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128)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130화(130/143)
130화. 차고 달고 쓴 동전 (23)
막시민은 방금 타고 온 캐비닛과 비슷한 속도로 고개를 돌려 루시안을 봤다.
“너, 이게, 마음에, 든다는 거냐?”
“응! 신기하잖아! 걸어서 올라갈 필요도 없고! 흔들흔들 하는 것도 재밌고! 우리 바깥 풍경도 내다보자. 아참, 12층이 더 높으니까 전망도 더 좋겠지?”
이런 관점 차이는 어디서 발생하는 걸까. 돈? 자신감? 안전 불감증? 심지어 루시안은 당장 12층으로 뛰어 올라갈 기세였으므로 막시민은 친구의 팔을 붙들었다.
“안 돼. 여기서 기다려. 강연 시작될 때까지는 눈에 띄면 안 돼.”
“왜?”
“주최 측이 널 보면 뭘 시키고 싶어서 좀이 쑤시지 않겠냐? 이를테면 개막 연설이라든가.”
루시안이 순간 입을 딱 벌리며 두 주먹을 부르쥐었다.
“아, 맞다! 저번에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나 그런 거 절대 못 해. 완전 웃음거리였다고. 그런 거 시키면 여기서 뛰어내릴 거야.”
“어차피 내 계획은 시작한 다음에 들어가는…….”
그때 루시안은 막 창문을 발견했으므로 막시민의 말을 끝까지 듣는 대신 창가로 달려갔다. 금세 탄성이 터졌다.
“우와!”
망아지 고삐를 쥔 초보 기수 같은 기분으로 한숨을 내쉰 막시민이 뒤따라가 곁에 서자 루시안이 소근거렸다.
“뛰어내리는 건 취소야. 엄청 끔찍하게 죽을 거 같아. 하지만 그렇다고 연설을 할 순 없어. 어쩌지. 그냥 10층에 숨어 있으면 안 되나.”
막시민은 몸을 기울여 유리 너머를 흘끔 봤다. 하지만 캐비닛에서 느낀 현기증이 되살아나는 느낌이라 도로 한 발짝 물러서고 말았다.
창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이 높이의 유리창치고는 너무 널찍하고 깨끗해서 바깥의 어마어마한 풍경이 지나치게 생생해 보였다. 켈티카를 가르며 흐르는 블루엣 강은 실개천인가 싶고 복잡한 거리며 집들은 세밀화 같고…… 저 멀리 불쑥 솟은 성은 혹시 비취반지 성일까?
막시민도 이 풍경이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까지 그들을 보내준 캐비닛의 흔들림이 준 불안감이 머리에 남은 까닭에 풍경조차 일렁이는 느낌이었다.
막시민의 관점으로 그 캐비닛은 장롱에 갇힌 채 낭떠러지로 내던져지는 기분을 체험시켜주는 십오 분짜리 고문 도구였기 때문이다.
그가 ‘여긴 튼튼한 기둥으로 떠받쳐져 있다, 이건 추락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타이르고 있는 사이에 루시안은 제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그래, 생각이 바뀌었어. 우리 도로 내려가서 간식이나 사 먹자. 생각해보니까 강연은 원래 재미없잖아.”
막시민은 기가 막혀서 처음으로 루시안을 째려봤다.
“야, 내가 저 안에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고 말 안 했냐?”
그러고 있는 동안 캐비닛이 차근차근 운반해 온 사람들이 밀물처럼 몰려왔다가 12층으로 사라져 갔다. 10층이 한산해지자 막시민은 시계를 꺼내 확인한 다음 말했다.
“그래, 알았다. 넌 내가 들어갈 수 있도록 바람만 잡은 다음에 집에 가라. 어차피 네가 진짜로 나타날 줄도 몰랐고. 원래 네 이름만 빌려서 친구라고 하고 안에 들어가려 했던 거야.”
루시안이 킬킬 웃더니 말했다.
“내 이름이 막군한테 쓸모도 다 있고, 괜찮네? 근데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집에 가긴 싫어. 강연 끝나고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참, 막군은 어디서 지내? 나 놀러가도 돼?”
