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52)
성황의 아이들-52화(52/469)
052. 클라노스 (4)
신성력.
주신이 이 세계에 내려주신 축복이자 주신의 존재를 가장 명확하게 입증하는 증거.
그러나 이것을 단지 성스러운 신의 힘이라고 뭉뚱그려 정의할 수는 없었다.
상처를 아물게 하고 질병을 이기도록 돕는 [치유]의 힘.
악운을 멀어지게 하고 행운을 부르는 [축복]의 힘.
삿된 것들을 가려내고 부정한 것들을 없애는 [멸악]의 힘.
신성력을 보유한 자는 이 세 가지의 특성을 모두 보이는 것이 특징인데, 물론 그 정도에는 다소 개인차가 존재했다. 보통은 한 가지에 특출한 반면, 나머지 두 가지는 있으나 마나일 정도로 미미한 경우도 많았던 것이다.
엑소시즘을 주 과업으로 삼는 성 테르바키아 기사단이 주로 멸악의 힘에 특화되어 있고, 봉사와 희생을 과업으로 삼는 성 그라지에 기사단은 주로 치유나 축복의 힘을 보유한 자가 많은 것이 그 예이다.
물론 고위 사제들이나 추기경 정도 되면, 보유한 신성력 자체가 워낙 강대했기 때문에 세 가지 특성에 모두 강한 경우도 많았다. 그쯤 되면 특화된 분야에 한해서는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이적을 행사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만큼 [기적]에 어울리는 광경은 달리 없으리라.
눈부시게 하얀빛이 모레스 황자의 몸을 감싸자, 순식간에 상처에서 나무 조각들이 밀려 나가며 새 살이 차오른다. 가죽이 터지고 근육 일부가 찢어발겨졌던 손 역시 매끄러운 근막이 재생되고 희고 보드라운 새 피부가 자라났다.
그 많은 상처들이 흉터 하나 남지 않고 매끈하게 없어져 버렸다. 심지어는 지난 수일간 하루 종일 연무장에서 구르느라 조금 그을렸던 얼굴까지 뽀송하게 밝아진다.
그야말로 막대한 생명력 그 자체가 한 사람에게 퍼부어지는 경이.
그것이 일반인들이 보는 [기적]의 광경이다.
그런데 성직자들의 눈에는 조금 다른 것들이 보였다.
성황과 황자를 감싸고 있는 오색의 찬란한 아우라. 주변으로 넓게 퍼져 나가는 은은한 신성의 향기. 이따금 언뜻 성황에게서 엿보이는 밝은 금빛의 후광.
어찌 이 광경을 보고 감히 주신의 대리자를 의심할 자가 있으랴.
고위 성직자일수록 혹은 보유한 신성력이 강할수록, 그 광경은 더욱 강렬하고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오오…….”
“주신이시여…….”
완전하게 압도되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성호를 긋는 고위 사제들을 보라.
디고리 추기경의 경우에는 완전히 경도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 심지어는 저 괴팍한 베니투스 추기경마저 성호를 그으며 눈시울을 촉촉하게 적시고 있었을 정도.
물론 신성력이 전무하여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들것 위에 멀뚱하게 누워 있던 성진은, 갑자기 회의실에서 사람들이 달려 나와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울기 시작하자 그저 당황스러울 따름이었지만.
이윽고 상처가 아물고 통증이 완전히 사라지자, 성진이 들것에서 일어나 멀쩡해진 오른손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와, 이게 신성력…….’
아무것도 모르는 성진이 보기에도 성황의 능력은 범상치가 않았다. 어제 프란시스가 몇 번 보여준 치유력과는 차원이 다르다. 상처가 흔적도 없이 아무는 것은 물론, 심지어 흘러나온 혈액마저 제대로 재생이 된 듯 약간의 빈혈기조차 남지 않았다.
성황이 성진의 이마에서 손을 거두며 한숨을 쉬듯 말했다.
“얌전히 수련이나 하고 있으라 하지 않았더냐.”
그러나 성진은 억울했다.
“어, 하지만 아버지. 저 수련하고 있었는데요? 저는 시키신 대로 말을 잘 들었…….”
그러나 그는 채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순간 성황의 눈썹이 꿈틀 움직이더니 예고 없이 딱밤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따악.
“꾸엑!”
성진은 이마를 부여잡고 들것 위를 뒹굴었다. 뭐지? 왜 목검이 터질 때보다 더 아픈 거 같지?
그러거나 말거나, 성황은 자리에서 일어나 들것 옆에 풀 죽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마사인에게 다가갔다.
“폐하…….”
“저 녀석이 유별나 사고를 치고 다니는데 왜 네가 스스로를 탓하느냐, 마사인. 내 너를 검술 교사로 보낸 것이지 보모로 보낸 것이 아니다.”
