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130)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132화(132/143)
132화. 차고 달고 쓴 동전 (25)
교수가 새로운 사람을 불러냈다. 그자들은 천을 씌운 상자를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들고 와 옆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교수는 천 끄트머리를 잡은 채 기대에 찬 눈빛의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쓸데없는 옛날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오늘 모임이 성립되도록 도와주신 국왕 폐하와 귀족 한 무더기와 날씨와 우연과 시대의 흐름과, 어제 먹은 쇠고기와 작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어려서 삼 년간 돌봐주신 고모할머니 등등이 등장하는 중이었다.
막시민이 다시 단상 뒤를 봤을 때 왼쪽 끝, 커튼 한 겹이 움직였다. 그 뒤로 희끄무레한 뭔가가 비쳤다가 사라졌다. 얼굴 전체도 아닌 이마 일부와 머리카락, 그리고 한쪽 눈.
그러나 막시민은 놓치지 않았다. 그자다.
그때 교수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럼 그 첫 번째를 공개하겠습니다. 발다르장의 은제 회중시계입니다. 870년 작, 벨가노의 서명이 뒷면에 새겨져 있습니다.”
순간 어리둥절한 나머지 현실로 돌아온 막시민은 눈썹을 올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원숙기의 작품답게 정밀한 세공을 자랑하지만 뚜껑 손잡이와 뒷면에 미세한 생활 흠집이 남아 있다는 것을 감안하여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 2만 엘소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뭘 하는 거야? 강연이 아니었어?
아니었다.
잠시 멍해져 있던 막시민은 곧 상황을 파악했다. 이것은 특별히 초대된 고객만 참여할 수 있는 비공개 경매였다.
고미술품, 골동품을 주로 다루는 분위기다. 그러면 그렇지. 이런 손님들이 고작 강연을 듣자고 몰려들 리가 없지.
동시에 그는 자리로 돌아갈 수 없게 됐음을 깨달았다.
물건 소개가 끝나고 경매가 시작되자 아무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지만 그건 이유가 아니었다. 관찰하기 좋은 자리에 앉은 결과 막시민은 비공개 경매의 진행 규칙을 금방 알아봤다.
근사하게 차려입은 신사 숙녀들은 금액을 입에 올리지 않았고 팔찌를 낀 손으로 가벼운 손짓만 해서 자신의 의사를 표시했다.
손끝 한 번 튕기면 500엘소, 두 번 흔들면 1000엘소, 한쪽 손바닥을 펴 내밀면 5000엘소.
이런 와중에 벌떡 일어나 자리로 걸어가 앉는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간 10만 엘소쯤 부르게 되는 거 맞지?
심지어 이 경매는 진행 속도도 상상 초월하게 빨랐다. 보증된 특급 물건만 나오는 경매인지, 설명만 끝나면 다들 생각은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빠르게 금액을 올렸고 몇 초만 한눈을 팔았다가는 바로 낙찰 선언이 떴다.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모든 사람이 눈에 불을 켜고 눈앞을 주시했다. 다른 사람이 뭘 하는지 신경쓸 겨를 따윈 없었다. 신나게 돈을 쓰느라 바빠서.
하지만 이런 데 쓸 돈이 없는 막시민만은 경매장 곳곳에서 작은 변화가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커튼 뒤를 막대 같은 것이 스쳐간다. 낙찰을 선언하는 순간, 누군가가 의미 없는 손짓을 한다. 계속해서 새로운 경매품을 가져오던 사람이 웬일인지 다른 사람으로 바뀐다. 그는 장갑을 끼었으나 또 다른 장갑을 주머니 안쪽에 끼워두고 있다. 정체 모를 소음이 왼쪽에서 한 번, 오른쪽에서 한 번 난다. 다섯 번째 경매품이 나왔을 때 처음의 귀부인이 다시 뒤를 돌아본다…….
순식간에 열 번째 입찰까지 진행되는 동안 막시민은 생각했다. 여기서는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고 있다.
지금껏 본 것이 모조리 착각이고 증명할 수 없는 직감뿐이라 해도 이 정도까지 뚜렷한데 빗나갔던 적은 없다.
하지만 상관없잖아. 본래 초대되지도 않았던 자신은.
그는 예정에 없이 나타난 불청객일 뿐이다. 이 행사가 경매인 줄도 몰랐다. 이 행사가 경매를 가장한 거대한 음모처럼 느껴지든 말든, 그게 자신과 상관이 있을 이유는 없다.
혹시 그 음모가 톱니가 이곳을 약속 장소로 지정한 이유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거기까지 개입할 순 없고…….
그런 생각을 하다가 막시민은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정말 그게 전부야?
착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미심쩍은 무언가가 막시민의 직감을 붙들고 있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인가를 벌이려 하는 자들이 다른 누구도 아닌, 막시민을 의식하고 있다는 착각. 단지 몰래 숨어들어온 쥐새끼를.
