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54)
성황의 아이들-54화(54/469)
054. 클라노스 (6)
호두까기.
마사인이 처음 그 검을 본 것은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도 전의 일이다.
당시 델크로스는 내전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1황녀의 세력을 흡수하며 갑자기 세가 강해진 2황자 브레이든이 황궁마저 점거해 버리자, 1황자파는 수도의 북문 부근까지 후퇴하여 전력을 재정비하던 차였다.
그러던 중 16대 성황이 갑작스레 서거했다.
-비열한 브레이든 놈! 분명 놈이 아바마마께 해를 끼친 것이 분명하다!
1황자 카메론은 벌게진 눈으로 이를 갈았다.
마사인은 불안한 얼굴로 그의 아버지 카메론을 바라보았다.
당시 황실 아카데미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그는, 1황자파가 수도에서 후퇴할 때 급히 그를 찾아온 친위대의 손에 끌려 여기까지 따라오게 되었던 참이었다.
그의 형인 제이든과 어머니인 황자비는 수도에서 철수하던 중, 경비대와의 마찰로 채 피신하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저주받을 브레이든 놈! 황위에 눈이 멀어 기어이 악마를 끌어들이다니!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
아내와 첫째 아들을 어이없이 잃은 이후, 1황자는 간혹 이렇게 미친 사람처럼 굴 때가 있었다. 뜬금없이 부하들에게 화를 내거나 근거 없는 의심을 철석같이 사실이라 믿으며 욕지거리를 쏟아냈다.
-황실에, 이 신성한 델크로스의 황실에 악마종이 숨어들었다! 네놈들은 눈을 뜨고도 보지를 못하느냐! 천년의 성국 델크로스도 이제는 끝이란 말이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는 틈만 나면 황궁 방향을 무섭게 노려보며 삿대질을 했다. 가끔은 검을 뽑아 들고 허공을 향해 휘두르기도 했는데, 전력이 보강되는 대로 당장이라도 수도로 쳐들어갈 기세였다.
그렇게 이 두 세력의 전면전이 되는가 싶던 찰나, 갑자기 이들을 중재하겠다는 자가 나타났다. 브르타뉴 왕실에서 파견되어 추기경과 함께 잠시 수도를 방문했다는 리슐리외라는 자였다.
마사인은 어린 마음에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황위를 두고 두 형제가 서로에게 칼을 뽑아 들었다. 이미 황자비와 황손의 피를 본 뒤였다.
이제부터는 한쪽이 승리하면 다른 한쪽은 전멸할 뿐. 대체 이 구도의 어디에 중재의 여지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리슐리외에게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카메론은 제법 심각하게 중재 제의를 받아들였다. 1황자파의 참모진들은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며 갑론을박을 벌이더니, 급기야 소규모의 협상단을 꾸리기에 이르렀다.
돌아가는 상황은 점점 마사인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될 리 없는 협상이 아닌가.
특히 리슐리외라는 자.
반 가면으로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이따금 음침하게 웃는 그 작자는 여간 꺼림칙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불길한 예감은 곧 현실이 되었다. 협상을 하겠다며 나간 카메론의 일행은 그 길로 영영 돌아오지 못했던 것.
피투성이가 된 호위 기사 하나만이 간신히 살아 돌아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저, 저하의 말씀이… 전부, 사실이었습니다. 악마가… 황궁에 악마가 있습니다! 크헉!
그는 그 말을 내뱉은 후 갑자기 칠공에서 피를 뿜어내며 죽어버렸다.
-저주…….
치료를 위해 호위의 옆에 있다 피를 뒤집어쓴 사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저주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모두 이곳에서 피해야 합니다!
곧 1황자 진영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피를 뿜으며 쓰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친위대 기사들과 사제들, 그리고 시종들 몇몇만을 거느린 마사인은 간신히 그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며칠 사이에 부모님과 형님을 모두 잃었지만, 마사인은 상실을 실감할 틈도 없었다. 그들을 단숨에 집어삼킨 그 모호하고도 불길하기 짝이 없는 위험이 어느새 성큼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수도에서는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 기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고, 저주의 기운은 여전히 마사인 일행을 쫓고 있었다.
1황자파의 잔당은 하나 남은 황손인 마사인을 데리고 북쪽의 관문 요새로 숨어들어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그 후로 수도에서는 연신 믿을 수 없는 소식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황궁에 악마가 있다. 2황자가 악마 숭배자였으며 1황자에게 응징당했다.
