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76)
성황의 아이들-76화(76/469)
076. 염상 결정 (7)
유령인지 영혼인지 모를 무언가의 인도에 따라 한참을 걸은 끝에, 성진은 수도 경비대에 둘러싸여 흠씬 얻어맞고 있는 칼멘 경과 조우하게 되었다.
‘…저렇게 맥없이 맞고 있을 놈은 아닐 텐데?’
평소 칼멘 경을 상주기사들 중에서도 제법 눈여겨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성진은 의아해졌다. 그러나 곧 그가 누군가를 필사적으로 감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도 경비대가 하는 일이라지만 결코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그렇게 판단한 성진은 개입을 결심했다.
“어이, 거기 잠깐 중지.”
신기하게도 칼멘 경을 만나자마자 유령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단다. 어쩌면 그를 만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나 싶기도 한데.
어쨌거나 지금은 더 이상 유령 따위에게 신경 쓸 상황은 아니었다.
“수도 경비대가 황도 내 발진 환자란 환자는 죄다 이단 재판부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악마의 저주라는 명목으로요!”
성진은 칼멘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회색 역병은 이미 마물의 알이 원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거기다 이단 재판부의 입장도 저주가 아니라 역병이라는 것으로 일찌감치 결론 난 상황.
이제 곧 [마물 전담 대책반]이 발족할 예정이고, 환자를 찾는 족족 알을 적출하기만 하면 될 텐데.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짓을 벌이는 거지?
성황 그 양반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가?
무엇보다도 칼멘 경이 감싸고 있는 환자의 상태가 심상치가 않았다.
로페룸의 알이 기생한 지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른 듯, 발진이 줄어들고 몸 전반이 회색빛으로 변해가고 있다.
[알이 아직 살아 있어.]환자를 살핀 마왕 놈이 귀띔해 주었다.
[근데 뭔가 이상한걸? 저놈 머릿속에 엄청나게 많은 염상 결정이 보여. 뭐지? 이런 건 처음 보는데?]마왕의 말에 성진의 예감이 불현듯 그에게 속삭였다.
저 사람을 데려가서 조사해야 한다고.
어쩌면 회색 역병이 발생하는 원인과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이 환자를 데려갈 거다. 방해하지 말고 비켜.”
성진은 수도 경비대에게 조용히 물러날 것을 종용했고, 결국 그들은 바닥에 얌전히 드러누우며 길을 터주었다.
뭐, 효율성을 추구하다 보니 그 과정에서 약간의 폭력이 동원되었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리고 칼멘은 성진을 무슨 세기의 범죄자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기껏 맞고 있는 걸 구해줬더니, 이런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
만신창이가 된 칼멘 경을 대신해 환자를 들쳐 업은 성진은 빠른 속도로 황궁을 향해 걸었다.
처음 칼멘이 가려고 했던 황궁 부속 의료원도 어쩐지 불안하다는 판단이었다.
일단 환자를 진주궁에 보호한 후, 끌려갔다는 다른 환자들의 행방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단 재판부에 수감되었던 아카데미 학생들이 당한 꼴을 생각해 보면, 환자들을 치료하기는커녕 당장 때려죽이지만 않아도 다행이니까.
‘일단 아버지한테도 이 사실을 알리고…….’
그러려면 우선 몰래 황궁을 빠져나온 사실부터 털어놓아야겠지.
앞으로 황궁 경비가 한층 더 강화되겠군.
다샤한테도 한소리 듣겠는데.
적어도 경호 책임자인 마사인의 귀에는 확실하게 들어갈 거다.
‘…마사인 경, 엄청 화내겠지.’
성진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아 최대한 수도 경비대와 마주치지 않도록 빙글빙글 길을 우회하며 돌아다녔다. 다행히 제대로 걸을까 싶었던 칼멘 경은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따라오고 있고.
그러는 동안에도 마왕 놈은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바로 환자의 머릿속에 가득한 염상 결정에 대해서.
[이 정도면 채널링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봐야 해.]염상 결정이 바르토시처럼 제대로 된 기관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우선 바른 형태와 적절한 크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단다.
그러나 이 환자의 경우는 달랐다.
마치 머리 전체에 유리 가루를 뿌려놓은 듯 묘한 양상이라고 마왕은 설명했다. 그 하나하나가 결정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보잘것없다나.
