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117)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119화(119/143)
119화. 차고 달고 쓴 동전 (12)
5. 한겨울밤의 잠복 수사
첫날과 둘째 날을 성과 없이 보내고 세 번째 날, 여느 때처럼 10시가 되기 조금 전에 클레망틴 거리에 도착한 막시민과 이스핀은 거리를 따라 올라갈수록 어리둥절해졌다.
이날 클레망틴 거리는 밀회나 추적이 어울리는 어둑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야외 무도회장이랄까.
“야, 이게 웬일이냐. 오늘 무슨 날이야?”
거리 좌우로 늘어선 저택들은 창마다 불이 환했고 거리에는 사람이 넘쳤다. 근처의 한 저택에서 일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걸음을 멈춘 막시민이 혀를 찼다.
“우리 옷을 잘못 골라 입은 거 같지 않냐.”
막시민과 이스핀은 깔끔하고 단순한, 켈티카의 중류 시민다운 검정 외투 차림이었다. 화려함과 초라함 어느 쪽이로든 딱히 눈에 띄지 않는 모습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면 지금 클레망틴 거리에서 제일 흔해빠진 복장은 색색가지 화려한 드레스에 모피, 실크 연회복 따위였으므로 그들 틈새를 비집고 걷고 있는 둘의 정상적인 복장은 사방의 귀족들이 ‘혹시 내 비서 왔나?’ 하고 흘끔거리게 만드는 역효과를 발휘했다.
이스핀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저 사람들이 우리 손에 샴페인 쟁반이 왜 없는지 궁금해하고 있는데.”
“그만큼 처먹었으면 집에 가서 잠이나 자지 샴페인은 왜 또 찾냐. 양탄자에 밤참이나 차리려고.”
“밤참이라니?”
이스핀은 이게 무슨 소린가 생각하다가 깨닫자마자 푸흐흡, 하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반면 막시민은 사실을 말한 것뿐 딱히 농담이 아니었으므로 왜 웃는지 몰라 미간만 찌푸렸다.
취기가 올라 평소보다 과장스러운 몸짓을 하는 사람들이 흔했으므로 자연스럽게 네냐플에서 보낸 마지막 밤이 떠올랐고, 그날 밤의 멍청이들이 계단참이나 정원 구석에 반납해놓은 저녁 메뉴가 떠오른 것도 추억담이라고…… 해야 하나?
막시민은 술에 익숙했고 여건만 허락한다면 거의 무한히 마셔댔지만 그런 짓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므로 제 주량을 모르고 과음하는 놈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왜 아까운 술을 도로 뱉고 난리야?
“인기 폭발의 비서가 된 기분은?”
“거지같네. 저놈들한테서 좀 떨어지자.”
그들은 곧 25번지 근처에 이르렀다. 큰길 건너편 모퉁이에 일찌감치 문을 닫은 카페는 그간 두 사람의 단골 대기 장소였다. 그날도 익숙하게 야트막한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 야외 테이블 하나를 차지했다.
그런데 오늘은 날씨가 제법 추워질 조짐을 보였다. 잔눈발 섞인 찬바람의 기세가 만만치 않아 둘 다 깃을 세우고 모자를 눌러써야 했다.
그런 채로 하나는 팔짱을 끼고, 다른 하나는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친 자세로 거리를 쏘아보고 있자니 마치 카페 주인한테 빚 대신 카페를 접수하겠다고 통보하러 온 어둠의 조직원들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막시민이 음침하게 투덜댔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야.”
“여기도 인기 있는 살롱이 많겠지. 하필이면 여러 군데가 열리는 날이라든가.”
“이렇게 추운 날 집에서 털 담요 덮어쓰고 브랜디나 홀짝대면 될 걸 여기까지 기어나와 술을 처마셔야겠냐고.”
“왜. 난 저 사람들 재밌어 보이는데. 야아, 비싼 술 먹고 거리를 헤집고 다니니까 아주 기분 죽이겠다!”
이스핀은 술도 한 잔 안 한 주제에 잘도 흰소리를 내지르며 킥킥 웃었고 사람들은 슬금슬금 카페 앞을 피해 갔다.
막시민은 얘가 뭘 의도하는가 싶어 몇 번 힐끔대다가 물었다.
