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101)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102화(102/143)
102화. 추리극장의 배우들 (29)
일꾼 두 사람은 청어절임의 질문에 대꾸하는 대신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제법 넓어 보이는 방은 일말의 일관성조차 없는 각양각색의 가구들로 가득찼고 뭘 내려놓을 빈틈 같은 건 없었다. 이런 데서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인간들의 정체는 뭘지 궁금해질 광경이었다.
“햐, 이걸 어쩌란 거야?”
“이렇게 뭐가 많은데 왜 또 의자 같은 걸 사는 거야?”
그건 의자였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호두나무 틀에 붉은 벨벳을 씌운, 앉는다기보다 비스듬히 누워야 할 것처럼 생긴 의자다.
뒤를 돌아본 이스핀은 그 의자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리고 울컥 화가 치밀었다. 아까부터 몇 시간째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기껏 이걸 가지러 갔었어?
청어절임과 데보라가 가구들을 주섬주섬, 그러니까 치울 데가 없었으므로 탑처럼 쌓아 자리를 만들어 주었고 일꾼들은 간신히 의자를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땀을 닦으며 팁이 필요한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봤지만 이스핀은 화가 나서, 나머지 둘은 돈이 없어서 아무도 호응해주지 않았다.
일꾼들이 사라지고 나서 잠시 후, 막시민이 들어왔다.
“3층 올라가는 계단이 좁다 보니 앞질러 갈 수가 있어야 말이지. 팁 못 받았대서 내가 주긴 했는데 두 번 준 건 아니겠지?”
그런 다음 방을 둘러보더니 입맛을 쩝, 다셨다.
“사람이 넷이나 모였는데 나란 놈의 주머니에서 팁이 나가다니. 켈티카는 살아볼수록 놀랍게 얄짤없는 도시구만.”
“야, 너.”
창가에 기대어 서서 팔짱을 끼고 있던 이스핀의 목소리가 이미 심상치 않았지만 막시민은 못 알아챈 체하며 대꾸했다.
“왜?”
“너 고작 이걸 가지러 나갔던 거야?”
“이것뿐만은 아니고…… 하여튼 언제 가져와도 가져왔어야 되는 거라서. 몇 날 며칠 계속 맡겨둘 수도 없고.”
“그렇다 쳐. 하지만 어디로 뭘 하러 갔는지 정도는 말해주고 나가는 게 예의 아니야?”
“그야 그땐 네가 없었으니까 그렇지.”
“다음에는 여기 둘한테 말을 해두든가, 쪽지라도 써놓든가 해. 알았어?”
이스핀의 말은 옳았지만, 저녁에 이스핀이 와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도 사실이었다. 청어절임이나 데보라한테 일일이 행선지를 설명해야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은근히 다그치는 말투가 거슬렸다. 왜 나한테만 상식을 요구하는 거야? 그러는 너는 뭐 엄청난 상식인이라서?
“너야말로 말 안 하는 게 백만 가진데 난 꼭 어디 뭐하러 간다고 다 말하고 다녀야 되냐?”
“그야 네가 납치 위협 같은 걸 받지 않을 때 얘기잖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데 왜 그래!”
“그래서, 계속 이러겠다는 거야? 무슨 일이 진짜로 생길 때까지?”
한 명은 입구, 한 명은 창가에 서서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이는 가운데 사이에는 집어던지기 딱 좋은 망가진 가구들이 가득했으므로 그 사이에 낀 누구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고 방금 이런 곳에 떨어진 의자도 당황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데보라가 청어절임을 쿡 찌르며 속삭였다.
“야, 이런 상황에서 애들은 옆방으로 빠지는 거야.”
그러더니 슬금슬금 옆방으로 도망쳤다. 청어절임도 뒤따라갔지만 데보라와는 달리 문간에 서서 밖을 힐끔거렸다.
그쯤 되자 막시민도 이스핀이 자신을 걱정했다는 걸 알아차렸으므로 입술을 삐딱하게 물었다가 풀었다가 하다가 대꾸했다.
