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1: Winterer RAW novel - Chapter (21)
룬의 아이들 윈터러 제7권. 3장, Nature Seals Her Promise of Spring in White(21/21)
3장, Nature Seals Her Promise of Spring in White
1. 마침내 돌아온 잔
바람이 많이 부는 8월 초순의 어느 날, 보리스는 넉 달 간의 머무름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솔렛이 찾아왔다가 떠난 지 이틀만의 일이었다. 루시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지 말라고 잡거나 왜냐고 묻지도 않았다. 보리스가 루시안의 아버지 칼츠 씨를 만나 과거의 중대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오겠다고 말할 때 루시안도 그 곁에 서 있었다. 루시안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본 드메린 칼츠 씨는 별 말 않고 가도 좋다고 허락해 주었다. 떠나는 날 아침 일찍, 루시안이 저택 입구의 고풍스런 기둥에 기대 선 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간단한 여행자 복장에 검 두 자루, 검은 망토만을 걸치고 걸어나오던 보리스는 루
안을 향해 다가갔다. 바람에 망토 자락이 나부꼈다. 칼츠 저택의 정원에 선 수많은 나무들이 일제히 나뭇잎을 뿌리고 있었다. 잎새들을 쓸어가고, 녹색 풀들을 쓰다듬던 바람이 이윽고 루시안의 흰 재킷 자락을 부풀게 했다. “나 말이야, 너 처음 왔을 때.” 기댄 기둥에 신발 자국을 비벼 남기고 있던 루시안이 보리스가 가까이 오자 입을 열었다. “나랑 다른 것도 다른 것이었지만, 자꾸 보고 있자니까 이렇게 심심하게 살아온 녀석이 있다니, 필히 재미있는 일을 가르쳐 주어야겠다는 사명감이 들더라고.” 루시안 앞에 선 보리스는 어이없는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런 것도 사명감인가.” 루시안은 고개를 저으며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넌 정말 이상한 애였어! 나한테 지금까지 좋은 친구가 없었던 건 내가 싫증을 잘 냈기 때문이었어. 난 뭐든 싫증을 잘 내거든. 그래서는 친구 같은 거, 금방 다 잃어버리잖아. 그런데 너는 나랑 너무 달랐어. 내가 모르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너를 보면 기분이 이상해지곤 했거든. 나로서는 결코 느낄 수도, 겪을 수도 없는 세계랄까. 내가 고집을 부릴 때, 기절시켜서라도 고집을 꺾은 사람도 너뿐이었어. 넌 말이지, 음,.” 루시안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말을 고르다가 말했다. “아무리 알고 또 알아도, 다 알 수가 없을 것 같았어. 그래서는 절대 싫증을 낼 수 없잖아?” 보리스의 얼굴에 곤란한 듯한, 그러나 따뜻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의 입에서 평소라면 쉽게 하지 않을 말이 흘러나왔다. “나도 네가 나와 너무 달랐기 때문에 좋았어.” “그래서, 우리 재미있게 지냈잖아?” 루시안이 다문 입술을 한껏 움직여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양 뺨이 동그랗게 도드라지며 아이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래.” 바람이 다시 불었다. 늘 묶고 지냈는데 여행을 떠나며 오랜만에 풀어놓은 긴 머리가 물결치고, 루시안은 바람 속에서 짤막한 금발이 눈을 찌르는지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자꾸만 그러고 있다가 불쑥 말했다. “사실은, 너 가지 말라고 잡고 싶었어.” 보리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너무나 여행하기 좋은 날씨였다,. “너한테, 내가 알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있다는 것, 알아. 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모르겠지만, 정말 위험한 일일 것 같다는 생각이, 그런 생각이 들었어. 말릴 수 없다는 것, 알면서도, 그런데도,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지 뭐겠어,.” 말없이 땅을 내려다보고 있던 보리스는 한 걸음 다가가 무언가 참고 있는 루시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확신 어린 어조로 했다. “이번에 돌아오게 되면, 너와 함께 학원에 갈게. 약속해.” 이번에는 루시안 쪽에서 아무 말도 못했다. 보리스는 다시 한 번 약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자신이 쉽지 않은 약속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은, 지키지 못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생각했다. 학원에 함께 가기 위해선, 살아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그럼, 꼭 약속이다?” “그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뛰어넘어야 할 수많은 어려움들을 알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만큼은 보리스도 진심이었다. 손을 거두며 물러선 보리스는 짧은 미소만 남긴 채 입구를 나섰다. 루시안이 마구간에 말해서 준비시켜 놓은 말 한 필이 그곳에 서 있었다. 루시안이 늘 타던 가장 좋은 말이었다. 말에 오른 보리스는 더 이상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산과 들이 스쳐갔다. 달리는 말 위에서 아노마라드가 멀어져갔다. 그럴수록 다른 땅은 한층 가까워졌다. 더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그가 돌아가고자 하는땅의 어둠을 향해 달려갔다. 지체할 여유가 없는 여행이었다. 머뭇거리다가는 모든 것이 돌이킬수 없게 되어버릴 지도 모른다. 8월 하순이 되기 전에 보리스는 아노마라드 식민령 티아(Tia)를 가로질러가 곧장 트라바체스 국경을 넘었다. 루시안의 아버지가 배려해 준 신분 증명이 큰 도움이 되었다. 국경을 넘고 부터는 진로를 북동쪽으로 했다. 닷새 더 달려가 8월이 끝나기 직전, 간신히 그가 가고자 한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트라바체스의 수도, 론(Ron). 그가 최종적으로 목적하는 땅은 이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전에 반드시 찾아가야 할 곳이 있었다. 이제 그가 돌아가려 결심한 곳은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 되는 최후의 승부처였다. 그 전에 그는 한 사람을 만나 과거의 일을 매듭지으려 결심하고 있었다. 론 시내에서 그 저택을 찾아내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 “누구시라고요?” 긴 여행으로 먼지투성이가 된 보리스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중년의 문지기가 의심쩍다는 듯 되물었다. 보리스는 오른손을 들어 이마에 흩어진 머리를 걷어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모아 쥔 다음 든 문지기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게 했다. 조금 후 문지기의 눈이 의혹으로 흐려졌다. “당신도 눈이 있다면, 내가 그의 조카라는 걸 의심할 수 없을 것 아닌가요?” 보리스는 점차 자라면서, 그들 집안의 사람들이 꽤 비슷한 얼굴을 타고난다는 옛 이야기를 스스로의 얼굴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몰랐지만 보리스와 예프넨이 닮은 것은 물론이고, 그들은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 율켄을 닮아 갈 것이며, 율켄은, 친동생 블라도 진네만과 닮아 있었다. 그 파충류처럼 노르스름한 눈빛만은 다르지만. “흐음, 맞는 것 같지만 주인님을 만날 수는 없을 겁니다 이틀부터 아니 계시고, 또 조만간 돌아올 것 같지도 않으십니다.” 