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Holy Emperor RAW novel - Chapter (96)
성황의 아이들-96화(96/469)
096. 로건 (3)
딸꾹. 성진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딸꾹질을 했다. 어찌나 놀랬는지 인사하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였다.
성황은 천천히 침상 옆으로 걸어오더니, 선 채로 잠시 조용히 성진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주위로 기온이 확연히 내려가는 느낌이 들어, 성진은 저도 모르게 으슬으슬 한기가 이는 것을 느꼈다.
성황은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서 있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덤덤한 목소리라서 오히려 더 무서웠다.
“목검을 터뜨리더니, 이제는 스스로의 몸까지 터뜨릴 셈이었더냐.”
아, 성황은 그가 어떤 식으로 오러를 마구잡이로 돌려썼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거기서 조금만 더 나아갔으면, 정말로 온몸의 근육이 목검처럼 터져 나갔을 것이다.
“그…….”
제 오러가 놈의 핵에 닿지 않았습니다.
그 외에는 놈을 죽일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려고 하면 변명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그 검 날처럼 시린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단 한마디만이 겨우 입에서 튀어나왔다.
“…죄송합니다.”
정말로 그에게 미안했다. 진짜다.
황궁에서 모레스의 몸으로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짧은 기간 동안 얼마나 성황의 속을 썩였던가. 크게 다친 것이 수차례며, 한 번은 실제로 죽기까지 했었지.
평생 할 자식 걱정을 이렇게 단시간에 하게 만들다니, 차라리 개망나니 모레스가 그보다는 나았을지도 모른다.
진심으로 반성하며 고개를 수그리고 있자니, 서늘하던 성황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알겠느냐? 연공법은 오러의 한계를 만드는 장벽이 아니다.”
성진은 속으로 뜨끔했다.
성황은 그가 공격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당장 연공법을 집어던져 버린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확실히 성진은 당시, 그가 연공법을 따라 하느라 스스로 한계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실제 성진은 외기로 내보내기에 아직은 충분치 않은 오러를 억지로 긁어모아 거칠게 팔을 통해 방출했을 뿐이다.
그가 한 짓은 따지고 보면 그의 몸을 또 다른 목검처럼 사용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러를 멋대로 불안정하게 휘두르며 제 살을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연공법대로 수련을 하고 오러 층을 쌓다 보면 언젠가는 뚜렷하게 검 바깥으로 외기를 내보낼 수 있으리라. 조금 더 강력하면서 더 안전한 방법으로.
“오러를 움직인다는 것은 양날의 검을 휘두르는 것이나 마찬가지. 연공법은 그 검을 다루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성황이 고개를 끄덕인다. 성진은 그간의 경험으로 그가 야단치는 시간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짝 고개를 든 성진이 성황에게 물었다.
“저, 그런데 아버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
“제가 어젯밤 일어나서 명상을 했는데 말입니다. 갑자기 오러 층이 확 늘어나서 말입니다.”
“…..”
“얼마 전까지는 6층 근처였는데, 단숨에 늘어서 지금은 거의 7층에 가까워지고 있거든요? 이제는 막 외기를 제대로 내보낼 수 있을 거 같은 느낌도 들고 그런데요, 혹시 이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던 성황의 눈이 다시 서늘해지는 것을, 성진은 열심히 떠드느라 미처 깨닫지 못했다.
“혹시 이게 아버지한테 치료를 받으면서 생긴 변화일까요? 아니면 그 거미 마물과 싸우다가 오러 고갈이 되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까요? 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치료를 받거나 오러 고갈을 시키면 혹시 연공 성취가 빨리 늘어나거나…….”
순간 성황의 눈썹이 꿈틀 움직이며, 성진의 이마에서 불꽃이 튀었다.
따악!
“꾸엑!”
성진이 이마를 감싸 쥐고 침상 위를 뒹굴었다. 어찌나 아팠던지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맺혔을 정도였다.
성황은 잠시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쯧쯧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이놈은 대체 누굴 닮아 이 모양인가. 도무지 배우는 것이 없구나.”
아니, 그건 좀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제가 다 들었거든요?
카트리나 경이 분명 그랬습니다! 제가 아버지 어릴 적을 아주 쏙 빼닮았다던데!
그대로 방을 나서던 성황은 잠시 멈칫 발을 멈추더니 입을 열었다.
“…다음 알현에는 호두까기를 가져오거라. 검을 봐주마.”
“예?”
