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88)
성황의 아이들-88화(88/469)
088. 이계 묵시록 (3)
매혹.
고위 악마라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보통은 마기를 매개로 발현된다고 마왕은 설명했다.
[그렇다 보니 성직자가 아닌 인간에게는 딱히 저항할 방법이 없어. 그러니 이놈이 정신을 못 차리고, 누가 알을 심는 것도 모른 채 헬렐레거린 걸 테지.]“누가 헬렐레거렸다는 겁니까, 빨강이 님!”
[그러니까 누가 빨강이냐, 이 얼뜨기야!]왁왁거리는 둘을 내버려 두고 성진은 생각을 정리했다.
로페룸의 알을 심고 다니는 녀석이 뭔가 [매혹]과 같은 기술을 쓴다는 가정은 제법 타당해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느 미친놈이 자기 가슴팍에 기생충을 심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겠는가.
하지만 그러려면 일단 악마종이 황도 내에 들어왔다는 전제가 선행되어야 하지 않나? 델크로스는 완전히 성황의 영향 아래에 장악되어 있기 때문에 악마종이 얼씬도 하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보통의 매개가 마기라는 거지, 다른 것이 매개가 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아. 어떤 의미에서는 마기처럼 저항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니 더 위험할 수도 있지. 예를 들면 신성력이라던가…….]뭐?
성진이 눈을 깜박거리자, 마왕이 한숨을 쉬었다.
[멀리 갈 것도 없지. 떠올려 봐. 네 아버지의 압도적인 신성력을 마주했을 때 인간들의 반응이 어땠는지.]그 말에 성진은 목검이 터졌던 그날의 일을 회상했다.
어땠냐니? 그저 조금 감동했을 뿐이 아니었나?
그러니까 추기경들이 모조리 회의실에서 튀어나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주신을 외치며 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눈물을… 어라?
‘…뭔가, 엄청 위험하게 느껴지는데?’
성진이 식은땀을 흘리자 마왕이 주억거렸다.
[그렇지? 좁은 의미에서 매혹은 그저 상대를 유혹하는 기술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매혹은 인간 본연의 감정을 극도로 자극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는 기술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그 매개가 신성력이든 오러든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할 수 있지.]즉 마왕의 말은, 인간의 감각 일부를 제대로 자극할 수만 있다면 [매혹]과 유사한 효과를 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보통의 인간은 어디서부터가 매혹인지도 잘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그렇다 보니 알면서도 거기에 저항하기 힘들어하지. 그 예로, 지금까지 내가 수없이 많은 인간들에게 [매혹]을 사용해 봤지만, 넘어오지 않은 경우는 단 하나뿐이었어. 오직 이성진, 너 하나 말이야.]‘…응?’
잠깐, 방금 뭔가 그냥 넘길 수 없는 말을 들은 기분이.
‘…뭘 걸어?’
[어, 매혹. 나, 너한테 걸었었는데…….]성진이 경악했다.
대체 언제?
[그러니까 막막, 내가 너한테 세계를 주겠다고 막 그랬잖아. 그때 나 되게 끝내주는 미녀로 보이지 않았어?]‘……?’
확실히 그때 마왕 놈이 뭔가 여러 가지 제안을 하기는 했다.
-나는 목숨을 건지고, 너는 지구와 마계를 둘 다 가지는 거야. 융합된 두 세계가 품은 잠재력을 생각해 봐! 넌 마왕에 필적하는 힘을 가질 수도 있어!
그러니까 그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생각해 보자.
그때 마왕 놈이 어떤 모습이었지? 머리만 남아 있는, 그것도 주먹질로 얼굴이 완전히 뭉개진 절세미녀?
잠깐, 그게 [매혹]이 통할 상황이냐?
[…크흐흑!]마왕 놈은 갑자기 울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고는 그대로 성진의 머리 한구석에 틀어박혔다.