“깡패 노릇은 또 어디 가서 해봤냐?”
“응? 이게 깡패 노릇인가? 종일 고생고생하다가 하하호호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외롭고 슬퍼서라도 말을 걸고 싶어지는 거 아니야?”
에투알 수련병 시절, 종일 고된 훈련으로 녹초가 된 채 잠시 대기하고 있는데 놀러가는 사람들이 킥킥대며 쳐다보거나 하면 꼭 누군가가 이런 말을 외치곤 했다. 동기였던 목청 좋은 클로드가 시작할 때가 많았고 상대방이 깜짝 놀란다 싶으면 여럿이 가세하곤 하던 장난이었다.
그때 이스핀은 그저 구경하며 웃기만 했는데 아마도 공녀라는 신분이 신경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는 오를란느도 아니고, 누가 보든 말든 알 게 뭐람?
하지만 막시민은 그런 사정을 알 리 없었으므로 얘가 추위를 이기려고 브랜디를 반 병쯤 목구멍에 퍼붓고 왔나 생각하다가 물었다.
“너 지금 외롭고 슬프냐?”
“어, 그럼. 나도 살롱 가서 잘 놀 수 있거든. 엄청 잘 놀아.”
막시민은 살롱이라는 곳에서 뭘 하며 노는지도 몰랐으므로 ‘아 그러세요’ 하는 표정으로 어깨만 으쓱하고는 다시 앞을 봤다.
잠시 후, 맞은편 25번지 저택의 문이 열렸다. 하지만 거기에서는 살짝 취한 멋쟁이들 대신 빨간 모자를 쓴 소년 하인 한 명이 나왔다. 소년은 주위를 신경쓰지 않고 곧장 거리를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둘은 얼굴을 마주봤다.
“따라갈까?”
“아니, 잠깐 기다려.”
막시민은 소년을 뒤따라가는 대신 카페 뒤쪽을 한 바퀴 돌고 돌아왔다. 그런 뒤 고개를 빼고 보니 소년은 눈길 탓인지 여전히 멀리 가지 못한 채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막시민은 울타리에 기대어 서며 말했다.
“이런 늦은 밤에 심부름이라도 보낸 거라면 뛰어갔어야 될 텐데 지나치게 한가하군. 하지만 손님을 데리러 간 거라면 너무 멀리 갔어. 누오보의 기술자라면 사람 눈을 피하려 할 텐데 거리 끄트머리까지 에스코트하러 나와달라고 했을 리 없지. 미심쩍긴 한데 일단 좀더 기다려보자. 10시 넘었지?”
“응. 뒷문 쪽으로 가볼까?”
뒷문 쪽에는 청어절임과 데보라를 보내두었다. 하지만 하인들이나 드나드는 작은 문이라 많은 기대는 하지 않았다.
막시민은 10시 반까지는 이곳에 있어보자고 했다. 이스핀이 거리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내 생각인데, 오늘 이 거리가 특별히 붐비는 거라면 어쩌면 그자도 오늘을 택했을 가능성이 크지 않나 싶어. 눈을 피하기에 제격이잖아.”
흥청대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졌다. 막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문제의 기술자는, 우리의 상상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것 같군.”
막시민은 다시 주위를 세심하게 살펴봤다. 이스핀의 시선도 거리를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웃으며 잡담을 나누는 살롱의 손님들로 부산스럽던 거리는 그들을 태울 마차들이 나타나면서 한층 복잡해졌다. 사두마차들이 대여섯 대나 줄지어 몰려오자 맞은편 집들의 입구는 마차 지붕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평소 같으면 마차가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을 테지만 오늘처럼 여러 곳에서 살롱이 열리는 날, 고작 마차 두 대가 지나갈 너비밖에 되지 않지만 저택만은 즐비한 클레망틴 거리에는 그 많은 마차들을 수용할 공간이 태부족했다. 따라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대 놓은 마차가 줄을 지어 차례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마차 준비가 다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오면 될 텐데 왜 미리 나와서 떨고 있을까? 친목이 극대화되는 살롱의 특성상 인기 있는 사람의 마차가 도착하면 배웅 겸 모두 밖으로 나오게 되었기 때문이겠지.
