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108)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109화(109/143)
109화. 차고 달고 쓴 동전 (2)
물요정을 떠올리자 또 다른 꿈의 잔상이 밀려와 샤를로트는 눈을 꾹 감았다. 누군가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뒷모습이어서 얼굴은 못 봤지. 한 걸음 한 걸음 잠기다가 마침내 머리끝까지 물속으로 사라져버렸어.
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고요하기만 했지. 하지만 소리가 들려왔어. 부름이. 음이 맞지 않는 기묘한 노랫가락이. 나를 찾아내다오. 나를 건져다오. 위대하고 처참한 힘을 계승한 소녀여…….
샤를로트는 창가에서 물러섰다. 얼굴을 가린 채 침대로 물러나 앉았다. 심장이 빠르게 고동쳤다.
사 년 동안 차곡차곡 쌓인 뜻 모를 조각들을 언젠가는 맞출 수가 있으리라. 어딘지 모를 세계에서 오래전에 벌어져버린 그 일들을 꼭 알아야 하는 거겠지. 모르지만, 몰랐으면 좋겠지만, 알아야만 이 임무를 해낼 수가 있는 거겠지.
오빠는 왜 그자의 심장을 빼앗아 숨겼으며 왜 사라졌는가. 그자는 심장을 되찾아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가로막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누구의 심장이 꿰뚫리게 될까?
그 순간을 투지를 품고 상상하지만 한 가지 생각만은 견딜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 곁에 쓰러져 있을지도 모른다. 샤를로트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중 누군가가.
그런 일은 없어야 해.
서서히 날이 밝아왔다. 아침볕이 멍자국을 지우듯 샤를로트의 마음 속 안개도 조금은 말랐다. 이미 저질러버린 일이다. 후회스럽지만 뒤집을 순 없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이 늪을 말려버리고 걸어나가는 순간까지 그 애의 손을 붙들고, 무사하도록 지키는 수밖에.
같은 시각 막시민은 자고 있지 않았다. 의자에 누워 눈을 감고 있긴 했지만 직전에 꾼 꿈이 망막에 맺혀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평소 꿈을 많이 꾸는 편이 아니었다. 별 중요성을 두지 않는다는 쪽이 맞을지도 모른다.
꿈이란 게 다 그렇고 그렇지. 쓸데없는 것들을 잔뜩 부풀려서 보여줄 뿐이지. 낮에는 의식 밑바닥에 파묻혀 느껴지지도 않던 불안감 한 티스푼이 꿈속에서는 비구름처럼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다.
깨어난 뒤에 그게 뭘까 자꾸 되씹어봤자 촛불을 등진 어린애가 제 그림자에 겁먹은 꼴이 될 뿐이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 꿈은 그렇지 않았다.
꿈속의 막시민은 높다란 성벽을 따라 걷고 있었다. 오래되어 갈색을 띤 벽에는 이름 모를 덩굴이 무성하게 늘어져 있었다. 풀벌레 소리가 공기 속에 뿌린 모래처럼 바삭바삭하고 이마에서는 약간 땀이 났다.
갑자기 구름이 몰려든다. 늦여름. 오후 4시 반. 빛은 아직 눈부시지만 잎새의 초록이 갑작스레 짙어진다. 모든 잎이 날카로운 그림자를 한 조각씩 품는다. 밤을 깨달아서. 그림자 속에 밤이 보낸 예고가 들어 있다.
백 년에도 일 년에도 끝이 있듯 하루에게도 있지. 다가올 끝을 깨달아 현명해진 잎사귀들처럼 막시민은 별안간 무언가를 깨닫고 멈추어 섰다.
여기다. 여기서 기다리면 올 거야.
잠시 후 저만치에서 희끄무레한 것이 나타났다. 걸어오고 있었다. 제법 가까워졌지만 아직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밤이었다. 잎들은 이미 고요했다.
흰 드레스를 입은 여자였다. 치맛자락과 긴 머리가 함께 너울거리고 있었다.
바람이 강했던가? 모르겠다. 홀로 바람을 몰고 오듯 만곡한 성벽을 따라 걸어 막시민 앞까지 왔다. 막시민은 우뚝 서서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막시민의 존재도 깨닫지 못한 듯했다. 그저 한 그루 나무처럼 지나쳤다. 막시민은 여자를 부르거나 붙드는 대신 시선을 내리깔며 여자가 신은 신발을 보았다. 수수한 드레스와 달리 영롱하게 반짝이는 녹색 비단신이었다.
