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124)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126화(126/143)
126화. 차고 달고 쓴 동전 (19)
막시민이 남작부인의 시시콜콜한 사정을 알게 된 이유도 물론 루시안 때문이었다.
작년 여름, 여러 친구들과 루시안의 집에 초대받았던 시기에 하필 굿랜드 교수의 불륜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모든 사람들이 하루 종일 그 화제만 떠들어댔고, 분위기에 잘 휩쓸리는 루시안은 여기저기에서 얻어들은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신바람나게 해주었다.
그 결과 막시민은 그 교수가 벨로치 남작부인을 어떻게 만나게 됐고 어떻게 부인을 구워삶아 신임을 받게 됐고, 그후 어떤 혜택을 누렸고, 고고미술학 아카데미와는 어떤 관계인지 온갖 뒷사정을 한 시간에 걸쳐 이야기할 수 있는 지식을 갖게 됐다.
시시하고 지루한 화제라고 생각했지만 초대된 자의 예의로 들어 둔 덕택이었다. 그보다는 고급술을 실컷 마시게 해준 예의였다고 해야 할까.
루치아니 다 벨로치 남작부인의 이름을 듣자마자 막시민이 떠올린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먼 네냐플에서 세 번째 유급을 피하고자 학업에 여념이 없던 남작부인의 소중한 손자분께서는 방학을 맞아 기분도 전환할 겸 켈티카에 오셨다가 방학 숙제에 도움이 될 것 같은 문제의 강연을 들어보고 싶어졌다.
물론 초대장은 없지만 그건 그분이 켈티카에 머물고 있지 않았으므로 당연한 일이다. 강연 시작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하실 예정이지만 그렇더라도 좋은 자리를 마련해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참, 친구도 한 사람 함께 올 예정이다.
그렇게 자리가 마련되고 잠시 후 막시민이 등장한다. 루시안이 초대한 학교 친구 역할인 막시민은 초대장이 없으니만큼 루시안이 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점잖게 대응한다.
이윽고 입장이 끝나고 강연은 시작되지만 루시안은 도착하지 않고, 친구라는 신사는 밖에 계속 서 있다. 상대가 루시안의 친구인 만큼 괜찮은 가문의 자제를 세워두고 있다고 생각한 입장 관리인은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질 것이다.
그러다가 그냥 들여보내주면 좋고, 아니라면 적당히 날조된 쪽지가 그즈음에 도착한다.
갑자기 바쁜 사정이 생겨서(오랜만에 수도에 행차한 부잣집 아들에게는 수많은 일정이 있기 마련이다) 못 오게 된 루시안이 친구에게 자기 대신 강연을 듣고 자세한 내용을 전해달라고 했다는 내용이면 대충 될까.
물론 아카데미 사람들이 루시안 칼츠라는 사람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씨알도 안 먹힐 이야기겠지만 그 사람들은 이 동네 귀족들도 잘 모른다고 하니까. 주최자 노부인의 손자인 네냐플 학생이라면 학구적인 젊은 신사일 것 같잖아?
그런 식으로 그럴싸한 시나리오를 떠올리는 데는 십 분도 걸리지 않았지만 그후로 막시민이 계속 고민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이 이야기에 루시안이 등장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물론 직접 등장하는 건 아니다. 지금쯤 남부의 쾌적한 저택에서 한가롭게 지내고 있을 녀석이 켈티카에 나타날 가망은 전혀 없다.
루시안이 제 집에 앉아서 켈티카까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면 그 녀석도 일종의 마법사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런데 비록 마법 과목은 모조리 낙제했을지라도 이런 종류의 마법이라면 어쩐지 잘해낼 느낌이 든다.
심지어 루시안은 켈티카를 싫어했다. 아버지인 칼츠 씨는 본래 아들을 켈티카에 있는 학교에 넣고 싶어 했는데, 누가 뭘 꼭 해야 한다고 하면 죽어도 하기 싫어지는 루시안은 ‘켈티카 가기 싫어’를 입에 달고 다니다가 놀랍게도 네냐플 입학이라는 기적을 이룩하여 잔소리에서 성공적으로 벗어난 바 있었다.
칼츠 씨도 네냐플이라면 흠, 켈티카에 있지 않더라도 인정할 만하지, 하고 생각했으므로 부자간에는 평화로운 타협이 성립되었다.
이런 좋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 시나리오는 왜 거슬리는가. 합리적인 근거는 없다. 분명 없지만, 단지 루시안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예상 밖의 사태가 터질 것만 같은 예감을 지울 수가 없다.
막시민이 이 년간 겪어본 바로 루시안의 이름은 마치 혼란을 부르는 토템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루시안의 이름을 써먹어서 이딴 짓을 해도 될까. 과연 아무 일도 없을까.
하지만 새삼 생각해봐도 근거 없는 두려움이었다. 마치 “폭풍우!”라고 외치면 폭풍우가 밀려올 것 같다는 수준의 원시적인 미신이 아닌가.
