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105)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106화(106/143)
106화. 추리극장의 배우들 (33)
이스핀이 뭐라 말하려 하자 막시민이 고개를 흔들었다.
“됐어. 어쩌겠냐. 잠시 동료인 척해보자고. 넌 오토마톤이 필요하고, 난 플레상스 경을 구해야 하고, 우리는 사건을 해결해야 하니까.”
이스핀은 막시민이 지난번과 같은 대답을 들을 거라고 생각해 말을 돌려버렸음을 알았다. 그런 이야기를 두 번, 세 번 들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달라질 건 없는데.
마차가 빠르게 달려가는 가운데 둘은 잠시 말없이 창밖만을 보았다. 광장이 가까워질수록 거리는 점차 번화해졌다.
겨울 낮의 햇빛만으로도 다양한 광채가 넘실대는 도시였다. 우아한 창틀과 난간을 갖춘 창문, 크림색과 살구색을 칠한 외벽, 장갑과 보석과 리본을 파는 가게들, 날씬한 이륜마차들, 모피를 두르고 양산을 쓴 여자들, 매끈한 새틴 코트 차림의 남자들, 벨벳 외투에 뺨이 발그레한 아이들, 신문이나 꾸러미를 쥐고 바삐 달려가는 점원들…….
막시민은 플레상스 경의 편지를 다 읽고 난 이스핀에게 말했었다. 내가 이런 도시에서 태어났다니 어처구니가 없다고.
그 편지를 통해 둘은 플레상스 경이 막시민의 어머니와 인연이 있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막시민은 플레상스 경을 만나보기 위해서라도 이 사건을 해결해야겠다고 말했다. 둘에게는 각자의 목표가 생겨났고 서로를 도울 이유도 뚜렷해졌다.
하지만 막시민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결심을 했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플레상스 경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걸까?
이윽고 눈에 익은 풍경이 언뜻언뜻 비치면서 중앙 광장이 먼발치로 보이기 시작했다. 막시민은 인파가 많아져 마차의 움직임이 느려졌을 무렵 마부를 불렀다.
“잠깐 볼일이 생각났으니 여기서 내립시다.”
삯을 치르고 마차를 세우자마자 둘은 재빨리 사람들 틈바구니로 비집고 들어갔다. 마침 휴일이라 광장은 붐볐고 손수레나 좌판을 가지고 나와 이것저것 파는 사람들이 많았다.
막시민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 어느 손수레 앞에서 갈색 숄을 하나 집더니 이스핀에게 휙 둘러주었다. 자신은 후드가 달린 반망토를 샀다. 값을 치르고 다시 걷기 시작하자 이스핀이 속삭였다.
“고맙긴 한데, 네가 산 망토 진짜 너랑 안 어울린다.”
“……일부러 그런 걸로 고른 거야.”
“정말?”
사실을 말하자면 이스핀에게 둘러준 두툼한 숄도 어울리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름 켈티카 토박이처럼 매끈하게 차려입은 둘을 중부에서 막 올라온 촌뜨기처럼 보이게 만드는 마법의 의상이랄까.
둘은 광장을 북쪽으로 가로질러 어느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거기서 다시 마차 한 대를 집어타고 펠그레이브 남작, 아니 브라운센의 저택이 있는 거리까지 가서 내렸다. 여러 채의 저택이 줄지어 있는 제법 고급스러운 거리였다. 어느새 3시경이었다. 점심을 먹지 못한 둘은 배가 고파왔다.
“얘기가 잘 되면 얻어먹고, 아니면 사 먹고.”
저택 입구에 이르러 그렇게 중얼거린 막시민은 문지기를 찾았으나 그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웬일인지 문도 빠끔 열려 있었다. 문지기가 잠깐 자리를 비우면서 깜빡한 모양이었다.
그걸 본 막시민은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집 입구를 통과하더니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 앞 회랑까지 갔다. 이스핀은 얼결에 따라가면서도 이래도 되나 싶어 주위를 흘끔댔다. 그때 저택 뒤편에서 늙수그레한 하인이 나타났다.
“아니, 저, 누군데 여기까지 들어왔소? 남작님 손님이오?”
상대의 차림새가 깔끔해 보여 빗자루를 휘두르는 대신 질문으로 시작한 하인은 곧 눈을 크게 떴다. 막시민이 이렇게 외쳤기 때문이었다.
“아니 당신은! 혹시 보든 씨가 아닌가요? 맞죠? 당신 얘길 진짜 많이 들었는데 반갑습니다!”