‘그럼 이 사람도 막 환청 같은 게 들리고 그러는 걸까?’
샤론 경의 경우를 떠올리며 묻자, 마왕은 그 가능성 자체를 부정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낮에 본 그 미친 기사의 염상 결정은 불완전할지언정 나름의 모양새는 갖추고 있었지. 하지만 이건 뭔가를 감지할 정도도 못 돼. 그냥 모래알이나 마찬가지라고.]즉 머릿속에 불순물이 잔뜩 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단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
[그냥 뇌가 망가지기만 할 뿐이지. 그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 정도로 머릿속이 지저분해져 버리면 의식이 제대로 유지될지도 의문인데?]그렇다면 역시 회색 역병이 원인일 가능성이 높겠지?
예전에 멀쩡하게 기사단장씩이나 했다고 하니, 원래 이런 상태는 아니었을 테고.
어쩌면 회색 역병을 앓는 자들의 머리가 점점 이상해진다는 것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벤 경이야 일찍 발견되어 후유증 없이 일어났지만, 어느 정도 병이 진행된 다른 환자의 경우는 어떤지 확인해 보는 것이 좋을지도.
칼멘 경에게 이 환자의 예전 상태를 물어볼까 했는데, 뒤를 돌아보니 그는 뭔가 깊게 고민하고 있는 듯 대단히 심각한 표정으로 걷고 있었다.
-이분은 예전 근위대의 기사단장이셨던 분입니다. 이단 재판부에 끌려가지 않도록 부디……!
구타당하는 중에도 기를 쓰고 감싸고 있었던 것도 그렇고, 평소 불손한 태도를 보이던 상대에게 살려달라고 절절하게 매달리는 것도 그렇고.
이 환자는 대체 칼멘 경과 무슨 관계일까?
전 황궁 기사단장이 이런 부랑자 같은 몰골을 하고 있는 것도 맘에 걸린다.
어쩐지 대단히 민감한 부분을 건드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성진은 뭔가 더 묻는 것을 포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마침내 황궁 제2 동문에 이르렀을 때 성진은 조금 낙담했다.
인적 없는 개구멍이던 동문이, 지금은 횃불로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져 있었던 것이다.
무장한 근위대 기사들이 동문 주위를 빙 둘러싼 채 도열해 있고, 드문드문 성 아우렐리온 기사단의 정복을 입은 성기사들도 눈에 띈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는 마사인 경이 서 있었다.
‘결국 경호 책임자를 이 새벽에 불려 나오게 만든 건가…….’
나올 때처럼 몰래 들어갈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요란해서야 그야말로 크게 사고 쳤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역시 빠져나온 걸 들킨 거겠지?
그런데 발각된 건 어느 시점일까?
어떻게 제2 동문을 정확하게 특정 지은 거지?
이런저런 생각도 잠시. 성진 일행을 발견한 황궁 기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일제히 달려왔다.
그들은 어린 황자가 누군가를 업고 걸어왔다는 사실에, 업혀 온 자가 완전 거지꼴이라는 사실에, 그리고 황자를 보좌해야 마땅한 황궁 기사가 외상으로 제 몸 가누기도 벅차하는 사실에 차례대로 놀랐다.
기사들에게 환자를 넘기던 중 마침 쿠르트 경의 얼굴을 발견한 성진이 그에게 지시했다.
“이 사람은 진주궁의 손님이다. 회색 역병을 앓고 있으니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곧장 진주궁의 닌니아스 의원에게 보이도록. 우선 의원에게 알의 적출을 서둘러 달라고 전하고.”
쿠르트 경은 무언가에 대단히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다른 기사들에게 지시하여 기사단 망토를 엮은 간이 들것을 만들도록 했다.
그러는 중 환자가 실린 들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칼멘 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놈 저거, 완전 정신을 놓고 있네.
“…칼멘 경도 옆에다 같이 눕혀 놓든지.”
성진이 손을 휘휘 저으며 말하자 황궁 기사 두 사람이 다가와 그를 부축한다.
그 일련의 과정을 통솔하고 있던 쿠르트 경은 잠시 묘한 얼굴로 성진을 살피더니, 곧 공손히 예를 취해 보였다.
그리고는 들것에 실린 환자와 칼멘 경을 데리고 진주궁 방향으로 사라졌다.
그러고 나서야 성진은 겨우 마사인 경을 향해 돌아설 수 있었다.
