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469)
성황의 아이들-469화(469/469)
469. 축언 (9)
네이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불행 중 하나는, 오라클의 권능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하나도 잊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출생 직후부터 주변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들을 기억했다. 아직 말을 배우기 전이었음에도, 이해할 수 없는 소리의 음절들을 고스란히 머릿속에 저장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향후에 그는, 갓 태어난 자신을 향해 속삭이던 냉정한 베스세바의 목소리를 재조합해 낼 수 있었다.
-날 너무 원망하지 말렴, 아가야. 이건 모두 널 위한 일이다. 지금의 네게 있어서 이 힘은 독임에 진배없단다. 사람들이 네 신성력을 알아차리면, 너는 성황가의 살아 있는 성상이 되어 평생 신성력이 솟아나는 샘 취급받으며 착취당할 테지.
아마도 그 직후 ‘낙인’이 새겨졌으리라. 네이트가 그것의 위치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영혼을 저며 내는 극심한 고통에 곧바로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네이트에게 있어서 가장 큰 행운 중 하나는, 오라클의 권능으로 인해 얼핏 스쳐 들은 희미한 환청까지도 모조리 기억한다는 것이었다.
낙인이 새겨지던 날, 네이트는 그를 향해 다급하게 외치던 누군가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잠깐만! 그러지 마! 다른 더 좋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찰나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염상 결정을 통해 쏟아지던 온갖 사념들 속에서, 유난히 귀를 잡아끌던 그 또렷한 목소리는 이후에도 두고두고 네이트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언어를 익히고 그 의미를 온전히 알게 된 후에는, 목소리의 주인이 자신을 위해 베스세바를 온 힘을 다해 저지하려 했다는 것을 이해했지.
그래서 때때로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지곤 했다. 그저 삭막하기만 하던 출생 전후기에 거의 유일하게 온기로 남은 기억이었으니까.
이후로도 그 목소리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들려오곤 했다. 대개는 ‘낙인’을 새겼을 때처럼, 네이트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닥뜨린 순간이었다.
-새로 온 그 호위 기사를 조심해야 합니다. 기억해요. 절대로 그 작자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 포털을 쓰세요. 뒷일은 저한테 맡기고요. 전 이제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해졌거든요.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그저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지금-
애열의 끄나풀을 앞에 두고 스스로의 배에 보란 듯 검을 쑤셔 박은 이 상황에서, 네이트는 뜻밖에도 그때와 같은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이 양반아! 지금 미쳤어요?!]어른인 듯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천진한 어린아이 같기도 한 기묘한 울림.
오랜만에 들려오는 사념에 잠시 반가움이 일었지만, 네이트는 더 이상 그 목소리에 길게 집중할 수 없었다. 육체를 넘어, 영혼을 찢어발기는 지독한 통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니, 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왜 댁은 하는 일이 죄다 이따위냐고요!]목소리는 미친 듯이 화를 내고 있었지만, 거기서 전해지는 감정은 오직 걱정과 애틋함뿐이다. 네이트는 고통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를 향해 변명을 주워섬기고 있었다.
‘설령 영안으로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다 해도, 죽지 않은 다음에야 스스로의 영혼을 볼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절대 낙인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이지. 하지만 나는 지금 당장 내게 새겨진 낙인을 없애야 한다.’
[그래서 일단 죽으려 했다고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예?]‘아니, 그게 아니다. 정말 이대로 죽어 버리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으냐? 나는 그저 영혼 어딘가에 새겨져 있을 낙인을 없애기 위해, 그것이 있을 만한 위치를 찾아 영혼째로 도려내려 했을 뿐이다. 낙인의 일부를 훼손하는 것만으로도, 영혼을 옥죄고 있는 제약을 풀어 버리기에는 충분할 테니까.’
적어도 그의 영혼 어디에 그 방해물이 존재하는지를 특정할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네이트는 얼마든지 낙인을 비껴가는 우회로를 만들 수 있었다. 더욱이 그 우회로를 가득 채우고도 넘칠 만큼 강한 힘이 있음에야!
[…아니, 그게 또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허… 이거 진짜 골 때리는 양반일세…….]잠시 허탈하게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이윽고 결심을 마친 듯 네이트에게 말을 걸어왔다.
[제기랄! 좋아요. 알겠다고요! 저한테도 별다른 방법이 없네요. 당신이 이미 관측해서 확정해 버린 자해 이벤트를 개변하는 건 제게는 불가능하니까요. 우린 애초에 달리는 시간의 방향이 너무도 다르단 말입니다!]‘그렇다면…….’
