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51)
성황의 아이들-51화(51/469)
051. 클라노스 (3)
성황은 곧 알현실을 떠났다. 오전 정무 회의 전, 그의 업무 대행이었던 타티아나 황후를 만나 그간의 보고를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동안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예정이었다.
정무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다른 추기경들과 기사단장들 역시 하나하나 자리를 뜨는 중, 디고리 추기경만이 아직도 멍청하게 넋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잠깐 사이 지옥으로 떨어졌다 튕겨 올라온 것이나 다름없으니, 완전히 진이 빠질 만도 했다.
“디고리 추기경.”
카트리나가 옆으로 다가와 그를 부른다.
디고리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평소 늘 온화한 표정이던 그녀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폐하께서 당신 자녀들 또래에게 관대하신 점을 다행으로 아셔야 할 겁니다. 케네스 소년에게 혹여 불똥이 튈까, 당신의 망언 또한 넘어가 주신 것을 잊지 마십시오. 애초에 어린 학생들이 연루된 일이라 굳이 이단 재판부로부터 지켜주셨음을 모르십니까?”
“…….”
“만일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아닌 다른 자가 감히 모레스 황자님을 꾀어내어 그 생명이 위태로울 뻔했다고 칩시다. 어찌 되었을 줄 아십니까? 재판받을 기회도 없이 그 자리에서 목이 베였을 겁니다.”
그녀의 말에 조금의 과장도 없음을 디고리는 지금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오전 정무 회의 때는 이 점을 유념하시고 발언에 주의하셔야 할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카트리나 역시 자리를 떴다.
디고리는 그러고도 그들이 사라진 입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앉아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오전의 정무 회의는 성황의 오랜 부재 끝임에도 불구하고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황후는 유능한 여인으로 그간 별 무리 없이 성황을 대행해 정무를 꾸려왔기 때문이다.
곧 있을 탄신 연회 준비에 대해 소소한 세부 수정이 오고 갔을 뿐 회의는 늘어짐 없이 끝이 났다. 가장 큰 의제가 되리라 여겨졌던 디고리 저택의 사건은, 성회를 소집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마무리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 * *
진주궁에 평화로운 아침이 돌아왔다.
마사인 경은 어제에 비해 훨씬 표정이 좋아져 있었고, 곁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에디스 또한 이제는 여유를 되찾은 듯 편안한 모습이다.
어젯밤만 해도 무장한 기사들 사이에서 살벌하기 그지없는 대치가 오고 갔건만, 단 하루 만에 분위기가 이렇게 반전되다니.
성진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건 성황의 권력의 대단함에 놀라야 하는 거냐, 아니면 모레스의 입지가 형편없음에 놀라야 하는 거냐?
“수련이나 할까…….”
아침 식사를 뜨다가 문득 소리 내어 말했더니, 옆에 있던 마사인과 프란시스가 어이없다는 듯 성진을 바라보았다. 뭐 이런 속 편한 놈이 다 있지, 하는 속내가 뻔히 보인다.
“뭐 이런 속 편한 분이 다 있습니까.”
“…그걸 직접 말로 내뱉을 줄은 몰랐는데, 프란시스 경.”
밤새 진주궁에서 자리를 지켜준 고마움이 반감되려 하잖나.
어차피 성진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는 주의였다. 황궁 내 모레스의 입지를 높이는데 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차라리 바나하스 연공법 2식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배우는 것이 낫지 않은가.
그렇게 마음을 굳히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방해가 있었다.
“모레스…….”
리자베스 황비가 눈물을 글썽이며 방 안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언제나처럼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모습이다. 성진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이 사람은 어째 얼굴을 봐도 봐도 대하기가 영 편치 않았다.
“어마마마.”
“몸은 괜찮은 것이냐? 큰일에 휘말렸었다고 들었단다.”
“네, 괜찮습니다.”
“아아, 어제는 정말 걱정이 많았거늘. 또 오해를 살까 두려워 진주궁에 오지는 못하고, 그저 마음만 졸이는 고통의 시간이었단다.”
