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73)
성황의 아이들-73화(73/469)
073. 염상 결정 (4)
환한 불빛과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
슬쩍 숨어들어 뭔가 빌리기에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라 잠시 주저했지만, 성진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래도 이 꼴로 나갈 순 없으니까.’
성진은 숙소 근처까지 다가간 후 마왕에게 말했다.
‘야, 저기에 마리아 경이나 쿠르트 경이 없는지 확인해 봐.’
만에 하나라도 상급기사가 있다면 어설픈 오러 은폐 따위 단숨에 간파당할지도 모른다.
다행히 잠시 머릿속에서 뿅 하고 사라졌던 마왕이 곧 돌아와서 말했다.
[둘 다 아예 숙소 내에는 없어.]‘좋아!’
성진은 오러 은폐를 사용한 다음 재빨리 숙소 안으로 숨어들었다.
기사 숙소 1층에는 휴게실로 사용되는 넓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 기사 넷이 모여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빈 술병들뿐 아니라, 아예 커다란 오크통 하나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것을 본 성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
뭐, 상주기사들 대부분이 술값을 위해 자원했다니, 비번인 날 이러한 광경이 벌어지는 게 당연한 것인지도.
어디까지 돌아봐야 하나 했는데, 다행히 휴게실 입구 근처에 보급품으로 보이는 낡은 망토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성진은 슬그머니 휴게실 안으로 팔을 뻗어 개중 깨끗해 보이는 망토 하나를 거머쥐고는 재빠르게 몸을 물렀다.
그대로 살짝 빠져나가면 될 일이었다.
마침 누군가 두두두두 복도를 달려와 휴게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쾅!
“칼멘 경 아직 안 왔어요? 지금 어디 있어요?”
공교롭게도 퇴로가 막혀버린 성진은 재빨리 반대편 복도로 몸을 숨겼다.
엇차. 부동심, 부동심.
“오, 클로디아 경. 너도 한잔 할래?”
“됐어요. 그나저나 칼멘 경, 왜 안 들어와요? 내일 저랑 근무 바뀌었는데.”
“그놈 오늘 비번이었어. 근무표 바뀐 거 아직 전달 못 받았을걸. 바쁘면 내가 대타 뛰어줄까?”
“술이나 좀 깨시고 그런 말씀 하세요, 선배.”
클로디아 경은 잠시 투덜거리는 듯하더니 이내 술자리에 합석했다.
“아, 결국 내일 내가 땜빵해야 하나. 한 잔만 줘봐요.”
“그래. 일단 쭉 마셔.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고.”
다시 술자리가 왁자지껄 시끄러워지는 것을 확인한 성진은 망토를 뒤집어쓴 후 조심스럽게 움직이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드르륵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번에는 술 마시던 기사 하나가 휴게실 밖으로 나온다.
그는 하필이면 하나뿐인 숙소 입구로 비척비척 걸어가더니, 외벽에 기대서서는 바지춤을 끄르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노상 방뇨할 거면 멀리 나가서 하라고!
“후배 좀 잘 챙겨주세요. 선배는 칼멘 경이랑 같은 4기사단이잖아요?”
“야, 내가 챙기기 싫어서 그러는 줄 아냐? 너도 알다시피 요즘 그놈 좀 겉돌잖아.”
“겉돌아요?”
“응. 본래 그놈이 2기사단이랑 껄끄럽긴 했는데, 요즘은 다른 놈들하고도 데면데면해.”
“…그래요? 왜죠?”
클로디아 경의 질문에 선배라 불린 기사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너는 몰랐냐? 그거 전부 3황자 때문이야.”
“우리 저하가 뭘 어쨌는데요?”
“헐. 얘도 우리 저하 타령이야. 요즘 진짜 왜들 이래?”
그러는 와중에 밖으로 나갔던 기사가 돌아와 휴게실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성진은 자리를 뜨지 않고 복도에 기대선 채 가만히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솔직히 요즘 파견 분위기 너무 이상하지 않냐? 술자리에서 다들 그 돼지 새끼를 안주로 씹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언제부터 천재 황자님이고 우리 저하야? 어?”
“그건 그렇지.”
“예전 그 일 때문에 칼멘 녀석은 아직도 2기사단에 고개를 못 들고 다니는데, 정작 그 2기사단 놈들까지 다들 황자라면 정신 못 차리고 천재, 천재 하면서 떠받들고 있으니, 원…….”
