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84)
성황의 아이들-84화(84/469)
084. 브루노 그린 (2)
몸이 회복된 후 브루노 그린은 그대로 진주궁의 손님으로 눌러앉았다.
내심 ‘제가 이런 대접을 받을 명분이 없습니다!’ 하고 외치며 빈민촌으로 돌아가 버리지나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것은 괜한 걱정이었다.
그는 진주궁에 몇 없는 손님방 하나를 차고 앉아, 시녀들의 시중을 자연스럽게 받으며 휴식을 취했다. 그 태도가 더없이 귀족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수년간 빈민촌에서 쥐 죽은 듯 눌러살던 사람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다.
천한 출신에도 재능 하나로 아득바득 출셋길을 달려온 남자.
한순간의 불운으로 모든 것을 잃은 비운의 평민 기사단장.
그런 이미지였지만, 실제 브루노 그린이라는 인간은 매사에 여유가 넘쳤으며, 밝은 얼굴에서는 비운의 파편 한 조각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진주궁에서 브루노 그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자신의 콧수염을 공들여 다듬는 것이었다.
“…멋진 콧수염이군.”
저녁 식사 시간, 브루노 단장의 얼굴을 마주한 성진이 얼떨떨하게 내뱉은 말이다. 너무나도 개성 넘치는 콧수염이 시선을 강탈했기 때문.
아직 이발을 하지 않아 부스스한 머리는 여전했지만, 매끈하게 다듬어진 그의 콧수염만은 정확하게 165~170도의 각도를 유지하며 유려한 곡선으로 뻗어 있었다.
성진의 칭찬에 그는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콧수염을 옆으로 쭈욱 잡아당겼다.
“무인으로서의 마음가짐입니다, 저하.”
“응?”
“전장에 나설 때나 결투를 앞에 두고 있을 때, 저는 늘 콧수염의 각을 날카롭게 다듬으며 심중의 검을 세웁니다.”
“……?”
“지금도 전투에 임하는 마음가짐으로 수염을 다듬었습니다. 폐하와 저하께서 제게 내려주신 제2의 인생. 어중간한 각오를 보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콧수염은 남자의 마음가짐을 나타내는 가장 정확한 척도니까요.”
그, 그럴 리가?
이성은 그거 다 개소리일 뿐이라고 외쳤지만, 성진은 저도 모르게 아직 수염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 매끈한 입 주변을 더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수염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사람이 생겨났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칼멘 경이었다.
“그… 무인으로서의 각오를 다지느라…….”
아직은 어색한 태도였으나, 이제는 성진에게 제법 깍듯한 예를 취하기 시작한 칼멘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아쉽게도 기른 지 며칠 안 되어, 각오 따위 알 수 없이 거뭇거뭇 지저분해 보일 뿐이다. 그래도 그 나름 스승을 향한 존경의 의미려니 성진은 생각했다.
문제는 그 스승님께서 본 척도 하지 않았다는 거였지만.
“넌 심중의 검을 다스리기 전에 검술 수련이나 좀 제대로 하거라. 고작 일곱 명에게 얻어터진 덜떨어진 제자 놈아. 어디 가서 황궁 기사라고 떠벌리지 말고.”
“단장님!”
칼멘이 울컥하며 외치자 브루노 단장이 콧방귀를 뀌었다.
“왜? 내가 틀린 말 했냐?”
“그땐 저도 어쩔 수가… 아니, 근데 태도가 너무 달라지신 거 아닙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정도면 제법 재능 있는 편이라고 격려해 주셨잖습니까!”
“뭐? 내가 너한테 재능 어쩌고 하는 말을 했어? 그럴 리가? 너 내가 로건 황자님의 검술 스승이었다는 사실은 잊은 거냐?”
천재라는 말을 듣던 브루노 단장에게는, 로건 황자 정도 되는 재능이 아니면 모두가 다 거기서 거기라고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칼멘이 답답해하며 발을 굴렀다.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그러셨잖아요! 당신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가, 바로 저 같은 제자를 하나라도 남긴 거라고 분명히……!”
그러나 단장은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릴 뿐이었다.
“글쎄다. 네 녀석이 가끔 좋은 술을 사 온 기억은 난다만.”
“그러니까 그때……!”
“하지만 너랑 그걸 나눠 마신 기억은 없는데? 그 좋은 걸 왜 너를 주냐?”
“이익!”
성진은 두 사제가 벌이는 촌극을 옆에서 지켜보며 한숨을 쉬었다.
뭐, 칼멘 저놈이야 워낙 성질머리가 불같으니 아무것도 모르고 펄쩍펄쩍 날뛰고 있지만. 냉정한 척 그를 약 올리고 있는 브루노 단장의 눈에는, 누가 봐도 그의 제자를 향한 애정이 깃들어 있지 않은가.
하지만 단장이 그저 칼멘을 놀리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성진은 알고 있었다.
-드문드문 기억의 공백이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써는 그것이 최선이었네.
당시 단장의 치료를 끝내고 안대를 끌러내며, 성황이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확실히 완전히 망가졌던 뇌를 되돌리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을 터.
