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127)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129화(129/143)
129화. 차고 달고 쓴 동전 (22)
세 사람은 쥬스피앙의 힘으로 어딘지 모를 풍경 좋은 산비탈의 오두막 같은 곳으로 단숨에 보내졌다고 했다.
어찌나 고급스러운 마법이었는지 눈 한번 깜빡이고 나니 낡아빠진 오두막 안에 둘러앉아 있었다는데 흔한 어지럼증조차 없어서 순간 이동이 아니라 환각이나 꿈이 아닌가 헷갈렸을 정도였다.
다행히도 그들은 셋이었기에 서로에게 꿈이 아닌지 물어볼 수가 있었다. 나중에 보리스는 사후세계가 아닌가 의심했다고 말했다.
쥬스피앙이 그들을 납치하다시피 한 이유는 심볼리온의 마법사들이 막시민을 알 법한 학생들을 찾아내기 위해 네냐플 근처를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마법사께서 굳이 직접 납신 것은 그들 중에 사랑하는 딸 티치엘이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실은 좀더 중대한 이유가 있었다. 귀책이었다.
쥬스피앙 자신도 그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비록 말은 이렇게 했지만.
“빌어먹을 낙제왕 놈에게 너무 근사한 구경을 시켜주는 바람에 귀찮은 일이 잔뜩 생겼지만, 나름 소득도 있어서 말이야. 아주 쓸데없는 짓은 아니었다.”
그 오두막에서 셋은 드디어 막시민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게 되었다고 했다.
과연 쥬스피앙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 막시민은 그 점이 몹시 궁금했지만 루시안은 ‘넌 다 알지?’라는 말로 중요한 설명을 생략하더니 근사하게 낡아빠진 오두막은 야영 여행에 제격이었고 다 같이 장작을 모으러 산비탈을 돌아다닌 사연과 저녁에는 감자 수프와 감자 부침을 만들어 먹었는데 맛이 좋았고 양이랑 개도 몇 마리 있으면 양치기 놀이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부탁해봤는데 거절당했다 등등의 이야기만 신나게 늘어놨다.
쥬스피앙이 애들을 데리고 왜 그런 놀이를 했는지 의아했지만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리니 어쩐지 알 것도 같았고…….
“……그러더니 우리한테 이대로 한 달쯤 여기서 사는 건 어떠냐는 거야. 난 바로 좋다고 했지! 하지만 보리스는 사양하더라고. 그리고 나도 다시 잘 생각해보니까 티치엘이 없으면 곤란할 것 같았어. 티치엘을 데리고 가버리면 대마법사님이 우리한테 신경도 안 쓸 거 아니야?”
뭔가 중간에 많은 설명이 생략된 듯한 결론이었지만 루시안은 늘 그렇듯 핵심만은 놓치지 않았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쥬스피앙이 티치엘을 데려가고 나면 거기 남은 너희 둘은 겨울옷에 넣어 둔 동전 두 개처럼 잊히는 거지.
설득에 실패한 쥬스피앙이 팔짱을 끼고 셋을 노려보며 구시렁대는 모습이 안 봐도 보이는 듯했다. 가만히 보면 여자애 하나, 남자애 둘이 모이면 영 다루기 힘들더란 말이야. 내용물은 바뀐 것 같지만, 하여튼.
“그럼 달리 갈 데를 골라보든가. 집은 말고. 평소 안 가던 곳으로. 심볼리온 놈들은 이미 너희 셋을 찾고 있어. 지난번에 마주쳤을 때는 너희를 몰랐지만 이제는 아니거든.
물론 그놈들이 너희를 납치하거나 해치지는 않겠지만 너희 머릿속에는 정보란 게 있지. 그리고 그놈들은 마법사야. 성벽이나 창칼 따위로는 놈들을 못 막는다. 지금 필요한 건 그놈들과 마주치지 않는 거야. 대략 이 방학이 끝날 때까지는.”
막시민은 문득 쥬스피앙의 집을 생각했다. 자신도 한때 그 안에서 안전하게 지내지 않았던가? 그때 루시안이 막시민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우리가 좋은 생각을 못 해내니까 티치엘이 ‘그냥 우리집으로 데려가면 안 돼요?’라고 했거든? 와, 대마법사의 집에 놀러갈 기회였는데! 하지만 대마법사께서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 이유도 안 가르쳐주고 그냥 안 된대.
