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109)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110화(110/143)
110화. 차고 달고 쓴 동전 (3)
사과를 침대 머리맡에 두자 꿈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남의 조각나고 뒤죽박죽된 과거가, 생생하다 못해 자아를 뒤흔들 정도로 밀려든다. 많은 기억들이 피범벅이고 또 다른 것들은 피 없이도 잔혹하다.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하루치의 기력이 다해 평범한 대화도, 웃음도, 음식의 맛도 잊어버렸다.
딴 사람으로 변한 것 같다는 말을 수없이 들으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포기할 순 없다. 이건 오빠가 목숨을 걸어가며 만든 기회니까.
수백 년 동안 그자가 가장 약해진 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베르나르가 심장을 빼앗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죽여야만 한다.
심장을 잃어 약해진 뒤로 어딘가에 숨어 지내고 있는 그자를 끌어내기 위해 그자가 노리기 시작한 오토마톤을 먼저 가로챈다. 그자가 참지 못하고 은신처를 나와 덤벼들기를 기다리면서…….
“그런데 사백 년이나 살았다면 그자는 정체가 뭔데? 인간이기는 한 거냐?”
“인간이냐고? 글쎄. 모르겠어. 내 꿈속에서는 인간처럼 보이긴 했지만.”
뛰어난 마법사들이 가끔 인간의 수명을 초월하기도 한다는 건 알지만 제 뜻으로 사백 년이나 살아온 인간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누가 증명해주겠는가?
그자의 부모도, 가문도, 심지어 이름조차 모른다. 그자가 쓰는 여러 이름은 모두 진짜가 아니었다. 이스핀의 꿈속에서 그자는 한때 기억을 잃은 철광 노동자였다.
같이 일하게 된 노동자들은 그자의 기괴한 낯빛과 어눌한 표정, 어색한 말씨를 보고 비웃음을 섞어 별명을 붙여주었다. 아이언페이스라고. 그자는 아무 불만 없이 그걸 제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그자에게는 인간이 갖는 대부분의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쇠의 왕도, 스테어 아이언스도, 살아오며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을 뿐 진짜가 아니야. 어쩌면 그자조차 제 이름을 모를지도 몰라. 그렇게 진짜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기록에서 찾아낼 수도 없고 마법으로 지칭할 수도 없었어. 예전에 다른 마법 학교에 잠깐 들어가 그자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려 했지만 검색조차 되지 않아서 사흘 만에 포기했지.”
“사흘이라니, 그걸 갖고 어떻게 자료를 다 뒤지냐? 거긴 책이 몇 권 없냐?”
“아니. 찾는 법이 좀 달라. 마법 학교에서만 가능하다는 신비로운 방법이 있는데 설명하기가 좀 어렵지만…… 아니 잠깐, 네냐플에도 있지 않을까? 이공간에 있는 자료 보관소 말이야. 동그란 돌처럼 생긴 것에 손을 대고 열쇠 주문을 사용하면 그 안에 있는 기록을…….”
막시민은 그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네냐플에서는 포도원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마법사들은 실제 세계 위에 덧씌워진 ‘이공간’이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공간에 자료며 유물을 보관하곤 하는데 그곳에 접속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 장소가 포도원이었다.
동그란 돌은 아니고 마법이 걸린 서안을 사용한다는 정도가 다를 뿐이었다. 직접 써보진 못했어도 예전에 구경만은 실컷 했다.
“어, 있다. 그거 다른 학교에도 있는 거였냐. 몰랐네. 근데 그거, 아무한테나 사용 허락을 내려주지는 않던데.”
“응, 그것 때문에 나도 입학이란 걸 해야 했지.”
어딘가의 다른 잘난 놈도 이것과 똑같은 소리를 했던 느낌이라 그때와 똑같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어쨌든 네냐플의 포도원은 입학만 한다고 자유롭게 사용할 수는 없는 장소였다. 다른 학교는 좀 다른가?
“거기서 그자의 행적과 관련 있는 키워드를 여럿 넣어 보았지만 일관된 정보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어. 그래서 이 세상은 그자를 모르는구나, 조각난 괴담으로 남아 있을지 몰라도 하나의 괴물인 그자를 추적한 사람은 없었구나, 그자가 살아온 수백 년을 목격하고 역겨움과 분노와 두려움을 느끼는 건 나뿐이구나, 나만이, 몇백 년에 걸친 이 미해결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구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화가 나면서 동시에 소름이 끼쳤어. 이 무거운 짐을 내가 져야 할 이유는 없지만 나까지 외면한다면 그자는 온전히 자유로운 거야. 무혐의인 거야. 그리고 어쩌면…… 책임을 넘겨받은 누군가가 겁이 나서 외면했기 때문에 그자가 여전히 이 세상을 활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내 조상 중 누군가가…….”
