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95)
성황의 아이들-95화(95/469)
095. 로건 (2)
리자베스 아세인. 현 대륙 정세에 영향력이 지대한 아세인 대공의 여식.
성황이 황위에 오르기 전 만난 인연으로 3황자 모레스를 낳고, 현재 1황비의 자리에 오른 야심만만한 여인이다. 그녀가 황후의 자리를 노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모레스를 황태자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는 사실은 마왕에게 들은 바 있다.
성진은 그녀에 대해 몇 가지의 의혹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그녀는 분명 어떠한 과거를 감추고 싶어 하며, 모레스가 기억이 없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모레스를 황태자로 만들고 싶어 한 것치고는, 어째 아들이 뭘 하든 그다지 간섭하는 것 같지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마사인이 유난히 그녀를 경계하는 이유 또한 그와 관련 있지 않을까 성진은 추측하는 중이었다.
둘째, 모레스가 과거에 여러 단체들에 대해 후원을 한 것이 실은 리자베스 황비의 소행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다.
왜 하필 그런 수상한 단체들이냐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황자의 이름을 사칭하며 그렇게 오랜 시간 은밀하게 후원을 한다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가능한 것인가.
점점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는 조나단에게 검은 선지자들의 모임 후원 건을 자세히 물어보면 좀 더 확실해지겠지만.
셋째. 과거 그녀가 어린 모레스에게 꾸준한 정서적 학대를 해왔을 가능성이다.
꿈에 성진이 알지 못하는 2황자 로건이 등장한 것을 보면, 역시 성진이 보는 것은 모레스의 과거가 맞을 것이다. 비록 잠깐 동안의 동조였을 뿐이지만, 그때의 성진이 느낀 것은 황비의 폭언이 하루 이틀이 아닌 제법 오래 지속되어 왔다는 것.
비교적 정상적인 아이처럼 보이던 모레스가 갑자기 개망나니가 된 것과 뭔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후후, 어머니에 대해 조사를 의뢰하는 아들입니까.”
다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얼굴이 어쩐지 콩가루 막장 드라마를 기대하는 후배의 얼굴을 연상하게 하여 성진은 손사래를 쳤다.
“내가 이전 기억이 없어서 그렇지. 어머니께 자꾸 물어보는 것도 뭔가 못 할 짓 같고.”
“흐음…….”
다샤는 그의 변명에 알 만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비님은 아세인 대공의 따님입니다. 그녀의 주위에는 늘 아세인 대공의 세작들과 델크로스 정보원들 간의 첨예한 기싸움이 벌어지고 있죠. 섣불리 다가가기도 어렵고 정보를 모으기도 쉽지 않아요. 그녀에 관해 조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세인 대공과 폐하의 귀에 바로 들어갈 가능성 또한 매우 큽니다.”
역시 어려울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다샤가 허공을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생기 넘치는 청록의 눈이 별이라도 쏟아질 듯 반짝거린다.
“이 얼마나 성취감이 높은 일이란 말입니까! 맡겨만 주십시오. 제가 누구보다도 은밀하게, 황비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모조리 까발려 드리겠습니다! 과거의 모든 인연과 행적으로부터, 하루 몇 점의 고기를 드셨는지 화장실은 몇 번이나 가셨는지까지 낱낱이 고해 드리죠!”
어이, 이보쇼. 그건 범죄야. 내가 그 스토킹 대상의 아들이라는 건 염두에 두고 하는 소리냐?
조사 대상의 사생활 정도는 지켜줘.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저하. 몸조리 잘하시고요!”
올 때보다 한층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그녀는 사뿐사뿐 테라스를 넘더니 진주궁 정원 너머로 귀신처럼 사라져 버렸다.
성진은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전에도 느낀 거지만 정말로 드물게 성취욕 높은 인간이다.
[쟤한테 네 아버지도 조사해 보라고 해보지 그래? 반응이 보고 싶네.]마왕은 진심으로 궁금한 듯했다.
어, 난 안 궁금해. 다샤와 내가 나란히 그 양반에게 처맞을 미래가 빤히 보이니까.
성진은 침상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바로 다시 잠들기에도 좀 어중간하고 명상이나 해볼까 싶었다.
죽거나 불구가 될 뻔한 몸이었다지만, 성황이 말끔하게 치료해 준 덕분인지 온몸에 활기가 넘치고 어쩐지 몸이 더 좋아진 느낌이 들었다.
‘…음?’
