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113)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114화(114/143)
114화. 차고 달고 쓴 동전 (7)
잠시 후 바이올린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이스핀은 흐으음, 이라고 말하더니 손끝을 조금 올렸다. 그리고 주머니에 넣은 손을 움직이면서 말했다.
“나한테 인질 있다, 얘들아.”
반응이 있었다.
바이올린이 떨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찻잔처럼 달그락대더니 곧 저러다 부서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덜컥거렸다. 웅웅대는 소리 속에 찌직, 찍, 하며 천을 찢는 듯한 소리가 섞여 울렸다.
걸쇠가 풀려 있던 덧창이 덜컥 열리면서 커튼 자락이 바깥으로 날려가 맹렬히 펄럭였다. 막시민은 이러다가 바이올린도 박살나서 창밖으로 날려갈까 불안해져 창밖을 흘끔댔지만 이스핀은 단지 이렇게 말했다.
“버티네.”
주머니에 넣었던 왼손을 빼내자 손 안에 든 작고 투명한 덩어리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잠시 후, 거기에서 붉은 잉크로 그은 듯한 선이 뻗어 나왔다.
선은 막시민이 들고 있는 활을 한 바퀴 감고 바이올린으로 이어져 울림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바이올린 안쪽에서도 붉은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야…….”
“걱정 마. 안 태워.”
저렇게 당당하게 말하니 믿어야 하겠지만 막시민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렌지나무 술집에서 불타는 원숭이 놈은 막시민의 코트에 시커멓게 탄 구멍을 남겼기 때문이다.
작은 불꽃처럼 혀를 날름대던 빛은 이윽고 안으로 쑥 들어가버렸다. 하나, 둘, 셋을 셀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비명 같은 소리가 터졌다. 키아아악!
막시민이 활을 꽉 움켜쥐면서 이스핀을 봤다. 이스핀은 바이올린을 뚫어져라 보느라 막시민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다시 바이올린을 돌아본 막시민은 이스핀이 준 주의를 잊고 달려가 바이올린을 낚아챌 뻔했다.
바이올린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이스핀의 눈에서도 같은 불꽃이 반들거렸다. 이쯤 되자 불길이 창밖에서도 보일 성싶었다.
막시민은 천장과 커튼을 힐끔대면서 이 건물에 화재가 나서 창밖으로 기어 내려가는 상상을 해봤다. 벽에는 담쟁이가 있었던 것 같지만 겨울이라 줄기가 말라비틀어져서 두 사람 몸무게를 견딜 것 같진 않았고…….
‘하지 마.’
‘아파.’
‘말라.’
‘말랐다.’
막시민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면서 이스핀을 봤지만 이스핀은 여전히 바이올린에 집중하고 있을 뿐, 자신처럼 놀란 기색은 없었다.
설마 안 들리는 건가? 이렇게 또렷한 목소리가? 혹시 취했나? 하지만 한 잔밖에 안 마셨는데?
‘말라버렸어.’
‘없어.’
‘없으니까.’
‘마셔.’
‘마신다.’
여전히 수수께끼인지 동사 변화 모음인지 싶은 내용이었지만 달라진 것도 있었다. 목소리가 저번에는 서너 살짜리 같았는데 지금은 일곱 살쯤 된 아이 같다. 그리고 약간의 맥락도 생긴 느낌인데.
이쯤 되니 술에 취해서 헛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는 않았으므로 막시민은 이스핀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 그때 뭔가가 눈앞으로 날아들어 흠칫 놀라는 듯한 감각이 일어났다. 그러나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 마.’
‘무서운.’
‘무서워서.’
이건 또 뭐야? 말하지 말라 이거야? 그런데 사람의 감각까지 조종하는 거냐?
“무섭다고? 내가 더 무섭지 늬들이 무섭냐?”
막시민이 한 말에 이스핀이 돌아보는 순간이었다. 불길이 스르륵 줄어들더니 사그라져버렸다. 이스핀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낭패한 표정으로 뇌까렸다.
“젠장. 실패했어.”
“어떻게 된 건데?”
“바위틈에 처박혀서 안 나오려 하는 염소를 끌어내는 거랑 비슷한데 염소가 발길질이 심해가지고…….”