그 때였다. “마님, 제발!” “이러지 마세요, 마님!” 하녀 몇 명이 애타게 간청하는 소리가 들리고, 조금 후 무언가 깨지고 부서지는 듯한 소음이 들려왔다. 보리스가 불길한 낌새를 채고 대뜸 물었다. “집안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삼촌에게 문제라도?” 자신이 블라도를 ‘삼촌’이라고 다시 부르게 될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나, 어쨌든 그는 그렇게 물었다. 문지기는 좀 망설이다가 보리스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고서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넓은 응집실로 들어갔을 때, 보리스는 예상 밖의 광경에 놀랐다. 겉으로 보았을 때 훌륭하고 깔끔해 보이던 저택이었는데 내부는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때 응접실을 장식했던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곳곳에 부서져 흩어져 있었다. 목 긴 꽃병이 부러진 채 떨어져 있었고 꽃은 이미 시든 채였다. 삐뚤어지고 구겨진 양탄자도 누구도 손대지 않았다. “누구지? 당신, 소식을 갖고 왔어?” 젊은 부인이 응접실 한 구석에 아이처럼 조그맣게 웅크리고 있다가 고개를 번쩍 들고 보리스를 쳐다보았다. 그녀를 내려다본 보리스는 말하는 것을 잠시 지체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 이 집의 안주인이었으리라 생각되는 그녀는 보기에 애처로울 정도로 흐트러진 옷매무새에 다듬어지지 않은 머리를 하고 미친 사람처럼 떨고 있었다. 하녀들이 그녀를 일으키려 했지만 그녀는 막무가내로 기다시피 보리스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어깨에 걸친 숄 자락을 끌어당기며 눈물자국으로 얼룩진 얼굴을 보리스의 눈앞에 갖다댔다. “말해 줘! 어디 있어? 그 애는 어디 있어? 아버지 손으로 돌아온 거야? 그렇지? 그 애는 아무렇지도 않겠지?” “누구를, 말하는 건가요?” 보리스는 직감적으로 이 부인이 자신의 숙모이리란 것을 짐작했으나 그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꺼내 보았자 알아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 부인은 계속 숄 속으로 몸을 움츠리면서, 그러면서도 일그러진 얼굴로 계속 소리를 질렀다. “그 애를 데려와! 우리 아기를 데려와! 우리 아기가 울고 있어! 그 애가 우는 소리 때문에 미칠 것 같아!” 보리스는 갑자기 손을 내밀어 부인의 양쪽 손목을 잡았다. 부인은 흠칫 놀라 손을 빼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꽉 움켜쥔 채로 물었다. “그 아이란 것이, 숙모와 삼촌의 아기입니까?” ‘숙모’,‘삼촌’이라는 말이 그녀에게 어떤 충격을 가져다 준 모양이었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던 그녀는 갑자기 온 힘을 다해 보리스의 손을 뿌리치고 뒤로 넘어졌다. 그리고 덜덜 떨면서 하녀들을 불렀다. “루치카! 보로냐! 나, 나를 데려가 줘, 나, 나는,.” 보리스는 뚜벅뚜벅 하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하녀는 보리스가 조금 전 한 말을 듣고 그가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인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며 말했다. “저, 저, 마님께서는, 좀 불편하세요.” “아기가 어떻게 된 거지?” “아가씨는 없어졌어요,. 이틀 전에 아가씨 생일 날 사라져 버려서, 주인님은 아가씨를 찾으러 가버리셨어요. 얘기로는 집사님이 데려가셨다고,.” “집사?” “네, 튤크 집사님이,.” 그 순간, 보리스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며 되물었다. “튤크 집사라고?” 그 이름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틀크 집사, 진네만 가문의, 아버지 율켄의 심복이 아니었던가! 아버지와 함께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그가 어째서 이곳에 있었다는 거지? “틀크 집사라는 사람은, 본래부터 이곳에 있던 사람인가?” “주인님께서 오래 전에 데려오신 분이라고만, 알고 있어요.” 보리스는 홱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대로 된 설명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 때, 저택 안쪽에서 대략 일흔은 되어 보이는 늙은 하인 한 사람이 걸어나오다가 낯선 사람을 보고 멈추어 섰다. 하녀가 얼른 달려가 그 노인에게 속삭였다. “하인장님, 저, 주인님의 조카라고,.”하인장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는 보리스를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러면, 돌아가신 율켄 어르신의?” 보리스가 하인장과 말하려고 응접실을 가로지를 때 이 집의 안주인인 젊은 부인은 마치 행려 병자처럼 몸을 끌며 옆으로 피했다. 그녀는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들을 이야기가 있다고 느낀 듯 떠나지는 못했다. 다가간 보리스가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율켄 진네만이 제 아버지입니다.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하인의 눈이 커졌다. “오오, 이럴 수가, 정말로 살아 계셨단 말씀이십니까,. 이런 다행한 일이, 저는 옛날, 예니치카 아가씨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진네만 저택에 있었답니다, 그 땐 사병이었지요. 그러나 두 형제분께 서 의절하시고 나서 블라도 주인님을 따라오게 췄습니다. 통령 각하께서 론의 사병을 모두 거두게 하셨을 때 저는 너무 늙어서 하인이 되었지요. 도련님께서는 기억 안 나십니까? 제가 목마도 자주 태워드렸는데요, 보리스는 이 하인장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문득, 예니치카 고모가 죽을 때 자신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렇다면 이 하인장은 지금 자신을,. “전, 예프넨 진네만이 아닙니다.” “예? 그럼,.” “예프넨 형은 오래 전에 죽었습니다. 저는 동생입니다.” “아,.” 노인은 너무 늙어서 예프넨의 나이도, 그의 외모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저 그 시절 진네만 저택에 아이라고는 예프넨 한 명밖에 없었으므로 그 아이를 잊지 않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조금 후 보리스를 바라보던 노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 착하던 도련님이 돌아가시다니,.” 보리스도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형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을 보니 새삼 무언가가 울컥 치미는 기분이었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며 노인에게 물었다. “어린아이는 어떻게 된 겁니까?” “틀크 집사를, 기억하시지요?” “그 분이 이곳에 계셨던 겁니까?” “예, 그 사람이 이곳으로 온 걸 보고서 율켄 어르신께서 이미 살아 계시지 않으리란 건 짐작했습니다만, 참으로 뜻밖이었지요. 아시다시피 그 사람은 율켄 어르신의 제일가는 충복이 아니었습니까? 저야 그 사람이 진네만 저택으로 오기 전에 먼저 블라도 주인님께 왔습
