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87)
성황의 아이들-87화(87/469)
087. 이계 묵시록 (2)
참연어의 본래 이름을 아는 데는 굳이 황궁 창고 기록을 조사할 필요도 없었다. 마침 새 차를 우린 포트를 들고 들어온 시종장 루이스가 명쾌한 대답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검의 이름은 [은가시]이며 별명은 [아카시아]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검이지요.”
그는 성황의 자리에 따뜻한 새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경전에서 내려받은 미덕은 [참회]라 합니다.”
보검에 경전의 미덕을 덧붙이는 것이 델크로스 황실의 오랜 관습이라고 한다. [약속]이라던가 [희생]이라던가 [경애] 같은 것들 말이다.
그나저나 수석 시종장쯤 되면 황궁 창고 물품을 전부 꿰고 있는 거구나. 대단한데?
성진의 감탄에 루이스는 허허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이 검이 특별한 것이지요. 성유물로 지정된 몇 안 되는 무구 중 하나였지만, 수십여 년 전 갑자기 도난당했었으니까요.”
당시 다른 성유물들과 함께 신학 아카데미 내에서 엄중한 관리를 받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오랜 탐색 끝에 다시 찾은 검은, 그저 보통의 보검이 되어 있었다고.
“벌써 40년도 전의 일입니다. 당시의 저는 견습 시종에 불과했습니다만, 워낙 유명한 사건이었던 터라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무려 성유물이 도난당하고, 성유물의 격을 잃어버리는 사건이었다. 황실과 아카데미가 발칵 뒤집혔었다고.
고위 성직자들과 아카데미의 학자들이 몇 개월을 매달리며 난리를 쳤지만, 검이 잃어버린 고귀한 격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많은 사람들의 한탄 속에서 은가시는 황궁 창고 안에 방치되기에 이르렀다 한다.
“그래서 저는, 폐하께서 이 검을 선택하신 것 또한 운명이 아닌가 하였습니다.”
루이스는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성황을 바라보았다.
그러한 내력을 미처 몰랐던 성황의 얼굴은 자못 진중해 보였다. 무려 성유물이었던 검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
“별다를 것 없는 이름이 아닌가. 그렇다면 은가시보다는 역시 참연어 쪽이…….”
그게 고민이었나!
성진은 재빨리 소리쳤다.
“아니! 절대로 은가시나 아카시아 쪽이 멋집니다!”
“…….”
그렇게 시무룩한 얼굴 해도 아닌 건 아닌 겁니다!
* * *
알현을 마치고 진주궁으로 돌아가는 길, 성진은 잠시 재판부에 들르기로 했다. 수감되어 있는 케네스 디고리와 검은 선지자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마물 전담부에 출근해도 할 일이 마땅치 않고, 전담부의 전원이 어쩐 일인지 성진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 실정. 그렇다 보니 그냥 내키는 대로 자체 조사해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각다각. 느린 속도로 달리는 마차 안에서 성진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동행하고 있던 마사인이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살피더니 묵묵히 입을 다문다. 왜 쓸데없이 재판부로 가냐며 단속을 하기에는 현재 황자의 얼굴이 자못 심각했기 때문.
사실 알현하는 내내 성진이 정말로 성황에게 묻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혹시 아렌쟈를 통해 브루노 단장을 계속 주시하고 계셨던 것은 아닌가요?
-그가 온전히 저의 인과에 속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아렌쟈는 저나 마왕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아버지는 저와 마물 전담부에 대체 무엇을 기대하고 계시는 겁니까?
한데 막상 성황의 얼굴을 마주 보면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과연 성진의 묘한 예감 때문인지, 아니면 예민한 기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성황과 대화를 하다 보면 성진은, 이따금 그에게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위태로운 공기를 감지할 때가 있었다.
-가끔은 입 밖에 내뱉은 것만으로도, 그 토대가 크게 흔들려 무너져 버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카트리나가 한 말이 계속 떠오르기도 하고.
‘게다가 기분 탓인가, 요즘 묘하게 사람이 피곤해 보인단 말이지…….’
잠시 생각하던 성진은 곧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마구 흩트렸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맞은편에 있던 마사인이 움찔 놀라며 그를 쳐다본다.
‘아 모르겠다! 골치 아프다!’
애초에 이런 고민은 성진의 적성이 아니었다.
뭐 성황이 어련히 알아서 잘 하지 않겠는가. 공사가 다망한 양반의 일을 돕지는 못할망정, 괜히 거기에 입을 대어 부담을 더할 필요는 없겠지.
그래. 우선 사고나 치지 말자.