마사인의 얼굴이 웃는 건지 찡그린 건지 모를 표정으로 잔뜩 일그러진다. 성황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다음 고개를 돌렸다.
“루이스.”
“예, 폐하.”
“오후 일정이 어떻게 되나?”
충직한 시종장은 조금 난처한 얼굴을 했다. 마침 날짜상으로는 모레스 황자와의 알현을 잡아야 하는 날이지만, 아무래도 지난 수일간의 밀린 공식 일정이 너무 많았다.
“폐하, 아무래도…….”
수석 시종장이 말끝을 흐리자 성황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점심 준비는 되었네.”
하지만 폐하. 아침도 거르시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만류하는 수석 시종장에게 간단하게 손을 휘저어 보인 성황은, 아직도 이마를 감싸 쥐고 끙끙거리는 성진을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너는 나와 잠시 얘기를 좀 하자, 아들아.”
딸꾹.
갑자기 왜 딸꾹질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성진은 성황의 집무실까지 얌전히 끌려갔다. 온몸에 피 칠갑이 되어 있는 상태였지만 두 사람 다 그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법복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앞서 걷는 성황의 뒤를 졸졸 따라가면서, 성진은 이따금 그의 뒤통수를 힐끔힐끔 살폈다. 어째 이 양반이 좀 피곤해 보이는데, 기분 탓인가.
집무실에 도착해 시종들을 물린 성황은, 책상에 앉아 손깍지를 끼더니 턱 끝으로 슬쩍 맞은편의 소파를 가리켰다.
“앉거라.”
“넵.”
“설명.”
“넵!”
성진은 오러를 목검에 흘리게 된 이유에 관해 열심히 설명했다. 왜 목검에 흘린 오러를 폭주시키려 했는가.
그래서 우선은 마사인이 애벌레를 벨 때 보여준 멋진 일격을 설명하게 되고, 또 그러다 보니 디고리 저택에서 벌어진 전투에 관해서도 간단하게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얘기가 나온 김에 최근 오러 연공법에 얼마나 진척이 있었으며, 전투 후 갑자기 연공 숙련도가 확 늘었다는 것도 자랑처럼 떠벌리게 되었고.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성황이 바쁜 것 같으니 일단 이야기를 많이 해서 가급적 시간을 때워보자고. 그러면 야단맞을 시간이 좀 줄지 않을까.
의외로 당장 호통이라도 칠 것 같았던 성황은 그저 조용히 성진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래서 오러를 폭주시킬 타이밍을 잡고 있는데 갑자기 목검이 펑 하고, 뭐 그렇게 된 겁니다.”
“…….”
성진이 긴 설명을 끝내고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는데,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성황이 벽시계를 슬쩍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마사인이 사용했다는 그 기술은 [오러 폭사]라고 하는 것이다.”
오. 야단치기는 포기한 것 같다.
“황궁 기사들 사이에서는 [폭풍 베기]니 [하늘을 가르는 잔월]이니 하는 터무니없는 별명으로 불리지만, 무시해도 좋다. 네가 보기에 오러를 폭주시킨 것처럼 보였던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실제 기술의 원리는 조금 다른 것이다.”
성황은 간략하게 그 기술의 요지에 관해 설명했다.
핵심은 무기에 흘려내는 오러가 아닌, 무기 밖으로 형상화된 외기의 검 면에 해당하는 얇은 오러의 층이다. 그러니 일단은 안정적으로 오러 블레이드를 만들어 낸 이후라야 시도해 볼 수 있는 기술인 것이다.
오러의 폭주처럼 보이는 것은 실은 오러에 일정한 진동수로 울리는 검명을 실어 날리는 것에 가깝다고. 즉 무작위로 오러를 요동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극도로 제어된 진동을 중첩시켜 파괴력을 극대화시킨다는 것.
결론은 아직은 네가 흉내 낼 깜냥이 되지 않으니 얌전히 오러 층이나 쌓으라는 말이었다.
“발상 자체는 재미있는 것이었다만, 무기에 대고 시험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짓이었다. 알겠느냐?”
“네…….”
이제 겨우 오러 입문에 든 초보자가 욕심이 과하긴 했지.
면목이 없어 볼만 긁적거리고 있는데 집무실 밖에서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수석 시종장이었다.
“폐하, 이제 알현실로 드실 시간입니다.”
성황은 작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긴, 이리 설명을 해줘도 뭔가 새로운 발상이 생기면 또 해보고 싶어지지 않겠느냐.”
“음…….”
차마 부정은 못 하겠다. 성진 역시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본인의 성격적 결함을 잘 알고 있었다.