비밀스러운 곳에서 자란다는 사과들은 왜 그자의 과거사를 품고 있을까? 이스핀도 같은 의문을 품었다고 했다.
그런데 사과 속에는 그것만 든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이스핀 남매의 과거사도 부분적으로 들어 있었다. 대체 왜? 무슨 상관이 있기에?
“마치 한 상자에 나란히 든 사과들 같지. 내게 이 힘이 온 이유인 것처럼. 가문의 적을 죽이기 위해 대대로 보관되는 칼처럼. 즉, 그자가…… 나와 피가 닿는 존재라는 뜻이 아닐까.”
“한 핏줄이라고?”
상대를 괴물이라 칭하면서 동시에 한 핏줄이라고 말하는 이스핀의 얼굴은 핏기가 사라져 하얗게 들뜬 가면처럼 보였다. 창백하다는 말만으로는 표현되지가 않았다. 그걸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이맛살이 찌푸려진다.
그래, 가문의 피투성이 비밀이든 임무든, 그런 게 있다 치자. 그런 게 왜 가장 어린 사람 몫으로 떨어져야 하는데?
“그자의 특징 중 단 하나 확실한 건 프시키들이 그자를 두려워한다는 거야. 내가 이 힘을 얻게 되었던 북쪽 섬, 그곳 사람들은 옛날부터 프시키를 섬겼다고 해. 그들의 말로는 프시키들이 저들을 죽여줄 힘을 가진 나를 찾아 각성시키고자 했다는 거야.
그리고 그 이유는 저 심장의 주인을 내가 없애주길 바라서라고, 그러니까 그자는 어쩌면 일종의 프시키인지도 모른다고…… 그런 믿기 힘든 얘기를 해줬지.”
막시민이 아는 프시키는 별다른 해가 없는 작은 에너지 생물일 뿐이었지만 이스핀은 프시키가 위험을 미리 알아차리는 힘이 있다고 했다. 마치 자연재해를 감지하고 달아나는 야생동물처럼, 심지어 문제가 생기기 몇 년 전부터 소란을 피운다는 것이다.
그리고 프시키들이 두려워하는 자가 바로 그자라면, 프시키가 인간의 모습을 취할 수도 있는 거라면…….
머리가 복잡해진 막시민이 고개를 내저으며 물었다.
“프시키가 어떻게 너와 한 핏줄일 수가 있는데?”
“그것까지는 추측이니까 유보해둘게. 하지만 아무 상관이 없다면 왜 내게 이 기억과 힘이 왔는지 알 수가 없어. 단지 우연일 수도 있는 걸까? 그게 더 납득하기 힘들어. 왜냐하면 평범한 프시키는 찾아내어 없앨 필요가 전혀 없어. 그저 겁 많고 소란스러운 작은 새들 같은 존재일 뿐이야. 그런 존재를 찾아내어 죽여버리는 능력이 왜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걸까? 프시키들은 나를 찾아내어 각성시키려 애썼는데 그게 자기들을 모조리 죽여달라는 뜻이었을까?
그럴 리 없잖아. 이유가 있어야 하잖아. 그것도 중대한 이유가. 이 힘을 가진 내가 상대해야만 하는 자가. 기억이 든 사과들도 프시키를 섬기는 그 섬에서 나왔어. 그들은 내게 힘을 주고, 기억을 주었어. 이만하면 해야 할 일은 명확한 거잖아?”
듣자니 점점 참을 수가 없어진 막시민의 목소리가 커졌다.
“다 그렇다 쳐도 왜 하필 너냐고! 네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냐? 누가 네 의견을 물어보긴 했냐? 너희 조상들은 이런 상황을 정말로 납득한 거냐? 왜 너한테는 선택권이 없는 거냐고!”
“몰라. 왜 하필 내 오빠였는지 모르는 것처럼. 나도 오빠가 곁에 있다면 물어보고 싶네. 오빠도 나 같은 생각을 했는지. 왜 이 비밀이 우리에게 온 거냐고.”
“대답을 못 할 사람에게 왜 물어보냐? 너희 부모님한테 물어봐! 나한테 왜 이러냐고 따져봐라. 어차피 대답은 정해져 있으니 물어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그건 아니지만…… 어머니는 날 낳고 곧 돌아가셨어. 아버지는 내가 프시키와 관련된 힘을 얻게 된 건 알지만 그냥 작고 신기한 마법인 줄로만 아시지. 아이언페이스에 대해서는 모르고, 내가 복수심 때문에 오빠를 죽인 범인을 찾고 있는 줄로만 아셔. 그나마도 내가 스무 살이 되면 포기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기다려주고 계실 뿐이야.