이상을 깨달은 것은 명상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고갈되었던 단전의 오러들이 이미 모두 회복이 되어 있는 것은 그렇다 치고, 정신을 조금 집중하고 있는데 주변의 오러들이 스르륵 모여들더니 저절로 6층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
뭐, 최근에는 거의 6층에 근접하기는 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명상에 잠겨 있으려니 오러가 계속해서 단전에 모여들었다. 갑자기 오러 활성도가 지나치게 높아진 것이다.
어어, 하는 사이에도 마구잡이로 흘러들던 오러는 거의 7층에 근접해서야 가까스로 멈추었다.
그쯤 되니 성진도 당황해서 집중이 완전히 흐트러져 버리고 말았다.
‘이거… 뭐지?’
성진은 식은땀을 흘렸다. 하루 만에 오러 층이 이렇게 늘어나는 것이 과연 정상인지,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이렇게 막 늘어나다가 설마 목검처럼 몸이 팡 터져 버리거나 하는 것은 아니겠지?
다행히 관조해 본 몸 상태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보였다. 6층 반을 넘어서는 많은 양의 오러가 온몸을 순환하며 끊임없이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원인이 뭘까. 오러가 한번 완전히 고갈되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까?
아니면 혹시…….
‘그 양반이 뭔가를 한 건가?’
무심코 그렇게 생각하던 성진은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뭔가 이상한 일이 있으면 일단 성황을 떠올리게 되다니, 델크로스 황궁 사람이 다 되었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명상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아 그는 그냥 침대에 누워버렸다. 이미 한잠 거하게 잔 후라 쉽게 잠들지 못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성진은 꿈 한 번 꾸지 않고 아침까지 단잠을 잤다.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처럼 진주궁의 새가 우는 시각에 성진은 잠에서 깨어났다. 멍하니 눈을 비비고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에디스가 새 물병을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이어 마사인이 방으로 걸어 들어온다.
“기침하셨습니까, 저하.”
성진은 순간 뜨끔 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어제 마사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물을 상대로 과하게 날뛰었다는 자각이 있었던 것.
디고리 저택에서 한번 죽었다 살아난 후, 그는 최근 성진의 안전에 지나치게 민감한 듯 보였다. 오늘은 또 어떻게 잔소리를 할까.
그러나 성진의 걱정과는 달리 마사인의 얼굴은 생각보다 편안해 보였다.
아니, 편안하다기보다 어딘가 해탈한 느낌이.
“일단 심장이 멎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딥니까.”
아, 그러고 보니 일전에는 완전 넋이 나가서 심폐소생술을 했다고 했지.
“제가 아무리 전전긍긍해 봤자 아무것도 바뀌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하.”
마사인은 담담하게 말하며 창문 밖의 정원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완전히 놓아버린 듯, 푸르른 정원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아련하기만 하다.
“제가 어찌 감히 황자님을 말리겠습니까. 이제 저하께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냥, 전처럼 갑자기 죽지만 말아주십시오.”
“어…….”
“그러면 이 마사인,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하를 폐하의 앞에 모시겠습니다. 네, 그러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해결되겠지요. 하하하하.”
“…….”
서늘한 아침 공기 사이로 그의 허허로운 웃음소리만이 공허하게 메아리친다.
성진은 그가 막 화를 낼 때보다 지금이 더 무서웠다.
마사인 경, 내가 잘못했어!
그날 아침 성진은 마사인과 함께 오러 수련을 하면서 갑자기 단전에 오러가 늘어난 원인을 알아보려 했다. 그렇지만 마사인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어제 저하께서 어떤 꼴이 되셨는지 두 번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늘 하루는 침상에서 나올 생각 마시고 그저 얌전히 안정을 취하십시오.”
거기다 연무장에 갈 틈도 없었다. 오전 중에 진주궁을 찾는 방문객이 끊이질 않았기 때문.
가장 먼저 그를 방문한 것은 아멜리아였다. 수련을 하다 달려왔는지 드물게도 드레스가 아닌 가벼운 셔츠와 늘씬한 바지 차림이었다.
의외로 다른 사람보다 그녀가 몹시 화가 나 있었는데, 붉게 상기된 볼을 하고 눈썹을 삐쭉 세운 그 모습 역시 어여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멜리아는 그렇게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성진에게 씩씩거렸다.
“모레스! 너란 애는 왜 그렇게 몸을 사릴 줄 모르니! 위험한 곳에 그냥 막 뛰어드는 버릇은 그만 고치렴! 옆에서 보는 사람의 기분이 어떤지 아니?”
“…네?”
제가 언제 또 위험한 곳에 뛰어들었다고.