막시민은 초점 잃은 눈빛으로 탐정 사무실을 이 녀석에게 들키면 끝장이라는 생각을 했다.
위대한 쥬스피앙이시여, 이 쓸모 있고 선량한 녀석이 저와 심볼리온을 꼭 만나게 해주고 싶은 것 같은데 어찌하면 좋겠냐고요.
“내 이름은 말이다…….”
“아참, 막시밀리앵이었지. 근데 그거 너무 길다. 참, 그 뒤는 뭐였지? 플레이트?”
이런 식이다 보니 막시민은 강연장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루시안의 결정이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강연이 끝난 다음에 어딘가에서 만나자고 약속하도록 하자. 물론 거기에 자신은 나타나지 않을 거지만…….
조금 미안하긴 해도 어쩔 수가 없구나, 평지풍파의 루시안이여.
그리하여 4시가 조금 넘은 시각, 루시안은 드디어 계단을 올라가 12층으로 갔다.
연회장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정면에 보였고, 문은 활짝 열려 있었지만 안쪽으로 두꺼운 커튼이 내려져 있어 안은 보이지 않았다. 초대받은 손님들은 이미 모두 들어간 뒤였다. 안내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혼자 서 있었다.
친구에게 부탁받은 역할을 성실히 해내기로 작정한 루시안은 눈을 반짝이며 안내인에게 다가갔다. 안내인은 그 기세에 다소 위축된 표정으로 절을 했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뭐더라, 하여튼 강연이 열리는 것 맞죠?”
굽혔던 허리를 편 안내인은 기묘한 눈빛으로 루시안을 쳐다봤다. 왜냐하면 그의 상식으로는 이곳에서 개최되는 격조 높은 행사를 그런 식으로 부르는 것은 주최 측의 품격을 심각하게 손상시키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초대된 손님이라면 설마 그런 예절을 모를까? 하지만 루시안이 입은 코트가 제법 근사했으므로 그는 면박을 주는 대신 편리한 우회책을 택했다.
“초대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
루시안은 해맑게 대꾸했다.
“없는데요?”
“아쉽지만, 이곳에는 초대받은 분들을 위한 자리만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루시안은 마주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아, 그래요? 하지만 초대 받고 안 오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텐데. 어디든 그렇잖아요? 특히 강연이란 건…… 참, 그런데 뭐에 대한 강연이죠?”
처음 계획대로 했다가 연설대로 끌려갈 것이 가장 무서웠던 루시안은 주최자의 손자임을 알리는 대신 자력으로 입장 자격을 획득하려는 사람 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그거야말로 자부심 높은 안내인이 기다렸던 질문이었다.
“고매하신 예술 후원자이신 루치아니 다 벨로치 남작부인께서 이끄시는 팬지 파빌리온의 주최로 고고미술학 아카데미가 직접 주관하는 이번 행사는 아카데미의 종신회원이시자 힐스토우 학교의 교수이시고 저명한 미술품 및 유물 수집가이신 레몰린 경께서 ‘후기 가나폴리의 궁정 조각 양식과 남부 건축 사조의 유사점 및 재현과 변형’을 주제로…….”
중간쯤부터 내용을 듣고 있지 않았던 루시안은 상대가 말을 맺자 열 살 때부터 익혀온 ’아하, 이제 정확히 알았네요’ 하는 표정을 지어서 ‘뭔 소린지 전혀 모르겠다’를 감추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말씀대로라면 그 아카데미의 창설을 위해 총액 대비 1할의 기금과 83점의 가치 높은 미술품을 기꺼이 기증하신 저희 아버지를 생각할 때 제게 초대장이 오지 않은 이유를 납득하기가 조금 어렵군요? 안 그래요?”
루시안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말투를 외워서 흉내내면 가끔 근사한 효과가 발생하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이번만큼 적절한 순간은 흔치 않았을 것이다.
안내인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지나가다 들러본 참견꾼이 아니었네? 그는 허둥지둥 명부를 꺼내 들며 고개를 조아린 채 루시안에게 물었다.
“죄송합니다. 존함을 알려주시면 한 번 더 확인해보겠습니다.”
“루시안 칼츠.”