하인은 멈칫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보든은 내가 아닌데. 그런데 거…… 누군데 그러시오?”
“아, 그럼 카펠 씨죠? 그렇죠?”
“카펠은 내가 맞소만…….”
막시민은 친한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카펠이라는 하인은 얼떨결에 손을 맞잡고 흔들긴 했지만 웃어야 하나 헷갈려하는 표정이었다. 곁에 선 이스핀은 막시민의 연기가 너무 본격적이어서 당황했지만 영문도 모른 채 저걸 따라 하다가는 수습하기 어렵겠다고 생각해 기묘하게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나저나 저 하인들의 이름은 어째서 알고 있는 거람?
“이렇게 말로만 듣던 분을 뵈니 정말 반갑네요. 전 요슈아 로트마이어라고 합니다. 파울 형님의 사촌이죠. 파울 형님이 이곳에서 만난 친절한 분들 얘기를 여러 번 써 보냈거든요. 형님이 워낙 숫기가 없어서 다른 데서는 적응이 힘들었는데 여기 왔더니 참 지내기가 좋다고 그러더라고요. 다 두 분 덕분이겠죠? 제가 대신 감사드리겠습니다.”
“어, 그게…… 그러니까 파울을 찾으러 온 거요?”
카펠이 머뭇머뭇하는 걸 보니 과연 막시민이 예상한 대로의 성품인 모양이었다. 보든과 카펠이라는 이름은 어제 왔을 때 주위 상점가를 어슬렁대면서 상인들을 슬슬 찔러 알아냈다. 이런 곳의 상인들은 근처 저택 하인들의 이름이며 성품을 잘 알기 마련이었다.
“그럼요! 켈티카에 들르면 꼭 놀러 오라고 했거든요. 주인 되시는 분도 아주 인심이 좋으시다던데, 그래도 저 같은 놈이 인사를 드리는 건 예의가 아니겠죠?”
“그야 그렇지만, 그보다…… 사실 파울이 여기 없어서 말이오.”
“네? 어디 갔는데요?”
카펠은 파울이 여기서 한동안 일하긴 했지만 지난달 말에 이렇다 할 얘기도 없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말을 해주었다. 이어 머뭇대다가 덧붙였다.
“얼른 나가보시오. 주인님 눈에 띄면 좋은 일이 없을 거요. 파울이 말씀도 안 드리고 제멋대로 사라진 걸로도 노하셨지만 그 뒤로 물건이 뭐가 없어졌다고, 그걸 그놈이 훔쳐간 것 같다고 역정이 대단하셨거든.
뭐 우리야 어떻게 된 사정인지 모르지만 말이오. 하여간 멀리서 왔는데 미안하게 됐소이다.”
둘은 카펠에게 어물어물 인사를 하고 실망한 기색을 보이며 저택을 나섰다. 저택에서 한참 멀어져 상점가가 있는 거리에 접어들고서야 막시민이 중얼거렸다.
“점심은 사 먹어야 되겠네.”
이스핀이 그를 봤다.
“너 파울이 여기서 일했다는 거 어떻게 알았어? 데보라가 말해줬어?”
“아니.”
막시민은 생각을 정리하느라 땅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데보라도 거기까진 몰랐더라고. 직업이 자주 바뀌었던 모양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여기가 11구거든. 청어절임이 파울을 만났다고 주장했던 그곳 말이야.
어제 펠그레이브 저택의 주소를 알아내자마자 여기가 파울 이야기의 시작이겠구나 싶었지. 플레상스 경이 손댔던 남작 사건이 발생한 이곳에 ‘로트M’이라는 메모로 추가된 자는 어디서 일했을까. 플레상스 경이 파울을 왜 그렇게 열심히 도와주려 애썼는지 궁금했는데 해답이 이거구나 싶었지. 어제 베고니아라는 카페도 찾았고. 바로 저기야.”
막시민이 가리킨 방향을 보니 모퉁이에 자리잡은 조그마한 카페 입구가 보였다. 이스핀은 그쪽을 보고 나서 다시 막시민을 봤다.
“그럴 법하긴 하다만 증거는 없었잖아? 추측만 갖고 들어가서 잘도 그런 연기를 했단 말이야?”