잡풀 우거진 흙길을 걷기에는 너무나 연약하고 아름다웠다. 초록색 보석들이 이슬처럼 매달려 있었다.
막시민은 고개를 돌리며 여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이 모르는 여자가 집을 떠나, 가족을 떠나, 태어나서 가져온 모든 것을 떠나 어디론가 가고 있다.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그냥 알았다. 말려야 하나? 한마디라도 해봐야 하나?
현실의 막시민이라면 낯선 사람을 보며 이런 심각한 생각을 했을 리 없지만 이건 꿈이었다. 꿈속의 막시민은 진심으로 여자가 한 선택이 가혹하고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꼭 모두 내버려야 하나? 타협할 방법은 없었나? 둘 다 가질 방법은 없었어?
그런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말했다.
‘부탁할게.’
돌아선 여자는 두 발짝 만에 어둠에 녹아버렸다. 뚫어져라 봐도 아무도 없었다. 현실이라면 귀신을 봤나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막시민은 계속해서 그쪽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손을 내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한참이나 그러고 있었다.
마침내 뭔가 하얀 것이 불쑥 내밀어지고, 막시민은 흠칫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 꿈은 뭘까? 깨고 나서도 이렇게 모든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꿈은 처음인 듯했다.
휘어진 성벽, 빛을 움켜쥐는 구름, 한 순간 먹으로 덧그린 듯 짙어지던 잎들, 흰 드레스, 녹색 영롱한 비단 신발, 낯선 여자, 그 여자가 한 말. 어둠속을 뚫어져라 보며 기다린 것.
꿈의 모든 부분이 인상적이었지만 평소의 막시민이라면 신기하다고 생각하다가 곧 도로 잠들어버렸을 것이다. 눈을 뜨고서야 깨달은 사실 하나 때문에 지금껏 뜬눈이었다.
여자의 얼굴이 이스핀을 닮았다. 아니, 머리가 길 뿐이지 이스핀이 맞았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눈 빛깔이 달랐던가? 모르겠다. 그것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왜 이런 꿈을 꾼 거지?
그렇게 자문하고 있자니 어제 카페에서 나눈 대화가 떠올라왔다. 식은 커피와 홍차의 향이 풍기던 테이블 너머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가 흘러나왔을 때 막시민은 내심 당황하면서 생각했다.
이런 얘길 하라고 등 떠민 사람이 나였단 말이지? 어이쿠, 이 겁도 없이 무모한 놈아.
그러면서도 멈추게 하지 않고 계속 듣고 있었다. 기가 막혀 입을 못 다물겠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크고 무거운 비밀을 혼자 간직하려 들다니 대체 무슨 짓이야? 짓눌려 죽을 참이야?
사람은 혼자 아는 작은 비밀 하나로도 서서히 목이 졸려 죽을 수도 있는데, 이건 그런 수준을 까마득히 넘었잖아.
이스핀에게는 베르나르라는 이름의 오빠가 있었다고 했다. 베르나르는 이스핀이 열다섯 살 때 실종되었다. 그리고 이스핀은 오빠를 섬겼다던 사람을 만나 갑작스럽게 거대한 비밀을 듣게 되었다.
오빠는 십이 년 전 비밀을 수호하는 자들을 만나 숨겨진 장소로 인도되었고, 그곳에서 자라는 사과를 따서 모았다. 그 사과에는 어떤 끔찍한 자의 기억이 들어 있었다. 그것도 수백 년에 걸친 기억이.
사과를 머리맡에 두고 자면 기억은 꿈의 형태로 잠자는 자에게 조금씩 스며들었다.
수년에 걸쳐 사과의 기억을 흡수한 베르나르는 그 기억의 주인인 자가 적어도 사백 년 이상 살아왔으며, 뭔가를 찾고 있고, 그걸 찾게 되면 이 세상에 큰 위험이 닥친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는 그밖에도 뭔가를 알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베르나르는 그자를 찾아내어 접근한 끝에 ‘심장’이라고 불리는 것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그 심장이 정말로 인간의 심장과 같은 기능을 가졌는지, 그런 것은 모른다. 문제는 그자가 심장을 빼앗기고도 죽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다만 그자는 약해졌다. 수백 년을 살아오며 점점 강력해지던 그자의 권능은 마비되었고 쉽사리 밖에 나오지도 못하게 되었다.
