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123)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125화(125/143)
125화. 차고 달고 쓴 동전 (18)
8장.
1. 그랑도프
그랑도프 호텔은 최근 떠오르는 번화가인 물굽이 언덕 기슭에 있었다. 켈티카의 전통적 번화가인 참수 광장, 또는 귀족들의 성이 즐비한 동안(東岸)과도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쪽에서 유명한 시설이라고는 기껏해야 마차를 주문 제작하는 카로체리아 정도였다고 했다.
그런 곳에 최근 새롭다 할 만한 것들은 모두 생겨나는 중이었다.
유리로 지은 대형 온실이 생겼고 인공 수로를 갖춘 공원이 만들어졌다. 켈티카 안이라면 사흘 안에 배달해준다는 우편사무소도 생겼다. 기존에 있던 대극장보다 세 배쯤 크다는 극장도 한창 지어지는 중이었다.
이 모두는 갑작스러웠지만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깊이 생각해본 사람은 드물었다. 폐하의 어느 총신이 세금을 넉넉히 빼돌렸나 보지. 어느 높으신 분께서 참수 광장이 꼴 보기 싫어진 모양이지.
이유를 궁리하지 않아도 이야깃거리는 충분했다. 물굽이 언덕에 또 이상한 것이 생겼다더라, 이번에는 12층이나 되는 여관, 아니 호텔이라더라, 호텔이란 여관과 뭐가 다른 거냐, 12층이나 걸어 올라가다가 발목이 부러진 인간은 없다더냐, 따위의 이죽거림을 주고받기에 그쳤다.
12층까지 어떻게 올라가는지 직접 가서 확인해본 사람은 드물었다. 호텔 정문 앞을 지키고 선 문지기가 먼발치에서만 봐도 서슬이 퍼렜기 때문이다.
이스핀은 켈티카에 막 도착했을 때부터 소문의 그랑도프 호텔을 구경해보고 싶었지만 지금까지는 한가롭게 구경 다닐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날이 오늘인가 하면 그 또한 아닐 듯했다.
그랑도프 호텔 맞은편 사거리 모퉁이에 선 이스핀은 호텔을 올려다보다 말고 중얼거렸다.
“저 위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근사하겠다.”
“현기증 날 것 같은데.”
곁에 선 막시민은 아까부터 미간을 찡그린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이스핀보다 반시간 먼저 이곳에 왔다. 온 김에 옷깃을 깔끔하게 털고 모자를 고쳐 쓴 다음 슬쩍 입장을 시도해보았으나 입구에서 바로 밀려나는 좌절을 겪었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손님들이 다가올 때면 새털처럼 부드럽게 비켜서 절을 하던 문지기는 막시민의 앞을 슬쩍 막아서며 ‘숙박을 원하시는지, 또는 숙박객과 약속을 하셨는지’를 물었고, 식당을 이용하려 한다고 하자 ‘예약을 하셔야 한다’며 조금씩 거리로 밀어냈다.
차림새가 깔끔한 정도로는 입장할 수 없단 말이지.
지금의 위치로 건너온 막시민은 호텔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관찰해 보았다. 몇몇은 막시민처럼 문지기의 질문을 받았지만 또 몇몇은 간단한 인사만으로 통과했다. 장기 투숙객이나 식당에 뻔질나게 오는 사람들이겠지.
새로운 얼굴로 승부하려면 비단 드레스에 모피를 걸치고 보석과 금붙이 서너 가지쯤은 휘감아야 자연스러운 미소를 날리며 통과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 같은데.
그러고 있는 동안 이스핀이 왔다. 이날 둘은 ‘팬지 파빌리온’의 강연에 자연스럽게 숨어들 방법이 있을지 조사해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강연이 개최되는 12층은커녕 로비 구경도 못 해보고 돌아가야 할 처지였다.
“저 문지기가 호텔에서 제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래.”
“그래. 그런 것 같더라.”
어차피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 관찰할 수 있는 직원도 문지기뿐이었다. 이어 이스핀은 흐음, 하고 여전히 비서 정도로 보이는 자기 옷차림을 내려다보더니 의외로 소심한 의견을 냈다.