사실 보자마자 달려와 떽 하고 호통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는 멀찍이 서서 굳은 얼굴로 성진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성진은 쭈뼛쭈뼛 그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어, 음…….”
“…….”
“…멋대로 혼자 나가서 미안해, 마사인 경.”
마사인은 잠시 말없이 성진을 내려다보더니, 걸치고 있던 자신의 망토를 벗어 성진의 어깨 위에 덮어주었다.
그리고 찢어진 낡은 망토와 잠옷이 보이지 않도록 세심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저, 마사인 경…….”
“저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단호한 대답에 올려다보니, 마사인은 그야말로 이 세상의 고뇌란 고뇌는 모조리 짊어진 듯 우중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는 진주궁의 경호 책임자입니다. 이번 일은 모두가 저의 실책입니다.”
“응? 나간 건 난데 왜…….”
“최근의 일들로 저도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반성? 댁이 무슨 반성을?
“저하께 저의 기준을 강요하고 충분한 신뢰를 드리지 못한 것. 그래서 저하께서 결국 저를 배제하고 움직여야겠다는 판단이 들도록 만든 것. 야심한 이 밤에 홀로 위태로운 외출을 하도록 몰아붙인 것. 이 모두가 모자란 저의 불찰이 아니겠습니까.”
이 인간 지금 진지하다.
성진은 기겁했다.
어? 아냐, 아냐! 이 고지식한 양반아!
잠깐 바람 쐰 걸 가지고 그렇게 땅 파고 들어가지 마!
“스스로의 책무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주제에, 감히 저하께 이러쿵저러쿵 주제넘은 참견을 해왔다니 정말 부끄럽습니다.”
“어, 그러니까…….”
“저부터가 저하를 믿음으로 따랐어야 했건만, 신하로서의 도리를 저버리고도 저하의 신뢰만을 바란 겁니다. 그걸 깨닫고 나니 무슨 염치로 저하를 대해야 할지 막막하여…….”
“…저기, 마사인 경?”
“당당히 진주궁 경호를 자처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제 제가 무슨 낯으로 폐하를 뵈어야 하겠습니까. 차라리 죽음으로라도 만회할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고쳐 죽겠으나…….”
“그만! 내가, 내가 잘못했어, 마사인 경!”
앞으로 다시는 마사인 경 몰래 나가지 않을게!
그러니 제발 멘틀 레벨에서 멈춰! 내핵까지 파고 내려가지 말라고!
허둥거리는 성진을 향해 마왕이 떨떠름하게 물어왔다.
[…너 어째 저놈에게 말리고 있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이냐?]* * *
성진은 진주궁에 도착하자마자 성황의 호출을 받았다.
어차피 찾아갈 생각이기는 했다. 누군가가 독단으로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있다면, 이는 성황에게 반드시 보고해야 하는 문제였으니까.
간단하게 환복을 한 후 성진은 그 길로 바로 본궁으로 향했다.
깊은 새벽이라 그런지 본궁은 아직 어둠에 잠겨 있었다. 오직 성황의 집무실만이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을 뿐이다.
“본래라면 근위대 전체가 비상 태세로 들어갔어야 합니다만, 다행히 사태가 커지기 전 폐하께서 먼저 진주궁에 전령을 보내셨다 합니다.”
마사인이 우울함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설명했다.
무려 황자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사건이다. 온 황궁이 발칵 뒤집혀도 모자랐을 테지만, 성황이 진주궁 사람들을 안심시킨 후 제2 동문으로 마중 나가라고 언질을 주었다고 한다.
“잠깐, 제2 동문?”
“정확히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제2 동문을 특정 지은 범인은 성황이었다.
그 양반,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내가 없어진 건 또 어떻게 알았는데?”
나름 빈틈없이 기척을 죽이고 나갔다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발각된 원인이 무척 궁금했다.
그러나 돌아온 마사인의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저하의 전담 시녀가 무언가 이상하다며 저하의 방으로 찾아왔다 합니다.”
에디스가?
“네. 저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답니다. 평소 저하께서는 늘 비슷한 시간에 뭔가 잠꼬대 같은 걸 하신다고 하더군요.”
“……?”
금시초문이었다.
나한테 그런 잠버릇이 있다고?
야, 마왕아? 뭔가 아는 게 있냐?
[…….]마왕 놈은 침묵했다.
