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48)
성황의 아이들-48화(48/469)
048. 예감 (6)
해가 지고 있었다.
그러나 노을이 깔리고 이윽고 어두워졌을 서쪽의 하늘은 전에 없이 환하게 밝았다. 산등성이부터 북동쪽으로 돌아 들어가는 골짜기 전체를 덮는 거대한 불꽃이 솟았기 때문이다. 화전촌이었다.
엔리케가 힐긋 뒤로 눈길을 주었다.
“시작되었나 봅니다.”
네이트는 말없이 그 광경을 응시했다. 그의 눈은 축제처럼 환한 불빛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혼. 불타오르는 산 위로 투명한 영혼들이 하늘하늘 움직이며 허공으로 솟아오르고 있다.
아마도 저들 중 일부는 고통스러운 죽음에 몸부림을 치는 것일 테고, 또 일부는 삶의 미련을 버리지 못해 발버둥 치는 것이리라. 그래도 멀리서 보는 자에게는 모두가 그저 팔랑팔랑 춤을 추는 듯 보이는 것이다.
그들은 곧 몸을 돌려 관도를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아세인 관문 근처에 이르자 눈에 익은 관이 튀어나왔다.
엔리케가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보았지만, 네이트는 순순히 관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관짝이 아니라 당장 무덤에 누우라고 해도 들어갔을 것이었다. 딱 죽을 만큼 피곤했으니까.
스르륵. 뚜껑이 덮이자 그대로 의식이 끊어졌다.
길드 지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위가 깜깜했다.
멍한 정신으로 엔리케의 부축을 받으며 건물로 들어서니, 아슬란과 막스 영감이 초조한 얼굴로 네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던지 그사이에 안색이 거멓게 죽어가고 있다. 심지어 그에게 달려든 아슬란은 그의 로브 자락을 붙잡고 펑펑 울기까지 했다.
그리 살가운 관계도 아닌 노인네도 차마 외면하지 못하더니, 본 지 며칠 되지도 않은 네이트를 위해 이리도 마음을 쓴다. 참으로 정이 많은 소년이다 싶었다.
한창 감동의 해후를 나누고 있는데 로비 안쪽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으하하하하! 느려 터져 가지고, 이제야 도착했냐?”
기골이 장대하고 근육 발달이 훌륭한 남자 하나가 호탕하게 웃으며 로비로 나왔다. 길드의 실세이자 대륙의 몇 안 되는 소드 마스터, 아세인 지부장 저스틴 애스트로스였다.
“크크크큭, 폐하야. 너 이번에는 고생 좀 했다며? 아슬란 꼬마가 그러던데, 너 완전…….”
남자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키득키득 웃으며 그들을 향해 다가오다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네이트가 조용히 그를 향해 양팔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그의 손목에 감겨 있는 피가 흥건하게 배어 있는 붕대를 본 남자가 흠칫 놀라며 네이트의 눈치를 보았다. 순식간에 화기애애하던 로비의 분위기가 서늘하게 가라앉는다.
“저스틴.”
조용한 호명에 남자가 움찔 몸을 떨었다.
“한 번만 더 이런 장난을 친다면, 앞으로 자네 가게에는 무조건 30% 관세를 매기겠네. 알겠나?”
“뭐?”
저스틴의 눈은 휘둥그레지다 못해 아예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관세 30…. 야! 그건 완전 도둑놈 아냐? 천하의 아세인도 그런 짓은 안 한다! 게다가 내가 대체 뭘 수입한다고 관세를 부과해, 어?”
“수입하잖나? 브르타뉴 최신 유행.”
“뭐…….”
저스틴의 입이 떡 벌어졌다.
유행도 수입품이냐? 어? 야, 잘됐네, 그래! 대신 가격을 올릴 거다! 팍팍 올릴 거야! 우리 가게 제일의 고객이 니 마누라인 건 알고 있냐?
한참을 구시렁거리던 남자는 곧 순순히 오러 블레이드를 꺼내어 수갑을 잘라주었다.
탱강, 탱강. 깔끔하게 동강 나 바닥으로 떨어지는 수갑을 보며 아슬란이 탄성을 질렀다. 우와.
저렇게 방정맞아 보이는 인간이 실제로는 엄청난 실력자였다.
네이트가 수일 만에 겨우 홀가분해진 양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자니, 그 모습을 한동안 살피던 저스틴이 떨떠름한 얼굴로 물어왔다.
“…야, 너 괜찮냐?”
“……?”
이놈이고 저놈이고 오늘 왜 이러는 건가. 괜찮냐고 물을 거였으면 처음부터 장난을 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델크로스로 돌아가기 전, 네이트는 아세인 지부의 현 상황과 이번 일의 처리 방향에 대해 간단한 보고를 들었다. 그중에는 그가 화전촌에서 구출해 온 두 사람의 거취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족도 연고도 없는 막스 영감은 우선 길드에서 허드렛일을 도우며 생활하기로 했다.