그 증거로 단장의 머릿속에는, 아직 몇 개의 작은 염상 결정이 흉터처럼 남아 있었다.
[짐작 가는 부분은 있어.]한참을 고심하며 생각을 정리한 마왕 놈이 설명했다.
[염상 결정이란 것은 본래 정상적으로 몸에 생길 수 있는 기관이야. 단지 그게 좋지 않은 위치에, 비정상적인 숫자로 생성된 것이 문제라는 거지.]마왕 놈의 추측은 그랬다.
염상 결정은 실은 병마가 그곳에 침입한 흔적이라기보다, 로페룸의 알에서 뿜어지는 무언가에 인체가 자연적으로 반응한 결과일 것이라는 것.
[신성력이 잘 듣지 않는 건 그 때문이 아니겠어? 사제한테 일광 화상으로 치료를 받는다고 해서 점이나 주근깨가 함께 사라지는 건 아닌 것처럼.]얼마 전, 강한 햇볕 아래에서 각 잡고 훈련하다 가벼운 화상을 입었던 클로디아 경의 이야기였다. 닌니아스 의원의 권유로 사제의 치료를 받았지만, 그녀의 매력 포인트인 주근깨는 여전히 건재했던 것.
즉 강한 햇볕으로 인한 화상은 신성력의 치료 대상이지만, 그에 대한 인체의 자연스러운 반응들은 그대로 남는다는 거였다.
‘그렇다면…….’
결국 회색 역병의 치료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 셈이다. 바로 몸을 염상 결정이 생기기 이전으로 완전히 되돌리는 것.
하지만 시간을 마음대로 조작하는 것이 가능한지 어떤지를 따지기 전에, 한 사람의 시간을 온전히 되돌리는 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인과가 얽혀들 수밖에 없다고 마왕은 설명했다.
[그래서 멀쩡한 부분을 최대한 그대로 남기고, 염상 결정으로 손상된 부분만 이전으로 되돌려 가며 억지로 신체를 이어둔 거야. 염상 결정은 점진적으로 생겨났을 테니, 되돌린 시간도 부위별로 제각각이었겠지.]그때 성황이 단장을 세포 단위로 쪼개고 있다고 느낀 게 완전히 착각은 아니었던 거다.
[그것만으로 불가능한 부분은, 신성력이라는 힘의 정의를 몇 차례 뒤집어 엎어가면서까지 꼼수를 부렸고.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엄청난 양의 인과가 비틀리며 이 세계가 충격으로 흔들렸어. 아마 너도 조금은 느꼈을 거야.]확실히.
성진은 당시 자신과 브루노 단장을 향해 모여들었던 묘한 인력의 흐름을 떠올렸다.
[거기다 뇌라는 것이 그리 쉽게 손댈 수 있는 기관이 아니잖아? 신경 접합이 조금만 바뀌어도 기억이 완전히 날아가 버리거나 불구가 될 수 있어. 그걸 거의 손상 없이 복구해 낸 거지. 이제 네 아버지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짓을 한 건지 조금은 이해가 가냐?]‘헐…….’
성황 이 양반,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도, 그 결과를 모조리 나에게 떠넘기겠다는 소릴 한 거야? 대체 무슨 속셈인 거지?
복잡한 성진의 속과는 상관없이, 두 사제 간의 실랑이는 계속되었다.
“기사 서임을 받았을 때부터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기사가 되는 것은 단지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진정한 수련은 이제부터이니 더욱 정진하라고! 근데 왜 네 녀석은 그때부터 도통 발전이 없어?”
“아, 맞아요! 그리고 그날, 저한테 그런 말씀도 하셨잖습니까! 제가 어엿한 황궁 기사가 되다니, 이제는 단장님도 여한이 없다고……!”
“글쎄다. 그런 기억은 없다만.”
“크악!”
거 참, 형편 따라 편리한 기억이었다.
그리고 며칠간 휴식을 취한 후, 브루노 단장은 진주궁 연무장에도 슬슬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러가 회복되고 있습니다.”
며칠 잘 먹었다고 벌써 온몸에 근육이 붙기 시작한 단장이 말했다.
그가 말하지 않았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짐작했을 것이다. 그의 오러 활성이 지난 수일간 눈에 띄게 좋아졌으니까.
“활성도를 보니 대략 3층에 근접한 것 같습니다만.”
“네, 마사인 경. 조만간 3층이 될 것 같습니다.”
“휴우, 정말 어마어마한 속도군요. 직접 활성도를 느끼고 있음에도 쉽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마사인의 감탄에 브루노 단장이 미소 지었다.
“이미 한번은 걸었던 길이니까요. 처음 오러를 쌓는 것과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데카론 나이트란 오러 10층에 이르러 연공의 극의를 본 자.
어떠한 깨달음이 없고서는 결코 10층을 이뤄낼 수 없으며, 그 이후는 몇 층을 더 쌓아 올리던 층수 자체를 강함의 척도로 보지 않는다.