내가 억울해서 친구가 초대해줬는데 왜 못 가냐고 막 물어보니까 엄청 귀찮아했는데 결국 알아내긴 했어. 보리스 때문이래. 보리스의 검 말이야. 그걸 집에 못 들여놓는대.”
뭔가가 궁금할 때의 루시안은 평소보다 백 배로 집요해지는데 이번 일로 쥬스피앙조차 이길 정도임이 판명되었다.
“하여튼 대마법사님은 우리가 여기서 지내지 않을 거면 일단 흩어져야 한다고 했어. 그래야 마법사들이 우릴 찾기가 힘들다나.
보리스는 자긴 어딜 가든 별문제 없으니 그냥 아무데나 보내주라고 그러더라고? 우와, 완전 멋지지. 하지만 난 그렇지 못하니까 켈티카로 가는 게 제일 좋다는 결론이 났어. 켈티카에 있으면 마법으로 사람을 못 찾는다나?
그리고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우리 엄마 아빠가 너무 놀랄 거 아니야. 그래서 난 집으로 하인을 보낸 다음에 켈티카로 가고, 보리스는 좀 시차를 두고 천천히 켈티카로 오기로 하고, 티치엘은 뭐, 대마법사님이랑 같이 갔지.”
그렇게 출발한 루시안이 켈티카에 도착한 지는 대략 이레가 되어간다고 했다.
칼츠 저택이 아닌 다른 거처를 택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루시안은 누군가의 감시 없이 은둔 생활을 해낼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고, 사흘쯤은 어떻게 버텼지만 그사이 나가도 괜찮은 이유를 열 가지쯤 개발한 다음 나흘째 밤부터는 친구들도 만나며 놀았다.
그리하여 루시안이 켈티카에 왔음을 알게 된 사람들이 생겼고, 소문은 알음알음 퍼져 어젯밤 어느 가문의 하인이 칼츠 저택을 찾아오는 상황이 벌어졌다.
루시안이 팬지 파빌리온의 강연에 간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거기서 만날 수 있겠느냐는 전갈을 갖고서.
하지만 칼츠 저택의 하인들은 지시받은 그대로 대답했다. “도련님은 켈티카에 계시지 않습니다.”
당황한 심부름꾼은 전갈만을 남기고 돌아갔다.
다음날 루시안은 그 전갈을 전해 받았지만, 내용을 보고는 어리둥절해졌다. 내가 그랑도프 호텔에서 열리는 강연에 친구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고?
“그런데 거기에 막시밀리앵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거야! 네냐플 다니는 친구 막시밀리앵! 그게 누구겠냐고! 난 여기 오면 널 만날 수가 있다는 걸 바로 눈치챘지.
얼른 옷 차려입고 오는 동안 완전 신났잖아. 켈티카에 온 뒤로 재밌는 일은 하나도 없었는데 드디어 재밌는 일이 생겨서! 왜냐면 나 너한테 해줄 얘기 엄청 많거든! 지금도 했지만 그거 말고도 아주 많아!”
막시민은 목소리를 낮추라고 손짓하며 나직이 말했다.
“……야. 쥬스피앙 님의 말대로라면 넌 여기 와서 날 만나면 안 되는 것 아니었냐.”
“어, 그것도 그렇긴 한데 그래도…… 내 도움이 필요하니까 내 이름 쓴 거 아니야? 말만 해! 다 도와줄게! 그나저나 여긴 뭘 하러 왔는데?”
“…….”
심볼리온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흩어진 주제에 심볼리온이 노리고 있는 장본인을 만나겠다고 달려오다니. 대체 왜 켈티카까지 와 있는지 알긴 하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막시민은 말을 삼켰다.
루시안의 부주의함에 화를 내기에는 친구들이 사방팔방 흩어져 이런 불편을 겪게 된 것부터가 자신 탓이었다.
그런데도 “말만 해! 다 도와줄게!”라고 하는 녀석한테 왜 이렇게 생각이 없냐고 화를 낼 만한 뻔뻔스러움은 막시민에게도 없었다.