“뭐 어떠냐? 아니면 엇, 제가 잘못 알았나 보네요, 그러고 나오면 그만인데. 집 좀 잘못 찾았다고 하인들이 날 두들겨 패길 하겠냐, 치안대에 신고를 하겠냐? 기껏해야 욕이나 하겠지. 욕 좀 먹고 답을 빨리 얻으면 좋은 거지.”
이스핀은 정보가 확실하다 싶어야 자연스러운 행동이 나오는 성격이었으므로 그런 대답은 예상 못 한 듯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하여간…… 그래, 너 대단하다. 하지만 청어절임이 파울을 만났다던 말은 거짓말이었잖아?”
“그래. 청어절임은 파울을 실제로 만나진 않았지. 다만 존재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플레상스 경에게 접근하려고 그 이름을 이용했던 거지. 어제 오늘 청어절임을 슬슬 찔러보니까 걔는 이 두 사람에게 실제로 관심은 없었던 것 같아.
파울과 플레상스 경이 무슨 관계인지, 플레상스 경이 펠그레이브 사건을 이 년이나 조사했다든가, 그런 것들은 몰랐더라고. 걔는 단지 이들 둘이 쇠의 왕의 최근 관심사라는 걸 알고 쇠의 왕의 약점을 알아낼 수 있을까 해서 접근했다고 생각해. 그래서 일단 그 녀석을 내버려두기로 한 거야.”
이스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결론이 났단 말이지. 하지만 청어절임은 베고니아를 알고 있었잖아?”
“청어절임이 베고니아를 알고 있었던 건 파울이 이 근처에 산다는 것까지는 조사했다는 뜻이지. 보아하니 파울은 이 근방에서 이런저런 일자리를 전전했던 모양이야. 하인 일을 얻기에 좋은 곳이긴 하겠지. 저쪽은 저택이 즐비하고 이쪽은 거리가 허름하니까 말이야.
그런데 희한한 건 그날 청어절임이 보인 태도야. 우린 그때까지 데보라가 한 말은 그리 의심을 안 했는데 청어절임은 아니었어. 데보라의 입에서 베고니아 얘기가 나오고서야 ‘아, 당신이 파울을 알긴 아는군’이라고 인정했단 말이야. 다시 말해 청어절임이 우리보다 의심이 많았다는 거지.”
“데보라가 진짜로 파울의 동생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단 말이야?”
“그래. 걔는 그랬던 모양이야. 하지만 난 데보라의 얘기를 들을 때까지만 해도 이 사건에 진지한 관심이 없었어. 플레상스 경도 나하고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주도면밀하게 저울질하며 듣지 않았지.
하지만 청어절임은 아니었던 거야. 어쩌면 그놈의 태도가 옳을지도 모르지. 청어절임이나 데보라나 둘 다 우리한테 뭔가 얻어갈 게 있어서 버티고 있지만 제 속에 든 걸 다 내놓는 놈은 아무도 없단 말이야. 하여간 이 얘기엔 가짜들이 무척 많아. 솔직히 머리가 좀 아플 정도야. 너를 포함해서.”
이스핀이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난 너를 속이지 않아.”
“그렇지. 속이진 않고 해줘도 되는 얘기까지만 하지.”
“그건…… 널 위해서야.”
“뭐?”
이스핀도 여기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던 듯 눈썹을 찌푸리고 있다가 이윽고 이마를 짚더니 조용히 말했다.
“내가 널 이용해먹고 속여먹고 그러려고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거야. 내가 처음부터 좀더 거짓말을 잘했어야 했는데. 아니, 아니지. 그래봤자 넌 금방 꿰뚫어봤을 테니까 소용없었겠지. 어쨌든 거기까지만 말하자. 아, 젠장.”
그러는 사이 둘은 어느새 베고니아 카페 앞까지 와 있었다. 카페 안을 슥 들여다보니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막시민이 앞장서서 들어가자 이스핀도 뒤따라 들어가 둘은 안쪽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메뉴판을 보니 이곳은 커피가 주종으로 이스핀은 거품을 많이 낸 커피를, 막시민은 홍차를 고르고 간단한 샌드위치와 양파 수프, 초콜릿 페이스트리를 함께 시켰다. 차가 먼저 나오자 막시민은 설탕을 약간 떠서 넣더니 한 숟갈 더 떠서 이번에는 자기 입에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녹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래? 설탕 맛이 이상해?”
“난 단걸 먹으면 머리가 좀 아파. 원래 좋아하지도 않고.”
“그런데 왜 먹었어?”
“제대로 생각을 하려니 좀 필요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