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116)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118화(118/143)
118화. 차고 달고 쓴 동전 (11)
“카스티유 경이 저하고 의견이 좀 다르네. 제가 조심해서 다루라고 말씀드린 건 얼굴 반반한 빈털터리거든요? 멍청이는 별로 상관없어요. 그런 놈들을 차버리는 건 쉬워요. 말했다시피 멍청하니까요.
하지만 사탕발림 빈털터리가 얼마나 끈질긴지 모르시죠? 그놈들한테는 이게 죽고 사는 문제라고요. 하긴 카스티유 경이야 이런 걸 알 기회는 없었겠죠. 하지만 저는 살아오며 몇 무더기나 만나보아서 잘 알아요. 돈 좀 우려낼 수 있겠구나, 싶으면 그놈들은 희대의 연기파가 되어서 지긋지긋할 정도로 질척댄다니까요?”
“콜레트, 걔는 그런 애가 아니라니까?”
“아아, 진짜로 큰일이네. ‘걔는 그런 애가 아니야’야말로 사탕발림 빈털터리한테 걸린 아가씨들의 고전적인 멘트란 거 아시나요?”
“아니, 그게 참…….”
답답해진 샤를로트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파이 한 조각을 먹었고 콜레트는 분주하게 눈을 굴리며 공녀님을 빤히 봤다. 당장 필요한 인력이니 그만 만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안이하게 미적대다가 진짜로 큰 사달이 나는 건 아닐까? 어느 쪽이 더 중요한 문제지?
귀부인다운 연애의 규범을 전수하되 고리타분한 대고모님 같은 소리를 늘어놓아 공녀님의 친구 역할을 잃어버리면 곤란하다.
콜레트가 할 말을 주의깊게 고르느라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데 샤를로트가 불쑥 말했다.
“그 얘긴 그만하면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그건 그렇고 며칠 전에 내가 물어본 거, 좀 알아봤어?”
“네?”
콜레트는 흠칫 긴장했다. 샤를로트가 이런 식으로 갑자기 말을 돌리려 들 땐 난감한 요구가 튀어나오기 쉽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었다.
“브라운센 말이야. 초대받을 수 있겠어?”
“아아, 네. 그게 좀, 알아보긴 했는데 말이죠…….”
하필 속시원한 대답을 드릴 수 없는 주제라 더욱 난감해졌다. 죽은 펠그레이브 남작의 저택을 사들인 브라운센에 대해 나름 정보력을 다해 알아봤지만 이렇다 할 만한 이력도, 저택을 사들이게 된 동기도, 하다못해 연결된 끈도 전혀 찾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나름대로 켈티카 사교계에서 빠지지 않는 인맥을 자랑하는 자신인데 대체 어찌된 셈인지 모르겠고, 브라운센은 정말로 근본 없는 날벼락부자인 모양이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다짜고짜 만나고 싶다고 하면 의심을 살 것 같아 안면만 겨우 있는 사람들까지 총동원해서 걸칠 만한 인연이 있나 알아보는 중인데 쉽지가 않아서요.
브라운센이라는 사람, 그 저택을 사기 전에는 빵집을 운영했다는 것이 알려진 이력의 전부더라고요. 빵집이라니, 그런 사람을 누가 알겠느냐고요.”
“정말이야? 빵이 맛있을 느낌의 이름이긴 하네. 그 빵집은 어디에 있었는데?”
“북부의 발렌이라던가? 발렌 사람들은 빵을 얼마에 사먹기에 빵집 주인이 남작의 저택을 다 사들이고 그러는 거죠?”
샤를로트가 킥킥 웃더니 말했다.
“그러네. 밀가루에 이상한 걸 넣지 않았나 조사해야 될 것 같은데. 내가 할 일은 아니겠지만. 하여튼 초대받을 가망이 없다면 다른 길을 뚫는 수밖에 없겠네.”
“다른 길이라고요? 어떻게요? 직접 가보시겠다는 건 아니죠?”
“맞는데?”
“어, 언제요?”
“내일.”
공녀님을 섬기다 보면 예지력만 늘어나는 모양이었다. 콜레트는 미간을 찡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콜레트의 표정을 살핀 샤를로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담 넘어 들어가겠다는 거 아니야. 우아하게 손님으로 초대받으면 제일 좋았겠지만 그럴 만한 핑계를 못 찾았으면 낮은 길을 택해볼 수도 있는 거지. 알아보니까 브라운센이 아이의 가정교사를 두 명째 내쳤다더라고. 새 가정교사가 필요하지 않을까?”