이스핀은 그런 상황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오를리의 보르 거리 같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하던 이스핀은 벌떡 일어나 카페 테이블 위에 올라섰다. 하지만 그 정도 높이로는 마차 너머를 잘 보기 어려웠다.
막시민은 대로를 건너가려 했지만 무질서하게 세운 마차들이 이리저리 얽혀 있어서 쉽지 않았다. 겨우 빠져나가는가 했을 때 갑자기 옆집에서 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거창한 드레스 덕택에 막시민은 향수와 부채 틈에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다.
그때였다.
“마님! 어디 계십니까?”
어디선가 들려온 외침에 사람들이 한꺼번에 고개를 뺐다. 그곳의 상당수가 ‘마님’이었으며, 추운 길에 오래 서 있는 것이 달가운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 마차가 왔나?
“마차가 준비됐습니다!”
이번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마차 틈바구니를 두리번댔다. 그때 마침 길을 막고 있던 마차 한 대가 빠져나가고 새로운 마차 두 대가 거리로 접어들었다. 외관을 보고 제 마차가 아니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금세 흥미를 잃고 하던 대화로 돌아갔다.
마차들이 반쯤 빠져나갔을 무렵, 거리를 건너온 이스핀은 25번지 앞에 서 있는 막시민에게 다가가 물었다.
“봤어?”
막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스핀의 외침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거리 건너편을 바라봤을 때, 한 사람만은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계속 걷고 있었다. 그러더니 마치 제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25번지의 문을 열고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 사람은 땋아 올린 머리 뒤로 해오라기 깃털을 단, 중년의 귀부인이었다.
눈에 띄는 빨간 모자를 쓴 소년 하인은 신호였다. 아마 문을 열어놓았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드레스 차림인 사람이 가장 시선을 덜 끄는 클레망틴 거리에서 비슷한 차림새로 인파 틈에 섞여 있던 기술자는 거리가 어수선한 틈을 타서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 슬쩍 안으로 들어갔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둘 다 놓칠 뻔했을 정도로.
“사람 눈을 피하겠거니 생각하긴 했지만 보통 용의주도한 게 아닌데. 딱 살롱이 끝나는 시간대를 택한 것 봐.”
“저 정도면 아마추어 탐정한테 걸릴까 봐는 아닐 거고, 진짜로 사나운 놈한테 쫓기고 있는 모양이지. 아이언페이스도 오토마톤을 어디서 만들었는지 궁금했을 거 아니야.”
“진짜일 가능성이 커진단 얘기지. 베네트가 제대로 된 정보를 줬나 본데.”
“그래. 누오보의 기술자를 뒤쫓아서 공방을 발견하면 할아버지가 맡긴 물건도 물어보고, 너희 오빠 얘기도 물어보고, 베네트는 5000엘소를 쓰게 되고, 그래 좋아. 다 좋다 이거야. 그런데 물건을 건네받았으면 자기 작업대로 가져가든가 할 것이지 왜 여기서 고칠 작정을 한 거냐고.”
하필 1월 한파가 닥치는 바람에 기온은 계속해서 떨어졌고 잔눈발은 본격적인 함박눈으로 변했다. 켈티카에서 춥다고 느껴본 적이 없던 이스핀도 코트 주머니에서 손을 빼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 채로 어느새 밤 11시 반.
문제의 귀부인은 가방 비슷한 것조차 들고 있지 않았으므로 수선용 공구를 갖고 온 것 같지는 않았고, 당연히 오토마톤을 건네받아 제 작업실로 돌아갈 줄 알았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간 귀부인은 나오는 기색이 없었다.
뒷문 역시 마찬가지라는 보고였다. 데보라는 걸친 게 허술해서 동사할 지경이라 일단 돌려보내고 청어절임만 남겼는데 지금쯤 그도 얼린 청어가 되어 가고 있을 터였다.
막시민과 이스핀도 이대로 더 버티다가는 동상이든 폐렴이든 하나쯤 당첨될 예감이었으므로 숨을 곳을 모색했다.
선택지가 많지도 않았다. 이 거리의 집들은 대부분 귀족들의 저택이므로 문지기며 하인들이 있다. 그렇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