-아니다, 실은 1황자가 2황자에게 속아 살해당했다.
-오래전 행방불명되었던 3황자가 돌아왔다. 엄청난 난봉꾼이지만 유례없이 강하단다.
-성기사단을 이끌고 황궁의 악마들을 쓸어버렸다. 그가 결국 새로운 성황이 되었다.
하나같이 놀라운 소식뿐이라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수도에서부터 그들을 쫓아온 악마종의 저주가 마침내 요새 전체를 집어삼켰다.
성기사들과 사제들의 기도로 버티던 것도 잠시, 1황자파의 사람들은 하나둘 온몸에서 피를 뿜어내며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맨정신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극심한 공포였다.
-부디 보중하시옵소서. 황위를 이을 적통은 오직 마사인 님뿐입니다.
마지막까지 그렇게 당부하던 충직한 친위대 기사단장이 두 눈에서 철철 피를 뿜으며 쓰러져 버린 후, 마침내 굳게 잠긴 요새 안에는 마사인만이 홀로 남게 되었다.
소년은 쓸쓸한 마지막을 예감하며 가만히 구석에 앉아 죽음을 기다렸다. 며칠 사이에 너무 극심한 심력을 소모한 탓인지,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멍한 상태였다.
그가 악마종의 저주와 피투성이의 시체들 사이에서 홀로 이틀을 더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마기에 강한 성황가 특유의 체질 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흘째가 되던 날.
아침부터 요새 밖이 콰앙, 쾅 하며 한동안 소란스럽더니, 갑자기 누군가가 굳게 잠긴 철문을 가볍게 베어버리고 요새 안으로 들어왔다.
“다 죽어버렸다고 하더니 이런 사기꾼들을 보았나. 아이 하나가 살아 있지 않나.”
쿵! 먼지를 일으키며 바닥으로 쓰러지는 철문 너머로, 제법 훤칠하게 키가 큰 남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밝은 빛에 마사인이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리고 있자니, 남자는 검을 갈무리하며 성큼성큼 그를 향해 다가왔다.
“어릴 때의 얼굴이 조금 남아 있구나. 너는 제이든이냐, 아니면 마사인이냐?”
초면인 듯한데 어쩐 일인지 그는 마사인을 아는 것 같았다.
“…마사인… 입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묘한 아우라 때문일까, 남자에게는 절로 높임말이 나왔다.
“그래. 마사인.”
그는 피바다가 되어 있는 요새 내부를 둘러보며 잠시 눈살을 찌푸리다, 마사인의 이마를 향해 예고도 없이 손을 뻗었다. 움찔 놀라기도 전에 그의 손에서 전해진 빛이 온몸을 감싼다.
“…어?”
포근하다. 그렇게 느끼자마자 자잘한 생채기들이 사라지고 온몸에 활력이 샘솟기 시작했다. 며칠간 굶은 통에 기운이 없던 몸이 갑자기 생명력으로 가득 차오른다.
무엇보다 수도에서부터 끈적하게 달라붙어 오던 저주의 기운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사제가 아닌 마사인도 그 불길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저주였건만. 그것이 이리 간단하게 사그라들다니,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살았다.
마사인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는 그 끔찍한 저주로부터 완전히 구원받은 것이다.
그것을 인식한 순간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요새의 사람들이 죽어 넘어갈 때까지도 크게 동요가 없었던 몸이, 마치 이제야 제대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몸은 이제 괜찮아졌을 터인데, 왜 아까보다 더 떨고 있느냐? 아직도 어디가 불편한 게냐?”
그리고는 마사인의 머리 위로 한 번 더 빛의 폭포가 쏟아져 내린다. 그 환한 빛이 마치 절대적인 안전을 약속하는 상징처럼 느껴져 갑자기 울컥하며 감정이 북받쳤다.
소년이 무릎을 감싸 안고 말없이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하자, 그제야 몸 상태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남자는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는 천천히 문가에 기대앉더니 잠자코 소년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마사인은 자신의 모습이 지금 얼마나 꼴사나운지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지옥 같던 며칠을 겪으며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이 갑자기 풀리자 눈물이 쉬이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울었을까,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서늘한 눈으로 요새 밖을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곧 마사인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일어설 수 있겠느냐? 지금 여기서 나가야 한다.”