“가정교사요?”
거의 울상이 된 콜레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대공국 공녀님의 체통으로 가정교사라니. 전 지금껏 공녀님께 뭘 가르쳐드린 걸까요.”
“가정교사가 뭐 어때서. 내가 어려서 본 가정교사들은 다들 괜찮은 사람들이었는데.”
“그야 그랬겠죠. 하지만 문제는 가정교사 본인이 어떤 사람인가가 아니랍니다. 고용주가 어떤 사람인가가 중요하죠. 세상에는 말이죠, 상종 못할 고용주가 아주 많거든요!”
“그런 인간이라면 적당히 무릎이라도 걷어차 주면 되지 않을까?”
“공녀 연하, 대저 인간의 무릎이라는 연약한 관절은 연하의 발에 걷어차이고도 온전할 수가 없는데다가…… 그런 소란을 일으켰다가 나중 일은 어쩌시려고요.
제 입장도, 아니 대공국의 입장도 조금만 생각해주세요. 켈티카 사교계에 드나드는 누군가가 목격자가 될지도 모르고, 그런 사람과 다른 데서 마주칠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아도 대공 전하께는 공녀님께서 켈티카에 잠시 머무르며 사교계 인맥을 쌓으실 거라고 말씀을 올렸는데 그게 사실이 되자면 적어도 한두 번쯤은…….”
샤를로트가 견디지 못하고 관자놀이를 짚으며 대꾸했다.
“아, 아, 그래. 알았어. 그 계획에는 아주 문제가 많군.”
“제가 다른 방법을 반드시 찾아낼게요. 그러니까 가정교사 행세 같은 말씀은 부디 거두어주세요.”
콜레트의 얼굴에 굳은 의지가 서리는 것을 보니 정말로 무슨 수든 만들어낼 느낌이 왔으므로 이쯤에서 손을 드는 편이 좋을 듯했다.
“알았어. 참, 앞으로 며칠은 좀 늦게 들어오게 될 것 같아.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제가 공녀님이 들어오시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잠을 잘 수가 있겠어요? 빨리 에투알이 와야 제가 마음을 좀 놓을 텐데…….”
샤를로트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곧 오겠지. 그럼 이만 좀 쉴게.”
“그전에 잠깐만요, 공녀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또 있어? 피곤하니까 빨리 해줘.”
샤를로트가 의식적으로 하품을 하는 걸 눈치챘지만 콜레트의 표정도 이번에는 결연했다.
샤를로트는 그날 호프의 저택 앞에서 추위에 떨며 두 시간을 보낸 막시민이 포도주나 한 병 마시고 자면 굳어진 몸도 풀리고 좋겠다고 판단했을 뿐이었지만, 콜레트가 보기에는 적당히 보아 넘길 수 없는 중대한 조짐이었고, 지금 시각은 새벽 1시였고, 고리타분한 대고모님께서 방탕한 연애의 대가를 이길 조건이 다 갖추어진 참이었다.
“이런 건 적당한 나이에 이르렀을 때 모후께서 알려주시는 것이 제일이지만 지금은 공녀님 곁에 저밖에 없으니 저라도 최선을 다해볼게요.
공녀님, 세상에서 가장 정직하고 성실한 사내일지라도 여자 문제가 얽히면 진실 하나에 거짓을 셋씩 말하게 된답니다. 그걸 꿰뚫어볼 줄 알아야 후회할 일이 생기지 않는 거예요.”
“아까 하던 얘기라면 충분히 들은 것 같은데.”
“아니에요. 충분하지 않았어요. 자, 기억하세요. 넷 중 셋은 거짓이라고요. 반드시 악의를 갖고 속인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냥 그렇게 돼요. 남자란 일단 그런 생각을 하고 나면…… 휴, 어렵네. 하여튼 젊은 아가씨라면 남자의 모든 말을 걸러 듣는 편이 안전해요.”
“지금 누구 얘길 하는 건데?”
“누구라도 마찬가지예요. 예외는 없어요. 남자들을 함부로 믿으셔서는 안 돼요.”
“왜 불신을 조장하는 거야? 내 주변에 여자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에투알에도 남자가 더 많았고, 그래도 지금껏 멀쩡히 잘 지내왔는데 갑자기 뭐가 달라진 건데?”
“공녀님께서 성장하셨죠. 아주 큰 변화죠. 이젠 전에 알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그간 아무리 친하게 지내고 든든하게 여겼더라도 말이죠.”