성황은 집무실 입구로 발을 옮기면서 허리에 있던 검대에 손을 가져갔다. 철컥 소리가 나며 길쭉한 검이 풀려 나온다. 그는 그것을 검대째로 말없이 성진에게 내밀었다.
“……?”
반사적으로 받아 들자 그리 무겁지만은 않은 진검의 무게가 양손에 감겨들었다.
“이제는 목검 대신 그걸 가지고 놀거라. 무슨 장난을 치건 여간해서는 부러지지 않을 거다.”
“어… 감사합니다?”
완전 혼날 줄 알고 잔뜩 긴장했는데, 검을 받았다.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더니 성황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린다. 성진으로서는 처음으로 보는 미소라고 할 만한 표정이었다.
그는 성진의 정수리를 두어 번 가볍게 툭툭 두드리고는 몸을 돌렸다.
그대로 집무실 밖으로 나서며 성황은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모레스.”
“네?”
“마사인에게는 본인 흉내를 내려다 사고가 났다는 말은 하지 말거라.”
어제부터 유난히 자책이 심한 기사단장의 이야기다.
성진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호두까기?”
본궁 밖에서 성진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던 마사인이, 그의 허리에 매여 있는 검을 보더니 눈을 커다랗게 치뜨며 외쳤다.
호두까기? 뭐야, 그게?
그의 말에 하벤을 포함한 진주궁의 상주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네? 호두까기요?”
“성황 폐하의 애병? 정말로 그 호두까기입니까?”
수수해 보이는데 나름 유명한 검인가 보다.
성황의 애병이라니, 뭔가 전설의 무기라도 되는 걸까? 근데 이름이 왜 그따위야?
성진은 새삼스레 검을 뽑아 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검은 별다른 장식이 없는 그저 보통의 롱 소드처럼 보였다. 단지 검신이 얄팍하고 조금 짧은 대신 힐트가 길어 양손으로 가볍게 휘두르기도 좋아 보였다. 장성한 어른이 쓰기보다는 모레스 또래의 소년에게 더 적합해 보이는 검이다.
검 날은 광이 조금 죽은 독특한 회색의 금속이었는데, 날이 그다지 매끈하게 갈려 있지도 않았다. 빈말로도 손질이 잘된 검이라고는 못 하겠다.
제국의 지존이 쓰기에는 어째 너무 초라하지 않은가?
그런데 상주기사들의 말은 달랐다.
“이게 단단하기로 유명해서 숫돌로도 갈리지 않는다는 그 검이로군요!”
“새로 벼려보려고 대장장이가 화로에 넣어도 잘 달궈지지도 않는다며?”
“먼 옛날 드래곤이 호두를 까먹으려고 만들었다는 그 전설의…….”
잠깐. 여기 그런 세계관이야? 드래곤이 있어?
그런데 왜 호두를 까먹으려고 검을 만들어?
거기다 전설의 검이라기에는 이름이 좀. 호두까기라니, 으스스한 무언가가 연상되지 않는가.
그러니까.
어쩐지 호두보다는 사람 뚝배기를 잘 깰 거 같은 그…….
아니나 다를까, 하벤이 주위를 잠시 살피더니 비밀 이야기를 하듯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성황 폐하께서 어린 시절 한창 전선에서 활동 중이실 때, 이 검에 대가리가 깨진 사람이 수천수만을 넘는다고 들었습니다.”
정말로?
성진이 황당해하고 있자니, 다른 상주기사들이 다가와 한두 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네. 정말입니다. 박살 난 머리로만 산을 이룰 정도였다고 하죠.”
“그 산에서 흐르는 피가 거대한 강을 이루고…….”
“아직도 그곳에서는 밤마다 머리 없는 귀신들이 울부짖으며 돌아다닌다는…….”
“…….”
이 양반이 대체 나한테 뭘 준 거야.
어지간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는 프란시스 경조차도 이번에는 제법 놀란 모양이었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성진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 검을 한시도 떼어놓고 계신 적이 없었는데, 대체 뭐라고 하셨기에 폐하께서 그 검을 황자님께 주신 겁니까?”
성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수련하다가 목검이 부러졌다고 하니까 대신 가지고 놀라고 하셨어. 이건 잘 부러지지 않을 거래.”
마사인은 대단히 충격을 받았는지 동공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목검 대신… 가지고 놀라고?”
쯧. 프란시스가 혀를 찼다.
“마사인. 너는 그 되도 않는 환상을 이제 접을 때도 되지 않았냐? 그러니까 저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전설의 무구가 아니란 말이다.”
마사인 경, 호두까기에 대한 동경이 있었나 보다.
“아니, 그래도 저 검은…….”
“어릴 때 성황 폐하가 종종 산에서 저걸로 호두를 까주실 때부터 알았어야지.”
어, 정말 호두 까는 용도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