성진이 되물었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 * *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그저 알을 심기만 하랬더니, 너희들은 거기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날카로운 목소리가 쩌렁쩌렁 오두막을 울린다. 은밀하게 마련되어 있는 수도의 한 접선 장소였다.
반가면을 쓴 긴 은발의 남자 앞에, 초라한 행색의 지하 사제 두 사람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본래는 희게 빛났을 사제복이 그을음과 오물들로 엉망이 되어 있다. 사제복 가슴에 새겨진 작은 문장만이 그들이 이단 재판부 소속 사제임을 드러내고 있을 뿐.
노사제가 망연한 얼굴로 눈물만 흘리는 동안, 옆에서 부복하고 있던 클레멘스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것은 정말 예상 못 한 일이었습니다. 저희는 그저 과업을 위해 충실히 파종을 했을 뿐입니다. 정말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단 재판부에 게이트가 열린 거지?”
“정확한 경위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잊혀진 교단의 형제가 벌인 짓으로 생각됩니다. 분명 남아 있던 [안식]의 유산을 건드린 거겠죠.”
“…안식의 잔당? 그가 갑자기 왜?”
“그것이 저희도 잘…….”
“지금 그걸 말이라고!”
옆에서 작은 술병을 들고 술을 홀짝거리던 레오나드 왕자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저렇게까지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격앙되어 있는 로메인의 모습은 그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확실히 그럴 만도 하지.
갑작스러운 임시 긴급조치로 대부분의 씨앗들이 쓸려간 지 겨우 수일.
설상가상으로 어제 오전, 갑자기 황궁 쪽에서 날아든 다수의 마물로 인해 그나마 발아되었던 씨앗들까지 모조리 파괴되어 버렸다.
그간의 고생이 전부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
수십 개의 대롱을 꽂아야 겨우 하나둘 싹을 틔울까 말까 한 씨앗이었다. 그것들이 모조리 사라져 버렸으니, 이제부터 언제 또 그 작업을 다시 시작한다는 말인가.
“안식의 형제에게는 이전부터 과업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던 중이었습니다. 본래는 대수확의 날, 함께 유산을 열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만…….”
클레멘스가 난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쩐 일인지 헤이즈, 그자가 갑자기 독단으로 움직였습니다. 전혀 사전에 낌새도 없이 벌어진 일입니다. 정말입니다!”
“그러니까 그자가 갑자기 왜!”
“듣기로는 게이트를 열기 직전, 이단 재판부를 방문한 손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원인이 있다면 그 손님이 아닐까 하고…….”
로메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 손님이 누구더냐?”
“3황자인 모레스 황자입니다.”
“모레스 황자…….”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수도 외곽에서 일어난 마물 소동에서도 얼핏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았던가?
대체 그자가 뭐기에 죽은 듯 숨어 지내던 안식의 잔당을 움직이나.
듣자 하니 둘도 없는 개망나니라 청장미궁에서도 내쳐졌다더니, 사실은 소문처럼 단순한 망나니가 아니었단 말인가?
어째서 지금까지 잠잠하던 자가 갑자기 판 위로 올라와 존재감을 드러내는가.
“…성황의 새로운 말인가.”
로메인은 나직하게 되뇌며 이를 갈았다.
“델크로스의 수호자여. 무슨 꿍꿍이인가 했더니 과연, 직접 손을 쓰지 않고 말을 움직이는 것이 대단히 능숙한 자였구나.”
반가면 너머로 옅은 갈색의 눈동자가 사납게 번뜩인다. 그 눈빛을 마주한 클레멘스가 흠칫 놀라며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그래. 그렇게 균형을 유지하느냐. 내 너의 그 아슬아슬한 곡예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기대하겠다.”
말과는 달리 전혀 기대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로메인은 그렇게 시퍼렇게 날이 선 시선으로 황궁이 있는 방향을 언제까지고 노려보았다.
* * *
어제의 마물 소동으로 오전의 정무 시간은 바쁘게 흘러갔다.
이단 재판부는 거의 괴멸하다시피 했고, 죄수들을 포함한 다수의 인명 피해가 났다.
성 마르시아스 기사단은 단장인 듀란드 경을 잃고, 그의 부관인 패리스 경이 임시 단장직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이단 재판부 내에 암흑 교단의 잔당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 알려지며, 그 수장인 베니투스 추기경을 비롯하여 다수의 성직자들이 책임론에 휘말렸다. 말 그대로 폭풍과 같은 정무 회의였다.
