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86)
성황의 아이들-86화(86/469)
086. 이계 묵시록 (1)
그곳은 태양이 완전히 사라진 세계였다.
생명의 온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공기.
하늘로부터 끈적끈적한 비가 뚝뚝 쏟아지며, 수천수만의 싸늘하게 식어가는 시체들 위를 뒤덮어가고 있는 죽음의 땅.
그 끈끈한 점성의 액체가 비가 아니라 피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조금 뒤의 일이다. 하늘과 땅, 그 모든 것이 그저 붉었기 때문이다.
그 붉은 하늘 아래 네이트는 홀로 조용히 서 있었다.
이것은 [재앙]이 강림한 델크로스의 모습.
결국 균형을 잃어버리고 만 결과인가.
[하하.]어디선가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너른 평원을 빼곡히 덮고 있는 병사들의 주검이 디딜 때마다 발에 채인다. 쏟아지는 핏물이 여기저기 피웅덩이로 고여 걸음걸음마다 찰방찰방 소리를 냈다.
이윽고 그가 눈앞에 둔 것은 다 무너져 가는 성벽.
아니, 이것을 과연 성벽이라 부를 수 있을까.
반쯤 부서진 성문과 돌벽이 일부 남아 있을 뿐, 완전히 허물어진 성벽은 역시나 붉은 피에 젖어 있다.
그리고 그 성문의 중앙에 처참하게 손상된 시체가 못 박혀 있었다.
수백 혹은 수천, 셀 수 없을 만치 행해진 무딘 칼질에 넝마처럼 갈가리 찢어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 덕분에 그것이 이전에 사람이었던 것임을 알아보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참으로 지독한 원한을 가진 자의 소행이다.
네이트가 눈살을 찌푸리는데,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그에게 일러준다.
[그자는 로한의 왕이다.]아멜리아가 푹 빠져 있던 그 놈팽이인가. 어쩌다 이런 꼴이.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응보일 것이다.]담담한 듯 전해지는 그 목소리가 아무런 감정을 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섬뜩함을 느꼈다.
네이트는 주변을 둘러보다 미처 피웅덩이가 침범하지 않은 마른 땅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곧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는데, 그곳에는 네이트가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들이 싸늘하게 식은 채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을 향한 채 누워 있는 젊은 여자는 허름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가슴에는 작은 단도가 박혀 있다.
그의 기억보다 짧아진 머리카락에 보다 나이가 든 모습이었지만, 희게 질린 메마른 얼굴은 그럼에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멜리아.
[아픈 손가락이다. 돌보지 못한 어린 시절이 애틋하여 바람 들 새라 고이 보살폈더니, 꽃 한 번 피워보지 못하고 작은 화분 속 화초로 그리 시들어 버리고 말았다. 꿈과 재능이 많은 아이였는데…….]그녀의 옆에 누워 있는 것은 검은 갑주를 입은 젊은 청년이었다. 등 뒤로 수없이 많은 화살이 박힌 채 모로 쓰러져 누워 있다.
그가 아는 것보다 더 나이를 먹어 단단하고 날카로운 얼굴이 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창백한 얼굴 한편에는 치기 어린 앳된 기색이 남아 있었다.
나의 아들.
[잠재력이 많은 아이지. 어딘가로 날아갈까 전전긍긍하며 울타리를 치고 보호했는데, 결국은 혼자서 그 힘을 끌어내어 자신의 것으로 다루어냈다. 차라리 조금 더 일찍 날개를 펴게 내버려 둘 것을…….]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다른, 다른 아이들은…….
[그만 가라. 너는 아직 감당하지 못한다.]화악.
그 말을 끝으로 세찬 힘에 밀려, 그는 갑작스럽게 그 붉은 세계에서 튕겨 나왔다.
하늘과 땅이 반전되더니, 순식간에 시야에서 까마득히 사라져 버린다.
“…하!”
“폐하!”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네이트는 눈을 떴다. 고개를 드니, 초조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수석 시종장 루이스의 얼굴이 보인다.
그는 집무실 소파에 기대어 누워 있었다. 손에는 아까 루이스가 그에게 가져온 아멜리아의 펜던트를 쥐고서.
은장미궁의 시녀가 공방에 수리를 맡긴 물건을 루이스가 중간에서 빼돌려 온 것이었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식사도 거르시고 그대로 집무실에 드셨다 하여 살피러 왔습니다만, 어찌 그리 식은땀을 흘리십니까?”
“…아니, 별것 아니네.”
네이트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시종장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두근두근 빠르게 뛰고 있던 심장 박동이 조금씩 느릿하게 가라앉는다.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손에 쥐고 있던 부서진 펜던트를 내려다보았다. 작은 물방울 모양의 보석은 반으로 갈라졌음에도 여전히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다.
그 붉은 빛으로 가득 찬 불길한 세상과는 조금도 관련 없어 보이는 희고 깨끗한 보석.
“별일 아니야.”