게다가 직접 와서 확인해 본 결과 그랑도프 호텔 12층에 적당한 신분을 가장해 들어간다는 계획이 훨씬 더 불가능해 보였으므로 맑은 하늘에 루시안이라는 날벼락이 칠 가능성은 슬슬 포기해도 될 듯했고…….
막시민은 여전히 호텔을 먹잇감처럼 요모조모 뜯어보고 있는 이스핀을 불렀다.
“그만 가자.”
“이제 결심이 섰어?”
“뭐?”
막시민이 어리둥절한 눈빛을 보내자 이스핀이 명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호텔 구경에 넋을 놓은 줄 알았는데 자신이 쓸데없는 고민을 마무리하도록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너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았냐?”
“아니?”
“그럼 결심이 섰느냐는 건 뭔 소리냐?”
“이번 일에 네 친구 이름을 써먹을까 말까 궁리하고 있었을 거 아냐. 결론은 나왔는데 뭔가가 마음에 걸렸던 거잖아. 그런 문제가 생각만으로 해결된 걸 보면 필요한 건 단지 결심이었네. 그렇지?”
“…….”
이런 식으로 속을 읽힐 때마다 말문이 막히곤 하는 막시민을 내버려두고 이스핀은 거리 저편으로 관심을 돌렸다. 행인들 사이로 미심쩍은 사람이 알은체를 하며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품이 넓은 긴바지에 조끼, 서지 코트라는 부잣집 심부름꾼 같은 차림새의 남자는 가까이 오고 보니 청어절임이었다.
“부르셨습니까, 나리?”
넉살 좋게 인사까지 하는 것이 영락없는 하인 모습이라 막시민은 갑작스러운 연극에 초대된 사람처럼 뜨악한 표정이 됐다.
“넌 왜 이 꼴이야?”
청어절임은 곁에 선 이스핀을 흘끔대며 히죽히죽 웃었다.
“그야 중대한 임무를 맡아야 하니 적절한 옷차림을 갖추도록 하라고 이쪽 나리께서 저에게 30엘소라는 큰돈을 쥐여주고는 뒷거리 옷집에 보내셨기 때문이죠. 이만하면 되겠습니까? 어떠세요?”
아까 이스핀이 늦게 도착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던 모양이었다. 이스핀은 턱을 괴며 청어절임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옷은 웬만큼 됐는데 머리가 문제네. 너무 텁수룩해. 좀 자르자.”
“아이고, 이발소에 가라굽쇼, 나리? 그런데 옷값이 어떻게나 비싼지 벌써 주머니가 달랑달랑하는뎁쇼?”
변신에 능숙한 인간답게 어느새 말투도 능청스러운 하인이었다. 그러는 꼴이 어쩐지 거슬린 막시민이 이스핀을 돌아봤다.
“하인은 왜 필요한 거냐? 강연에 하인은 입장이 안 된다며.”
“고고미술학 아카데미라는 곳에 편지 보낼 거 아니야? 네 친구라는 칼츠 씨, 부자라며. 그럼 부잣집 하인처럼 차려입은 사람을 보내야 진짜 같겠지.”
“내가 뭘 하려고 했는지는…… 아니, 됐다. 편지는 보내려던 거 맞는데, 여기 근처에 무슨 최신식 우편사무소가 있다지 않았냐? 사흘이면 닿는다던데.”
“사흘 멋지네. 그런데 부자들은 그런 거 안 써. 그냥 하인 보내지.”
확신 어린 말투에 막시민이 뜨악한 표정을 짓자 청어절임이 거들었다.
“그 말씀이 맞죠. 귀족 나리들 눈에는 놀고먹는 하인이 저택에 수두룩한 것처럼 보이거든요. 누군지도 모르는 배달부한테 편지를 맡길 일이 없죠.”
이스핀이 청어절임을 힐끔 봤다.
“웬일로 너랑 나랑 의견이 같고 난리지. 그나저나 이발소는 어디 있는데?”
“오는 길에 하나 봐뒀지요.”
청어절임이 앞장서고 둘도 뒤따라 큰길을 따라 걸어갔다. 호텔 위로 해가 비스듬해지는 시각이었다. 그랑도프 호텔 근처에는 새로 들어선 가게가 많아 최신 유행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런 거리를 걷다가 안쪽의 좁다란 골목으로 접어든 세 사람은 이윽고 2층에 있다는 이발소 간판 앞에 멈춰 섰다. 이발 및 면도. 15엘소.
청어절임이 “우와, 번화가라 그런가 되게 비싸네”라고 중얼거리자 이스핀이 말했다.
“그러네? 야, 사무실로 가자. 내가 대충 잘라줄게.”
“네? 직접 잘라주신다고요?”
청어절임은 저도 모르게 제 목을 쓰다듬으며 목에 뭐가 걸린 듯한 소리를 냈다. 이스핀이 한쪽 입술만 올리며 씩 웃었다.
“너 내가 날붙이 다루는 솜씨 알지? 그까짓 머리쯤이야.”
“아니 저기, 제가 잘라야 하는 건 머리카락이지 머리가 아닌뎁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