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122)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124화(124/143)
124화. 차고 달고 쓴 동전 (17)
“그러니까 공녀님의 목표는 누오보 공방 출신의 기술자였다는 거죠? 그런데 대신 저 여자가 걸려들었고, 그 결과 저는 소름끼치는 감옥을 도로 연 사악한 백작이 되고 말았단 말이죠.
제가 알아보니까 제 전, 전, 전대 슈니발트 백작께서 그곳에 사람 셋을 죽인 살인자를 가뒀던 것이 마지막이더라고요? 그놈은 거기서 팔 년이나 갇혀 있다가 한겨울에 폐렴으로 죽었나 보던데 그런 전통을 이어가게 될까 겁나서 화로 세 개에 이불 다섯 채를 갖다 쌓은 제 기분을 아세요?
수백 년 된 귀신들도 신이 나서 기어나왔는지 어젯밤에는 악몽을 꾸었고……. 하아, 그러니까 전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겠어요.
그 누오보인지 뭔지의 진짜 기술자를 찾아내어서, 저 망한 연애담 부인을 여기서 내보내고 말겠어요. 들어보니까 거기 무슨 공방이 아니라 막장 연애의 산실이던데. 뭐래, 기본이 5각 관계야.”
듣자니 콜레트도 감옥에 내려갔다가 문제의 연애 실패담을 한 시간이나 듣게 된 모양인데 이딴 얘기를 끝까지 듣고 만 자신에게까지 화가 잔뜩 나 있었다. 그 여파로 공녀를 따라다닌다는 탐정 놈팡이도 더더욱 불신의 눈길을 살 전망이었다.
콜레트는 정말로 뭔가를 알아냈다. 살롱이 열린 다음 날, 따뜻한 차를 가지고 방으로 찾아온 콜레트는 살짝 감기 기운이 있어서 집에 머물던 공녀에게 추운 밤에 돌아다니지 말아달라고 잔소리를 늘어놓고는 곧 누오보의 이야기를 꺼냈다.
“미술품과 관련된 모임은 한둘이 아니어서 일단 그쪽의 큰손을 두 분 초청해서 열심히 비위를 맞춰봤죠. 그랬더니 재밌는 얘기들이 많이 나왔네요.
본래 공방이 문을 닫은 건 공방주인 베니토 누오보가 몸이 아파서였다고 해요. 하지만 그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 전성기에는 거느린 도제들만 쉰 명은 됐다고 하거든요? 또 자식들도 있었고 말이죠. 그중 누구라도 공방을 물려받으면 될 텐데 그러지 않고 잘 되던 사업을 접어버렸다니 좀 믿어지지가 않죠.
그 뒤로 켈티카 외곽구에 있었던 공방 건물도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는데 이젠 뭐, 건물도 무슨 방적소인가에 팔렸고 캄프 씨 말마따나 그 많던 기술자와 도제들도 다 사라져서 정식으로 명맥을 이어받은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세상에는 충분히 많은 돈만 있으면 죽은 개도 짖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지 않겠어요?”
콜레트가 눈을 사르르 내려뜨는 것을 보니 제법 자신만만한 건인 듯했다.
“그래서, 돈을 좀 썼더니 뭐가 되살아났어?”
“뭐 그게 제 돈은 아니지만요. 제 살롱에 자주 오는 매들로 자작 댁 아드님이 알고보니 누오보의 오토마톤을 하나 갖고 있었다는데 작년부터 제대로 작동을 안 했대요.
그래서 고쳐줄 사람이 없나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누오보의 것은 워낙 정교하기로 유명하니까 시시한 실력으로 손댔다가 망칠까 무서워서 나서는 사람이 없었나 보더라고요. 그만하면 포기했어야 했는데 자꾸 오토마톤의 인기가 오르니까 미련이 남아서 금화를 한 줌씩 더 꺼내봤던 모양이죠?
그런데 바로 어제, 새로 오신 분들이 우쭐해진 나머지 며칠 뒤에 열린다는 특별한 강연 이야기를 슬쩍 비췄는데, 한마디 끼고 싶어 좀이 쑤시던 소자작이 자기도 거기에 간다고 말해버린 거예요.
그 소릴 들은 귀부인들이 깜짝 놀라지 뭐겠어요? 그게 사실은 아무나 갈 수 있는 행사가 아니었던 거죠. 딱 냄새가 나는데 그걸 그냥 흘려넘기면 공녀님의 콜레트가 아니지 않겠어요?”