아직도 걱정스러운 빛이 가득한 시종장에게 한 번 더 그렇게 말한 네이트는, 책상 서랍을 열어 보석을 넣고는 탁 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 * *
마물 전담 대책반 신설이 정식으로 결정된 지 수일이 지났다.
성회에서는 아직까지도 이 [마물]을 인정하느냐, 아니면 악마종의 한 분류로 두어야 하는가에 관한 갑론을박이 한창이었다. 경전에 명확하게 이세계나 마물에 관해서 언급한 구절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문제로 삼는 것은 경전에 있는 단 한 구절.
-주신의 대리자가 있으매 주신께서 친히 축복을 내리시고, 이 땅에 악마종과 같은 삿된 것들이 감히 발을 붙이지 못하리라 이르셨도다.
이것이 어떻게 해석되느냐에 따라 마물이 마물로 남을지, 악마종이 될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악마종 이외의 것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소! 그 이상을 말하는 것은 이단이야!”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분명 악마종과 [같은]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소! 삿된 것들은 그 외에도 있다는 암시가 아니겠소?”
“암시? 지금 암시라고 하셨소? 그런 식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을 엄연히 경계해야 마땅하단 말이오! 그게 바로 이단이 아니고 무어야!”
“뭐라? 지금 말 다 하셨소?”
책에 쓰여 있는 단 한 구절로 일주일을 싸우고 있다니, 신학자들이란 정말로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 지경입니다. 처음에는 당장이라도 수도를 돌아다니며 역병 조사에 착수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건 뭐 사무실에 앉아서 얌전히 책이나 들여다보고 있게 되었지 뭡니까.”
성진이 바삭 하고 쿠키를 씹으며 투덜거렸다. 성황은 맞은편에 앉아 찻물을 들여다보며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
브루노 단장의 치료 이후 처음으로 가지는 알현 시간이었다. 며칠 사이에 워낙 여러 일들이 있었던 터라 성진은 성황에게 이야기할 것들이 무척 많았다.
일단 단전의 오러 층이 거의 6층에 근접했다. 수일 내에 6층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었다.
평균적으로 5층에서 6층을 만드는 데 빨라도 3~4년이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성진의 성취는 그야말로 경이적인 속도였다. 이 정도면 스콰이어를 넘어, 막 입단한 하급기사 수준은 될 거라나.
마사인이나 상주기사들의 감탄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고. 그 브루노 단장조차 경악을 금치 못하더니, 뭔가 배신당한 듯한 표정을 지었더랬지.
-아니, 이렇게 잘 할 수 있는 분이 제 수업 시간에는 대체 왜?
모레스는 아예 제자라고 생각지도 않고 있었던 것 같은데 뭘 새삼스럽게.
“브루노 단장은 아버지 덕분에 오러를 되찾았습니다. 오러 활성이 돌아오는 만큼 풍채가 날이 갈수록 달라지지 뭡니까. 데카론 나이트의 경지에 이르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더군요.”
“…….”
성황은 딱히 대답하지 않았지만, 성진은 어쩐지 그가 평소보다 주의 깊게 경청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쨌든 브루노 단장 역시 빠른 속도로 오러를 쌓아 얼마 전 4층을 이루어냈다.
늘 느긋하게 여유를 부린다 싶었는데, 최근에는 뭔가 오기가 생긴 듯 명상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이었다. 그의 콧수염 끝이 더욱 길고 예리해지고 있는 것은 덤이고.
그리고 또 하나의 화제로는 마물 전담 대책반이 있겠다.
성진은 이틀 전부터 마사인과 함께 매일 전담반 사무실에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정식으로 부서가 발족된 만큼, 형식상 출근이란 걸 시작한 것이다.
물론 아직은 업무에 관해 이렇다 할 방침이 마련되어 있지도 않고, 그저 같은 팀이 된 사람들과 친분이나 쌓고 있는 수준이었다.
처음 레안드로스 경의 말로는 여기저기서 인재를 초빙하고 있다고 했는데, 실제 자문으로 선임된 교수들은 한창 성회에서 말싸움 중이었다. 거기다 총 책임자인 레안드로스 경은 본인의 일도 워낙 많은 터라 사무실에 올 생각도 하지 않았고.
어차피 이미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는 엑소시스트들이나 인퀴지터들은, [마물] 탐색을 추가로 명받고 하던 일을 계속할 뿐이었다.
결국 현재 전담반 사무실에는 반쯤 정신 나간 엑소시스트가 하나, 쾌활한 빨강머리의 인퀴지터가 하나, 그리고 라이오라 역병회의 향수 테러범 하나만이 꼬박꼬박 출근하는 중이었다.
특히 성진은 이 라이오라 돌팔이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지브릴 시모어.
그녀는 얼마 전 성진과 함께 수도 경비대에 난입한 인연으로 마물 전담반에 눌어붙었다. 일전에는 재판부 앞에서 만나 성진 일행에게 장미향 테러를 자행하기도 했던 그 역병 의사다.