니다만, 어쨌든 그리 쉽게 배신할 사람이 아닌지라 마음을 바꿨다는 이야기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지요. 그러나 몇 년 동안 튤크는 블라도 주인님을 잘 섬겼습니다. 그게 블라도 주인님께, 가장 치명적인 복수를 하기 위한 기나긴 준비였음을 이제야 알게 된 겁니다. 그는 정말로, 무서운 자였습니다.” “그러면,.” 보리스의 머릿속에서도 상황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도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 본 튤크가 얼마나 음험하고 무시무시한 인물이었는지. “그 사람이, 어린 예니 아가씨를 납치해 갔습니다. 그 날은 예니 아가씨 생일이었지요. 예니 아가씨를 보러 온 손님들이 너무 많아서 잠시 아가씨가 보이지 않아도 다른 손님과 놀고 계시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파티가 끝났을 즈음 두 시간이나 아무도 예니 아가씨를 보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마님도, 주인님도, 유모도, 하녀도, 집안이 발칵 뒤집히고 나서 튤크 집사의 방에서 편지가 나왔습니다. 편지를 보시고 블라도 주인님께서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되어 예니 아가씨를 되찾아오겠다고 저택을 떠나셨지요,.” 아이 이름이 ‘예니’인 건가, 보리스는 블라도 삼촌과 예니치카 고모의 일을 자세히 몰랐으므로 오히려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비참하게 죽고 만 고모의 이름을 딸에게 붙이다니. “그 편지를 볼 수 있습니까?” “주인님께서 가져 가셨습니다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어린아이의 생명이 죽은 사람의 피를 갚게 될 것’이라고요. 어디로 간다는 말은 없었지만 주인님께서는 어디로 가야 할 지 아시는 것 같았지요. 그리고 그 순간, 보리스도 느낄 수 있었다. 튤크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어디로 갔을지, 그리고 블라도가 그것을 어찌 알 수 있었는지, 이 운명에 얽힌 자들만이 깨달을 수 있는 마지막 장소, 그곳뿐이었다. 그곳보다 아버지의 피를 갚기에 더 좋
장소가 달리 있을까? 그리고 그곳은 바로 자신이 가려는 장소이기도 했다. 곁에 있던 숙모가 중얼거리다가 무언가를 외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목소리가 커지고 나서 그 섬뜩한 말을 모두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 흘린 피의 값을 치르게 된 거야! 이런 날이 올 줄 난 알고 있었어, 신의 맷돌은 느리게 돌지만 밀알 하나도 놓치지 않으니,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겠지? 하지만 죽은자는 잊지 않아! 당신의 죄가 예니를 데려간 거야! 당신의 죄가!” 우는건지 웃는건지 알 수 없는 기괴한 소리로 떠들어 대는 숙모를 바라보며 보리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인장에게 고개를 돌린 보리스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몇 년에 걸쳐 쌓아온 블라도에 대한 원한, 그것이 보리스보다 강할 사람이 있을까? “본디 이곳에 올 때 저는 삼촌에게, 과거의 그 모든 일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려 했습니다. 삼촌의 무서운 고집 때문에 아버지와 예프넨 형이 끝내 목숨을 잃었고, 혼자 남겨진 저는 몇 년 동안 수십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살아왔습니다. 진네만 가문을 이루던 사병들도 뿔뿔이 흩어지거나 목숨을 잃었고요. 그만한 결과를 낳는 일을 저지르려 했을 때, 분명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중대한 까닭이 있었으리라고 믿기에…. 그것을 들어야만 제 마음을 정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나 이제는 물을 수가 없게 되었군요. 나중에 삼촌께서 이리로 돌아오시거든 이렇게 전해 주십시오.” “무엇이라고,?” 보리스는 한 걸음 물러나며 나직이 말했다. “당신의 죄는, 사람의 손이 아니라 운명의 손으로 거두게 될 것이며, 마침내 독이 든 잔이 당신 앞에 돌아왔을 땐 결코 피할 수도 용서받을 수도 없을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보리스는 몸을 돌렸다. 늙은 하인장과 하녀들, 그리고 반쯤 정신이 나간 젊은 부인은 소년의 검은 망토가 문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종그날 님으로부터의 전언이다.” 류스노 덴, 칸 통령의 숨은 무기로서 ‘1익’ 이라 불리는 그가 통령을 만나러 가지 못한 지도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 윈터러를 가진 소년을 찾아내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이미 3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을 맡게 된 후 최초로, 그는 연달아 실패했다. 몇 번인가 가까이 닿을 뻔하긴 했다,. 그러나 완전히 손아귀에 넣지 못하는 한 ‘그럴 뻔했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였다. 최근 그는 자신에게도 조바심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끼는 중이었다. 그렇게 오래 기다리고 다시 모든 조사를 처음부터 시작하기를 몇 번, 그런 끝에 드디어 실마리를 잡아 이곳까지 온 것이다. 그런데 정말 시작 지점으로 되돌아온 느낌이었다. 그들이 찾아온 곳은 다름 아닌 트라바체스, 그와레 성이었다. ‘4익’ 유리히 프레단도 오랜만에 함께였다. 몇 번이나보리스의 종적을 놓쳐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두 사람은 한동안 헤어져서 각자 조사를 벌였는데 자신들이 갖고 있는 대륙의 정보망을 완전히 총동원하다시피 하여 노력한 결과 결국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보리스가 필멸의 땅에 들어갔다가 그와레로 간 방식을 생각하면 그들은 거의 불가능한 조사를 해낸 셈이었다. 두 사람은 그와레 성 사람들이 확실히 ‘보리스’ 라는 이름을 가진 한 소년을 기억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끝내, 보리스가 머물렀던 부닌의 대장간도 찾아내고 말았다. 친구인 양 좋게 위장한 결과, 드디어 보리스가 대상인 드메린 칼츠에게 고용되어 아노마라드로 떠났다는 정보까지 손에 쥐었던 순간이었다. 찾고 찾던 목표물이 드디어 발자국을 남겼다는 것을 알았는데, 칸통령의 마법사종그날로부터 전혀 엉뚱한 정보가 전해져 온 것이다. 류스노의 설명을 듣자마자 유리히는 다짜고짜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그 녀석이 론에 나타났다고요? 으악, 젠장!” “그래. 블라도 진네만의 저택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고 한다. 늙은하인이나 하녀의 말을 얼마나 믿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으으, 난 그 놈을 이제 존경하기 시작했단 말입니다! 이번에는 론이라고요? 정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놈이잖아요!” 류스노는 유리히의 반응을 무표정하게 보고 있다가 말했다. “너도 아는지 모르겠지만, 블라도 진네만이 딸을 도둑맞았다는군.” “뭐? 그 딸이 몇 살인데 벌써 도둑맞는단 거죠? 대체 어떤 녀석이?” “그런 얘기가 아니고, 블라도 진네만이 데리고 있던 심복 중 한 명이 배신을 해서 어린아이를 데리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 심복은 블라도가 예전에 멸망시킨 친형제, 즉, 우리가 쫓고 있는 그 소년의 아버지가 데리고 있던 자였지 그자가 복수를 하기 위해 몸을 숙이고 오래 기다렸던 모양이다.” “체, 자기 주인을 배신한 놈을 데려다 쓰니까 그렇죠. 배신이나 하는 놈 따위, 아무리 능력 있다고 해도 결국은 화가 된다니까.” 전형적인 트라바체스 사람다운 의견을 내뱉은 유리히는 이어서 물었다. “그럼 이제 우리는 론으로 가야 하는 건가요?” “나는 생각 중이야. 일단 소년이 블라도의 저택에 나타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복수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삼촌이니까. 그게 아니면 이제 와서 찾아갈 이유가 없지 않겠어?” “그렇다 치고, 진짜 나타난 것이 아니란 건 뭐죠?” “너도 알다시피 이미 몇 년이나 지났지,. 소년의 모습은 많이 변했을 거야, 이곳에서 물어봐서 너도 알지 않나? 그런 소년의 얼굴을 .