지금까지처럼 몸 건강히 얌전하게 지내는 것만으로도, 나름 자식 된 도리를 다하는 게 아니겠어?
그렇게 성진이 나름 기특한, 성황이 알았다면 한숨을 쉬었을 생각을 하는 동안 마차는 재판부 앞에 도착했다.
성진이 재판부를 방문한 것은 마침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검은 선지자들] 회원 여섯 중 셋은, 성회가 끝날 때까지 보석금을 내고 귀가 조치하게 되어 곧 감옥을 나갈 예정이었던 것이다.물론 이 일의 주모자이자 저택의 하녀와 하인, 두 사람의 실종과 관련이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케네스 디고리는 제외였다.
회색 역병으로 치료받고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한 애슬리와 조나단도 마찬가지였고.
“저희는 그 병에 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저하.”
“애슬리와 조나단, 두 사람은 처음부터 다른 곳에서 조사를 받은 걸로 압니다.”
출옥을 준비하고 있던 세 사람이 머뭇거리며 말하자 성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성진은 지금 이단 재판부를 의심하고 있었다. 디고리 저택에서는 멀쩡하던 두 사람이 재판부로 이송되었을 때는 이미 마물의 알이 박힌 채였던 것.
그렇다면 마물의 알이 박힌 것은 이단 재판부 내의 감옥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말이다.
두 사람이 의식을 회복하여 증언을 해준다면 간단한 일이지만, 회색 역병을 앓은 사람들은 마구잡이로 생겨나는 염상 결정 덕에 모두 정신이 이상해진다고 하니 무사히 깨어날지도 미지수였다. 그렇다면 이단 재판부에서 함께 있었던 놈들을 족치는 수밖에.
그러나 몇 번을 캐물어도 세 사람은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애초에 다른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던 것 같고.
결국 성진은 별다른 성과 없이 세 사람을 내보내야 했다.
“저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그때 다른 곳에서 치료를 받는 중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만난 것은 케네스 디고리.
그는 안색이 상당히 초췌해져 있었는데, 그것이 감옥에서 마음고생을 해서인지 아니면 얼마 전 날림으로 제출한 졸업논문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반트라 모스 사건 당시 그는 성진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두개골 골절이 생겼다고 한다. 덕분에 치료를 받느라 정작 이단 재판부에서는 별다른 고생이 없었던 것이다.
“자네는 나에게 진심으로 감사해야 해.”
“…네?”
대가리를 깬 장본인이 오히려 거드름을 피우자 케네스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멍청히 성진을 바라보았다.
당시에는 완전히 정신이 나간 놈처럼 굴었었는데, 이 지경이 되고 나니 그는 다시 얌전하고 반듯해 보이는 청년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 자식, 반트라 모스에게 사용인 두 명을 먹인 것은 기억하고 있는 건가? 적어도 내 눈앞에서 애슬리 베쳐를 먹이로 던져 주려 했던 것은 발뺌할 수 없을 거다.
그런데 이놈이 불쌍한 얼굴로 성진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를 말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하. 그때는 제가 어떻게 되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제가 왜 그랬는지 저도 잘 이해가 가질 않아서…….”
뭐, 이 자식아?
성진의 표정이 험악해지자 케네스 디고리는 움찔 놀라더니 기가 죽어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에 와서 이런 말씀 드려봐야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저희 [검은 선지자들]은 그저 이 세계의 신비로운 일들을 찾는 소소한 모임이었을 뿐입니다.”
그들이 처음 모임을 만든 것은 2년 전이라고 한다. 그저 교수들 몰래 금서를 재미로 읽고, 여러 가지 의문점을 토론하기도 하는 혈기 왕성한 사교 클럽이었다고.
그런데 1년 전 [현자]라는 사람이 나타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자신을 ‘이 세계의 진리에 도달한 자’라고 거창하게 소개한 현자를, 처음에 회원들은 쉽게 믿지 않았다.
그러나 현자는 알면 알수록 대단히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지식이 무척 풍부했으며, 이따금 비밀을 털어놓듯 말해주는 세상의 진리 또한 대단히 그럴싸하게 들렸다.
무엇보다도 그가 가지고 온 검은 덩어리는 결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언가가 아니었다. 그것이 이 세상의 신비라는 것을 회원들은 점점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레스로부터 후원이 시작된 것도 대략 그즈음이었다고 한다.
-현자님의 말씀대로군요! 아마도 황자님이라면 우리의 신비를 함께 나눌 수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문득 디고리 저택 지하에서 케네스가 외쳤던 말들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그 반트라 모스의 애벌레를 이곳에 처음 가져온 것은 그 [현자]라는 놈이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자는 검은 선지자들에게 모레스에 관해 언급을 했다.