“그러니까…… 아니, 됐어. 다음부터는 안 그러면 되지? 앞으로는 일일이 보고드리고 다닌다고. 이제 됐냐?”
이스핀의 눈이 가늘어지며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살아오며 저런 시시한 고집을 부리는 상대를 봐주고 넘어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잘못한 걸 알았으면 깔끔하게 인정하면 되지 그런 고집은 왜 부리는 거야?
“알긴 알았어? 근데 그런 말을 왜 곱게 못 하니? 달리 뭐 잘한 거라도 있어서? 네가 걱정거리란 사실을 못 받아들이겠어? 그 작자들이 너를 가장 잡아가고 싶어 한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겠어? 그러고 나면 이젠 내가 탐정이 돼서 널 찾아야 되니? 나한텐 그런 능력 없거든? 대신 넌 네 몸을 지킬 능력이 없단 말이야!”
구경하던 청어절임이 뒤를 돌아보며 소곤거렸다.
“야…… 이번엔 아무래도 플레상스 경이 털릴 것 같다.”
“그야 그럴 만하니까 그렇지. 근데 왜 또 도로 플레상스 경이야. 슈발리에라며.”
“몰라. 그런 어려운 말 어떻게 기억해.”
막시민은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걱정했기 때문에 저런다는 건 알고 있었다. 걱정의 대상이 되다니, 낯선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껏 늘 자신은 주목받는 위치가 아니었고, 아니었기 때문에 내키는 대로 움직여왔다.
이렇게 해도 될지, 저렇게 하면 안 될지,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않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하러 훌쩍 떠나곤 했다. 그게 자기 방식이라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제 몸 못 지킬 정도라는 생각도 물론 해보지 않았다. 예전에 누가 그의 신변이 걱정스럽다며 이렇게 나왔다면 집어치우고 신경 끄라는 반응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바뀌었다. 상대는 여럿이고, 거침없이 집요하고, 첫 번째 목표가 자신이었다.
예전에 위험에 처한 녀석이 제멋대로 굴려 할 때 얼마나 화가 났는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마저 그 꼴이 된다면 우스운 일이다. 바뀐 상황도 못 받아들이는 주제에 어디서 살아남겠는가.
막시민 리프크네는 늘 현실주의자였다. 논리적으로 증명 불가능한 기분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지 말자는 것은 그의 좌우명이나 다름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 걱정한다는 것이 어색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이것도 적응해야 할 현실이라고 생각하며 막시민은 차마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비틀어 열어 말했다.
“……그래 없다. 없으니까 뭐라도 가르쳐줘봐라.”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이스핀도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문간에서 기웃대는 청어절임과 눈이 마주치자 즉시 손가락을 들어 명령했다.
“문 닫고 들어가.”
“네, 네, 그래야 되겠네요.”
문이 쾅 닫혔다. 이스핀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문간에 낡은 캐비닛을 하나 밀어놓아 혹시 열더라도 이쪽이 보이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막시민의 가방을 낚아채어 창가로 돌아가면서 막시민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이리 와 봐.”
검술은 아니더라도 호신술이라도 가르쳐주려나 무심코 생각하고 있던 막시민은 의아한 기색으로 뒤따라 창가로 갔다. 이스핀은 창문 쪽을 향해 돌아선 채 가방을 적당한 콘솔 위에 얹어놓고 열었다.
“이거 말이야.”
안에 든 온갖 것들 중 이스핀이 가리킨 건 바이올린이었다. 어제 저녁에 잠깐 방으로 올라왔던 이스핀은 약속대로 가방을 열어서 살펴보았지만 막시민에게 의견을 말해주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방안에 청어절임과 데보라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그거 뭐?”
“이 안에 있어.”
“뭐가?”
“그거 말이야.”
최대한 멀리 떨어져 놓고도 혹시 안에서 들릴까 봐 돌려 말하자니 말이 잘 통하지 않았지만 막시민도 영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막시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스핀이 손가락을 현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자 현이 바르르 떨다가 스스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손끝도 닿지 않았는데.
웅…….