향도 아닌 곳에서 제대로 알아볼 사람이 과연 있을까? 늙은 하인이나 하녀들이 엉뚱한 사람을 잘못 보았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나?” “,있겠죠.” “그렇다면 다짜고짜 그쪽으로 갈 일은 아니지. 그런데 또 하나 석연치 않은 것이 바로 블라도의 딸 문제다. 블라도가, 정말로 딸 때문에 저택을 비운 것일까?” “무슨 소리죠? 딸 때문이 아니라면, 혹시 블라도 놈이, 그 녀석을 피해서 달아나기라도 한 거란 말입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이 소년은 우리가 찾지 못하는 동안 상당한 수준의 검사로 성장한 것 같지 않나. 블라도가 딸없어졌다느니 하는 핑계를 대고 일부러 숨었을 가능성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나?” “그것 참, 꽤 복잡하군요. 끄응, 그러면 어떻게 해야한담.” “갈라지자.” 그것은 당연하고도 효율적인 답이었다. 유리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한 사람은 아노마라드로, 한 사람은 론으로?” “아니, 론은 갈 필요가 없어. 소년이 복수를 위해 사라진 블라도를 추적하고 있다면, 그리고 블라도가 정말로 딸을 데려간 놈을 찾기 위해 나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마지막으로 그 딸을 데려간 자가 바로 소년의 아버지의 심복이었다면, 갈 곳은 론이 아냐.” “어디죠?” “롱고르드, 그들의 고향이다.” 조금 후 유리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멀지도 않군요.” 트라바체스에서 벌어진 수많은 피바람 가운데서 성장해 온 두 암살자에게 그 정도의 상상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주인을 죽인 자에게 복수하려고 몇 년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드디어 딸을 납치한 자가, 주인의 저택으로 가서 딸을 죽인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적당한 각본이 아닌가. 둘은 서로 마주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행동을 결정했다.
2. 최후의 인사
바람 소리가 났다. 깊숙한 구멍을 통과해 가는 듯한 소리였다. 인간이, 코를 거치지 않고 폐로 직접 호흡을 한다면 날 듯한 소리였다. 그런 소리가 눈앞에 선 거대한 폐허에서 나고 있었다. 슈우우우우우,. 보리스는 말에서 내려선 채 변해버린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모습은 항쟁의 불꽃에 휩싸인 어둠 속의 실루엣이었다. 그래서 더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일까. 십여 년간 늘 보았던 기억 속의 저택과 지금의 모습은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었다. 이미 오랫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는 상태로 버텨온 저택이었다. 한 때 독액에 부식된 일도 있었고, 거기에 오랜 비바람과 기온 변화가 겹쳐지자 나무로 된 곳은 거의 다 삭아버렸다. 쌓아올린 돌들은 곳곳이 부서져 떨어지거나 금이 갔다. 천천히 저택을 한 바퀴 도는 동안 검은 이끼가 온통 벽을 뒤덮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치 섬에서 본 환각 속의 포석들처럼. 이곳에서 열 두 해를 보내며 자란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 집이 버려진 지 고작 10년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 누군가 살긴 한 걸까 궁금해하다가 고개를 젓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마치 거대한 무덤 같았으나, 그 안에는 누구도 잠들어 있지 않았다. 있는 거라고는 내버린 가재도구들뿐일 것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보리스는 저택의 모습에서 단지 스산함을 느꼈을 뿐, 슬픔이나 아쉬움은 그리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남의 집 같았다 그러나 저 안에는 그와 예프넨이 웃고 장난치곤 하던 방이며 복도, 계단, 식당 같은 것이 그대로 있을 것이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블라도의 딸인 예니라는 아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물론 보리스는 그 아이를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예전 렘므에서 여자 암살자를 붙잡았을 때, 블라도에게 딸이 있다고 떠들어대던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믿는다면, 예니는 매우 순진하고 사람을 잘 따르는 아이일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사촌 여동생이었다. 한 번도 동생을 가져본 일이 없는 보리스는 그녀의 존재가 묘하게 신경을 건드린다고 생각했다. 어린 아이이고 아무 죄도 없으니 구할 수 있다면 구해내는 것이 당연한데, 그렇게 생각하려 할수록 블라도에 대한 증오심이 한층 고개를 쳐들었다. 그가 블라도 진네만의 저택에 찾아간 것은 그를 용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우플리온과 예프넨 두 사람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행동을 하려고 결심했을 때, 만일 자신이 실패한다면 블라도를 용서하거나 징벌할 기회조차 사라질 것이었으므로 최후가 될 지도 모르는 대화를 위해 간 것이었다. 형의 유언과 자신의 증오심, 그 모두를 떠나 용서할 수 있는 인간인가, 그것을 알고 싶었다. 그와 자신 사이에는 죽기 전에 청산해야 할 빛이 존재했다. 그러나 블라도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이미 천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라진 어린 딸 때문에 미친 사람처럼 되었다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측은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그의 손에 쫓겨 나야 했던 어린 자신과 예프넨 형의 모습이 떠올라왔다. 튤크 집사가 예니를 데려간 것은 아버지 율켄 진네만의 피값을 치르게 하기 위해서 일것이다. 집사조차 그러한데 자식인 자신이 그 아이를 구해내야 하는 것인가? 그러나, 아이는 역시 아이에 불과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보리스는 9층 창 하나에서 불빛 같은 것이 언뜻 비치는 것을 보았다. 착각이었나? 금방 사라지긴 했지만 너무도 분명했기에 보리스 떠나지 못하고 조금 망설였다.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을 리가 없었다. 버려졌다고는 하지만 이곳은 아직도 진네만, 다시 말해 블라도 진네만의 영지였다 칸 통령의 측근이 된 진네만 가문의 영지에 함부로 들어와 살 마음을 먹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저렇게 귀신이라도 나올 듯한 삭은 저택에서. 그러나, 분명히 보았다. 전속력은 아니었지만 한나절 내내 쉬지 않고 달려온 보리스는 조금 지쳐 있었다 전투를 벌이기에 앞서 잠깐 휴식이 필요할 지도 몰랐다. 해가 지려면 아직 반 시간 가량 여유가 있을 듯했다. 보리스는 저택 입구로 걸음을 옮걱놓았다. 들어오고서야 보리스는 마지막 날, 지붕이 뚫렸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사람이 돌보지 않는 동안 그 구멍은 점점 커져서 나뭇잎이며 빗방울, 눈, 먼지 같은 것들이 엉겨 구석마다 켜를 이루며 쌓여 있었다. 자신의 방으로 가보려 했는데, 입구에 커다란 판자를 대고 대못을 쳐 놓은 것을 보고 그냥 포기했다. 예프넨의 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 손때 묻은 추억의 물건들이 남아 있을 지 모르지만 보리스는 미련 갖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갔다. 아버지의 서재 문이 조금 열린 걸 보고 잠시 걸음을 멈췄지만, 그대로 지나쳐 연회장이 있던 곳으로 갔다. 그곳이 불빛이 보였던 곳이었다. 문은 닫혀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맛있는 파티 음식을 맛보고 싶어서 빼꼼 들여다보던, 그 때와 비슷한 동작으로 보리스는 문고리를 돌렸다. 최대한 소리없이 열었던 문이 갑자기 나사라도 빠진 듯 헛돌며 휘청 젖혀졌다. 보리스는 간신히 문고리를 부여잡아 당겼다. 그리고 안을 들여다보려 했을 때였다. “어서 오시지요.” 조금 예상했지만, 너무나 놀라고 말았다. 이곳만은 이 저택의 것이 아닌 듯한 풍경이었다. 쓰레기는 거의 다 치워지고 바닥의 먼지도 닦아내어 마치 보리스가 살던 시절의 모습으로 잠시 돌아간 듯했다. 