그는 반평생 매여 있던 도적단에서 드디어 벗어났다는 생각에 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 좋아하는 술도 찾지 않았는데, 연이어 쏟아진 신성력 폭포가 알콜 금단증상까지 억제해 준 모양이었다.
아슬란의 경우에는 선택의 폭이 더 넓었다.
“재능이 많은 아이네. 약제사로서도 나무랄 데가 없으며, 심지어는 오러를 홀로 깨치는 대단한 재능을 가졌지.”
어린 시절부터 도적단에서 굴렀지만 드물게 바른 심성을 가진 아이였다. 네이트의 담담한 칭찬 세례에 소년의 얼굴이 기쁨으로 빛났다.
“아이의 의사에 따라 최대한 도움을 주도록. 유명 약제사의 보조로 우선 공부를 계속하게 하거나, 전도유망한 기사의 스콰이어로 소개장을 써주는 것도 좋을 듯하네.”
한데 그 말을 들은 아세인 지부장이 슬그머니 웃더니 아슬란을 향해 묘한 눈짓을 했다.
“흠, 그러잖아도 널 기다리면서 이 꼬마랑 이런저런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했지.”
또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 저스틴을 노려보는데, 아슬란이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한 채 앞으로 나섰다.
소년은 네이트의 앞으로 척척 걸어오더니 곧 조심스레 한쪽 무릎을 꿇으며 몸을 숙였다. 아마도 엔리케가 하는 것을 보고 그새 흉내를 내는 듯 보였는데, 고개를 숙인 자세가 어설프긴 하지만 제법 진중하다.
그렇게 절을 올린 소년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네이트에게 고했다.
“바트… 아니, 성황 폐하. 저는 앞으로 폐하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옆에서 엔리케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하나의 순진한 인생을…….”
옆에서 잡음이 들리건 말건 아슬란은 네이트를 올려다보며 또랑또랑하게 말을 이었다.
“검술 실력을 쌓아 델크로스로 가려고 합니다. 내년에 열리는 황궁 기사단 시험을 보고, 폐하를 지키는 근위대의 기사가 되어 항상 옆에서 보필하고 싶습니다. 반드시 그리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생각지도 못한 아슬란의 말에 네이트는 내심 당황했다. 도적단에서 탈출한 지 아직 하루가 지나지 않았는데 인생 계획이 너무 빠르다. 게다가 그 과정이 묘하게 구체적이지 않은가?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 바람을 넣은 놈이 있었다.
“흠흠, 내가 검을 좀 봐주기로 했어. 기사단 시험쯤이야, 이 위대한 저스틴 님께서 간단히 통과시켜 주지!”
음하하하하! 자신만만하게 웃는 주책없는 지부장을 한차례 흘겨준 다음, 네이트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소년에게 시선을 맞췄다.
“아슬란, 너는 아직 어리다. 벌써부터 모든 것을 미리 정하려 할 필요는 없느니라. 어린 시절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지금까지 해 보지 못했던 것들을 해 보고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누리기에도 부족할 텐데,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신중하게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떠하냐.”
그러나 아슬란은 고개를 저었다.
“폐하가 아니셨다면 저는 분명 오늘 토벌대에게 그대로 목숨을 잃었을 테지요. 지금 저의 생명은 폐하께서 주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저의 남은 생은 응당 폐하를 위해 바쳐야 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그는 어린 시절을 홀로 도적단에서 처절하게 굴렀다. 겨우 적응하고 나니 토벌대가 닥쳐 혈혈단신으로 플란도르의 국경을 넘기까지 했다. 열심히 살아왔으나 어린 소년이 겪기에는 지극히 고독하기만 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지난 며칠간 네이트를 따라다니며, 아슬란은 전에 없던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쫓고 쫓기는 긴박한 상황에서조차 누군가를 굳게 믿고 의지하고 따를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얻은 그 안정감과 유대감을 소년은 다시는 잃고 싶지 않았다.
“아슬란.”
네이트는 소년에게 다시 한번 만류하는 말을 하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일순, 그를 올려다보는 소년의 얼굴에 장성한 청년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가 몇 년 후의 아슬란이라는 것을 네이트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훌륭하게 자란 그 청년은 어린 시절 장담한 대로 근위대 기사단의 정복을 입고 있었는데, 힘든 전투 중이었는지 정복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피에 젖어 있었다. 그의 주위로 싸늘하게 식어 있는 다른 근위대 기사들이 보인다.
그는 짙은 회색의 하늘을 향해 힘겹게 검을 겨누며 서 있었다. 누구인지 모를 그 상대를 노려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랬더라면 나는 절대……!
그 장면은 무척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절규하는 청년의 목소리에 어린 비통한 기색이, 네이트로 하여금 소년에게 다시 한번 같은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확신에 차 있는 소년의 눈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올곧기 그지없었다.