“내부는 어렵더라도 외관이라면 좀 구경해도…… 되지 않겠어?”
그 정도야 못 하게 하겠냐. 둘은 다시 길을 건너가 동쪽 모서리 뒤쪽의 거리에서부터 천천히 산책하듯 걸어갔다. 줄지어 선 마차들을 지나쳐 모퉁이를 돌자 파사드가 나타났다.
연한 하늘빛이 도는 대리석 기둥들이 수직 삼 층 높이로 솟아올랐고, 달걀 껍데기 빛깔의 벽이 부드러운 물결을 그리며 뻗어갔다. 버터크림처럼 굽이치는 회랑 벽을 따라 걷자니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케이크를 둘러싼 장식 인형처럼 느껴졌다.
정문의 웅장함은 그중 절정이었다. 서로의 어깨에 올라선 곡예사 셋도 한꺼번에 통과할 높다란 아치 현관이 세 개의 문으로 나뉘어 있었다. 아치에는 포도 수백 송이와 포도 잎 사이를 날아다니는 작은 천사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둘은 시골뜨기처럼 조금 눈을 크게 뜨고 정문을 바라봤다. 다행히도 그들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커플이 주변에 서넛 있었다.
“저 포도들 때문에 포도송이 호텔이라고도 불린다는군. 안쪽 어딘가에는 포도주 통이 무슨 벽지 발라놓은 것처럼 쌓여 있다던데.”
막시민이 자기 관심사를 말하다 말고 문득 옆을 보니 뺨이 살짝 상기되고 눈이 반짝거리는 이스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진짜로 멋지다, 들어가보고 싶다’라는 감상이 생생하게 드러나서 막시민은 조금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얘가 이렇게 천진한 표정을 짓는 건 또 처음 보네.
그렇다 해도 너무 오래 서 있으면 문지기의 관심을 끌 테고, 이런 식으로 기억되어봤자 좋을 일은 없었다. 둘은 호텔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던 행인들처럼 자연스럽게 파사드 끝까지 걸어간 뒤 지금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강연장을 염탐한다는 계획은 시도도 못 해보고 폐기됐지만 이스핀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막시민이 말했다.
“슬슬 돌아갈까.”
“잠깐만 있어봐. 조금만 더 보고.”
“이렇게 먼 데서 쳐다본다고 무슨 수가 생기냐.”
“그렇진 않지만 멋지고 예쁜 걸 보면 기분이 좋아지잖아.”
막시민의 얼굴에 ‘뭐야, 이 단순한 논리는’이라고 적혀 있었으므로 이스핀은 피식 웃기만 하고 다시 호텔을 쳐다봤다.
막시민도 호텔을 봤지만 물론 기분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에게 저 호텔은 정보를 캐내야 할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 외관은 어떻든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문전박대를 당한 입장이고.
“보기만 해도 된다니 편리하네.”
“응, 심지어 공짜잖아. 너 공짜 좋아한다면서 이런 공짜는 별로야?”
“……알았다. 공짠데 실컷 봐라.”
막시민은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빨리 포기하기로 하고 며칠째 고민중인 문제로 되돌아갔다. 저길 어떻게 들어간담.
단순히 호텔에 들어가기만 하려면 식당을 예약하거나 호텔에 투숙하는 방법이 가능할 것이다. 둘 다 돈을 조금, 아니 많이 쓰면 된다. 돈이 가장 쉬운 방법일 때도 있다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지만 어쨌든 거기까진 그렇다 치고, 강연장에 들어가는 것은 돈으로도 안 된다.
단순히 로비에 입장하는 것조차 까다로운 호텔의 12층까지 올라가야 하며, 또한 팬지 파빌리온과 같은 폐쇄형 모임이 개최하는 행사는 적당히 사칭한 신분으로 숨어들기 어렵다. 꼭 고위 귀족이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서로 웬만큼 안면이 있는 사이들일 테니 가짜는 들통날 위험이 크다. 결국 진짜 신분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단 얘기다.