흠, 어쩐지 놈의 트라우마를 자극한 것 같았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수련을 마친 성진은 마사인과 함께 마물 전담 대책반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처음 이틀간은 브루노 단장도 그들과 동행했었다. 성진 곁에 머물러 달라는 아렌쟈의 의뢰를 충실히 이행한 것.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마물 전담반 사무실을 꺼리기 시작했다.
“그 여자가 계속 시끄럽게 말을 겁니다.”
연유를 묻자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그 여자?”
단장은 말없이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아, 머리에 비정상적인 염상 결정이 있는 여자.
성 테르바키아의 엑소시스트, 샤론 경이다.
평소 조용히 할 일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채널링 능력자에게는 느낌이 다른 모양이다.
듣자 하니 그녀의 통제되지 않는 염상 결정으로부터 끊임없이 여러 가지 목소리가 들려온다고. 참아보려 해도 도저히 시끄러워서 감당이 안 된단다.
“본인 말로는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상이라며 양해를 구했습니다만, 글쎄요…….”
그렇게 말한 단장은 미간을 팍 구기며 신경질적으로 콧수염을 잡아당겼다.
“은근슬쩍 저에게 이런저런 민망한 말들을 던지고, 제 반응을 보면서 웃고 있습니다. 즐기고 있단 말입니다. 정말 기분 나쁜 여자입니다.”
“…….”
샤론 경. 대체 왜 그랬어?
오랜만에 자신과 같은 채널링 능력자를 만나니 들떠서 어쩔 줄 몰랐나 보다.
그렇게 해서 진주궁의 고정 출근 멤버는 다시 성진과 마사인, 두 사람이 된 것이다.
마물 전담반은 행정부 건물 별관 2층의 임시 사무실을 그대로 사용하는 중이었다. 별관 자체가 한적한 편이었기 때문에 마주치는 사람 없이 사무실에 도착한 두 사람은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장미향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지브릴…….”
“저하!”
다갈색 고수머리를 야무지게 틀어 올린 커다란 눈의 아가씨가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예를 취했다.
지브릴 시모어.
라이오라 역병회의 역병 의사로 전담반에 초빙된 젊은 재원이다.
그녀는 언제나 커다란 분무기에 가득 장미 향수를 들고 다녔는데, 쓸데없이 부지런해서 아침마다 제일 먼저 출근해 사무실 방역을 끝내두곤 했다. 즉 아무리 청소를 해도 사무실에 장미향이 가실 날이 없다는 것이다.
성진이 보기에는 돌팔이가 따로 없었지만, 신성 제국의 황자가 성회에서 인정하는 라이오라 학파의 가르침을 대놓고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담반 책임자인 레안드로스 경이 초빙한 인재를 함부로 내쫓을 수도 없고.
게다가 기본적으로 그녀는 성격이 싹싹한 아가씨였다. 상냥하게 웃으며 향수를 뿌려대니, 이건 뭐 화를 내지도 못하고 재주껏 향수 분사 범위에서 도망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성진은 한숨을 쉬었다.
“다른 사람들은?”
“샤론 경은 오늘 하루 레안드로스 단장님을 보좌하여 외근이랍니다. 발레리 경은 잠시 신학 아카데미에 다녀온다고 했습니다.”
“앗! 저하, 벌써 오셨습니까!”
지브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빨강머리 인퀴지터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해맑게 웃는 얼굴로 팔에는 커다란 책을 하나 든 채였다.
“오시기 전에 빨리 다녀온다고 했는데,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아냐, 방금 왔어. 그건 뭔가?”
발레리 경은 싱글싱글 웃으며 들고 온 책을 탁자 위에 턱 하니 얹었다. 오래된 고서인지 풀썩 책 먼지가 일었다.
“기대하십시오! 아마도 이 책을 펼치는 것은 수십 년 만에 우리가 처음일 겁니다.”