“……?”
무슨 오해를 사?
성진이 의아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살벌한 기세가 느껴졌다. 마사인 경이다.
그는 답지 않게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황비를 잠시 노려보더니, 그대로 휙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마땅히 취해야 할 예를 보이기는커녕 마치 못 볼 꼴을 보았다는 듯 못마땅한 태도다.
프란시스가 어리둥절하며 대충 황비에게 약식 예를 취해 보이고는 재빨리 그의 뒤를 따랐다.
이건 또 무슨 분위기지?
예절을 중시하던 각 잡힌 근위대 기사단장이 황비에게는 왜 저러는가.
한데 리자베스 황비의 반응이 또 의외였다.
평소 아랫사람을 쥐 잡듯이 잡는 권위 의식 투철한 여인이, 어쩐 일로 기사단장의 무례를 가만히 내버려 두고는 그저 성진을 바라보며 얌전히 눈물만 훔친다.
뭔가 싸한 예감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걸 눈치챘는지 마왕 놈이 말을 걸었다.
[황비는 전부터 조금 묘한 반응이긴 했어. 꼭 너한테서 뭔가를 숨기려는 것처럼.]‘…숨겨? 뭘?’
[글쎄…. 나도 그때는 이것저것 더 중요한 정보를 얻느라 정신이 없어 자세히 파고들지는 않았는데.]이놈이 말하는 중요도의 기준이 대체 뭘까.
[근데 참 이상하긴 했지. 네가 처음 여기 와서 기억을 잃었다고 할 때부터, 저 사람은 계속해서 속으로 그러더라고. 정말일까? 아아, 다행이다. 다행이다.]기억을 잃어 다행이다?
의문은 풀리지 않고 찝찝함만 더해졌다. 그러고 보니 저 사람, 얼마 전에는 성진이 약혼녀들을 기억하는지 떠보기도 했었지.
-과거는 그저 흘려보내는 것만으로 모두가 기뻐할 테지요.
혹시 타티아나 황후의 말은 리자베스 황비를 겨냥한 이야기였나. 그렇게 생각하니 저 뾰족한 눈매의 여인이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대단히 처연하면서도 아름답다. 설마 저 움직임 하나하나가 계산된 것이 아닐까 의심하는 것은 지나친 생각이겠지.
심지어 눈가를 쓸어내는 손수건까지도 드레스와 색깔 맞춤이었다. 고운 자수 부분이 겉으로 잘 드러나도록 절묘한 각도로 쥐어져 있고.
귀부인의 생리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의심하려고 드니 어쩐지 그녀의 모든 행동이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늘 보중하거라. 내 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그저 눈앞에서 바라봐야 하는 부모의 심정은 그 자체가 지옥과도 같거늘.”
그의 복잡한 속내를 알 리 없는 황비는 성진의 팔을 부여잡은 채 그렁그렁한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모레스, 아가. 이 어미는 두 번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단다.”
적어도 그 눈에 담겨 있는 걱정만은 분명 진심으로 보였기에, 성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찝찝하다.
그리고 잠시 후, 성진은 연무장으로 달려 나와 정신없이 칼춤을 추고 있었다.
오러를 단전에 묶어둔 채로, 늘 하던 준비 운동 대신 황실 기사단 표준 검술을 1식부터 5식까지 연이어 펼쳐낸 것.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몸을 움직였을까, 성진은 그제야 무척이나 흐뭇한 미소를 띠며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이야, 개운하다! 찝찝함을 해소하는 데는 역시 수련만 한 것이 없지!’
[하여간에 단순한 인간.]‘닥쳐!’
잠시 명상으로 달아오른 몸을 식힌 성진은, 몸속에서 한층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오러를 팔다리로 흘려내며 으쓱거렸다.
‘야, 그래도 너 없는 동안 내가 얼마나 오러 연공에 많은 진척이 있었는지 알아? 나 어쩌면 진짜 천재였는지도 모른다고.’