[하지만 적어도 당신을 도와 그 미친 짓을 조금 빨리 끝낼 수는 있을 겁니다.]목소리는 애써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히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네이트에게 자신이 파악한 정보들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당신에게 새겨진 낙인은 크기가 대단히 커요. 목뒤에서부터 등 아래쪽까지 모조리 뒤덮고 있을 정도군요. 거기다 구조 또한 엄청나게 복잡해서, 어지간한 훼손으로는 작동을 멈출 수 없을 겁니다.]네이트도 어느 정도는 낙인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다. 이단 재판부가 선고하는 최악의 형벌. 바로, ‘악마 숭배자’를 나타내는 지독한 낙인이다.
그 복잡한 문양은 어디까지나 규상 세계의 법칙을 기반으로 고안되었다고 들었다. 때문에 한번 낙인이 몸에 새겨지면, 멀쩡한 성직자도 순식간에 신성력을 잃고 말았지.
아마도 자신의 막대한 신성력이 현실 세계로 흘러나오는 걸 막는 데는 그것이 최선의 방책이었으리라.
[물론 그 낙인에도 몇 군데 취약한 부분은 있어요. 바로 근처에 9겹의 동심원이 빽빽하게 감긴 문양이 있는데, 워낙 민감한 코드들이라 한칼에 9개의 코드를 박살 낼 수 있겠는데요? 지금 검이 뚫고 나온 곳에서부터 우상방으로 한 뼘 정도만 더 찢으면 될 겁니다.]한 뼘.
동일한 경로에 있는 내장들이 함께 베여 나갈 것을 고려하면 빈말로도 짧다고는 못할 거리.
그래도 네이트에게는 꽤 고무적인 소식이었다. 본래라면 낙인이 힘을 잃을 때까지 줄기차게 몸을 헤집어 볼 계획이었으니까.
‘한 뼘…….’
네이트는 이를 악물고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콰드득!
엄청난 출혈과 함께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격통이 일었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 그의 정신은 전에 없이 날카로워졌고, 급격히 확장된 시야는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동시에 파악하게 해 주었다.
“다, 당신 도대체…….”
입을 떡 벌린 채 혼이 나가 있는 타이아가 보인다. 검을 쥔 네이트의 손을 따라가는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끄르르르르…….
마티유 수도원장을 단번에 쳐 죽인 악마의 모습도 보였다. 수도원장의 숨이 끊어진 이후에도 건물을 저 좋을 대로 박살 내며 감정을 해소하던 악마는, 마침내 그의 시체에 흥미를 잃고 애스트로스 용병단과 고아들이 모여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준다.
그리고-
‘……!’
네이트는 처음으로 목소리의 주인을 얼핏 훔쳐볼 수 있었다.
몸을 휘감고 있는 불꽃과, 검붉은 화마의 빛을 반사하는 옅은 금빛의 머리칼. 희미하게 비치는 영혼의 모습을 한 그가 주저하며 말했다.
[어, 씨…. 내가 이런 미친 짓을 응원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이제 다 와 갑니다. 조금만 더 힘내세요, 아버…….]파앗!
그 말을 끝으로 그 영혼은 네이트의 시간대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춰 버렸다. 짐작건대 그가 현실에 간섭하는 데에는 모종의 제약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네이트에게는 더 이상 그의 응원이 필요치 않았다.
쩔꺽!
흥건한 핏물과 함께 드디어 영혼을 움켜쥐고 있던 제약이 부서지고-
파아아아-!
오랜 시간 억압되어 있던 강력한 신성력이 해방되며, 마치 폭발하듯 환한 빛줄기가 사방으로 터져 나온다.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은 그 눈부신 빛 속에서, 타이아는 넋을 잃고 눈물을 흘렸다.
“…아아, 벧엘라!”
어찌 그 광경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정도를 넘어선 성스러움은 가히 영혼을 유린하는 폭력인 것을.
위대한 옛 성인들, 아니 심지어 주신의 또 다른 화신이 세상에 재림한들 이와 같을까.
“애열이시여! 주신의 화신이시여! 이 미천한 종이 드디어 당신께서 세상에 존재하고 임하신 증거를 눈으로 목도했나이다아!”
애열 교단의 교구장, 타이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혼으로부터 솟구치는 충만한 신앙심을 느끼며 흐느꼈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촤아악!
곧이어 그녀는, 번개처럼 휘둘러진 네이트에 롱소드에 그대로 목이 날아가고 말았다.
* * *
덜컹덜컹.
“…….”
다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난 뒤였다. 그들은 깔끔하게 정화된 채 아세인으로 향하는 짐마차에 실려 있었던 것이다.