대륙 제일의 기사라 불리는 발타자르는 무려 오러 12층을 쌓아 올린 데카론 나이트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검이 12층을 운용하는데 더 적합하기 때문일 뿐, 이상적인 형태로 오러 균형을 이루는 경지는 10층과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오러의 층이 더 낮아지는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브루노 단장은 단지 몸에 쌓인 오러의 총량이 적어 10층을 이루지 못했을 뿐, 그가 깨달았던 경지는 그의 경험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 증거로, 마음만 먹으면 단장은 지금도 언제든 감쪽같이 오러 균형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바로 다샤가 말했던, 이상적인 오러 은폐의 경지다.
“거기다 기분 탓일까요? 예전에 비해 몸의 오러 친화도가 무척 높아진 듯합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습니까? 그거 참 신기하군요.”
아, 그거 뭔지 알 것 같다.
예전에 오러 폭풍에 휘말린 다음 성진 역시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았던가? 분명 성황과 뭔가 관련이 있는 것이리라.
‘…참 알면 알수록 엄청난 양반이야.’
성진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대화에 집중하느라 정작 자신을 보며 이렇게 수군거리는 상주기사들의 말은 듣지 못했다.
“…야, 그럼 모레스 황자님은 뭐냐?”
“지금 데카론 나이트를 상회하는 속도로 오러를 쌓고 있는 거야? 초심자가?”
“진짜 저하는 대체 뭐지?”
어쨌든 희소식이었다.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단장이 다시 예전의 전성기로 충분히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델크로스에 또 다른 데카론 나이트의 탄생이 보장된 것이다.
“그럼 그대는 이제 어쩔 생각이야? 기사단에 복귀하게 되는 건가?”
성진은 문득 궁금해져 단장에게 물었다.
지금이야 손님이라는 명목으로 황궁에서 지내고는 있지만, 이 상태가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을 터.
때마침 2기사단의 단장 자리가 공석이었다. 마사인이 단장직을 내려놓은 후, 아직은 마땅한 후임이 없어 부관과 이전 기사단장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들었으니까.
브루노 그린은 현재 [정직] 상태.
예전의 사건은 이제 아무도 문제 삼으려 하지 않고, 그에 대한 징계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이대로 그가 다시 기사단장이 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으리라.
문제는 브루노 그린의 의사였다.
그는 과연 영광스러운 예전의 지위를 되찾기를 원할까, 아니면 비참하게 몰락했던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할까.
“그대가 다시 황궁 근위대에서 일하고 싶다면, 최대한 빨리 복귀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하지.”
한데 성진의 조심스러운 제안에 단장이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참으로 감사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하. 이후의 거취에 관해 어느 정도는 생각해 둔 것이 있습니다.”
“그래?”
“예. 실은 얼마 전, 한 기관으로부터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혹시 [아렌쟈]에 관해 아십니까, 저하?”
순간 성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렌쟈?”
“네. 성황 폐하의 직속 기관으로, 세간에 그리 잘 알려진 곳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들은 설명은 놀라운 것이었다.
아렌쟈는 성황의 집권 초기에 만들어진 소수 정예 기관이었다. 워낙에 비밀스럽게 활동하는 터라, 그의 최측근을 제외하고는 자세한 사항을 아는 자가 없었다.
아마 [아렌쟈] 앞으로 매년 꼬박꼬박 예산이 집행되지 않았더라면, 그 이름은 물론 존재 자체도 알려지지 않았을 거라나.
정보부가 지레짐작하듯 성직자들로 이루어진 집단은 아니었다. 대신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희귀한 [능력]이 요구된다고.
최근 브루노에게서 그러한 능력이 발현되어, 아렌쟈로부터 조심스러운 접촉이 있었다고 한다.
“능력?”
“예. 아렌쟈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의 요원이 있습니다. 내부에서 영능을 이용해 황도를 경계하는 요원, 그리고 점조직의 형태로 외부에서 움직이는 요원이죠. 마침 저는 외부 요원에 적합한 능력이 생겨, 기관에 합류할 것을 권유받았습니다.”
브루노 단장은 괜히 머쓱한 듯 콧수염을 잡아당겼다.
그의 설명으로 성진은 몇 가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얼마 전 조우했던 영혼 구슬의 정체는 천사나 유령이 아닌 영능력자, 즉 인간이었다.
그리고 같은 영능력자라고 하더라도 그 능력에는 다소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처음에 만난 것들처럼 아예 말이 통하지 않는 놈이 있는 반면, 나중에 나타난 것처럼 더 강력하고 의사소통이 가능한 놈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놈들은, 이전부터 브루노 단장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황도 여기저기에서 회색 역병 환자가 강제로 연행되는 와중에, 성진을 마침 타이밍 좋게 브루노 단장에게 인도한 것이 그저 우연은 아니리라.
그때 마왕 놈이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것들이 인간이었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건 제대로 된 영혼도 아니었는데? 좀 더 자세히 물어봐, 이성진!]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대에게 생긴 건 어떤 능력이야? 설명해 줄 수 있나?”
“흠…….”
성진의 물음에, 브루노 단장은 허공을 바라보며 잠시 뜸을 들였다.
“예를 들면, 그렇습니다. 저는 방금 저하께 말을 건 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아렌쟈에서 말하는 그 [빨강이] 님이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