그의 말처럼 묵은 먼지가 가득 쌓여 있는 낡은 책이다. 검게 변색된 가죽 표지를 탈탈 털어내니 겨우 알아볼 정도로 닳아버린 책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이계 묵시록]마사인이 움찔 놀라며 발레리 경을 노려보았다.
“…이건 성회가 지정한 금서 아닌가?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유독 이단 논란에 민감한 마사인이었다. 그가 마치 책으로부터 성진을 보호하겠다는 듯 슬그머니 끼어들자, 빨강머리 인퀴지터가 순간 당황한 듯 눈을 끔벅거렸다.
“어, 염려 마십시오. 물론 정식으로 허가를 받고 신학 아카데미에서 빌려 온 겁니다.”
“허가가 났다고?”
마사인이 의심쩍은 눈으로 노려보니 발레리 경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뭐, 그럴 만도 하죠. 요즘 성회에서 이계 생물에 관한 논의로 난리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 보니 몇 가지 자료가 금서 목록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
지브릴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고개를 들이밀자, 발레리 경이 그녀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적어도 그 [마물]에 가까운 이계 생물에 대해 기술된 건 이 책 하나뿐이라니까요. 만일 금서로 남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부서에 한해서는 앞으로도 제한적 열람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이래 봬도 마물 전담반이 아닙니까?”
마물이 실려 있는 책.
그제야 성진도 궁금증이 이는 것을 느끼며 마사인의 어깨 너머로 책을 곁눈질했다.
대체 누가 델크로스에서 마물에 관해 책을 쓴다는 건가? 어떻게 이 세계에 없는 생물에 관해 알았던 거지?
[오호. 게헤나의 마물이 실려 있는 책이 있어?]마왕도 간만에 흥미로운 감정을 보내왔다.
[누가 쓴 거지? 거 참, 신기하네.]여전히 머뭇거리는 마사인을 제치고 성진은 가까이 다가가 책 표지를 자세히 살폈다.
두터운 가죽 표지에는 여기저기 섬세한 양각 무늬가 새겨져 있어, 닳아버린 글자들을 잘 구별하기 어려웠다. 한참을 관찰한 끝에 성진은 책 귀퉁이에서 겨우 저자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시구르트 시구르슨 저
시구르트? 설마?
[이성진! 이놈이야!]머릿속에서 흥분한 마왕 놈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내가 전에 말한 그놈이 틀림없어! 꿈에서 꿈으로 돌아다니는 그 이야기꾼이야!]* * *
디고리 저택에서 죽었다 살아난 날.
절대 안정을 권고받은 이성진은, 침상에 누운 채로 마왕 놈과 그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보이드의 경계에서 마왕이 보았던 고위 마왕들, 그리고 외계 군주들의 이야기.
성진이 시구르트 34지구로 날아갔다가 성황의 도움으로 돌아온 이야기. 쌍둥이를 만나 여기저기 돌아다닌 이야기.
그 중에서도 둘이서 가장 오래 이야기를 나눈 것은 성진이 봤던 그 인형극에 관한 것이었다. 꿈의 마왕과 불의 마왕, 그리고 잔인한 용사에 대한 인형극.
[그때 날 공격한 것이 그놈이었단 말이지!]마왕 놈은 분한 듯 씨근덕거렸다.
[그런 간지럽지도 않은 공격을 날리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다!]간지럽지도 않았다며?
[야! 벼랑 끝에 서 있는데 손가락으로 살짝 밀어봐라. 어떻게 되겠냐? 난 그때 차원의 경계에서 다 죽어가고 있었다고!]어, 미안.
한동안 분통을 터뜨리던 마왕은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흥분을 가라앉혔다.
[네가 봤다는 그 인형사는 아마 꿈속을 돌아다니는 이야기꾼일 거야.]‘이야기꾼?’
[꿈에서 꿈으로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전하고 다니는 놈이지. 천개의 꿈을 거닐며 천개의 목소리를 낸다고 해.]성진은 묘한 마력이 깃든 그자의 목소리를 상기했다.