게다가, 중앙의 긴 대형 식탁에는 식사가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제가 운이 참 좋은 모양입니다. 이런 날, 이런 곳에서 도련님을 뵙게 되다니요. 어서 이리로 와 앉으십시오.” 5년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튤크 집사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본래 이 저택에 살 때도 보리스가 튤크를 볼 기회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튤크는 보리스가 이렇게 많이 자랐는데도 한 눈에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튤크가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오히려 놀랐다. 어쩌면 기억 속의 모습과 저렇게 똑같을 수 있을까? 심지어 옷차림조차도 같지 않은가? 혹시, 일부러 그렇게 한 건가? 튤크 집사는 예전 율켄 진네만이 이 저택의 주인이던 때처럼 어두운 녹색의 긴 재킷 차림이었다. 얼굴은 변함 없이 무표정했다. 빗어 넘긴 머리에 새치가 몇 개 섞여 있는 것만 제외하면, 완벽히 예전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다. 연회장도 비록 치운다고 해서 낡은 모습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지만 식탁에는 새하얀 식탁보가, 의자에도 덮개가 씌워져 있고, 식기며 나이프, 포크 등은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차려진 음식도 준정찬에 가까울 정도로 일정 이상의 격식을 갗추고 있었다. 식탁 아래에 큰 램프가 놓여 있었는데 그것이 보리스가 본 빛의 정체였다. 램프를 다시 꺼낸 튤크 집사는 식탁 위에 놓인 네 개의 촛대에 불을 옮겨 붙이면서 말했다. “왜 그렇게 계속 서 계십니까?” 너무 기이한 광경을 본 터라 잠시 판단력을 잃고 있던 보리스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튤크는, 그래, 블라도 삼촌의 딸을 데리고 사라졌다고 했다 그렇다면 작은 예니는 어디에 있지? “집사님 당신, 어린아이를 데려오지 않았습니까?” “그보다, 보리스 진네만 도련님.” 초에 불을 다 켠 튤크가 식탁 왼쪽으로 물러나며 차분히 말했다. “도련님께서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십니다. 또한 주인 어른과 예프넨 도련님께서 돌아가신 이상, 진네만 가문의 주인이 아니십니까? 그런 분께서 어찌 제게 존대를 하십니까. 하대를 하도록 하십시오.” 대륙을 방랑하는 길 잃은 어린아이 신세가 되어버린 후로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었다. 더구나 튤크 집사에게 말을 낮춘다는 것은 굉장히 어색한 일이었다. 그러나 하대를 하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을 기세인지라 보리스는 간신히 다시 말했다. “아이는, 예니라는 아이는 어디 있지?” “아아, 어린 예니 아가씨 말씀이십니까. 천천히 말씀을 드릴 테니 일단 앉아서 저녁을 들도록 하십시오.” 튤크 집사의 태도는 연극이라기엔 너무도 엄숙하고 진지하여 함부로 그것을 깨뜨리는 말을 꺼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니를 자신이 구해야 하는지, 또는 아닌지 혼란스러워했음에도 불구하고, 보리스는 일단 튤크로부터 예니의 행방에 대해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그가 하자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식탁 머리 상석에 놓인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런데 가장 먼 곳에 있는 맞은편 자리에도 비슷한 음식이 차려졌던 듯 보였다. 그러나 그곳은 먹은 흔적도 없이 좀 이상하게 어지럽혀져 있었다. 튤크가 곁으로 다가오더니 냅킨을 펴서 무릎에 올려 주었다 잔에 음료수를 따르고, 접시의 덮개를 벗겼다. 안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송아지 고기 스튜가 들어 있었다. 네 자루 촛불이 흰 식탁보 위에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그림자를 던졌다. 도저히 식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판국이었지만, 보리스는 아직 의심을 거두지 못했기에 먹는 것을 삼갔다. 보리스가 무언가 물으려 하는데 튤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옛 이야기를 좀 해드릴까요,” “옛 이야기라고? 그보다,.” “도련님의 옛 이야기지요. 주인님의 옛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물론 율켄 진네만 주인님 말씀입니다. 그 분께서 도련님을 미워하셨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이야기가 나오는 바람에 보리스는 무어라 답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말을 끊는 것도 어려웠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그 분은 ‘동생’이라는 존재는 무조건적이라고 생각하셨던 분이니까요. 예프넨 도련님이 어린 아기였을 즈음에는 그 분도 그런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 시절은 가장 좋은 시절이라 율켄 주인님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이 예프넨 도련님을 좋아하고 있었지요. 예니치카 아가씨의 사건이 일어나고서 두분 형제께서 반목하셨고, 그 후에 예프넨 도련님에게 동생이 되는 보리스 도련님께서 태어나셨습니다. 율켄 주인님의 눈에는 도련님의 존재가 집안의 암운처럼 보였을 겁니다. 자라면서도, 도련님은 예프넨 도련님처럼 밝고 상냥하기보다는 늘 아버님을 두려워하고 계셨지요. 물론 그것은 율켄 주인님께서 도련님께 정을 주지 않는다는 걸 본능적으로 도련님이 눈치채신 탓이겠습니다만.” “잠깐, 튤크 집사는, 그 때 우리 집에 없었지 않아?” 보리스가 어린 시절을 다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튤크 집사가 들어오던 때만은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튤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말씀은 맞지만, 저는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주인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실은 율켄 주인님께서 도련님 또래였던 시절도 기억하고 있지요. 저는 그 시절에도 롱고르드에 살고 있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도련님께 이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무슨,?” “그 시절의 율켄 주인님은, 지금의 보리스 도련님을 꼭 빼어 닮은 모습을 하고 계셨다는 것을요.” 보리스는 조금 놀라서 튤크를 올려다보았다. 스스로 자신이 아버지를 특별히 닮았다는 생각은 해본 일이 없었다. 자신과 같은 모습의 아버지, 어쩐지 너무나 이상한 느낌이다. 아버지라고 해도 율켄은 그에게 너무 어렵고 먼 존재였다. “사실, 지금과 같은 결과는 오래 전부터 잉태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돌아가신 예니치카 아가씨께서 어렸던 때의 모습도 기억합니다. 그 아가씨야말로 이곳 롱고르드의 천사 같은 분이었고, 그런 그 분의 존재가 결국 비극을 부르고 말았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예니치카 아가씨께서 그토록 아름답고 마음 고우신 분이 아니었더라면, 두 형제분들께서 10년이 넘도록 그 분의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합니다. 서로의 존재를 생각할 때마다 예니치카 아가씨의 일이 떠올랐던 것이지요. 그분의 절대적인 고귀함을 처참하게 부수고 만 자신들을 용서하지 못한 두 형제분께서는 자책하다 못해 상대방을 미워하고 또 미워하다가, 끝내 서로를 살해하는 것으로 기억을 지우려 시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율켄 주인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블라도 주인님께서 얼마간이나마 평화를 가질수 있게 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보리스는 튤크 집사가 두 사람을 똑같이 ‘주인님’ 이라고 부르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튤크 집사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삼촌의 딸을 빼앗아 온 사람이 아닌가? “그 평화는, 새로운 예니 아가씨가 태어나는 것과 함께 왔지요. 