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114)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115화(115/143)
115화. 차고 달고 쓴 동전 (8)
“거봐, 그럴 줄 알았지. 그 어르신이 재롱 본 값으로 뭐 하나 해줄 줄 알았다니까. 거렁뱅이 고아 녀석 주제에 운도 좋지.”
“야, 출세했다. 출세했어! 리프크네 장남이 네냐플이라니. 코츠볼트에 학교 문턱 넘어본 애가 몇 명이나 된다고, 그런데 들판에 쇠똥처럼 굴러다니던 녀석이 그중에서 1등이야! 게다가 거기 수업료가 영주님쯤 돼도 제법 신경이 쓰일 정도라던데 그걸 다 대줬다는 거 아니야!”
“심심하고 외로운 늙은이 말 상대 해주는 거, 그거 할 만하네. 어디 또 그런 눈 먼 노인네 없나? 우리집 아들놈도 좀 보내보자.”
“이 정도면 학교로 안 끝나지. 졸업하고 나면 뭘 시킬지도 다 계획이 있을걸?”
무슨 말이 오가고 있을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동생들이 보내는 편지만 읽어도 환히 그려지는 풍경이다. 쓸데없는 상상이란 걸 알지만 가끔 맥락도 없이 떠올라 막시민의 미간을 구겨놓는다.
공작의 숙부쯤 되는 사람이 시골에서 만난 꼬마 녀석을 귀여워해서 뭐 좀 해줬기로서니 어떻다고. 그저 부럽고 질투가 나서 하는 소리잖아. 조슈아 때문에 고향을 떠났으니 뒷일을 봐준 거지, 다른 게 뭐 있어? 예순 줄의 귀족과 맹랑한 시골 꼬맹이가 대등한 친구가 될 순 없는 건데. 그런 일은 애초에 불가능했는데.
오직 막시민만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말을 입 밖에 내기도, 남들이 들여다보는 것도 싫었다. 이 년 동안 학교에서 버티며 고향에 돌아가지 않은 이유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쥬스피앙이 왜 비용과 수고를 무릅쓰고 막시민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입학시험까지 면제시켜서 네냐플로 보냈겠는가. 히스파니에가 줬던 이 바이올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실을 따져보자면 결국 히스파니에가 막시민을 네냐플에 보내준 셈이 맞았다. 그 노인네는 이런 것까지 미리 생각했던 것일까.
막시민은 머리가 비상했으므로 이미 이 시점에서 온갖 가능성이 머릿속을 오갔지만 그냥 뒤꿈치로 대충 짓눌렀다. 그런 걸 알고 싶어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그 학교를 오래 다닐 것도 아니다. 거기 머물러야 할 이유는 일찌감치 끝났다.
“이런 게 나한테 얻어걸린 사연은 됐고, 결론은 프시키란 놈들이 여기서 나오기 싫어서 버티고 있다 그거잖아. 왜일까? 다른 놈들은 순순히 네 말을 듣는데 왜 이놈들만 죽을 똥을 싸며 못 나오겠다는 걸까? 심지어 네 말대로 나한테 도와달라고 하는 거라면 완전 번지수 잘못 찾은 거고. 혹시 어디서 중범죄를 저지르고 도주중인 것 아니야?”
이스핀은 무슨 헛소린가 하는 눈빛을 했다.
“프시키가 무슨 범죄를 저질러. 난동이라면 모를까. 더구나 내가 프시키 세상의 이폴레트도 아니고, 죄를 지은들 날 피할 필요가…….”
거기까지 말하던 이스핀의 표정이 변했다.
“아니네. 그 권총, 네 권총, 아니 네가 찾았던 내 권총 말인데.”
둘의 만남의 원인이 되었던 그 물건이다. 이스핀의 오빠가 누군가에게 보내버렸지만 복잡한 과정을 통해 막시민의 손에 들어갈 뻔했다가 네냐플 교수의 수중으로 들어가버린 권총.
“그게 왜?”
“넌 그거 봤잖아. 상태가 어땠는지 말해봐.”
“대충 10엘소짜리 고물이었지 뭐”
10엘소라는 말에 놀란 이스핀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내저으며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10엘소? 에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뭘 기대하는지 모르겠다만 그때 내가 그거 박살났다고 말하지 않았냐? 그래서 넌 화가 나서 날 박살내려고 했고…… 뭐 하여간에 어느 쪽이든 실제로 박살은 안 났다만 내가 괜히 그런 소릴 했던 건 아니라고. 그건 존재 가치를 예전에 다한 사실상…… 초콜릿 포장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초콜릿은 폭발했고…….”