“쿠르트 경이 문제라니까. 그 양반도 2기사단 출신이면서 은근히 황자를 챙긴다고.”
“다들 머리가 어떻게 된 거지. 그 개망나니가 언제 다시 패악질을 부릴 줄 알고.”
그러자 클로디아 경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너무 함부로 그렇게 말하지들 마세요. 저하가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는 너는 뭘 그렇게 잘 알아? 예전에 2기사단과 3황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는 하냐?”
“그건…….”
“모르면 말을 마. 마사인 경이 기사단장이 되고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지만, 예전 2기사단 사람들은 진주궁 방향으로는 오줌도 안 싸던 시절이 있었다더라.”
“맞아. 들어보니 엄청난 일화가 한둘이 아니더라고.”
“…….”
클로디아 경이 이익, 하는 소리를 내더니 곧 꿀꺽꿀꺽 뭔가를 들이켜기 시작했다.
연신 옆에서 오오 하는 탄성이 들리는 걸 봐서는 열 받은 김에 술을 엄청 마시는 모양인데.
타악!
잔을 거세게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감정이 고조된 듯 높아진 목소리로 그녀가 외쳤다.
“네에. 물론 저는 신입이고, 예전 일은 잘 몰라요. 하지만 한 가지는 똑똑히 압니다. 사람은 옆에서 직접 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거요!”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선배들도 그 당사자가 아니라 소문만 듣고 욕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 2기사단 사람들은 정작 별말 없잖아요?”
“야, 너도 알잖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돼지 개망나니가 얼마나 못돼 먹었었는지…….”
“지금은 아니잖아요. 돼지 아니잖아요! 개망나니 아니잖아요!”
“어어. 이놈 벌써 취하는 거 같은데?”
“저하를 제대로 봐달라고요. 우리 저하가 은근 속이 깊으시고 어른스럽다고요!”
“그래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마셔.”
기사들이 한동안 클로디아 경을 살살 달래는 듯하더니, 잠시 후 화제가 전환되었다.
이런저런 잡담과 얼마간의 음담패설이 오가고, 어색해졌던 분위기가 다시 화끈하게 달아오른다.
성진이 그 자리를 떠난 것은 그로부터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리 넉넉하지 않은 오러가 고갈될 기미가 보이자, 성진은 서둘러 기사 숙소를 빠져나와 오러 은폐를 해제했다.
“후우…….”
잠시 호흡을 고르면서 성진은 방금 들었던 정보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예전에 모레스와 2기사단 사이에 뭔가 큰 사건이 있었고, 그 일에는 칼멘이라는 기사가 연루되어 있다. 그는 그 일로 아직까지 2기사단과 껄끄러운 관계이고.
예전 평판을 생각하면 아마도 대부분은 모레스 놈의 잘못일 거다.
최근까지도 칼멘이 성진에게 대놓고 불손한 기색을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겠지.
[신경 쓰이냐?]‘…조금은.’
신경 쓰이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일단 모레스의 몸에 들어와 있는 이상, 성진은 결코 모레스 놈의 예전 행적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기억이 없다는 핑계로 유야무야 넘어가고는 있지만, 개중에는 그것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응어리가 남아 있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오히려 지금까지 성진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상냥한 것이다.
‘…아멜리아는 정말로 천사였구나.’
[어이구, 이 팔불출아.]문득, 칼멘이 되바라지게 대꾸하던 것이 생각났다.
-왜요? 제가 말씀드리면 기억은 하십니까?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가 진주궁 파견 근무를 하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를 끝낸 상황이라는 거겠지.
모레스에게 조금이라도 문제의 소지가 될 만한 자는 아예 진주궁 출입을 못 하게 하는 성황이 내버려 두고 있기도 하고.
어쩌면 칼멘은 단지, 황자가 자신의 잘못을 모조리 잊어버리고 유유자적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기 힘들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건데?]‘내가 뭘 어쩌겠어.’
지금에 와서 과거 모레스의 잘잘못을 일일이 가리고 수습할 생각은 없었다.
대부분 덮여가고 있는 일들을 괜히 들쑤실 필요는 없는 데다, 성진에게는 또 그럴 의리도 없지.
뭐, 그래도 전후 사정을 감안해서 칼멘 놈이 앞으로도 다소 건방지게 틱틱거리는 정도는 봐줄 용의가 있다.
고갈되었던 오러가 빠른 속도로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성진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 멀리서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클로디아 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하아! 남들이 뭐라 그래도 저는 앞으로도 평생! 저하를 따를 거예요오!”