물론 쥬스피앙이 이 상황을 알았다면 펄펄 뛰었겠지만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내고 마는 루시안을 상대로 어떤 행동은 해도 되고 어떤 행동은 하면 안 되는지 일일이 목록이라도 적어주셨어야 했는데 잠깐 만나봐서 거기까지는 모르셨겠죠……라고 한때 쥬스피앙을 이긴 전적이 있는 막시민은 생각했다.
동시에 다른 부분이 신경이 쓰였다. 쥬스피앙에게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이 있긴 한데, 막시민 한 명을 심볼리온에 끌려가지 않게 하기 위해 네냐플 교수들에 이어 쥬스피앙까지 발 벗고 나설 정도란 말인가?
스승들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눈물이 앞을 가리……는 문제가 아니라 여기에는 막시민이 모르는 다른 심각한 문제가 섞여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사정을 들어보니 루시안이 진짜로 달려오지 않았더라면 거짓말도 들통날 뻔했다. 루시안이 켈티카에 멀쩡히 와 있음을 아는 사람들이 강연장 곳곳에서 출몰해 말이라도 걸어왔다면?
일이 이렇게 풀릴 것은 계산에도 없었기에 막시민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앞으로 루시안의 이름을 함부로 써먹는 것은 진짜로 자제하자고. 루시안의 이름을 불러 루시안을 소환한 꼴이 아닌가.
어쨌든 계획은 전면 수정이 불가피했다. 등장시킬 예정이 없던 루시안이 나타났으니 주최자의 손자 자격으로 당당히 들어가 한 자리 차지하고 앉으면 될까?
하지만 간만에, 그것도 남의 눈이 신경쓰이는 자리에서 마주치고 보니 루시안을 계획대로 움직이게 한다는 것은 망아지를 데리고 티파티에 가는 거나 다름없는 과제임이 실감났다.
위대하신 쥬스피앙께서도 이 녀석을 켈티카까지 가게 할 순 있었어도 놀러 나가지 못하게 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어, 그렇게 말해줘서 정말 고맙다. 자세한 설명을 할 시간이 부족한데 일단 난 여기서 어떤 사람을 만나야 돼. 그러려면 강연장 안에 들어가야 하고, 들어가자면 네 도움이 필요하지.
그런데 날 도와주자면 기억해야 될 게 몇 가지 있어. 첫째로 여기서는 날 막시밀리앵 드 플레상스라고 불러야 된다. 네 친구인 건 맞고, 또…….”
“우와! 이제 막군 이름이 소공작보다 더 멋있어!”
“…….”
둘이 몇 마디를 더 나눴을 때 막 10층에 도착한 캐비닛이 텅, 소리를 내며 흔들렸으므로 막시민은 하던 말을 멈추고 턱과 목과 어금니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이 상층행 캐비닛이라는 시설의 정체는 마법으로 일시적으로 무게를 줄인 캐비닛을 케이블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캐비닛 안의 꽃무늬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 지나치게 가벼워진 캐비닛은 흔들흔들 하며 10층까지 올라가 멈췄고, 밖에서 문을 열어주면 나오면 되었다.
다시 말해 캐비닛을 매단 쇠줄인지 밧줄인지 모를 것에 목숨이 매달려 있지만 보이지도 않고 손쓸 수도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방식은 막시민의 취향과 조금도 맞지 않았다. 대체 뭘 믿고 이런 걸 타지? 갑자기 마법이 풀리지는 않나?
이걸 위해 호텔에 마법사가 상주하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렇게 비용을 들인 주제에 올라가는 데 거의 십 분이나 걸린다는 것도, 그래 놓고도 10층까지만 간다는 것도, 그래서 다시 두 층은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는 것까지, 모든 면에서 이상한 시설이었다.
10층에서 멈춘 이유는 8층 가는 사람의 편의도 조금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막시민의 관점으로는 처음부터 호텔을 12층까지 만들지 않으면 모든 문제가 깔끔히 해결된달까.
그런 것을 거만한 귀족들이 아무 불만도 없이 타고 다닌다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수수께끼라는 생각을 하며 캐비닛 밖으로 나왔을 때 루시안이 물었다.
“어땠어?”
“뭐가? 네 얘기?”
“아니. 이 캐비닛. 엄청 멋지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