샤를로트는 평소와 조금 다른 사람이 된 듯한 가신을 미심쩍게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연애 상대가 될 위험을 피하기 위해 모든 남자를 불신하라고?”
“음, 그건 조금 다르네요. 연애는 연애고, 연애를 하든 안 하든 젊은 남자가 하는 달콤한 말에 혹할 바에는 차라리 이쪽에서 그런 말을 해주는 편이 낫다는 거예요. 내가 한 말은 내가 조절할 수가 있지만 들을 땐 다르거든요.
남자들은 젊은 아가씨 앞에만 서면 못된 의도가 없더라도 저도 모르게 뒷일을 계산하지 않고 사탕발림이며 약속의 말 따위가 막 튀어나온답니다. 아니지, 나이는 문제가 아니네요. 늙은이일지라도 마찬가지거든요.
앞으로 수년간은 남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어디까지 진실일까 추리하는 게임이 시작됐다고 생각하셔도 좋아요. 하지만 그리 어려운 건 아니에요. 공녀님은 영리하시니까 좀 하다 보면 저절로 착착 분류가 될 거예요.”
“그래? 난 잘 모르겠는데. 웬만해선 다들 솔직한 것 같던데.”
그 뒤에는 칼끝을 들이대면, 이라는 말이 생략되었지만 콜레트는 펄쩍 뛰었다.
“다들이라뇨! 이거 큰일이네. 벌써부터 나한테는 늘 솔직하다, 이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믿을 수 있다, 이렇게 여기는 남자가 있으신 건 아니겠죠?”
콜레트의 머릿속에는 미덥지 않은 탐정 녀석밖에 없었지만 샤를로트의 입에서는 엉뚱한 답이 튀어나왔다.
“음…… 로랑?”
“로랑도…… 그러니까 카스티유 경은 약혼녀가…… 아니, 하여간 다 마찬가지라고요! 예외는 없다고 했잖아요! 유부남일지라도 똑같아요!”
샤를로트가 킥킥 웃기 시작했다.
“이 얘기 다음에 로랑 오면 해줘야지.”
콜레트는 답답해죽겠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이렇게 될 바에는 연애는 상상도 하지 말고 모든 남자들에게 철벽을 치라고 할걸. 논리 전개하기에는 그쪽이 훨씬 편하지. 물론 안전하기도 하고.
콜레트 자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공녀의 나이 또래에 귀족들에, 근위병에, 음악가에, 배우에 이르기까지 온갖 남자들과 연애를 즐겼지만 이런 상황에 처하면 그런 기억은 신기할 정도로 흐릿해지는 법이었다.
“공녀님, 이런 얘기는 남자들한테 해줄 만한 것이 아니고, 지금 중요한 부분도 아니고…… 그,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 탐정 녀석이 공녀님한테 포도주를 갖다달라고 한 게 맞아요, 아니에요?”
“아니야.”
아니라면, 하고 조금 마음을 놓으려던 콜레트의 귀에 더 심각한 말이 들려왔다.
“내가 주고 싶어서 문 앞에서 기다리라고 했어.”
“…….”
입을 딱 벌리고 있자니 어디선가 ‘몰랐습니다, 모르셨네요’라는 우스꽝스러운 노래가 들려오는 듯했다.
이 노래로 말할 것 같으면 전설 시대의 어느 왕이 공주를 탑에 가뒀지만 공주는 테라스로 나가 달빛을 받는 것만으로 요정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민담의 후렴구로 아이들이 누군가를 놀릴 때 곧잘 써먹곤 하는…….
샤를로트는 콜레트가 멍해진 사이 재빠르게 일어나 목욕물을 준비해둔 욕실로 사라졌다.
남겨진 콜레트는 고민에 빠졌다. 대공국의 하나뿐인 후계이신 공녀 연하가 옆 나라 술꾼 놈팡이의 농간에 넘어가고 있는 문제와, 돌아가신 지 사 년째인 공자님의 원수를 갚으려는 연하의 뜻을 받드는 일 중 어느 쪽이 우선이란 말인가.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공녀는 침실로 들어갔고 램프도 꺼져 있었다. 콜레트는 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 난롯불에 장작을 더 넣고 침대 머리맡으로 갔다.
긴장이 풀려서일까, 열두 살 때처럼 앳되어 보이는 샤를로트의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있던 콜레트가 나직이 속삭였다.
“저한테는 제 눈앞에 살아 계신 공녀님이 최우선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