물론 사무실에 처음 들어온 날도 예외는 없었다. 그녀는 상큼하게 웃으며 새 멤버들에게 인사 대신 향수 세례를 퍼부었던 것이다.
“그래서 출근하면 온 사무실에 장미향이 진동한다고요! 아, 진짜! 레안드로스 경은 그 돌팔이를 어디에 쓴다고 데리고 온 건지 모르겠다니까요.”
성진이 입을 삐죽거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성황이 머리를 한쪽으로 슬쩍 기울였다.
“그래도 제법 괜찮은 향이 아니냐. 역병 환자를 돌보다 보면 악취에 시달리는 일이 많으니, 그들이 향수에 연연하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억. 조심한다고 했는데 그새 몸에 배인 겁니까?
성진이 옷소매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다가 반짝 고개를 들었다.
“역시 아버지도 향이 병을 몰아낸다는 헛소리를 믿지 않으시는 거군요?”
“흠…….”
성황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차마 성회에서 공식적으로 밀어주는 역병 의사들을 대놓고 돌팔이라고 매도하지는 못하겠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이 멤버가 모여서 하는 일이 그겁니다. 경전이랑 신학 개론을 펴놓고, 우리 이제 뭐 할까, 책 보면서 의논하다가 반나절이 그냥 지나가요.”
성회는 대체 언제 끝납니까? 그냥 막 조사를 하면 되는 거지, 뭘 그렇게 따지는 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성진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듣던 성황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서 드디어 신학 개론을 조금 읽어보았다는 말이더냐?”
“음…….”
그냥 펴놓고 딴생각만 했지만.
이번에는 성진이 시선을 피할 차례였다.
그렇게 시선을 내리는데 성황의 허리춤에 못 보던 검이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호두까기와는 달리 짧은 검신을 가진 하얀 숏소드였다.
겉보기에 수수한 것이 참 취향 한번 올곧다 싶었다. 그런데 이전에 쓰던 것보다 너무 짧은 것 아닌가?
“어차피 오러 블레이드를 쓰면 그만인 것을. 손질할 필요 없이 튼튼한 검이면 족하다.”
아, 마음 가는 곳에 오러가 가는 분께는 이미 검 길이 따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거구나.
강한 흥미를 내보이자 성황은 순순히 검을 풀어 성진에게 보여주었다.
유백색의 손잡이를 가진 새 검은, 마찬가지로 검 날 역시 보기 드문 하얀 빛을 띠는 금속으로 되어 있었다. 들어보니 무척 가벼우면서도 단단한 것이, 볼수록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다른 장식은 없는데도 참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이다.
성황 역시 제법 그 검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참으로 날렵한 생선과 같지 않으냐? 하여 이 검의 이름은 참연어라 한다.”
엑? 잠깐?
“…설마 그게 그 검의 본래 이름입니까?”
“글쎄다. 황궁 창고에서 그냥 적당해 보이는 것을 가져와서 잘은 모르겠구나.”
황궁 창고에 있을 정도면 보검인 거 아냐? 대단히 멋들어진 이름이 있을 거 같은데?
“저, 아버지. 그래도 만일 유서 깊은 검일 수도 있으니, 제대로 이름을 알아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성진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 근사한 검이 제2의 호두까기가 되는 사태는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성황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더욱 멋진 이름이 붙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을. 참연어는 참으로 부드럽고 맛있는 생선이니라.”
“…….”
이 양반, 혹시 해산물을 좋아하나?
성진은 인상을 쓰고 잠시 고민했다. 이 양반을 어떻게 말려야 하지?
뭐,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성황 폐하의 애병 참연어’라니, 이러면 뭔가 좀… 그렇지 않은가?
“음, 아버지…….”
성진은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물론 이 검이 살아 있는 물건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번 이름이 붙은 것이라면 그것이 잊히는 것도 참 안 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애착을 가지고 아끼려 한다면, 그것의 이름 역시도 아껴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래. 이름이란 것은 정말 중요한 것이지.
일전에 쌍둥이들도 그러지 않았는가. 누군가를 이 세계에 묶어두는 건 이름이라고, 그 이름을 계속해서 부정당하면 세계에 발을 붙일 수 없게 된다고.
게다가 이 검이 본래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던, 그것이 단연코 참연어보다는 멋질 것이라는 데에 내 전 재산을 걸어도 좋다!
물론 아버지한테 받은 재산일 테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참연어를 고집할 것 같았던 양반이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물끄러미 성진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옳다. 본래의 이름이 잊히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닐 테지.”
그렇다면?
“내 루이스를 시켜 황궁 창고 기록을 조사하라 이르마.”
됐다! 제2의 호두까기 사태를 막아냈다!
성진은 불끈 주먹을 쥐며 속으로 환호를 내질렀다. 그래서 그때 언뜻 성황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찰나의 표정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