저는 곁에서 죽 지켜보았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어린 아가씨의 이름을 ‘예니’라고 짓도록 유도한 것은 저였습니다. 저는, 이 작은 예니 아가씨의 존재가 예니치카 아가씨의 죽음에서 비롯된 이 집안의 비극을 매듭지을 중대한 열쇠가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번 열렸던 문은 반드시 닫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극만이 끊임없이 이어지게 되지요. 그 문을 닫기 위해 태어나고, 자라 오신 작은 예니 아가씨께서는 실로 놀라울 정도로 돌아가신 예니치카 아가씨와 흡사했습니다. 저는 감히 확신하건대, 트라바체스 전체에서 이 작은 예니 아가씨보다 사랑스럽고 예쁜 아기는 다시 볼 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뿐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는 수많은 의원이며 선제후들이 어린 예니 아가씨 한 분을 보려고 론의 진네만 저택을 드나들었을 정도니까요”“…” 예니라는 아이를 본 일도 없는데, 어떤 아이인지는 더더욱 모르는데, 그런데도 튤크의 말을 듣고 있으니 그 아이에 대한 측은함이 솟아나 견딜 수가 없었다. 동시에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한 튤크가 얼마나 무섭고, 또한 가차없는 사람인가를 생각했다.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보리스는 그것을 지적할 수가 없었다. 저렇게까지 해서 죽은 율켄을 끝까지 보필하려 하는 것은 트라바체스 사람이 ‘강인함’ 이라고 부르는 특질과 연결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블라도 주인님은, 예니치카 아가씨에 대한 집착이 율켄 주인님보다 한층 각별했던 분입니다. 예니치카 아가씨의 결혼을 어떻게든 막고 싶어했던 것도 단지 정파 때문이 아니라, 여동생을 다른 사람에게 내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작은 예니 아가씨를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저는 그 분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예전 예니치카 아가씨께서는 율켄 주인님에 비해 능력도 풍채도 형편없는 블라도 주인님을 큰 오라버님과 똑같이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런 아가씨를 잃고서 텅 비어버린 듯 했던 마음을 작은 예니 아가씨가 채워 주었겠지요. 드디어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그 아가씨가 없어지는 것으로 가문의 비극이 깨끗이 끝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보리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그게 해결이 되는 거지? 작은 예니는 예니치카 고모를 좀금 닮은 것 말고는 아무 죄도 없어. 이름이 같다고 해서 같은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왜 그 아이가 대신 죄를 짊어져야 하지? 아니, 그것을 떠나서 누군가 새로운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야말로 비극의 문을 닫기는커녕 새로운 비극을 부르는 것 아닌가?” 그러자 튤크가 보리스의 눈을 정면으로 주시하며 말했다. “도련님께서는 블라도 주인님을 용서하실 마음입니까? 어차피 아무도 죽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미 예니치카 아가씨와 율켄 주인님께서는 돌아가셨고, 되살아날 수 없으니까요. 그 분들을 기억하는 저같은 사람은 계속해서 흐르는 피를 막기 위해 새로운 희생의 봉인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도련님은 모르시겠다는 것입니까?” “예니가죽으면? 블라도 삼촌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않아? 또 누군가를 죽이면? 그것은 비극이 아닌가?” “블라도 주인님은 더 죽일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대상이라고 해봐도 저뿐인데, 저는 가족도, 친구도,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
너무도 침착하고 당연하게 나온 말을 들으며 말문이 막혀버렸다. 자신이 죽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태도도 섬뜩했지만, 그가 그 정도로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었는가 하는 생각이 두려울 정도로 가슴을 압박해왔다. 자신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오랫동안 특별한 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 대신, 예프넨의 부재가 가져다 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예프넨의 일을 복수한다면 대상은 물론 블라도 삼촌일 것인데 자신이 그렇게 하고 나면? 딸을 잃고 정신을 놓은 듯했던 숙모는? 만일 예니가 살아남는다면 그 아이는? 그들이 자신을 용서할까? 아니, 아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다. 트라바체스에는 대가 없는 용서 따위는 없다. 튤크도 마찬가지다. 예니는 트라바체스에서 가장 사랑스런 작은 아가씨이고, 블라도는 누이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불쌍한 사내일 뿐이라 해도, 튤크에겐 그것이 용서해야 할 이유가 되지 못했다. 먼저 죽은 자, 율켄의 눈이 그의 등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보리스 도련님.” 보리스는 튤크의 목소리에서 어떤 힘을 느끼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튤크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침착한 눈으로 보리스를 보며 말을 이었다. “도련님과 율켄 주인님은 단지 외모만 닮은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어린 시절 율켄 주인님의 성품을 보아 알고 있습니다. 참 이상할 정도입니다. 율켄 주인님은 주인님 본인을 닮으신 보리스 도련림보다 돌아가신 마님을 닮은 예프넨 도련님에게 더 각별한 애착을 가지셨던 것 같으니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부자는 부자, 율켄 주인님과 보리스 도련님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흐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보리스 도련님은 지금 진네만 가문의 주인이십니다.” 예전 같았으면 ‘아버지고, 아들이고, 가문의 주인이라고 해도, 그것들이 지금의 내게 무엇을 주었단 말인가’ 라고 말했을 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그렇게 철없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한다면 보리스 역시 그들에게 준 것은 없었다. 그의 집안에 닥친 불운은 누구 한 사람의 책임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른 어떤 땅에 가서 살아간다고 해서, 물려받은 피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저는 율켄 주인님을 가장 먼저 모셨습니다.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두 번째, 세 번째 생명을 얻게 될 수도 있지만 어떤 것도 맨 처음 받은 생명과 비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율켄 주인님을 중심에 두고 모든 행동을 결정합니다. 도련님의 중심에는 누가 있습니까? 도련님 자신이 오랫동안 이름을 떨쳐 온 진네만 가문의 마지막 주인이라는 것을 자각하신다면, 작은 예니 아가씨나 블라도 주인님에 대한 마음은 버리셔야 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그것이 트라바체스에서 가문의 주인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보리스는 튤크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며, 그가 오랫동안 자신에게 이 말을 하고자 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튤크의 관점이었다. 그렇게 살아온 자였다. 배신을 최대의 치욕으로 간주하는 트라바체스에서 튤크의 진정한 주인은 율켄뿐이고, 세상에는 우선 순위란 것이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는? “틀크 집사, 당신이 내 아버지의 일을 그토록 목숨 걸고 해내려 하듯,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따르는 사람이 있어.” “그렇습니까? 