불어 터진 손을 호호 불던 라미라가 다샤에게 소곤거렸다. 그녀는 고아원에서 새로 사귄 친구였는데, 남들과 다른 피부색을 가진 다샤와 기꺼이 어울릴 만큼 털털한 소녀였다.
“그건 아냐. 분명 수도원장이 고아들을 어딘가로 몰래 팔아 치우는 거야.”
“팔아? 어디로?”
“아마도 레지나의 불야성이나 프림로즈 환락가겠지. 거기서는 우리 같은 고아들을 싼값에 구입해서 평생 지옥처럼 부려먹는다고 하더라.”
“히익! 정말? 그, 그럼 우린 어떡해?”
라미라의 호들갑에, 다샤는 그녀의 툭 튀어나온 광대를 바라보았다.
“…음, 넌 아마 괜찮지 않을까?”
다샤가 확답해 줄 수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서글프게도 라미라가 수도원에서 가장 못생긴 아이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차라리 주근깨 가득한 사내아이 페터라면 모를까, 그녀를 사려는 이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이익! 정말 고마워, 다샤! 그거 참 위안이 되는 소리네!”
“억! 정말 고마우면 이거 좀 놓지 그래?”
“닥쳐! 시커먼 바르샤 잡것아!”
“네가 할 소리냐? 흙이나 파먹고 다니는 아나톨리아 땅개가!”
엎치락뒤치락거리며 한참 쌈박질을 한 후, 둘은 몰래 숨겨 둔 빵 조각을 나눠 먹으며 화해했다.
“그래서 이제 어쩌려고?”
“응. 일단 수도원장을 외부 교회에 고발할 증거를 찾아야 해.”
수도원에서 자체적으로 해결책을 찾을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수도원의 최고 권력자인 원장이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한, 이곳의 사제들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할 것이 빤했으니.
“원장을 고발할 증거? 우리가 무슨 수로? 그냥 순환 근무하는 사제님들 중에서 착한 사람을 찾아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안 돼?”
“그런 식으로 무작정 호소해서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거야. 변변한 증거도 없이 원장을 모함하는 고아 새끼들의 말을 누가 믿겠어?”
거기다 이 일의 전말이 밝혀지면 수도원은 물론이고 교회의 위신에도 크게 금이 갈 터다. 일개 사제가 두 손을 걷어붙이기에는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사안.
‘그러니까…….’
차라리 수도원장의 작은 허물을 교회에 입증하는 쪽이 승산이 높았다. 교회 재산을 소량 횡령했다든지, 수도원의 규율 일부를 어겼다든지. 그렇게 크게 떠들썩해지지는 않으면서 책임자만 가볍게 갈아치울 수 있는 정도의 죄목을.
남보다 일찍 철이 들어야 했던 다샤는, 안타깝게도 그러한 교회의 생리를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앗, 다샤! 저기 수도원장이야. 이번에도 수상한 손님들과 함께 있어!”
“쉿! 함부로 쳐다보지 마, 라미라. 괜히 끌려가서 얻어맞을라.”
재빨리 고개를 숙인 다샤는, 그들의 대화를 조금이라도 엿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런 그녀의 귓가에, 언젠가 수수께끼의 여인이 속삭여 준 축언이 환청처럼 떠올랐다.
-다샤. 죽음이 풍기는 향기를 똑똑히 기억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