막시민과 이스핀은 어제부터 이 이야기를 충분히 나눴다. 그러나 대책이 없다는 점에서는 둘 다 똑같았다.
이스핀에게도 나름 사정이 있었다. 이스핀에게 이 정보를 알려준 콜레트는 두세 다리만 건너면 팬지 파빌리온의 초대장을 가진 누군가를 쉽사리 찾아냈을 테고 잘 구슬려 이스핀을 슬쩍 딸려 보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 콜레트가 이스핀이 직접 강연장에 들어가는 것을 강경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귀족들이 잔뜩 오는 행사에서 단 한 명이라도 샤를로트 공녀의 얼굴을 알아본다면 어찌한담?
콜레트의 주장이 근거 없는 우려는 아니었다. 오를란느 출신이면서 켈티카에서 살아가는 콜레트처럼, 양국의 사교계를 모두 드나드는 귀족은 이쪽에도 있었다. 친척을 따라 오를리에 들렀던 누군가가 샤를로트를 먼발치에서 봤다든가 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오를란느의 공녀 연하께서 타국의 가짜 귀족 따위를 연기하는 모습을 켈티카 귀족들에게 들키다니, 그런 망신을 당할 위험은 100분의 1의 가능성일지라도 절대로 감수할 수 없어요. 아시겠죠?”
하지만 막시민에게 그런 사정을 설명해줄 수는 없었다. 사실상 설명할 필요도 없었지만. 대신 팬지 파빌리온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정보를 최대한 모아 왔다.
남부에서 시작된 예술품 애호가들의 사교 모임이고, 남부 귀족들이 주요 회원이고, 중심은 루치아니 다 벨로치 남작부인이라는 사람이었다. 비록 남작부인이지만 예술품 수집으로 제법 이름이 있는 부유한 노부인이라 했다.
막시민의 고민은 그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이 노부인을 알고 있었다.
아니 물론 일방적으로 아는 거지만, 어쨌든 알고 있었다. 물론 만난 적은 없으며 앞으로도 없겠고 저쪽에서는 이쪽의 이름인들 들어볼 일이 없겠지만…….
“그런 관계를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
“없지. 그런데 내가 이 부인에 대해서 본의 아니게 쓸데없는 걸 많이 알고 있어서 말이야.”
“어떤 걸 아는데?”
“그러니까 뭐부터냐, 일단 삼 년 전부터 고관절염이 심해져서 걷지 못하게 됐고, 그래서 연회든 행사든 직접 참석하는 경우는 없어졌고, 필요할 경우 대리인으로 신임하는 교수, 그 뭐냐, 굿랜드 교수라는 사람을 보내곤 하는데 그 교수는 지금 켈티카까지 올 상황이 안 돼.
왜냐하면 작년 여름에 웬 남의 집 부인과 불륜 사건을 일으켰다가 혼쭐이 나서 스리슬쩍 잠적했거든. 그렇기 때문에 켈티카에서 주최되는 행사들은 고고미술학 아카데미라는 곳이 맡아서 진행하게 됐고, 이자들은 행사는 알아서 잘 치르겠지만 거기 올 법한 손님들의 얼굴까지는 잘 모를 거라는 거야.”
막시민으로부터 이런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오자 이스핀이 신기한 표정을 했다.
“너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진짜 탐정 십 년 차 같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 달 차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부인의 이름을 물려받은 녀석을 안다.”
막시민이 사거리 모퉁이에 선 채 생각을 거듭하도록 만든 원인이 바로 그 녀석이었다.
막시민은 어떤 일이 될 것 같은지 안 될 것 같은지 판단이 빠른 편이었다. 될 것 같다 싶으면 자세한 계획도 순식간에 떠올랐다.
하지만 문제의 녀석이 엮이면 거의 반드시 예측불허의 사태가 터진다는 것을 이 년간의 경험으로 알게 됐기에 이번에는 선뜻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 녀석의 이름은 루시안 칼츠.
네냐플 입학 동기이자 같은 빌라를 써온 룸메이트이며, 다름 아닌 루치아니 다 벨로치 남작부인의 손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