성진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어렸다.
클로디아 경,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하고 있었나?
좋아. 만약 인사고과가 있다면 적극 반영해 주지.
[하벤이라는 놈은 그렇게 질색을 하더니?]어, 그놈은 안 돼.
* * *
성진이 기사 숙소에서 얻은 소득은 몸을 가릴 망토만이 아니었다.
이런저런 쓸데없는 잡담을 듣던 중 기사단이 이용하는 개구멍의 존재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황궁을 몰래 드나들 수 있는 통로 같은 건 아니고.
그나마 검문 횟수가 적고 절차가 그리 까다롭지 않은 루트라는 말이었다. 만취한 기사들도 크게 눈총받지 않고 드나들 수 있다나.
[어차피 너는 오러 은폐하고 몰래 나갈 거 아냐?]‘그래도 마주치는 경비 인원이 적은 건 무시 못 하지.’
그래서 성진은 기사들이 말한 온실 정원 옆 [제2 동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델크로스 황궁의 내성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은, 희게 빛나는 석제로 축조되어 있는 높은 담벼락이었다.
사람이 타고 넘기는 좀 부담스러울 듯 보이는 높이였지만 그뿐.
‘거대 마물이 한 번이라도 들이받으면 그냥 무너질 거 같은데…….’
어쩐지 외적의 침입이나 공성전의 상황은 그리 염두에 두지 않은 듯 예스러운 외양이라고 성진은 생각했다. 감히 누구도 쳐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할 거라는 자신감인가.
제2 동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철창 한 겹으로 된 얇고 화려한 단조대문으로, 경비라고 해봤자 문의 양옆에 서 있는 황궁 기사 두 사람이 전부.
‘개구멍이라더니 정말 경계가 허술하구나.’
간간이 등불을 든 경비병들과 근위대 기사들이 스쳐 지나가기는 했지만, 빈도가 그리 높지는 않다.
막 두 팀의 경비조가 교차하여 반대 방향으로 저만치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성진은 오러 은폐를 유지하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황궁 기사 둘이 붙어 있는 문으로 가느니 그냥 적당히 벽을 타고 넘어볼 생각이었다.
타앗.
성진은 몇 차례 땅을 박차고 가속하여 매끈한 담장 위를 생각보다 손쉽게 뛰어올랐다. 오러를 그리 많이 운용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잠시 담장 위에 바짝 몸을 낮추고 반대편을 살피고 있는데.
[어? 저게 뭐지?]마왕 놈이 갑자기 얼빠진 소리를 냈다.
[방금 뭔가가 우리 옆을 지나갔는데?]‘……?’
성진이 숨을 죽이고 기감을 확장해 봤지만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이상하다? 분명 뭐가 휙 지나갔는데…….]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설마 유령 같은 거냐? 그런 거야?
[…너는 죽고 나서도 그런 게 무섭냐?]아니, 무섭지는 않아. 진짜야.
단지 유령은 주먹으로 팰 수 없으니 껄끄러운 것뿐이라고.
[지금은 없어. 대체 뭐였지?]마침 담장 바깥쪽의 경비조 하나가 성진의 바로 아래를 스쳐 지나갔다. 그들이 충분히 멀어질 때까지 숨죽여 기다린 후, 성진은 몸을 뒤로 돌려 담장에 매달렸다가 훌쩍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거 생각보다 순조로운데.
얼마간 바깥쪽으로 더 걸었을까. 그런 식으로 황궁의 외성 벽마저 간단하게 통과하게 되자, 이제 성진은 약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황궁 경계가 이래서 괜찮은 건가? 아무나 막 들어올 수 있겠는걸.’
물론 그가 미처 모르는 사실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그렇게 걱정하고 있는 와중에도 성진의 [오러 은폐] 실력이 시시각각 늘고 있었다는 점이다.
처음 다샤 앞에서 오러 은폐를 선보였을 때와는 이미 천양지차. 아마 그녀가 지금의 성진을 보았다면 절대로 믿음 부족 운운하지는 못했을 터다.
또 다른 하나는.
황궁의 경비는 단순히 물리적인 인력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성진. 뭔가가 있어. 아까부터 우릴 따라오는 것 같아.]마왕이 재차 경고하자, 황궁이 멀어지는 방향으로 무턱대고 나아가고 있던 성진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아무리 주의 깊게 살펴봐도 역시나 그의 기감에 잡히는 것은 전무.