이게 버릇이라고 할 만한 일인가요?
어안이 벙벙해진 성진이 눈만 끔벅거리는데, 아멜리아가 다가와 그의 손을 꼭 쥐며 눈을 빤히 마주 들여다보았다. 심지어 그녀의 맑은 회색 눈은 눈물로 촉촉하게 젖어 있기까지 했다.
“다시는, 두 번 다시는 그런 무서운 일은 하면 안 돼! 알겠니?”
“어…….”
당황스러웠지만 마주 잡고 있던 아멜리아의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에, 성진은 일단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정말이지?”
“네, 그럼요.”
“나랑 약속하는 거야!”
“네, 약속…….”
성진은 떨떠름하게 재차 대답했다.
아멜리아는 그 뒤로도 여러 번 그에게 확답을 받은 후에야 안심하며 은장미궁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으로 그를 찾은 것은 헤르나와 가데스, 쌍둥이들이었다. 오늘이 마침 성황과의 알현 날이었기에 체스를 두러 궁에 들어왔다나.
니들, 성황이 체스를 싫어하는 걸 잘 알면서 꼭 그렇게 그 양반을 괴롭히고 싶냐?
“모레스!”
“모레스!”
똑같은 얼굴의 인형같이 예쁜 아이들이 그를 향해 달려왔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아멜리아와는 대조적으로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침대 양쪽에서 모레스의 팔을 잡고 늘어지며 환하게 웃었다.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거야, 모레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어, 모레스!”
그리고 둘은 서로의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모레스는 모레스구나.”
“역시 모레스는 다름 아닌 모레스야.”
뭘, 또 너희들만 아는 얘기를 하면서 너희들끼리 납득하고 있어? 요 잔망스러운 꼬맹이들 같으니!
나도 오늘은 따질 것이 있다.
니들 왜 나한테 원숭이 망루에 대해 미리 설명하지 않았어?
“이제 와서 그 따위 일이 다 무슨 상관이겠어?”
“그래, 그 따위 일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뭐라고, 이것들아?
성진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데, 쌍둥이가 양쪽에서 그의 팔을 끌어안으며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잘했어, 모레스. 덕분에 생각보다 큰 피해 없이 일이 해결되었어.”
“잘했어, 모레스. 네가 그놈이 오래 공들인 일을 완전히 망쳐 버렸어.”
아이들의 말에 문득 성진은, 이전부터 추측하던 것이 사실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성황은 누군가가 마물의 알을 심고 회색 역병을 만드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일부러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그놈이 누구야? 아버지는 왜 알면서도 지금까지…….”
성진의 물음에 쌍둥이는 조금 침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알고는 있지만, 원래는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니까.”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가? 성진이 눈을 깜박거렸다.
“성황 아빠에게는 중요한 몇 가지의 제약이 생겼기 때문이야.”
“아빠 폐하에게 그 모든 걸 떠넘긴 뻔뻔한 영감탱이 덕분이지.”
헤르나와 가데스는 입을 삐죽거리며 성진의 소맷자락에 얼굴을 비볐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도 모레스 덕에 한시름 놨지 뭐야.”
“역시 모레스가 와줘서 정말 다행이야.”
“…….”
뭔가를 열심히 이야기해 주기는 하는데 정작 이야기의 핵심은 교묘하게 피해간다. 이제는 이 쌍둥이의 화법에 서서히 익숙해지는 성진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침대 옆에서 뭉그적거리더니, 잠시 후 아멜리아에게 놀러 간다며 진주궁을 떠나 버렸다.
이후로도 브루노 단장이나 상주기사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아, 오전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흘러갔다.
그리고 점심시간. 이상하게도 당장 달려올 것 같던 리자베스 황비에게 아무런 소식이 없어서 궁금해하고 있는데, 성진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그러니까, 진주궁 사용인들 전체가 불시에 긴장감에 휩싸이고.
[히익.]마왕 놈이 소스라치며 머리 한쪽으로 찌그러졌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는 침상 안에서 뒹굴거리던 성진조차도 확연하게 느낄 정도로 드라마틱한 것이었다. 의아해하고 있는데 똑똑, 하는 노크 소리와 함께 잔뜩 움츠린 에디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하. 성황 폐하께서 납시셨습니다.”
…뭐?
놀랄 새도 없이 문이 열리며, 예의 그 냉막한 얼굴을 한 성황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오전 정무가 끝나고 곧바로 진주궁으로 행차하신 모양.
딸꾹.
그의 서늘한 눈을 본 성진은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