그건 막시민이 관찰하며 느낀 감상과 완전히 일치했지만 이스핀은 곧 고개를 내저어버리고는 물었다.
“근데 넌 무슨 소릴 한 거야? 뭐가 무서워?”
“그게 말이다. 그때처럼…… 저놈들이 나한테 무슨 소릴 하더라고. 넌 안 들렸냐?”
“난 안 들렸어. 뭐랬는데?”
“뭐라냐……. 목이 말라서 무섭다나.”
“목이 말라?”
“아 뭐 말라서 없어지고, 마시고, 무섭고, 이런 소리들이었어. 근데 언제 무섭다고 했느냐면 내가 너한테 이걸 설명하려고 했을 때야.”
막시민이 자기가 들은 말들과 함께 수상한 감각까지 설명하자 이스핀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프시키들이 원래 사람을 놀라게 하는 걸 좋아하긴 하는데…… 그러니까 쟤들은 내가 무섭다면서 너한테는 뭘 호소하려고 드네. 진짜로 너하고만 친하고 싶나 보네. 너한테 무슨 매력이 있어서 이러지?
음, 아프다는 건 내가 괴롭혀서? 아, 불이 싫다는 건가? 그래서 목 마르니까 물이라도 줘라 이거야? 기가 막히네. 왜 얘들이 응석을 부리지?”
이스핀이 바이올린을 노려보며 이번엔 물속에 처박아볼까 궁리하는 듯했으므로 막시민은 얼른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피는 체했다. 태워먹진 않았다만 물까진 좀.
“그리고 저 속에 든 놈이 하나가 아니야. 다섯쯤 되려나? 숫자야 몇이든 당연히 내 상대가 아니지만 하나하나가 평범한 프시키하고 달라. 이상할 정도로 잘 버티거든. 내가 처음에 끌어냈던 놈까지 도로 데리고 들어가버렸잖아.”
막시민이 바이올린을 손끝으로 툭툭 쳤다.
“다섯이라. 현이 넷이고, 브릿지까지 하면 다섯이네.”
“아, 그렇게 되나? 그럼 요것 하나하나가 시치미떼고 있는 프시키란 말이야?”
이스핀이 다가와 현을 하나씩 건드렸다. 딩, 댕. 동. 댕. 사라졌던 현도 어느새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말끄러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바이올린 말인데, 네가 저번에 마법이 깃든 거랬지? 대체 어떤 거야?”
“그게 뭐, 지나간 상황이다만.”
“지나갔다고?”
“마법인지 뭔지가 깃들긴 했던 모양인데 이젠 없다고. 이 년 전에 좀 바짝 써먹었더니 우물이 말랐나 봐. 그 바람에 꼬락서니도 저렇게 변해버렸고.”
“뭘 했는데?”
막시민은 지난 일을 떠올리며 입속으로 말을 굴려봤지만 말이 되게 설명하자니 너무 복잡한 사연이었다.
어느 위대한 마법사께서 수백 명의 유령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나오셔야 했는데 그러려면 그곳의 시간을 멈춰야 했고……. 결국 대충 타협해서 간단히 말했다.
“찬트를 연주했거든. 신성 찬트.”
“신성 찬트?”
이스핀이 의아한 듯한 기색으로 되묻더니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건 또 뭔데?”
“너 모르냐?”
“몰라. 알았어야 되는 거야? 나 마법 배운 적 없는데?”
“그야 뭐 그런 건 아니지만…….”
막시민은 당혹감을 누르며 생각했다. 아, 그렇구나. 이거 만인의 상식 아니었구나. 내 주변은 평범하게 네냐플 다니는 인간들뿐이었던 거구나.
이스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찬트인가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일로 이 바이올린은 고갈된 우물이 돼버렸는데 누가 마중물을 넣은 셈이 되어서 다시 마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거네.”
“다시 마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그렇잖아. 아니라면 내가 왜 저 프시키들을 못 끌어내겠어. 바이올린이 프시키에게 힘을 줬는지, 프시키가 바이올린에서 금광을 찾았는지 그건 모르겠다만. 하지만 참 이상하네. 알다시피 프시키는 마법으로 못 없애. 프시키를 다루는 나도 마법은 전혀 모르고. 그러니까 프시키와 마법은 제법 거리가 먼 존재인데 이 바이올린 안에서 융합돼버렸단 말이야. 대체 어쩌다가?”