평소 본궁에 올 때면 성황의 눈치를 보느라 쥐 죽은 듯 입을 다물기는 했지만, 성진은 마왕으로부터 어딘지 불편한 심정을 생생하게 전달받고 있었다.
이놈, 뭔가 수상한데?
마침 집무실에 도착했기 때문에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폐하께오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하.”
루이스의 안내를 받아 성진은 집무실로 들어갔다.
크게 사고 쳤다고 야단맞을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막상 마주한 성황의 얼굴은 생각보다 평온했다.
“왔느냐.”
“…예.”
그는 여상한 얼굴로 물끄러미 성진을 바라보더니 말없이 손짓을 했다.
“……?”
영문을 몰라 가까이 다가가자 성황의 손이 성진의 이마를 향해 천천히 올라왔다.
또 딱밤이라도 맞는 건가 긴장하는데, 이마에 닿은 그의 손에서 갑자기 환한 빛줄기가 터져 나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성진은 그제야 자신이 몸 여기저기에 자잘한 통증들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오러의 흐름이 어지럽다. 단번에 무리한 운용을 한 게로구나.”
그러고 보니 수도 경비대와 싸우며 오러를 좀 마구잡이로 돌린 감이 없지 않지만.
이 양반의 눈에는 그런 것도 보이나 하는 생각은 이제 그리 새롭지도 않다.
한결 개운해진 어깨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자 성황이 턱짓을 했다.
“앉거라.”
어쩐지 무단 외출을 문제 삼을 생각은 없는 것 같다.
그렇게 판단한 성진은 순순히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누군가가 회색 역병 환자들을 모조리 이단 재판부로 잡아들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멀쩡한 피부병 환자까지도 저주 초기라는 혐의로 쓸어갔다고 하더군요.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
성황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성진은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의문들이 쌓이고 쌓여 턱 하고 목에 걸리는 느낌이 든다.
사실 성진은 얼마 전부터 쭉 성황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아버지는 회색 역병의 정체를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은 아닙니까?
그것은 다샤로부터 마물 전담 대책반에 대한 보고를 받을 때부터 줄곧 가지고 있었던 의문이었다.
사실상 회색 역병과 새 역병을 완전히 연관 짓기에는 연결 고리가 조금 빈약하지 않은가.
발진이 나타나는 초기와 온몸이 회색으로 굳어가는 후기.
초기 환자에게서 적출한 알과 죽은 시신에서 발견된 돌조각.
그 둘 사이의 연관성을 확실히 밝히려면, 전자가 후자로 이행되는 과정을 직접 관찰해서 증명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하건만.
성황은 기생 알에 대한 성진의 전언을 듣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둘을 같은 병으로 확정 짓고 바로 새로운 부서 발족을 명하지 않았나.
그리고 성진이 자문이라는 명목으로 끼어드는 것을 굳이 말리지 않았다.
그가 마물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마왕을 이용해 얼마나 쉽게 기생 알을 탐지하는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쨌거나 성진은 적어도 성황이 회색 역병을 해결할 마음은 있구나, 하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마물 전담 대책반]의 발족은 일차적으로 회색 역병 사태를 해결하는 것이 목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독단으로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은 그 목표를 역행하는 것 아닙니까? 어째서 그냥 내버려 두시나요?”
“…….”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마물 전담반은.”
그리고 이윽고 입을 연 성황은 뜻 모를 대답을 했다.
“장차 델크로스의 한 축을 지탱할 작은 태엽 장치다, 모레스.”
순간 성진은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깜박거렸다.
그러다가 제법 오래전 성황과 했던 대화가 희미하게 뇌리에 떠올랐다.
-정사라는 것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한 태엽 장치와도 같다.
아니, 그게 언제 적 이야기야?
황당해하고 있는데 성황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금 독단으로 수도 경비대를 움직이고 있는 자 역시 다르지 않다.”
“…빈틈없이 돌아가는 태엽 장치 중의 하나입니까?”
성진이 반신반의하며 묻자, 성황은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섣불리 손대면 망가지는 정교한 장치지.”
“…….”
“이 사태가 부조리하다 생각하느냐?”
성진이 가라앉은 눈으로 성황을 마주 보자, 그의 입매가 미세하게 올라가는 듯했다.
“무엇이든 하고 싶은 것을 하거라. 네가 그 부조리함을 바로잡길 바란다면 그리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