마왕 놈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퍽이나 그렇겠다.]그러나 성진이 오러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제법 그럴싸하게 바나하스 1식을 펼쳐내자 마왕의 기색이 변했다.
‘어떠냐. 좀 대단하지?’
[…….]얼떨결에 감탄사를 뱉은 마왕 놈은 뭔가 배알이 꼴렸는지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긴, 성진이 생각하기에도 이번에는 좀 멋지게 1식을 소화한 것 같기는 했다.
“우와…….”
놀란 것은 마왕뿐만이 아니었는데, 마침 연무장에 있던 하벤 외 상주기사들이 입을 떡 벌리고 성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황자님, 대체 무슨 일입니까? 어떻게 하루 만에 그렇게 실력이 확 늘 수가 있나요?”
“1식이 거의 완벽한데요? 지금 당장 2식으로 넘어가도 무리 없겠습니다!”
“어, 음. 그래?”
성진은 머쓱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의 전투 후 바나하스 식대로 오러를 흘려내는 것이 조금 더 부드러워진 것 같기도 하고.
반복 학습이 무섭다더니, 생각해 보면 어제 애벌레를 잡을 때도 무의식적으로 배운 대로 오러를 흘렸던 것 같다. 그런 행동들이 실전과 어우러지며 오러 운용과 동작이 조금 더 조화로워진 것이다.
‘드디어 2식으로 넘어가는 건가…….’
문제가 있다면 정작 가르쳐 줄 검술 선생이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는 것.
어제 사건 이후 종일 성진의 옆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던 마사인 경이, 뭣 때문인지 황비를 본 후 튀어 나가 버리고는 아까부터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제자는 배울 준비가 다 되어 있는데, 검술 선생이 너무 농땡이 부리는 것 아닌가?
성진은 잠시 목검 휘두르기를 멈추고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나저나 어제 마사인이 보여주었던 그 일검, 그건 정말로 대단했었지.’
오러로 만들어진 긴 금빛의 검과, 소리 없는 그 정갈한 일격.
그리고 뒤를 이은 거대한 후폭풍과 함께 반트라 모스의 애벌레가 그대로 동강 났었다.
그건 대체 무슨 기술이었을까.
외기를 검 형태로 만든 것은 알겠는데, 멀쩡한 오러 공격에 베인 부분이 왜 갑자기 폭발하지? 혹시 일부러 오러를 폭주시키는 건가?
성진은 잡고 있던 목검에 가만히 오러를 흘려보았다. 예전 마물의 기를 쓸 때처럼, 그냥 무기를 강화한다는 느낌으로.
몸속에서 흘리는 요령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아마 무기에 씌우는 방법 역시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애벌레와 싸울 때 그런 방식으로 진검에 오러를 운용했지만 별 무리가 없었으니, 아마도 괜찮을 거다.
지잉. 목검이 가볍게 떨려온다.
마물의 집게발과는 달리 목검은 내구가 약하고, 그 위를 흐르는 힘의 운용 또한 그리 세련되지는 못한 편이지만.
‘그래도 대충 이 정도 힘은 버텨주는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근처에 있던 하벤이 동그래진 눈으로 성진을 바라보았다.
‘자, 일단 오러를 씌웠으니, 여기서 막 요동치게 하면…….’
우우우웅. 목검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아니, 이건 아닐 거다.’
성진은 목검 안의 오러를 다시 안정시키며 생각했다.
무기 안에서 그냥 오러를 마구 꼬아봤자 무기를 망가뜨릴 뿐이지, 정작 벤 자리에서 강한 폭발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뭐랄까, 안정을 유지하다가 베는 순간, 그 찰나에 폭주를 시켜야 할 텐데.
후웅.
오러에 감싸인 목검을 횡으로 베며 성진은 타이밍을 가늠했다.
이다음에…. 아니다, 휘두른 뒤에는 너무 늦지.