베르나르는 그자가 심장을 되찾기 위해 돌아올 것을 알았다. 그자는 제 심장이 어디에 있는지도 느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심장은 그만한 크기의 물질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강한 에너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심장 속에 이리저리 퍼져 있던 빨갛고 가느다란 실오라기, 그래서 ‘혈관’이라고 부르게 된 물질은 만약 폭발시킨다면 성 한 채쯤은 간단히 날려버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뿜어냈다.
그런 위험한 힘을 차단하기란 쉽지 않았다. 간신히 찾아낸 물질이 ‘왕국의 쇠’라고 불리는 특별한 쇠였다.
왕국의 쇠는 기본적으로 일반 쇠와 비슷하지만 마력을 약간만 불어넣어도 놀랄 만큼 가공이 쉬워져서 정교한 물건을 만들기에 편리하다고 알려졌다.
세공력이 부족한 옛 시절에 세공사들은 쇠치고는 상당히 비싼 이것을 그에 걸맞은 값비싼 물건, 그러니까 소형 오토마톤 같은 것에만 소량 사용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이젠 세공력이 향상되어서 굳이 왕국의 쇠를 쓸 필요가 없어졌으므로.
오래된 오토마톤 중에서 왕국의 쇠가 가장 많이 함유된 종류는 권총이었다고 했다. 크기가 작다 보니 당대의 기술로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로 까다로운 세공이 필요했기에 구동부 전체를 왕국의 쇠로 만들곤 했기 때문이다.
특히 혈관을 넣기 위해서는 왕국의 쇠를 많이 포함한, 당대 최고의 오토마톤 권총이 필요했다. 베르나르는 구왕정 시절 최고의 장인 중 하나였던 누오보의 작품들을 택했다.
“그런데 말이다. 너희 오빠도 그런 값비싼 골동품들을 사들여서 힘들게 심장 조각을 집어넣느니 그럴 돈으로 그 왕국의 쇠라는 것만 사서 요만한 상자 같은 걸 만든 다음에 어디 우물 밑에라도 집어던지면 간단히 해결될 일 아니었을까?”
“네 말도 일리는 있는데 문제는 이제 왕국의 쇠를 구할 수가 없어. 그건 평범한 광산에서 캐내는 것이 아니야. 필멸의 땅에서만 나오지.”
정확히는 필멸의 땅에서 나온 유물에서 추출한 쇠였다.
유물들의 가치가 널리 알려지기 전, 보물 사냥꾼들이 필멸의 땅에서 갖고 나온 유물들 중 값나가는 귀금속이 아닌 것들은 종종 헐값에 팔려나가곤 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그걸 녹여볼 생각을 해냈다. 그 결과 평범한 쇠처럼 보였던 것들이 실은 상당히 특별한 쇠였음이 밝혀졌다.
마력이 부여된 쇠일까? 또는 가나폴리에서만 채굴되던 특별한 쇠였을까? 알 수는 없지만 어차피 오늘날에는 그런 광산을 찾아낼 방법도 없었다.
“요즘에는 필멸의 땅의 위험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보물 사냥꾼들은 줄어들었고 남은 유물은 마법사들이 차지해버렸거든. 마법사들이 귀중한 유물을 녹여서 쇠를 추출할 리가 있겠어? 그래서 이 쇠는 사실상 수급 방법이 사라진 물질이라고 할 수 있어.”
그리하여 구동부에 소량의 혈관을 봉인한 오토마톤은 대륙 곳곳으로 보내졌다. 그자가 무엇을 찾아야 할지 알아차리더라도 단번에 되찾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일을 마치고 얼마 후, 베르나르는 실종되었다.
베르나르가 돌아오지 않자 가족들은 장례를 치렀다. 그들은 베르나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도 알지 못했다.
오직 이스핀만이 은밀한 부름을 받아 프시키들에게 휘말려 죽을 뻔한 끝에 비밀을 수호하는 자들이 ‘블러디드’라고 부르는 힘을 얻게 되었다. 거대한 비밀과 한 상자의 사과를 물려받았다.
오빠가 마무리하지 못한 임무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