그렇다면 그자는 꿈의 마왕인가? 이야기의 마왕이 되기 위해 용사와 싸워야 한다는?
[글쎄. 내가 알기로는 그놈은 마왕이라고 불릴 만한 놈은 아니야. 이야기가 꿈의 상위 개념인 것도 아니고. 아마도 그놈은 그저 작은 염상을 만들기 위해, 재료가 되는 개념들을 가볍게 만진 거 같아.]마왕의 설명은 이러했다.
아마도 인형사에게 필요했던 개념은 [꿈]과 [불의 마왕], 그리고 인간인 [용사]다.
당연히 꿈의 마왕은 불의 마왕과 친구인 것도 아니었고. 단지 불의 마왕이 누군가의 꿈속으로 들어와 인간과 싸우다 죽었다는 것. 그 사실을 염상으로 구체화하는 것만으로 충분했을 거라나.
‘그럼 배신이 난무하는 그 음침한 이야기는…….’
[이야기의 저자가 음침한 놈이니 음침한 이야기가 탄생하는 거 아니겠어? 단지…….]‘단지?’
[잔인한 용사에 관해서만은 제법 고증이 잘된 이야기 같은데.]뭐, 이 새끼야?
둘은 잠시 옥신각신 말싸움을 했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때 난 뭐 이런 사이코 같은 놈이 다 있나 싶었다고!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고 그냥…….
뭐라고? 먼저 침략해 놓고서 너 너무 당당한 거 아니야? 게다가 영혼만 남은 주제에 벌렁거릴 심장이 어디 있다고 징징거리냐? 어?
어쨌든 성진이 주목한 것은 마왕의 진짜 이름, 그리고 그 [꿈]이라는 부분이었다.
마왕의 이름은 역시 [알 파하스]가 아니었다. 애초에 이름을 비꼬아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당연한 것일지도.
그러나 마왕 놈에게 진짜 이름을 묻자 그는 대답을 망설였다.
[음, 넌 모르는 게 좋을지도 몰라. 이 이름은 입 밖으로 불러서는 곤란하거든.]‘어째서?’
[그런 게 있어. 무언가 잔뜩 걸려 있으니까.]‘……?’
그럼 앞으로 또 놈이 어디론가 불시에 날아가 버리는 일이 생길시 어떻게 놈을 부르는가.
[내가 널 내 쪽으로 부를게. 그러면 너희 아버지가 휙 하고 다시 데리러 오지 않을까?]‘뭐, 인마?’
성황이 알았다면 뒷골 잡을 이야기를 잘도 속 편하게 떠들고 있었다. 또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 양반이 잘도 딱밤으로 넘어가 주겠다!
성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 [꿈]이라는 건 또 뭐야?’
게헤나의 마왕이 불의 마왕으로 대변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게헤나는 지옥의 업화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불의 마왕이 꿈속에서 인간 용사와 싸웠다는 부분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거지?
그러나 마왕은 여상하게 대답했다.
[뭐긴 뭐야. 시구르트 34지구 같은 하위 염상 차원을 그냥 꿈이라고 말하는 거야.]엉?
어안이 벙벙해진 성진을 향해 마왕이 설명을 덧붙였다.
[시구르트 34지구라는 명칭은 다른 게 아니야. 시구르트라는 이야기꾼이 34번째로 발견한 지구 차원이라는 뜻이지.]34번째로 발견한 지구 차원?
‘지구라는 차원이 그렇게 많아?’
[단순한 염상 차원이니까. 본상세계의 지구는 따로 있어, 이성진.]너무 놀라 할 말을 잃은 성진에게 마왕이 쐐기를 박았다.
[너의 세계는 누군가가 본상세계의 개념을 토대로 만든 염상세계. 즉 누군가의 꿈에 불과하다는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