무엇보다 아버지는 이런 증명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믿어주실 분이 아니야. 아버지한테는 사과가 주는 꿈을 보는 힘이 없었어.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그 꿈만 아니었더라면 이런 이야기를 진짜로 믿지는 못했을 거야.”
“그래서 부모는 아무것도 몰라서 평화롭도록 놔두고, 너희 오누이만 비밀을 감내해야 마땅하다고? 보호자는 대체 어느 쪽인데? 그게 정말로 네 판단이야? 네 오빠가 감내했으면 너도 감내해야 되는 거냐? 너도 이 이야기가 엄청나기도 하지만 믿기 힘들다는 생각을 안 하진 않는 거겠지? 증명되지 않은 추측도 상당히 섞여 있고…….”
“날 못 믿겠다고? 너도?”
그렇게 묻는 이스핀의 눈 속에서 기묘한 불꽃이 일었다. 그러나 곧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니, 당연한 거지. 그래. 믿기 힘든 얘기야. 내가 가진 힘, 아이언페이스의 존재, 이런 건 겪었으니 믿는다 쳐도 그자가 수백 년 동안 온갖 악행을 저지른 괴물이고, 프시키인지 인간인지 모를 존재고, 수많은 프시키들의 그자를 두려워하며 날 각성시켜 뭔가를 막으려 한다든가, 그런 얘긴 증거가 없으니 망상일지도 모른다……. 맞아. 합리적인 태도지.”
막시민은 물러서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어, 맞다. 난 증명된 것까지만 믿는다. 그래서 나머지는 이제부터 증명해볼 생각이야. 그런데 내가 널 별로 오래 보진 않았지만 얼굴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을 위해 죽음을 무릅쓴다든가, 그런 과대망상적 성격 같진 않거든? 너, 정말로 그런 이유냐?”
“난 거절할 수가 없었어. 내가 모르는 체하면…… 그 결과 엄청난 재앙이 벌어지거나 한다면…… 난 어떡해? 그냥 몰랐던 체하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되는 걸까?”
“야, 너 정말, 기막힌 소리 한다. 이 세상이 얼마나 크고 복잡한지 모르냐? 네가 뭔데 재앙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을 혼자 책임져? 너라는 한 명이 포기한다고 바로 끝장나는 세계라면 애초부터 잘못 만들어진 거 아니냐? 넌 위대한 마법사도 아니고 그런 책임을 질 만한 행동도 안 했고, 나이는 고작 열아홉 살밖에 안 됐거든?”
“멋진 얘기네. 하지만 애초부터 세상이 잘못 만들어진 거라면 어떻게 하는데? 나한텐 스승도 동료도 없었어. 사과는 기억을 줄 뿐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아. 하느냐 마느냐, 선택은 내가 할 뿐이야. 난 이게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어.”
한때 이스핀은 가까운 사람 누구도 믿지 않는다고 했다. 그건 그들이 믿을 만하지 못해서였을까, 아니면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막시민은 이스핀의 반응이 점점 격해지는 것을 보며 좀더 밀어붙이기로 작정했다. 지금껏 막시민에게 진실을 알려주지 않고 적당히 얼버무리려 들었던 것도 같은 이유였겠지.
그런 짓은 이제 그만해. 남의 도움 없이 혼자 짐을 짊어져야만 하는 불쌍하고 위대한 사람 같은 건 없어. 있더라도 없게 해야 마땅하단 말이다.
“그런 걸 선택이라 부를 수가 있냐? 네 상태가 좀 병적이라는 생각이 안 드냐? 잠깐 생각을 멈추고 이게 남의 일이라고 생각해봐. 혼자 비장하게 굴지 말고. 이런 걸 너 혼자 하라고 남겼다는 너희 오빠라는 사람도 미안하지만 난 잘 이해가 안 간다. 세상은 좀 여럿이서 구하면 안 되는 거냐?”
“오빠는 사고로 갑자기 실종됐기 때문에 내게 자세한 얘기를 해줄 기회가 없었을 뿐이야. 그리고 위험한 일에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면…….”
“왜, 너 혼자 세상을 구해야 빛이 나니까?”
순간, 이스핀의 눈빛에 분노가 어리는 것을 보며 막시민은 대략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이쯤 되면 가식을 벗으려나.
그러나 튀어나온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