어지간한 애호가들이 아니면 초대받지 못한다는 강연에 매들로 소자작이 가게 된 이유가 바로 누오보의 기술자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만나자고 제안해왔다는 것이다. 마치 고객도 이 정도 급은 맞추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처럼.
한 번 속았던 샤를로트는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로 누오보의 기술자래?”
“음, 아직 만나보진 못했다지만 소개해준 쪽에서는 확실하다고 한 모양이에요. 본명은 모르고 ‘톱니’라는 별명만 알려줬다는데, 저한테도 소개시켜달라니까 절대로 안 된다지 뭐예요.
분위기에 휩쓸려 얘기를 꺼낸 거지, 사실은 그쪽에서 반드시 비밀을 지켜달랬다면서 입을 안 열고 버티는데 제가 무려 세 시간에 걸쳐 살살 꼬드겼네요. 저한테도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오토마톤이 있는데 몇 년 전에 멈춰버려서 꼭 수리하고 싶다고 털어놓으면서 말이죠.
아아, 정말이지 피곤해서, 조금만 더 버텼다가는 걔하고 사귀자고 해야 할 지경이었다니까요. 천만다행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어쩌고 하며 눈물을 글썽대니까 넘어가서 입을 열어 주었네요.”
“역시. 이런 건 콜레트만 해낼 수 있다니까.”
공녀와 가신은 검지 끝을 톡톡 맞대며 웃었다. 오래 전 샤를로트가 빨강 드레스의 꼬마 공녀님이었던 시절에 둘만의 비밀이라는 뜻으로 만들었던 동작이 세월이 흘러 끄트머리만 남은 것이다.
콜레트의 어머니는 대공의 모후를 섬겼던 시녀였다. 어머니를 따라 궁에 오곤 하던 콜레트가 할머니를 찾아온 샤를로트를 만났던 것이 샤를로트가 세 살, 콜레트가 열다섯 살이던 무렵이었다. 콜레트는 그때도 재치가 넘치는 소녀여서 어린 공녀와 놀아주려고 재미있는 놀이를 이것저것 고안했었다.
‘톱니’와 매들로 소자작이 만나기로 한 곳은 ‘팬지 파빌리온’이라는 예술품 애호가 모임이 주최하는 강연. 날짜는 엿새 뒤였다.
강연장에서 자신을 주시하다 보면 접근해 오는 ‘톱니’를 발견할 수 있을 테니 거기부터는 알아서 대화를 잘 풀어나가보라고 소자작은 말했다. ‘톱니’가 워낙 신분 공개에 민감하게 굴다 보니 직접 소개하는 것은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강연에 초대받을 수 있어야 하겠지만.
“강연 장소는 어디야?”
“그랑도프 호텔 12층이라고 해요.”
샤를로트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12층이라고? 건물이 몇 층짜린데?”
“12층이 최상층이에요. 놀라셨죠? 저도 그게 지어졌을 때 엄청 놀랐답니다. 높이도 높이지만 그걸 다 짓는 데 글쎄, 오 년밖에 안 걸렸다지 뭐겠어요.
두 달 전쯤에 완공됐는데 한동안은 갑자기 무너질까 봐 사람들이 호텔 앞을 지나다니지 않으려 했다고 해요. 원래 더 높게 지으려다가 왕성의 가장 높은 탑보다 더 높으면 폐하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줄였다고도 하고요.
구경 삼아서라도 한 번쯤 가보실 만한 곳이죠. 외관도 그렇고 실내 꾸밈도 무척 근사하답니다.”
평민들 입에서까지 그랑도프 호텔 이름이 튀어나오던 이유를 그제야 알 법했다. 어떻게 그렇게 높은 건물을 그렇게 빨리 지었담? 오랜만에 오를란느 공녀로 되돌아간 샤를로트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켈티카의 발전상이 눈부시네. 조금 걱정스럽게 말이야.”
“저도 그게 신경쓰여서 살짝 알아봤는데 설계가 비밀이라서 속내를 모르긴 해도 그 건물에는 마법의 힘이 들어간 것 같다고들 하더라고요.
건축 기술을 제법 아는 사람들도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거든요. 기술보다는 돈이라는 측면에서요. 굳이 마법을 동원해서 짓자면 안 될 건 없겠죠. 하지만 마법사들의 몸값이 좀 비싼가요? 그런 돈을 들이고 무너질 위험까지 감수하느니 같은 돈으로 땅을 더 사서 넓게 짓는 편이 낫잖아요?”