[영적인 거라 아마 넌 느끼지 못할 거야. 근데 뭐지? 영혼 같기는 한데 온전한 형태는 아니군.]진짜 유령이냐!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어. 어, 한 놈 더 나타났다. 뭔가 적대적인 분위기는 아닌데,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지?]‘…….’
[아, 또 하나가 더.]마왕의 감정 상태가 언제나 직접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성진은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들이, 혼자 황궁 밖을 나서자마자 갑자기 나타났다고?
‘…혹시 말은 통하냐?’
그러자 마왕은 잠시 끙끙거리며 애쓰더니 한숨을 쉬었다.
[안 될 거 같은데? 저놈들 사념이 잘 읽히지 않아.]‘그럼, 네 쪽에서 말을 걸어봐.’
그러자 마왕 놈이 갑자기 목소리를 쫙 깔더니 위풍당당하게 소리쳤다.
[네 이놈들! 건방지게 빙빙 돌지 말고 어서 이 몸 앞에 무릎을 꿇지 못할까! 이 위대하신 게헤나의 마왕, 영원한 겁화의 주인을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영접하거라!]‘…….’
[전혀 못 알아먹는 눈친데? 제대로 된 영혼이 아니라, 조각 난 반편이라서 그런가 봐.]그거 꿇을 무릎은 있는 놈들이냐?
아무튼 마왕의 설명으로는, 현재 총 세 개의 작은 영혼 조각이 그들의 주위를 경계하듯이 빙빙 돌고 있는 중이란다.
크기는 어린아이의 주먹만큼도 되지 않는 작은 구슬 같은 것들이었는데, 자체적인 의식을 가졌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모습이라고.
[그런데 마치 제대로 의지를 가진 것처럼 움직이고 있어.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지?]‘흠…….’
마왕 놈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에 성진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상대는 제대로 된 유령도 아닌 작은 영혼 조각들.
눈에 보이지 않고 건드릴 수도 없다면, 반대로 놈들이 끼칠 수 있는 영향력도 극도로 적으리라는 판단이 든다.
그 존재의 하찮기로 따지면 머릿속에 사는 마왕 놈이랑 비슷한 정도가 아닐까.
‘별거 없네.’
거기다 이곳은 무려 신의 대리자가 기거하는 황궁 주변이다. 크게 위험한 놈들은 아니겠지.
그렇게 결론지은 성진은 조금 느긋한 발걸음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제2 동문으로부터 시작된 길은 황도 동쪽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는 주택가로 연결되어 있었다. 천천히 산책하듯 걷고 있자니, 따닥따닥 밀집되어 있는 빽빽한 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늦은 시간이라 길에는 인적이 없고, 이따금 멀리서 개 짖는 소리만이 적막한 허공에 울려 퍼진다.
그리고 주택가로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 사라졌다.]줄기차게 그들을 따라오던 영혼들이 갑자기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잘됐네. 포기했나 보다.’
아무리 별것 아닌 놈들이라도 정체를 알 수 없어서 좀 찜찜했으니까.
그러나 성진이 채 몇 걸음 더 걷기도 전에 마왕이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어? 이번에는 다른 놈이 나타났어. 좀 더 강력한… 응? 이놈은 어째 말이 통하는데?]그리고 뭔가에 집중하는 듯 조용하더니 느닷없이 벌컥 화를 냈다.
[뭣? 왜 감히 날 빨강이라고 부르는 거냐? 이 몸은 위대하신 게헤나의 마왕……!] [뭐라? 누가 꼬맹이야? 야! 인마, 너 진짜 해볼 테냐?!]‘시끄러워. 쓸데없는 걸로 싸우지 말고 대화를 해.’
성진의 면박에 입을 다문 마왕은 잠시 혼자서 구시렁거리더니 앓는 소리를 냈다.
[끄응, 일단 저놈이 너보고 잠시 자기를 따라오라는데? 어쩔래? 가볼래?]‘…….’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이놈 말로는 아마 네가 꼭 가봐야 할 거라는데?]믿을 수 있는 건 둘째치고, 조금 궁금하긴 했다.
그래서 마왕의 인도를 따라 한참을 더 걸은 끝에, 성진은 뜻밖의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흠씬 얻어맞아 누더기가 된 칼멘 경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클로디아 경이 그렇게 애타게 찾던 놈이 왜 야밤에 이런 데서 두드려 맞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