뜻밖이군요.” “그래, 뜻밖이겠지. 당신의 생각 속에서 진네만 가문에서 가장 주인다웠던 사람은 내 아버지겠지만, 나는 아니야. 알고 있어? 아버지는 그 날 밤 호숫가에서 돌아가셨어. 그리고 두 아들들이 살아남았지,. 내게 가문의 주인 이름을 물려준 사람은 아버지가 아냐. 바로 예프넨 형이다. 예프넨 진네만이야말로 내가 마지막으로 따랐던 가문의 주인이었어.” 비록 짧디 짧았던 시간이었지만 예프넨은 보리스를 이끌었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때 예프넨은 비록 아무 것도 없었으나 진네만 가문의 주인이었다. 그랬기에 그토록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동생에 대한 애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책임감이었다. 어머니를 닮아 마음이 여렸던 예프넨도 틀림없는 트라바체스의 사내였다. “예프넨 형은, 내가 복수하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랐지. 그걸 입으로만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직접 보여주었어. 나를 살리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것으로, 형은 내가 복수할 힘이 없을까봐 내 몸 하나만을 지키라고 말한 것이 아니야. 형 역시 집안을 파멸시킨 피 냄새가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고 있었어. 그걸 멈추기 위해서 튤크 집사 당신과 같은 방법도 물론 있을 거야. 하지만 당신이, 당신에게 유지를 남긴 율켄 진네만의 방식을 따르듯, 나는 예프넨 진네만을 따를 거야. 나는 당신과는 달라. 당신은 집사이고 누군가를 위해 죽기만 하면 되지만, 나는 안 돼. 당신이 말했듯 집안의 주인이니까. 나는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만’하는거야. 그것이 내가 택한 가주의 방식이다.” 보리스는 냅킨을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튤크 집사는 얼굴빛도 변하지 않고 보리스의 말을 다 들었다. 그리고 허리를 깊이 굽히더니 말했다. “보리스 진네만 주인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석양조차 자취를 감추고, 허물어져 가는 저택의 마지막 연회를 비추는네 개의 촛불, 그 앞에서 보리스는 처음으로 ‘주인님’이라는 말을 들었다. 모두가 죽어버렸고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비극의 역사를 끝내려 했다. 이제 그것은 끝날 것이다. 이 저택이 무너져 사라지듯, 저 에메라 호수 속에 묻히게 될 것이다. 다 식어 약한 김만을 올리는 요리를 내려다 본 보리스는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 빈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우측으로 비스듬하게 나란히 놓는 것은 충분히 다 먹었다는 표시였다. “튤크 집사, 당신이 내 아버지를 따르는 마음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고 있어. 이제 당신의 길을 가도록 해. 오늘들은 말은 잊지 않겠어. 그 말대로, 이제부터는 내가 진네만 가문의 주인이라는 것을 잊을 수 없을 거야.” 튤크는 굽혔던 허리를 펴며 보리스의 얼굴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다. 보리스는 그 얼굴에서 오랜 세월이 흘러도 결코 없어지지 않을 상처 같은 것을 읽었다. 이윽고 튤크는 말했다. “작은 예니 아가씨는, 호숫가에 버려 두고 왔습니다. 지금쯤 세상 모르고 잠들어 계실 것입니다. 주인님의 기억 속에 있는 바로 그 장소를 향해 가십시오.”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빠른 걸음으로 문을 향해 걸어갔다. 가려 하는 순간 뒤에서 튤크가 말했다. “조심하십시오. 얼마 전까지 저 곳에 앉아 있다가 간 분을 만나실
지도 모르니까요. 이것이 제가 드리는 마지막 말씀입니다. 진네만 가문의 마지막 주인님, 강인함과 자부심을 지켜 살아가십시오.” 튤크의 손은 식탁 맞은편을 가리키고 있었다. 보리스는 튤크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바라보고 날 듯이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예니!” 블라도 진네만은 보리스보다 반 시간 가량 앞서 있었다. 에메라 호수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딸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론에서 사정을 알고 이곳으로 달려오는 내내 그는 미쳐 있었다. 진네만 저택에서 드디어 튤크를 만났을 때, 그곳에 예니가 없는 것을 보고 행방을 알아내려고 억지로 마음을 억누르며 이야기를 듣고, 결국 한 마디 ‘에메라 호수변’ 이라는 말 때문에 더 듣지 못하고 뛰쳐나와 이곳을 헤매었다. 이 며칠 동안 그의 가슴은 예전 환수 크리갈의 독액으로 한동안 삭아들던 저택의 상태와 다르지 않았다. 에메라 호수. 형 율켄을 밀어내고 차지한 롱고르드였지만 채 한 해도 머무르지 않았다. 그 때 떠난 후로 오늘을 제한다면 단 한 번 돌아왔었다. 에메라 호수는 최후의 싸움이 있던 밤 이래로 처음이었다. 그는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해 왔다. 늪이 된 에메라 호수, 누이와 형을 차례로 삼킨 곳을. 그 둘을 죽인 것이 모두 자신의 손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살아온 그였다. 세월조차 그의 죄를 사하지 못했다. 그걸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도 몇 년 동안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어리석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예니치카가 다시 태어난 듯 사랑스런 어린 예니를 보면서 그 아이를 키우는 것으로 죽은 누이를 이곳에 되살릴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예니가 커서 행복해진다면 더 이상 어떤 죄도 없을 것만 같았다. 자신도, 자신이 해친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해치고자 할 모든 사람들도. 그러나 망상이었다. 튤크 놈은 어린 예니를 두고 ‘진네만 가문의 비극을 끝낼 마지막 제물’이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예니가 태어났을 때부터 황금 꽃처럼 곱디고운 그 아이를 희생자로 점찍고, 그 애의 남은 생명을 헤아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을 위해 그의 곁에서 충성스러운 개 노릇을 자청하며 지금까지, 그 가증스런 얼굴로 자신을 속였던 것이다! 블라도는 광인처럼 분노하면서도 동시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예니를 사랑하지 않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이리처럼 그 애를 물어가려고 호시탐탐 노리던 자를 눈치채지 못한 자신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썩은 식물 더미가 붉은 석양을 등지고 불타며 가라앉았다. 검은, 시체가 썩은 물 속에는,. “예니!” 그 날 밤에도 이렇게 그 애의 이름을 불렀었다,. “여니,.!” 율켄과 마지막 전투를 벌였던 늦여름의 질척한 밤, 두 형제는 서로를 노리면서 동시에 예니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천사 같던 예니치카, 이제는 썩어 문드러진 시체도 남지 않았을 예니치카, 이제는 제발 잠들어 줘,. 너의 저주가 진네만 가문의 사람을 하나도 용서하지 않을 셈이라 해도 예니만은, 나의 예니만은 돌려줘,. “예니! 예니! 제발, 대답해 다오,.” 블라도는 알지 못했다 어두운 에메라 호수 속에 소리 없이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오직 흰옷의 예니만을 생각하며 호수변을 따라 달렸다. 어딘가에 쓰러져 있을, 또는 위협 당하고 있을, 예니의 안전에 대한 생각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소리 없는 움직임은 블라도를 따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블라도가 멈추자 따라 멈추었다. 멈춰 선 블라도가 다시 한 번 목청엇 예니를 불렀다. “예니 ! 어디 있니! 대답하거라!” 그 때, 캄캄한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블라도는 그것이 예니의 목소리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들었다 처음에는 실낱같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이번에는 분명하게 들렸다. “예니, 기다려라!” 그러나 나타난 것은 예니만이 아니었다.