“초콜릿이 폭발해?”
의아한 기색만은 아니었다. 막시민은 아랫마을의 선량한 주민들이 학교 앞까지 쫓아왔을 때 네냐플 출신들이 흔히 하듯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네냐플 놈들은 별별 걸 다 폭발시키곤 하는데 초콜릿인들 못 하겠냐고요.’
“그건 그러니까 뭐냐, 뭔가가 물건 내부에서 녹아버려서 분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섞여버린 상태를 네냐플식으로 부르는 전문 용어랄까. 그런데 엄청난 에너지를 내뿜고 있어가지고 교수도 분해를 유보하고 일단 마력 차폐 상자에 넣어뒀고…….”
이스핀이 뒷말을 이었다.
“물론 그랬겠지. 그 권총 속에 혈관을 넣었으니까. 네가 찾았던 권총은 베니토 누오보의 딸 로잘린다의 다섯 개짜리 오토마톤 권총 세트 중 하나야. 금이고 보석이고 아낌없이 사용한 화려한 세공으로 이름났던.”
누오보는 뛰어난 장인이었지만 예술가보다 경영자의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 제 작품에는 의뢰인이 건넨 금화가 몇 개인지 철저히 따져가며 재료를 썼지만 딸에게는 온갖 값진 재료를 원하는 대로 대주었다고 했다.
훗날 수집가들에게 로잘린다의 작품이 더 사랑받게 된 건 희소가치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렇듯 귀엽고 섬세한데다 미친듯이 비싼 골동품을 파손하고 싶을 사람은 설마 없을 것 같았지만…….
“뭐, 화려한 세공? 금? 그 고물에 그런 게 어딨어. 완전 헐벗은 몰골에 구동부인지 뭔지도 반쯤 날아가고…….”
거기까지 말하던 막시민이 불쑥 미간을 찡그렸다. 왕국의 쇠로 만든 구동부가 파손되면 프시키를 차단하던 힘도 사라진다. 그런 비싼 걸 사서 분해해보고 싶어 하는 인간도 있다니 미쳤나 싶지만 하여튼 그 결과 권총에 빈틈이 생겨서…….
이스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꼴이 된 다음 근처의 프시키들이 먼저 발견했겠지. 아이언페이스가 제 심장이 뿜는 에너지를 감지하듯 프시키들도 같은 에너지에 끌리거든. 마치 꿀 한 방울에 벌떼가 달라붙듯이. 그 결과 검고 끈적거리는 물질, 즉 심장이 생겨나는 거야. 넌 그걸 초콜릿이라고 부른 거고.”
“혹시 아이언페이스의 부하나 그런 자가 거기 든 걸 꺼내려고 시도했던 흔적은 아니고?”
이스핀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이언페이스라면 그까짓 걸 공구 들고 분해하고 있을 필요는 없기 때문에 그보다는 실용적인 이유가 아니었나 싶네. 골동품 오토마톤의 구동 원리를 알아내고 싶었던 장인이라거나, 아니면 단순히 겉에 세공된 금과 보석을 긁어내다가 안에도 그럴듯한 게 들어 있는지 궁금했다거나.”
그걸 신나게 긁어간 누군가를 떠올리자 불쾌해진 막시민이 뇌까렸다.
“쳇, 보석인지 금인지는 다 어느 놈 손으로 사라지고 내 손에는 쓰레기만 떨어지는 규칙이라도 있는 거냐고.”
“다른 멀쩡한 걸 찾아내면 그때 구경해봐. 꽤나 예쁜가봐.”
“그런데 말이다.”
막시민이 다시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걸 처음에 분해한 미친놈은 아이언페이스가 아니었다 쳐도 어쨌든 권총이 그 꼴이 된 지 반년 가까이 됐는데 말이다. 게다가 꿀통처럼 달콤한 냄새를 계속 풍기고 있다며. 프시키도 프시키지만 아이언페이스도 지금쯤은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싶은데.”
“그럴지도 모르지만 네냐플에 있으니까…….”
“네냐플에 뒀다고 안전한 거 맞냐?”
이스핀은 무슨 소리냐는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거긴 안전하다며. 네냐플에는 안고니나의 커튼인가 하는 마법이 있어서 외부의 침입을 완벽히 차단하는 것 아니었어?”
마주보는 막시민의 표정이 기묘했다.
“네냐플 문 닫았잖아.”
“어, 으응. 그랬지.”
“너랑 나랑 합작으로.”
“그렇지.”
“그럼 그 안에 있던 것들은?”
“밖으로…… 뺐으려나?”