안내인은 경력이 짧은 젊은 학사였고, 잔뜩 긴장한 나머지 벨로치 가문과 칼츠 가문의 관계를 즉시 떠올리지 못한 채 진땀을 흘리며 명부를 뒤졌다.
보통 서너 개의 단어로 이뤄진 귀족들의 거창한 이름들 틈에서 그토록 쉬운 이름은 금방 발견되는 것이 당연했지만 물론 그런 이름은 없었다.
안내인은 결정권이 있는 사람을 불러야 하는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내인은 서둘러 커튼을 젖히고 연회장 안으로 사라졌다. 루시안은 발을 까딱거리며 기다렸다.
이윽고 커튼 너머에서 나온 사람은 또 다른 안내인, 그리고 루시안이 잘 아는 얼굴이었다. 아버지와 오랫동안 거래해 온 세빌랭 후작부인의 비서 노릇을 하는 조카딸이다. 그녀가 호들갑스럽게 소리쳤다.
“어머나! 진짜 루시안 도련님이었네요. 여기까지 웬일이신가요? 언제 켈티카에 오셨어요? 고모님께서 안에 계신데 도련님을 뵈면 정말 반가워하실 거예요!”
신원이 확인되자 초대장의 유무는 의미가 없어졌다. 루시안은 그들을 잠깐 기다리게 하고는 조금 떨어져 있던 막시민에게 돌아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됐어! 이제 들어가자. 근데 아는 사람이 있나 봐. 가서 인사만 하고 다시 나와야지.”
“그러냐.”
그때까지만 해도 그 정도의 계획 변경은 대세에 큰 지장이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안내인이 커튼을 밀어 열었고, 두 사람은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간 막시민은 생각했다. 뭔가 이상하다.
연회장 앞쪽에 단상이 꾸며져 있고 그쪽을 바라보도록 의자와 테이블이 열을 지어 놓인 것을 보면 강연 비슷한 것을 할 것처럼 생기기는 했다. 자리가 고작 40석 정도밖에 안 되긴 했지만. 팬지 파빌리온의 회원만 해도 80여 명, 아카데미의 회원은 백여 명이 넘는다고 들었는데.
그런 건 의문의 시작에 불과했다. 모인 사람들의 면면은 더욱 뜻밖이었다. 학구적인 주제를 내건 강연장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차림새며 거동이 최상류층들인 사람들이 가득했다.
문제의 강연이 고리타분하게 들리는 제목과 달리 흥미진진하기로 소문이 났다 치자. 그렇더라도 고작 강연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이런 귀빈들을 행차하게 할 수 있다고? 이런 자들은 엉덩이가 무척 무거운데?
물론 강연은 뒷전이고 사교가 본 목적일 수도 있지만, 보아하니 열심히 사교를 즐기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뭔가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모습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막시민이 이곳에 온 이유인 누오보의 기술자 ‘톱니’가 이런 사람들 중 하나란 말인가?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런 곳에서 약속을 잡을 수가 있지?
주변을 대략 훑어봤지만 이 사람이구나 싶은 사람은 없었다. 물론 톱니가 어떻게 생겼는지, 성별도 나이도 아무것도 모르지만 만약 저 자연스럽게 우아한 자태로 어울리고 있는 사람 중 하나가 톱니라면 그는 엄청난 연기력을 가졌거나, 또는 정체를 감추고 기술자로 취직한 귀족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정도로 여기에 모인 자들은 섣불리 흉내내기 힘든 품격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매들로 소자작은 어떨까?
이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대략 전해 듣고 왔다. 하지만 이곳에서 중키에 갈색머리, 체격도 얼굴도 평범한 젊은 남자란 마치 빵집의 디너 롤 같은 존재인지라 이 사람일까 싶은 인물이 무려 다섯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낯선 사람과 첫인사를 나누거나, 그런 사람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기색이 없었다.
대체 이 인간들은 어디에 있는 거야. 오긴 했냐? 일면식도 없는 너희 둘의 만남을 구경하러 여기 들어오느라 별별 짓을 다 했는데 정작 너희는 점심 디저트가 늦게 나왔다고 지각할 작정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