“난들 알겠냐.”
“이 바이올린, 네 것 아니야?”
“내 건 맞는데 내가 뭐 전설의 마법 천재라서 갖게 된 건 아니다. 그냥 우연히…….”
막시민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바꿨다.
“우연은 아니고 호의였지. 이제 와서 생각하면 왜 나한테 줬는지 잘 모르겠다 싶기도 해. 받을 때는 명백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네. 주는 쪽은 이게 고물 바이올린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난 몰랐어. 아주 오랫동안 몰랐지.”
이스핀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법 물건이면 보물이잖아? 엄청나게 비쌀 거고. 그런 물건을 주면서 어떻게 아무 설명도 안 해줄 수가 있어?”
막시민은 바이올린을 흘끔 내려다봤다. 검은 호두나무 상자에서 예상치도 못하게 튀어나왔던, 난생 처음 보는 악기의 근사한 곡선에 놀라 눈을 반짝였던 날이 언뜻 눈가를 스쳤다.
“너무 어려서 그랬나. 아홉 살인가 그랬으니.”
“아홉 살짜리한테 마법이 깃든 유물을 설명도 없이 줬단 말이야? 누가? 부모님은…….”
막시민의 개인사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플레상스 경의 비밀 장소에서 나온 편지와 책 덕분에 부모 밑에서 자라지 않았다는 것까지는 알게 됐다. 막시민이 고개를 흔들었다.
“부모 아니고 그냥 동네 이웃이었다. 알고 보니까 평범한 이웃은 아니었다만.”
막시민에게 바이올린을 줬던 이웃 목장의 노인은 친구 조슈아의 작은할아버지였다. 조슈아는 당시 사연이 있어 집을 떠나 할아버지 댁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하필 그 마을에 막시민이 동생들과 함께 살고 있었던 인연으로 둘은 친구가 되었다. 공화국이 황혼기에 접어들던 시절의 일이다.
둘은 이 년 동안 둘도 없는 사이가 되었지만 공화국의 숨통이 끊기고 신왕정이 들어서자 조슈아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수도 켈티카로, 유서 깊고 거대한 비취반지 성으로, 소공작 조슈아 폰 아르님이 되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공작 가문의 하나뿐인 후계자가 시골 목장에서 계속 뒹굴 수는 없는 거니까. 그렇게 조슈아가 떠난 뒤에도 막시민은 이웃 목장의 노인과 제법 잘 지냈다. 친구로서. 친구 하나 잘 건졌으니 핑계 삼아 돈 많은 노인한테 빌붙어 팔자 고쳐보겠다고 알랑거리는 어린 녀석이 아니라.
후회한 적이 있던가? 아주 가끔은. 이를테면 막내 녀석이 열병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는데 주머니에 동전만 달랑달랑해서 의사에게 달려가봤자 와주지 않을 것 같은 때라든가.
이게 무슨 꼴이람. 왜 두둑한 돈주머니 같은 걸 거절했던 걸까. 이 세상에는 가난한 친구의 등골을 빼먹는 놈도 많은데, 상대는 부자라고. 그것도 이만저만한 부자가 아니야.
하지만 위기는 매번 어떻게인가 지나갔고 다음번에 노인을 만나면 막시민은 뻔뻔스럽게 말했다.
“영감, 오랜만이네? 모처럼인데 비실비실 죽어가는 애들한테 영양가 있는 고기나 좀 사주시지?”
마을 사람들은 노인이 저 집 애들을 다 먹여 살리지는 않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각별하게 여기는 막시민한테 학교든 일자리든 뭐 하나 마련해주지 않겠느냐고들 했다. 그러던 중 막시민이 네냐플에 입학하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입이 떡 벌어져서는 저마다 자기들의 추측이 들어맞았다고 떠들었다고 한다.
어디 괜찮은 가문의 하인 자리나 소개해주려나 했는데 세상에나 맙소사 네냐플이라니. 물론 막시민을 입학시켜준 사람은 그 노인, 히스파니에 폰 아르님이 아니라 대마법사 쥬스피앙이었지만 사람들이 그런 사정까지 알 순 없는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