마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며칠간 미동 없이 앉아 있던 몸이었지만 남자의 신성력 덕분인지 움직이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들자, 그제야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막연하게 나이가 많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는 아직 소년처럼 앳된 모습이 남아 있는 청년이었다. 심지어는 마사인보다도 그리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는다.
단정한 검은 머리와 맑은 회색 눈이 낯설면서도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이 기분이 묘했다.
남자는 힐끔 바깥에 한 번 더 눈길을 주더니 마사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냥 내 뒤를 따라 걸으면 된다. 갑자기 무언가 나타나더라도 너무 놀라지 말거라.”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피식 웃고는 몸을 돌려 요새 밖으로 걸어 나갔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엉망으로 부서진 요새의 외벽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까부터 밖이 시끄럽다 했더니, 이 지경이 되느라 그랬던 모양이다.
마사인은 남자에게서 건네받은 수통을 홀짝거리면서 부지런히 그의 뒤를 따랐다.
남자는 성큼성큼 걸으면서 이따금 허공을 향해 중얼거리듯 혼잣말을 했다.
“내가 발견하지 못했으면 이대로 묻어버리려고 했나?”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지, 네놈들이 걱정할 일이 아니지 않나.”
“이제 너희들의 말은 믿지 않아. 대화는 끝이다. 채널을 닫아라, 코른시임.”
하는 행동만 보면 미친 사람이 따로 없는데, 그의 침착한 목소리며 이지가 뚜렷한 눈 때문인지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마사인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하나 보다 싶었을 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이렇게 신뢰하게 되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스르륵. 어느 순간 그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별다른 장식이 없는 둔탁한 회색의 검이다.
그 검이 곧 눈부신 하얀빛으로 덮이더니, 검보다 한 치 반이 더 긴 순백의 긴 칼날이 모습을 드러낸다. 대단히 깨끗한 외기의 발현이었다.
‘오러 블레이드?’
마사인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소드 마스터? 저렇게 젊은 사람이?
사악. 남자가 그대로 전방을 향해 가볍게 팔을 휘익 휘두르나 했다.
쿠아앙!
순간 저 멀리 떨어진 요새 외벽 한쪽이 폭발하듯 박살이 나고 말았다.
마사인이 움찔 놀라는 사이 그는 다시 한번 성의 없이 검을 휘둘렀다.
쿠르르르! 쿠웅! 왼쪽에 있던 창고 같은 건물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마사인이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데, 남자가 갑자기 뒤쪽을 돌아보더니 사선으로 길게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아아-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아까까지 마사인이 숨어 있던 요새 건물 전체가 일시에 폭삭 내려앉았다.
마사인의 턱이 저도 모르게 아래로 툭 떨어졌다.
대체 여기서 저기까지 거리가 얼만데……!
그런데 그때 마사인의 눈에 이상한 것들이 보였다. 무너지는 요새 너머로 무언가 시커먼 것들이 도망치듯 멀어져 가는 것이었다.
얼핏 검은 들개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시커먼 불가사리 모양의 괴생명체였다. 그것은 다섯 개의 다리 중 하나를 머리처럼 위로 들고, 나머지 네 개의 발을 마치 네발짐승처럼 움직이며 껑충껑충 뛰어다니고 있었다.
‘악마종……!’
그제야 마사인은 남자가 지금까지 무엇을 향해 검을 휘둘렀는지를 깨달았다.
워낙 남자의 검이 화려한 폭발을 일으키고 있어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자세히 보니 요새 여기저기에 들개 크기의 검은 악마종들이 숨어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년 떠나 있던 사이 수도도 참으로 웃기는 꼴이 되어 있구나.”
남자는 한숨을 쉬며 다시 몸을 돌려 황궁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보여준 위력 덕분인지 악마종은 쉬이 근처에 다가오지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서는 조금씩 그들을 따라오고 있었다.
이따금 그 삿된 것들이 거리를 조금 좁혀오나 싶으면.
콰아앙!
어김없이 남자의 검이 휘둘러지고 곧 화려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날 남자가 보여준 그 압도적인 광경들을 마사인은 아마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수수한 회색의 검과 그 위로 희게 빛나는 깨끗한 오러 블레이드. 그저 무심하게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체 낭비가 없는, 정갈하다 못해 아름답기까지 한 검의 궤적. 무시무시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하는 파괴력.
그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소년의 뇌리에 선명하게 박혀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