이스핀은 손가락을 도로 치웠다. 그러자 진동도 멎었다.
“이게 그거야. 모습을 바꾼 거야.”
막시민도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동판 명함이 여러 개로 불어났었고, 도로 사라지더니 현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게 프시키였다고?
하긴 오렌지나무 술집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프시키가 여러 가지 모습이 될 수 있는 것 같긴 했지만 변신 범위가 불타는 원숭이에서 바이올린 현까지냐…….
“이게 왜 이런 데 있는 건데?”
“나도 모르지. 그보다 놀라운 건, 이 안에 있으면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
이스핀이 어이없다는 것처럼 혀를 한 번 찼다. 자기 명령을 듣지 않는 프시키는 그날 이후로 처음이어서 꽤 놀랐다.
이스핀이 블러디드가 되고부터 프시키에게 명령을 하거나 없애버릴 순 있었지만, 그렇다고 프시키의 정체를 알아낸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많은 면이 밝혀지지 않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때, 생각나지?”
이스핀이 손을 펴서 가방에서 물건이 튀어나오는 시늉을 했다. 막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아무도 명령하지 않았는데 저들의 의지로 그런 일을 했단 말이야. 왜지? 이거 너한테 의미 있는 물건이야?”
“좀…… 있긴 하지.”
“내 추측이지만, 이것들이 너한테 볼일이 있는 것 같아.”
막시민은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이스핀을 보다가 문득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래서 말도 걸었던 건가.”
“뭐?”
깜짝 놀란 이스핀이 눈을 커다랗게 뜨며 막시민을 봤다.
“말을? 그게 정말이야? 네가 들었어?”
“딱 한 번뿐이었지만……. 그런데 그게 대단한 일이냐?”
이스핀은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로 고개를 흔들었다.
“난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 단 한 번도.”
지금껏 프시키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로랑과 크루파드뿐이다. 블러디드가 된 이스핀은 정작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그래서 로랑과 크루파드가 들었다는 소리도 어쩌면 착각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날 전투가 워낙 힘들었고 다들 정신이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들렸다던 말도…….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도와줘, 도와줘, 도와줘, 도와줘, 도와줘…….
“너한텐 뭐랬는데?”
막시민은 잠시 생각하고 있더니 이윽고 정확히 말했다.
“맨 처음에 ‘열어’. 그다음은 ‘듣는다’, ‘들어라’, ‘말한다’, ‘말해’. 그리고 마지막에는…… ‘잡다’, ‘잡았다’, ‘잡혔다’.”
“…….”
이스핀은 입술을 짓씹으며 바이올린을 노려봤다.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가 가진 않아도 저 정도로 정확하면 착각일 리 없다. 지쳐서 환각이 들릴 만한 상황도 아니었을 테고.
정말로 프시키는 말을 할 수 있는 건가? 그렇다면 왜 내게는 한 번도 말을 걸지 않은 거지?
“네 말대로라면 내 생각이 추측이 아니라 사실인가 보네. 얘들이 너한테 할말이 있는 모양이야. 기회가 된다면 한번 물어보든가.”
막시민이 기막힌 표정으로 양팔을 벌렸다.
“대체 나한테 왜? 난 널 안 만났으면 그게 뭔지도 몰랐을 사람 아니냐?”
“나도 이유는 몰라. 하지만 앞으로는 그걸 꼭 갖고 다녀. 내 생각엔 얘들이 널 도울 마음이 있어. 어떤 식으로 도와야 하는지는 잘 모르는 것 같지만. 전부터 보면 얘들한테도 무슨 생각이 있긴 한 것 같은데 우리 상식하고 달라서 뭐랄까, 좀 별나. 지붕에서의 일만 해도 그렇고.”
“쫓기든 잡혀가든 그건 알 거 없는데 초콜릿 잼과 돼지 뒷다리 햄은 꼭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어…… 뭐 그런 식이라고나 할까.”
이스핀은 다시 가방을 덮었다. 막시민이 가방과 이스핀을 번갈아 보더니 물었다.
“야, 그래서 끝이야? 이게 호신술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