겨우 일이 수습되자마자 점심을 거르고 진주궁을 다녀온 성황에게, 또 다른 고난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알현실에 체스판을 깔아둔 쌍둥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그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성황은 체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다짜고짜 퀸을…….”
그는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그의 진영에 뛰어 들어온 검은 퀸이 킹을 노린다.
“체크.”
에헴. 언제나 한발 빨리 움직이는 헤르나다. 그 과감한 수에는 이따금 그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별수 없이 킹을 옮겼다.
그리고 그 다음에 움직인 나이트에 의해 포위되고 말았다.
“체크.”
흐음. 언제나 한발 뒤로 물러나는 가데스다. 무려 서로를 보호하는 나이트의 합공. 그 빈틈없는 포위망에는 종종 애를 먹게 된다.
성황은 어쩔 수 없이 적진으로 한걸음 더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동안 이리저리 용케도 도망 다녔지만, 결국 홀로 적진에 깊숙이 뛰어든 킹의 말로는 뻔한 것이었다.
“졌구나.”
그의 담담한 선언에 쌍둥이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겨우 두 판이 끝났을 뿐인걸, 성황 아빠.”
“오후에는 계속 두기로 약속했잖아, 아빠 폐하.”
옆에서 식은 찻잔을 다시 채우며 수석 시종장이 흐뭇하게 웃는다. 그가 보기에는 더없이 다정한 한때이리라.
성황은 슬그머니 눈썹을 구겼다.
이것은 사실 자업자득이라고 봐도 좋았다. 처음 쌍둥이들에게 체스를 가르친 것은 다름 아닌 그였으니까.
지나치게 어린 나이에 채널링에 눈을 뜬 헤르나와 가데스는, 어린 시절 이따금 그들이 주체할 수 없을 지경이 되도록 정신을 놓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어떻게 보면 불완전한 채널링 기관을 가졌기에 오히려 제한이 없어진 케이스였다.
가끔은 식음을 잊고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는 아이들을 현실에 묶어두는 일환으로 성황은 아이들에게 체스를 가르쳤다. 쉼 없이 정신력을 쓰게 만들면서, 현실에 존재하는 게임판에 집중하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다행히 영리한 아이들은 곧 그 놀이에 심취하기 시작했고, 점점 현실을 바탕으로 살며 채널링을 스스로 조절하는 방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거기까지는 성공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성황도, 설마 이 아이들이 이렇게까지 체스 괴물이 되어 버릴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
그렇다면 다른 상대를 찾거나 쌍둥이가 함께 체스를 두면 되지 않는가. 수석 시종장인 루이스도 사실은 왜 두 사람이 이렇게 성황과의 체스에 목을 매는지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무분별한 채널링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은 주변 사람들의 강한 사념을 읽는 능력 역시도 제대로 조절하지 못했다.
즉 누군가가 두 사람 앞에서 강하게 집중하며 체스를 둔다면, 상대방의 수를 알고 싶지 않아도 무의식중에 읽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또한 누구보다도 가까운 두 사람이 서로의 사념을 읽지 못할 리가 없었다. 둘이 체스를 둔다는 것은 곧 혼자서 체스판을 두고 노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
오직 쌍둥이들에게 사념을 읽히지 않는 인간, 성황만이 아직은 진정으로 그들과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체스를 싫어하고 말고를 떠나, 성황은 제법 체스 두는 솜씨가 괜찮은 편이었고.
물론 능력을 조절하는 것이 점점 능숙해지고 있는 두 사람이다. 아마도 언젠가는 둘이서 원 없이 체스를 두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적어도 성황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황이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실은 쌍둥이가 알현 시간에 체스를 고집하는 데에는 그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는, 조금은 비틀린 애정에도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는 앞으로도 영원히 그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지만.
“성황 아빠는 다른 말을 보지 않고 혼자서 먼저 움직이려는 버릇이 있어.”
“아빠 폐하에게는 움직일 수 있는 다른 말이 아주 많다는 것을 잊지 마.”
이제 쌍둥이는 제법 어른스러운 말을 하며 제 아비를 타이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더냐.”
“응, 가끔은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희생도 있어.”
“맞아, 어쩔 수 없는 일에 죄책감을 가져도 아무 소용없는 거야.”
옆에서 루이스 시종장이 영특한 쌍둥이들을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두 사람이 하는 말의 진정한 무게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성황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체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말을 대신 움직이고 희생시키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는 인간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성황의 온기 없는 눈이, 쌍둥이가 가장 먼저 희생시켰던 검은 퀸에 한참을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