3. 유년의 겨울은 끝나고
캄캄한 호수변을 따라 걸어가며 간간이 들리는 블라도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던 유리히는 조금 후 불만스런 목소리로 내뱉었다. “계집애 하나를 도대체 얼마동안 찾고 있는 거야?” 유리히는 젊은이였지만 양아들을 두고 있었으므로 예니를 찾는 블라도의 심정을 전혀 모르지 않았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자꾸 가슴속에서 뭔가가 걸리는 느낌이라 차라리 빨리 찾아주기를 바랐던것이다. “기다리는 녀석은 오지도 않고. 여기 참, 굉장히 기분 나쁜 곳이네.” 유리히는 에메라 호수에 대한 풍문을 들은 일이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일은 없었다. 망령이라나 뭐라나 하고 떠드는 이야기도 알고 있긴 했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호수는 짐작보다 훨씬 음침하게 끈적거리는 곳이었다. 조심해서 걷고 있었지만 가끔 질척대는 곳을 밟게 되면 흠칫하기도 했고, 호수 곳곳에 들어찬 썩은 식물들의 모양도 느낌이 나빴다. 큰 달이 뜨는 날이라 밤 치고는 비교적 밝은 편인데도 모든 자연의 느낌이 기괴했다. 아노마라드 쪽으로 갈 것을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공을 세우기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자신이 롱고르드로 가겠다고 우겨서 이리로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귀신 나올 것 같은 늪에서 딸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외침만 계속해서 듣고 있자니 점점 정신이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보리스가 복수하기 위해 블라도를 노릴 거라고 믿고 있지 않았더라면 일찌감치 멀리 떨어져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갔을 것이다. 블라도의 목소리가 한동안 들리지 않자 유리히는 멀리 떨어졌나 싶어 걸음을 빨리 했다. 조금 가다 보니 흙바닥으로 번져 나온 늪이 앞을 가로막았고, 그곳을 돌아가자 트인 곳이 나타났다. 몸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몇 걸음 물러나 썩은 식물들 뒤에 숨은 유리히는 놀라운 장면을 보고 말았다. 처음에는 단지 대기가 흔들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안개로 이루어진 것 같은 뭉클거리는 팔이 쭉 뻗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팔이라고 생각한 것의 길이만 해도 3미터는 족히 될 듯했다. 유리히가 놀라서 자기 입을 틀어막는 순간, 그 팔은 물풀 속에 있는 무언가를 쳤다. 비명, 이었던가. 작고 하얀 덩어리가 허공을 날아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사방을 울린 소리는 블라도의 짐승 같은 외침이었다. 어둠 속에서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던 블라도가 검을 뽑아들고 미친 듯 돌진하여 그 팔을 찔렀다. 유리히는 분명히 보았다. 검으로 똑바로 찔렀건만 안개덩어리 같은 팔에서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팔이 높이 들어올라졌을 때, 유리히는 그것이 팔이 아니라 거대한 날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저것은, 적회색인가? 흉사 피에 물든 안개처럼 보이는 덩어리다. 팔인 줄 알았던 날개 뼈 아래로 뭉클거리는 날갯죽지가 커튼처럼 따라 올라갔다. 다른 쪽에, 같은 날개가 하나 더 있었다. 두 날개를 지닌 이 믿을수 없는 괴물은 양쪽으로 펼쳐진 날개의 길이만 합쳐도 7미터는 될 듯한 거대한 놈이었다. 어둠 때문에 어떤 모양인지 확실히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가까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암살자로 살아오며 수많은 이상한 것들을 보아 온 유리히도 이번만큼은 바닥에 주저앉지 않는 것이 고작일 정도로 충격에 사로잡혔다. 이런 공포는 생전 처음이었다. 저것은, 악마다. 다른 세계에서 온 악마야! 그 괴물을 향해 다시 한 번 검을 찔러 가는 블라도의 모습을 본 유리히는 솔직히 감탄했다. 블라도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검날이 아무 것도 자르지 못할 지라도 엄청난 기세로 찌르고 베었다. 그렇게 괴물의 날개가 펼쳐진 곳에 놓인 그 하얀 물체 앞으로 다가가려 했다. 괴물의 시잇거리는 소리에 맞서 블라도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수백 년 쌓인 시체들로도 부족했나? 이 피와 살점을 먹는 괴물아! 예니치카를 삼켰으면 충분하지 않나? 네가, 네가 또다시 예니에게 손을 댄다면 호수 밑바닥에 처박아 다시는 나오지 못하게 만들고 말테다!” 인간이 초자연적 존재를 향해 저 정도의 살의를 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슴 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외침이었다. 그리고 블라도는 달려들었다,. 예니를 되찾기 위해 다시 한 번 흑날의 검을 쥔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괴물은 블라도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듯 상대도 하지 않고 하얀 물체가 있는 쪽으로 날개를 뻗었다. 그리고 유리히는 보았다. 그 날개에서 하얗게 번쩍이는 이빨 같은 것이 튀어나오는것을. 그것은 쏜살같이 뻗어나가 바닥의 하얀 물체를 찔렀다. “아,. 아, 아, 안 돼!” 쇳소리에 가까운 블라도의 외침도 소용없이 하얀 물체에서 핏줄기가 튀어 올랐다. 어둠 속인데도 어찌 보였던 것일까. 블라도는 이제 아예 미친 사람이 되어 괴성을 울리며 괴물을 향해 몸을 던졌다. 같이 죽으려는 게 아니라면 저럴 수는 없었다. 괴물은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세 개나 되는 이빨 모양의 발톱들을 격출시켰다. 그것들이 블라도를 향해 날아가는 것을 본 유리히는 이제 자신감을 상실했다. 달아나야겠다고 생각하고 한 걸음 뒷걸음질치는 순간이었다. 어딘가에서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튀어나온 검은 그림자가 송곳발톱들 중 하나를 부쉈다. 이어 다른 발톱 두 개도 깨끗이 잘라져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저 자는,. 그 자의 손에 쥐어진 검에서 하얀 꽃이 이는 것이 보였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광채를 본 유리히는 순간 다시 정신을 차렸다. 틀림없었다. 의심할 바가 없었다. 저것이야말로 그가 찾아마지 않던 백색의 검, 윈터러다! 발톱들을 잘린 괴물은 잠시 무언가 탐색하는 것처럼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그 앞에서 번쩍이는 백색 검을 잡은 소년이 나직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랫동안 기다렸어,. 네 앞에서 달아났던 소년이 다시 한 번 돌아와 여기에 서기까지. 네가 앗아간 목숨들 대신, 네 생명을 받아가겠어. 아마, 공평한 대가가 될 거야.” 위험에서 벗어난 블라도는 자신의 안전은 잊어버린 것처럼 무방비 상태로 바닥의 흰 물체, 이미 움직임이 없는 흰옷의 어린 소녀를 향해 달려가 부둥켜안았다. 옷깃을 헤치고 무언가를 살피는 것 같더니 잠시 후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비통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예니이이이이이!” 유리히는 소년의 목소리를 들으며, 떨리는 다리를 멈추기 위해 노력하며 생각했다. 진네만 성을 가진 인간들은 이 호수 변에 살아서 모조리 미쳐버린 것이 틀림없다고. 자신은 미친 인간이 아니므로 이곳에서 기다릴 것이다. 저 싸움이 끝날 때까지, 어느 한쪽이 죽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게 될 때까지. 귓가에 블라도 삼촌의 목소리가 들린다,. 5년 전, 아버지와 형과 자신을 이곳으로 몰아넣었던 자, 그가 희생당한 어린아이를 부둥켜안고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단지 존재한다는 사실밖에 알지 못했던 사촌 누이는, 죽은 것일까. 보리스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굽어보고 있는 괴물을 보았다. 괴물은 섬에서 이솔렛과 함께 죽였던 그놈보다 세 배는 컸으며 그만큼 더 강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더구나 보리스의 기억 속에서 이 괴물은 목소리마저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맨 처음 괴물 앞에서 말을 했던 것이다. 알아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지체했던 잠시간은 곧 끝이 났다. 괴물은 자기 앞에서 빛나는 검을 적수로 인정한 듯 거대한 날개를 한껏 펴 펄럭였으며, 보리스는 몸을 도사리며 곧 다가올 공격에 대비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기억 속의 가장 큰 적, 어린 시절의 악몽 속에서 가장 끔찍했던 것을 다시 마주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심장이 속도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뛴다, 검을 들고 긴장한 손이 가늘게 떨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동시에 흥분해 있었다. 언젠가 치욕을, 죄를, 원한을 씻기 위해 지금껏 수많은 시험에도 굴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보리스가 긴장하는 것과는 달리 윈터러, 백색의 겨울검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보리스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이 검이 지금 얼마나 피를 원하고 있는지를. 그러나 그건 검 안에 사로잡힌 자들의 의지이다,. 윈터러 자체는 아무 의지도 갖고 있지 않다.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