대체 그 현자라는 놈은 뭐지?
“실은, 그… 현자님에 대한 것이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케네스 디고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그를 노려보는 성진의 눈초리가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었기 때문.
“하지만 정말입니다! 저희는 분명 그에게 매료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만, 생각해 보면 그의 얼굴이며 목소리며 제대로 기억나는 것이 없어요! 그를 어떻게 처음 만나게 되었는지도 이제 와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케네스 디고리는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성진은 하벤이 회색 역병에서 막 깨어났을 때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뭐 하는 사람이었는데?
-음? 글쎄요, 술이 너무 취해서 그런가? 지금 생각해 보면 얼굴이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네요. 그냥, 길고 고운 머릿결이 참 예뻤던 거 같아요.
그날 하벤은 정말로 단순히 술에 취해 있었던 것뿐일까?
이후로 그 현자라는 자에 관해 케네스를 더 족쳐보았지만, 마땅히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었다.
케네스가 마지막으로 현자를 만난 것은 모레스 황자에게 초대장을 보낸 그날이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검은 선지자들은 그냥 망나니 황자의 후원금만 받고 계속 무시할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자가 그날 직접 케네스에게 모레스 황자를 모임에 초대할 것을 권했다.
-그 황자의 눈에 무엇이 보이는지 알게 되어도 그대들이 그런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무거운 제약은 언제나 거대한 잠재력을 내포하고 있는 법. 이 세계의 신비에 입문할 자격으로는 차고 넘치오.
그것이 모레스에게 뜬금없이 모임의 초대장이 도착한 내막이었다.
‘…어이, 마왕아.’
[음, 사실인 거 같아. 맥박이 빠르긴 한데 그냥 감정적인 동요 때문으로 보여.]간이 거짓말 탐지기는 오늘도 열일을 하고 있었다.
성진은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하는 케네스를 잠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면회실을 나왔다.
아무래도 그 현자라는 놈을 좀 더 파고들어야 할 것 같은데, 대체 어디에서 단서를 얻어야 할지 모르겠다.
아직은 회색 역병 조사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고 있는데.
아, 찝찝하다. 찝찝해.
연무장에서 막 호두까기를 휘두르고 싶어진다.
그런데 막상 연무장으로 나갔더니, 더욱 골치 아픈 이야기가 성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렇게 운을 뗀 브루노 단장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회색 역병에 걸리기 전, 우연히 어린 시절의 첫사랑과 비슷한 사람을 만났다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었나?”
처음 병에 걸린 경과에 관해 물었을 때, 브루노 단장은 거의 기억나는 것이 없다고 진술했었다. 성진의 물음에 단장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것이… 그때는 그저 잠시 꿈을 꾼 거라고 여겼던 터라…….”
“아.”
확실히. ‘첫사랑이 나오는 좋은 꿈을 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참 모양 빠지는 일이긴 하지.
“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것이 꿈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녀의 얼굴은 그렇게나 흐릿한데, 목소리만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기억이 나니까요. 물론 당시 제 기억이 온전치는 않아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정말 그대의 첫사랑이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녀는 오래전 오르토나 내전 당시 확실히 죽었습니다.”
“흠…….”
성진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브루노 단장이 만났다던 첫사랑을 닮은 사람. 하벤이 만났다던 끝내주는 미인.
그리고 검은 선지자들을 매료시켰던 현자.
[…뭔가 냄새가 나는데? 꼭 악마들이 쓰는 [매혹] 같은 느낌이 나.]마왕의 말에 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습니다. 빨강이 님의 말씀대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매혹]이라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는 겁니다. 하지만 이 델크로스에 악마종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누가 빨강이냐고!]“네, 실례했습니다. 빨강이 님.”
[크악!]성진은 손을 들어 옥신각신하는 둘을 제지했다.
“그래서,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나?”
“별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그저 절 보듬고 위로해 준다는 느낌에 긴장을 완전히 풀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고통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아요. 이제 그 누구도 원망할 필요 없어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며칠 푹 자고 나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겁니다.
“…이런 느낌의… 아, 그렇다고 해서 제가 폐하나 저하를 원망했다는 것은 아니고…….”
단장이 뒤늦게 횡설수설 변명했지만, 성진은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알아, 이 양반아. 아무리 성황가에 진심으로 충성했다고 해도, 수년간 폐인으로 살았는데 원망 한 번 안 하면 그게 인간이겠어? 아마 나였다면 모조리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았을 텐데.
“그래, 속으로 몇 번을 갈아 마셨다고 해도 나는 이해해.”
“그러니까 그것이 아니오라…….”
“아무렴. 알아. 다 알고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