흔들리는 마차의 진동을 느끼며 멍하니 누워 있는데, 앞쪽에서 용병들이 옥신각신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거 놔! 날 말리지 말라고, 폴라! 내 이번에야말로 바트 저 녀석을 가만두지 않겠어! 감히 이 저스틴 애스트로스 님을 감쪽같이 속였겠다!”
걸쭉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 말투가 한없이 경박하게 느껴지는 남자였다.
그리고 뒤이어서 그를 타박하는 덤덤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게 무슨 정신 나간 소립니까? 우리 복덩이 신입이 어떤 활약을 했는지 눈으로 빤히 보고도 대장은 그런 소리가 나옵니까?”
“그야 물론, 녀석이 악마를 퇴치하는 데 어느 정도 공헌하긴 했지만……!”
“말은 바로 해야죠. 신입이 혼자 다 했잖아요. 우리야 어디 침식이 무서워서 악마 근처에 가까이 가길 했습니까?”
“……!”
“거기다 침식에 휘말린 불쌍한 아이들을 모조리 정화한 건 대체 누굽니까?”
그러자 남자는 허를 찔린 듯 잠시 말이 없더니, 곧 힘 빠진 목소리로 항변했다.
“하지만 그 녀석 때문에 우리도 피해가 만만찮다고! 그 쥐꼬리만 한 의뢰비를 받고 인명 구조에다 상급 악마 퇴치까지 하다니, 그런 보답 없는 헛수고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이야? 만약 녀석이 나한테 조사 결과를 제대로 보고만 했어도……!”
“물론 신입은 사전 조사를 제대로 하고 깔끔하게 보고서도 올렸어요. 만의 사태에 대비한 특약도 여러 개 제안하기에 그대로 계약서에 반영했습니다만, 설마 계약서 안 읽어 보셨어요?”
“아, 읽었지. 대충 읽긴 했는데… 아니, 잠깐만, 폴라. 한낱 하급 의뢰에 그런 복잡한 특약을 집어넣는 이상한 놈이 어디 있어?”
“그럼 기뻐하시죠. 다행히 우리 신입은 그런 걸 집어넣는 이상한 녀석이었고, 계약이 제대로 이행만 된다면 우리 용병단은 거액의 돈을 거저먹게 될 테니까요.”
그러자 남자가 움찔 놀라며 물었다.
“뭐야? 우리… 돈 벌었어?”
“네. 엄청 벌었습니다, 저스틴 대장. 까딱했으면 제국에 정식으로 성기사단을 요청할 판이었는데, 그걸 우리 용병단 선에서 무마한 거잖아요? 아마 구조한 고아원 아이들을 다 거두고도 돈이 남을걸요? 우리 신입이 정말 물건은 물건이에요.”
폴라라고 불린 여자의 폭풍 칭찬에, 남자는 잠시 기가 죽은 눈치였다.
“…그래서, 자넨 바트와 정식으로 계약하는 게 좋겠다는 말이야?”
“제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죠. 근데 신입 쪽에서 우리랑 정식으로 계약하길 거절했어요.”
“뭐? 또 왜!”
“바트가 저스틴 대장 같은 사람을 상사랍시고 깍듯하게 대접하기는 싫답니다.”
“…아니, 뭐라고오?”
남자가 씩씩거리며 어딘가로 사라지는 기척이 느껴진다. 아마도 그 ‘바트’라는 친구에게 한바탕 따지러 가는 거겠지.
동시에 같은 마차 한 편에서는, 나직하게 목소리를 죽인 또 다른 대화도 조곤조곤 들려왔다.
“구스타프 사제님. 정신이 좀 드십니까?”
여자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목이 잠긴 남자가 더듬더듬 질문했다.
“…아, 아이들은…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들 무사합니다. 침식 현상이 사라지고 제대로 안정을 찾았지요. 모두 사제님이 애써 주신 덕분입니다.”
“아아, 주신이시여!”
작은 기도와 함께 남자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네, 어림도 없었지요. 제 보잘것없는 신성력만으로는 아이들을 속절없이 잃었을 겁니다! 때마침 당신들처럼 대단한 용병들을 내려 주시다니, 참으로 주신께서 인도하심입니다.”
“쉿. 지나간 일은 너무 마음 쓰지 마시고 더 쉬시지요. 사제님께서는 신성력을 너무 많이 소진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거기까지 들은 다샤는 어쩐지 짙은 피로감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바트…….
구스타프 사제…….
본래라면 그녀의 인생에 일말의 접점도 없었을 이들. 그래서인지 어딘가 친숙하면서도, 이상하게 한없이 희미하게 느껴지는 이름들이었다.
…쿨.
의식이 희미해짐과 동시에, 그녀의 뇌리에서는 그 낯익은 이름들이 희미한 잔향을 남기며 스러져 갔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