“네,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
“…안 되겠습니까?”
저 간절한 눈에다 대고 그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델크로스가 또 하나의 훌륭한 황궁 기사를 맞이하는 날을 고대하겠다.”
네이트는 겨우, 잠겨가는 목을 가다듬어 그렇게 대꾸할 수 있었다.
* * *
찰랑찰랑.
작게 물결치는 물소리를 들으며 네이트는 눈을 떴다. 황궁 심처에 있는 작은 인공 연못이었다.
그는 연못 수면에서 몸을 일으켜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흠뻑 젖은 법복이 축축 늘어지며 무겁게 몸을 연못 바닥으로 끌어당긴다.
온화한 얼굴을 한 중년의 여인이 깨끗한 모포를 들고 그에게로 다가왔다. 언제나 든든하고 충직한 성 아우렐리온 기사단의 단장이다.
“두 차례 가량 정말로 심장이 멎으셨었습니다. 폐하.”
얼굴이 조금 초췌해 보이는 이유가 그것이었던가. 며칠간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자기 기사단장을 끔찍이도 위하는 프란시스에게 나중에 또 한 소리 듣게 생겼다.
“수고했네, 카트리나.”
“별말씀을. 황자님은 찾으셨습니까?”
네이트는 연못 밖으로 채 나오기도 전에 발을 멈추었다. 머리카락과 옷자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잠시 응시하던 그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이를 찾았네. 또 다른 클라노스가 되어 제국 밖에서 지내기로 했어.”
“…그러셨군요.”
그녀가 익히 아는 성황의 성격이라면 당장 아이를 데려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뭔가 일이 잘 풀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네이트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선 채로 한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한숨과 함께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솔로뮤, 그 작자를 그렇게 미워하지 말 것을…….”
카트리나는 무심코 숨을 들이켰다. 성황이 먼저 전 성황에 대해 언급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솔로뮤 클라인. 델크로스의 16대 성황이자, 신학 아카데미와 의회를 정치적 약점으로 단단히 옭아매고 있던 냉철한 군주.
어린 아들이 자신의 앞에서 피를 토하는데 그저 눈살을 찌푸리며 와인을 들이켜던 작자다.
어린 시절 네이트는 선대 성황을 보며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결국 그와 그의 어머니의 불행은 저자에게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저 작자를 죽여 버리면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와 똑같은 시선을 자신의 아이에게서 받게 되자,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새삼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비록 마지막에는 얌전히 대화에 응하는 듯 보였지만, 카이엔에게서는 이따금 그를 향한 미미한 살기가 전해져 왔다. 대륙 최대 권력자의 감시하에서 평생을 사느니, 차라리 기회를 봐 그의 숨통을 끊고 완전히 도망가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순순히 물러난 이유는 단 하나, 네이트에게서 도통 빈틈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카이엔과 대화를 하는 동안, 여기저기 검은 금이 간 아이의 영혼이 전해 오던 섬뜩한 악의는 아직도 뇌리에 생생했다. 영혼은 검은 눈물을 흘리며 쉴 새 없이 그에게 저주의 말을 쏟아냈다.
-저주할 거야! 저주할 거다! 내가 이렇게 아픈 건 모두가 너 때문이야!
-너의 영혼을 먹을 거야! 갈가리 찢어서 하나도 남김없이 먹어 치워 주겠다!
다른 영혼의 목소리는 들어도 정작 자신의 영혼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없는 카이엔이 절대 알아채지 못할 그의 본심이다.
“카트리나, 나는… 처음에는 그 아이가 말하는 자유를 주겠다고 생각했었네.”
사려 깊은 기사단장은 묵묵히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한데 지금은 자꾸만 그런 의심이 드는군. 혹시라도 나는 그 아이를 내 손으로 베는 일이 생길까 무서웠을 뿐일지도 모르겠어.”
네이트는 카이엔이 언제까지나 고분고분하리라고는 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이의 영혼이 망가질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제약의 축령을 아로새길 각오는 없었다.
망가져 가는 아이의 영혼이 다시 회복될 수는 있을까? 이미 임계점을 넘어 붕괴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완전히 삿된 무언가로 변해 버리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하나.
“다시는 내 아이를 향해 검을 들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카트리나는 그의 턱을 타고 뚝뚝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잠시 바라보더니, 곧 들고 있던 모포를 펼쳐 가만히 그에게 둘러주었다.
“폐하.”
“…….”
“혹여라도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운 확신에 차 있었다.
“폐하께서는 황자님께 폐하가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주신 겁니다.”
비록 그의 예감과는 다른 말을 하더라도, 언제까지나 그대로 믿고 싶어지는 굳건한 목소리.
“…그래.”
그래서 그는 늘 자신의 아이들에게 이 기사단장 같은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고 생각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