둘은 서로를 빤히 보며 표정 변화를 멈췄다. 눈빛에서 같은 뜻이 전해져왔다. 그거, 아직도 안전한 거 맞을까?
이스핀이 눈을 꾹 감았다가 뜨더니 말했다.
“당장 네냐플로 쫓아가고 싶어지지만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잖아. 하여튼 내가 하려는 말은 저기 바이올린에 들어 있는 저놈들, 쟤들도 그 권총 속에 들어갔던 프시키가 아닐까 싶다고.”
“어느 미친놈이 권총을 뜯는 바람에 잘 숨겨져 있던 혈관이 프시키에게 노출됐고, 꿀 냄새를 맡은 벌떼처럼 달라붙었던 놈들은 그게 네냐플 교수의 손에 들어가 마력 차단 상자에 넣어지는 순간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는데…….”
“그때 마침 눈에 띈 네 바이올린에 숨어버린 거 아니냐는 거야. 은신처가 돼줄 만한 마법 물건이니까. 내가 못 끌어낼 정도로.”
막시민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바이올린 현 하나를 튕겼다. 퉁…….
“그 말대로라면 무단 점거네. 남의 소중한 물건을 방값도 안 내고 다람쥐 통으로 쓰겠다 이거냐. 나 같은, 아니 나보다 더한 놈들이. 내가 현을 분리해버리는 수가 있다.”
“아, 그러네? 이거 어떻게 풀어?”
이스핀이 손을 내밀자 막시민은 재빨리 바이올린을 낚아채고는 한 손을 내뻗으며 기다리라는 표시를 했다.
“야, 풀어도 내가 푼다. 너한테 줬다가 검으로 끊을라.”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다만.”
“이건 섬세한 악기거든요?”
막시민은 바이올린을 껴안다시피 한 채로 줄감개를 돌렸다. 지금껏 딱히 애지중지한 적은 없었다만 바이올린을 태울 뻔했다가, 물에 처넣을 듯하다가, 마침내 검으로 현을 끊겠다고 나서는 인간이 등장하자 어지간한 막시민도 바이올리니스트의 심정이 되고 말았달까.
하지만 줄감개는 조금 돌아가는 듯하다가 멈춰버렸다. 평범한 현처럼 풀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지만.
“이거, 안 되네.”
“역시 그냥 끊는 편이…….”
“프시키는 손발이나 꼬리 끝이 잘려도 괜찮냐?”
“글쎄? 근데 걔들한테 꼬리도 있나?”
그렇게 말하며 슬그머니 손을 내밀어 만져본다 싶더니 어느새 툭, 끊겨 있었다. 막시민이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뜨고 쳐다보자 이스핀은 킥킥 웃으며 손바닥에 넣은 주머니칼을 감췄다.
“진작 이렇게 할걸.”
아까 안 나오려 버텼던 것이 무색하게도 눈 깜짝할 사이에 잘려버린 E현에서는 아무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얘도 혼이 나갔나? 이스핀은 현을 아래쪽까지 풀어내어 동그랗게 감아 묶더니 막시민의 겉옷 주머니에 쏙 집어넣고는 만족한 듯 싱긋 웃었다.
“자, 호신용이니까 꼭 갖고 다녀. 알았지?”
“이걸로 뭘 어쩌라고?”
“아, 쓰는 법을 몰라? 금속 현이란 사람 목을 조를 때도 쓸모가 있고, 또…….”
“너 지금 나한테 뭘 기대하는…….”
그때 문고리가 덜컥대더니 노크 소리가 났다. 세 번, 두 번, 세 번. 청어절임이나 데보라, 둘 중 하나가 돌아온 모양이다.
이스핀은 얼른 바이올린을 낚아채어 가방 속에 집어넣은 뒤 있던 자리에 놓았고, 막시민은 창가를 흘끔대며 느릿느릿 걸어가 문을 열어주었다. 데보라가 뛰어들어와 난로 속에 처박힐 기세로 달라붙더니 부르르 떨었다.
“어휴, 날씨가 갑자기 왜 이러지. 산책인지 사색인지 하다가 얼어죽겠네.”
겨울치고 한동안 따뜻하던 켈티카 날씨도 새해가 되자 성질을 부릴 때가 됐다고 판단했는지 오후부터 부쩍 찬바람이 거세졌다.
이어 데보라는 두 사람을 바라봤는데 둘 다 뭔가를 감추는 듯한 표정임을 알아차리고 눈썹을 조금 올렸다. 기색을 눈치챈 막시민이 먼저 물었다.
“청어절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