“하지만 이렇게 화제가 되고 있잖아. 그걸 원했던 게 아닐까?”
“그랬을까요? 그랬다면 안타깝게도 건물주는 건물을 올리는 도중에 노환으로 저세상 사람이 되어서 영광을 누려보지도 못했네요. 상속인은 너무 어려서 건물주의 재산을 관리하던 어느 단체가 운영을 대신 맡고 있는 실정이에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그런 단체가 호텔 같은 걸 제대로 운영할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식당과 3층까지의 객실 몇 개만 제대로 굴러가고 나머지 공간은 이런저런 행사에 빌려줘서 간신히 채우고 있나 보더라고요.
다시 말해 큰 적자 상태인 건데, 1층의 식당 ‘캐롤린즈’만은 아주 정평이 있다죠. 저도 가봤는데…… 켈티카 식당치고 제법이더라고요.”
오를란느 음식에 자부심이 있는 콜레트가 점잔을 빼며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진짜로 훌륭한 모양이었다.
샤를로트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어둑해져가는 창밖을 보고는 가신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응. 나도 그 평 들어본 것 같네. 수고 많았어. 이제부터 그 강연장에 들어갈 방법을 궁리해보자. 그래서 말인데 나 잠시만 나갔다 올게.”
“아니, 공녀님. 감기 기운도 있는데 어딜 가세요? 그리고 곧 저녁 드실 시간이거든요? 이미 준비가 다 됐을 텐데…….”
“맛있는 거야? 이따 돌아와서 꼭 먹을게. 한 시간 정도면 돌아와.”
어느새 일어나 모자를 집어드는 공녀가 어디로 갈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별수없이 새로 주문한 털 망토를 꺼내 둘러주며 일찍 돌아오시라고 신신당부하고, 나가시는 모습을 창밖으로 지켜보고, 부엌으로 내려가 밤놀이 나간 마르셀리에트 아가씨의 밤참 준비까지 명령한 뒤 콜레트는 제 방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밖은 캄캄해져 있었다. 저녁을 방으로 가져오게 할까, 식당에 이미 불을 피워놓았으니 그냥 내려갈까 궁리하고 있는데 덧창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흠칫 놀라 돌아보니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녀님께선 평안하신가요.”
아노마라드 귀족인 슈니발트 백작을 찾아와 공녀의 안부를 물을 사람은 한 가지 부류뿐이었다. 덧창을 조금 열자 검은 망토 자락이 펄럭이는 너머로 한 뼘짜리 창틀에 요령 좋게 걸터앉은 사람의 옆얼굴이 보였다.
여기는 2층이고 벽은 매끈하며 주위에는 거머잡을 덩굴 같은 것도 없다. 하지만 상대가 고개를 돌리자 콜레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의문을 품지 않았다. 조안느 드 도벨. 그녀는 에투알이다.
조안느가 창 안쪽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콜레트도 고개를 까딱, 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임무중인 에투알에게 그 이상의 예의는 사치스럽다.
“마담 도벨, 오랜만입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켈티카에는 언제 도착하신 건가요?”
“어제요. 백작께도 평안이 있길. 그리고 죄송하지만 초대는 사양할게요. 아직 공녀 연하께 인사 올릴 때가 아니라서.”
“조금 전에 나가셨는데, 보셨나요?”
“저희의 일이죠.”
간단한 대답이었지만 콜레트는 캐묻지 않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결 마음이 놓이네요. 그간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부디 잘 살펴봐주세요. 그나저나 밤이 깊었는데 쉬실 곳은…….”
“걱정 마세요. 저희끼리 알아서 합니다.”
“그렇겠지요. 참, 틸랑드 군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네. 찾아뵙고 인사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만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에투알 3분견대가 일하는 법을 잘 아는 콜레트는 더 권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안느는 귀족 출신인지라 둘 다 적당한 예의를 차린 것뿐이었다.
“실은 여쭤볼 게 있어서 늦은 시각에 실례를 무릅쓰고 올라오게 되었네요. 그 탐정 말씀인데…….”
낮은 속삭임이 오가고, 콜레트도 몇 마디를 했다. 이윽고 조안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하죠.”
조안느는 손을 내밀어 덧창을 직접 닫았다.
딸깍, 하는 소리에 이어 훅, 하는 바람 소리가 나자 콜레트는 괜히 궁금해져서 도로 덧창을 살짝 열어보았다. 이미 그곳에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