오러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는 이미 목표물을 베어낸 뒤가 된다.
후웅.
그러니까 베어 들어가는 찰나에 바로 시작해야 타이밍이 맞아.
아, 좀 늦었다. 대체 어떻게 그렇게 순간적으로 폭주시킬 수가 있지?
후웅.
이번에도 타이밍이 늦다. 목검이 심하게 요동치다 돌아온다.
좋아, 이번에는 조금 더 빨리,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퍼억!
순간 정말로 뭔가가 터져 나가긴 했다.
그러니까, 목검이.
조각조각 난 뾰족한 나무 조각들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성진에게도 일부 날아들었다.
“황자님!”
연무장의 기사들이 기겁을 하며 달려온다.
[히익?]머릿속에서 마왕 놈이 호들갑을 떨었다.
뭐? 왜?
무심코 마왕에게 묻던 성진은 순간 따끔한 통증에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어…….’
손바닥의 피부가 왕창 터져 나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갑자기 시야도 붉어졌는데, 이마에서 쏟아진 피가 눈으로 흘러들었기 때문이다. 살펴보니 날아든 파편이 얼굴과 몸 여기저기 박혀 있었다.
[히이익?]‘야, 진정해. 왜 네가 놀라고 그래?’
[지금 니 꼴이 어떤지 알고는 있냐? 대체 뭔 짓을 한 거야?]주위를 둘러싼 상주기사들의 반응을 보니 꼴이 말이 아니기는 한 모양. 새파랗게 질린 하벤이 소리친다.
“저하! 저하! 괜찮으십니까? 아니, 괜찮지 않은데, 내가 뭔 소릴!”
“의원, 의원을 불러! 아니, 신관을!”
“일단은 여기 좀 누우십쇼! 네? 피가 흐릅니다. 일단 자세를 좀 낮춰주십쇼!”
“마사인 경! 마사인 경을 찾아!”
아, 괜한 짓을 했네. 마사인에게 또 혼나겠다.
어제 임사 체험을 하고 진주궁에서 그 난리를 쳤는데, 하루 만에 다시 이런 꼴이 되었다. 왠지 죄책감이 든 성진은 기사들의 말에 얌전히 바닥에 누웠다.
“일단 조각을 뽑아, 지혈을…….”
“의원을 기다려! 이렇게 피가 흥건한데 뭐가 보이냐? 괜히 어설프게 누르다가 남은 조각이 밀려 들어가면 어떻게 해?”
“사제! 사제는 아직이냐?”
기사들이 갈피를 못 잡고 사방팔방 뛰어다니고.
[으아아아, 어아아아!]머릿속의 마왕까지 난리를 치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아! 마사인 경!”
한 기사가 반색하며 외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서 마사인과 프란시스가 허둥지둥 연무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어, 마사인 경. 저렇게 굳은 얼굴로 막 뛰어오니까 좀 무서운데…….
마사인은 성진의 상태를 보더니 마치 자신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의원은? 의원은 불렀나? 프란시스! 일단 신성력을……!”
그런데 침착한 얼굴로 성진을 살피던 프란시스 경이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 박힌 조각이 많다. 이대로 신성력을 흘리면 나무 조각이 들어간 채로 상처가 아물 거야. 게다가 의원이 손을 쓰더라도 저 손은 상처가 너무 깊어 후유증이 남을 것 같다.”
“그럼…….”
허망한 얼굴로 되묻는 마사인에게 프란시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폐하께 가야 한다.”
성진은 기겁했다.
네? 뭐요? 잠깐만!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그래서 이러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오전 정무 회의를 마치고 본궁 회의실을 나오던 성황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들것에 실려 온 성진을 마주하고는 잠시 말이 없었다.
“…….”
성진이 민망함에 눈알만 떼룩떼룩 굴리고 있는데, 잠시 후 성황이 눈을 감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내 그렇게 사고 치지 말라 일렀거늘.”
어, 음.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