그래서 막시민은 어처구니없는 억측을 해보았다. 저들은 사실 심볼리온의 마법사들이고, 도망자를 찾느라 절치부심한 끝에 단지 막시민을 낚아보겠다고 이 거창한 연극 무대를 차린 거라면?
그러는 가운데 새로운 경매품이 탁자 위로 올라왔다. 작고 손때 탄 장미목 상자 두 개였다.
교수는 상자 하나를 살짝 들어 뚜껑에 새겨진 이름을 사람들에게 보였다. 누오보.
“오늘의 하이라이트입니다. 보시다시피 경이로운 오토마톤 장인으로 알려진 누오보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누오보의 재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맏딸 로잘린다의 작품으로, 가장 유명한 숲 시리즈에 속하는 오토마톤 권총 중 두 정입니다. 완벽히 작동합니다.
누오보가 제작한 오토마톤은 백여 점에 이르지만 스물일곱 살에 눈을 감은 로잘린다가 남긴 작품은 모두 합쳐도 스무 점이 되지 않지요. 희소성 때문에도 가치가 있지만, 로잘린다의 작품이 오토마톤 수집가들 사이에서 유난히 인기를 끄는 이유가 그것만은 아닐 겁니다.”
뭐라고?
막시민은 눈을 크게 떴다가 간신히 팔걸이를 꽉 쥐며 놀란 표정을 감추었다. 로잘린다 누오보의 오토마톤? 저건 ‘혈관’을 넣었다던 권총이 아닌가? 그게 왜 여기 있어?
이스핀의 오빠는 혈관을 넣은 권총들을 신중하게 고른 사람들에게 선사했다고 했다. 풍파에 흔들려 소장품을 내다 팔아야 할 일이 없는 가문, 기념품을 소중히 간직하긴 하지만 지나치게 열광해서 사방에 자랑하지도 않는 품위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런 계산은 적중하여 대륙 곳곳의 자물쇠 달린 서랍들 속으로 빨려 들어간 숲 시리즈는 그후 한 번도 매물로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누가 갖고 있다는 소문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그중 단 하나만은 고물이 되어 막시민의 수중에 굴러들어왔다가 오스틀리 교수의 상자 속에 들어갔지만.
아무리 상류층만을 위한 비공개 경매라고는 하지만 그런 것이 두 정이나 한꺼번에 나오다니,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여기 이스핀이 있었다면 단상으로 뛰어나갔을지도 모른다.
저것들을 찾기 위해 사 년이나 노력했지만 실마리 하나 없었다 했는데 저들은 무슨 수로 손에 넣었지? 귀족들의 사교 모임인 줄 알았던 팬지 파빌리온이 수사 조직이라도 된단 말인가? 아니면 고고미술학 아카데미가?
막시민이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가운데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로잘린다 누오보의 작품에는 독특한 색채가 있습니다. 다리가 불편하여 일생의 대부분을 집 안에서만 보내야 했던 그녀는 자신의 오토마톤에 상상 속의 숲을 표현하려 시도했습니다. 아름다운 낮의 숲과 음산한 밤의 숲, 모두가 그 안에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다섯 정의 권총 시리즈는 흥미롭고 탄복할 만한 걸작품입니다. 이 권총들에는 각각 이름이 붙어 있는데 제작 연대순에 따라 ’아침 숲’, ‘카나리아’, ‘여름의 피’, ‘완전한 정오’, ‘밤의 숨’이라고 부르며 오늘 경매에 나온 것은 ‘카나리아’와 ‘여름의 피’입니다. 그럼 보실까요.”
교수가 상자를 열었다. 흰 장갑을 낀 채 들어올린 권총은 멀어서 어떻게 생겼는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막시민의 기억 속 고물처럼 한 손에 감춰질 정도로 작았다.
“금을 씌워 압도적인 화려함을 자랑하는 총신을 먼저 살펴보십시오. 더블 배럴 총구에는 진주가 둘러져 있지요. 방아쇠 위쪽을 장식한 다이아몬드는 하나하나가 8분의 1캐럿에 이릅니다.
길로쉐 에나멜의 우아함을 간직한 몸체에는 1캐럿이 조금 안 되는 루비가 박혀 있습니다. 그야말로 여름의 핏방울이지요. 그럼 방아쇠를 당겨 볼까요.”
방아쇠를 당겼으나 총소리는 나지 않았다. 대신 총구에서 붉고 노란 깃의 새가 튀어나와 날개를 파득대며 지저귀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진짜 같았는지 사방에서 감탄하는 소리가 일어났다. 울고 싶어질 정도로 귀엽고 우아한 광경이었다. 자세히 보고 싶은 사람들이 몸을 들썩거리자 교수가 말했다.
“여러분이 계신 자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을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잠시 후에 다섯 분씩 나오셔서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일이 익숙한지 사람들은 안내에 따라 차례로 일어나 무대에 올랐다. 직원 두 명이 교수 좌우에서 테이블을 지켰고, 사람들은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서서 물건을 살펴봤다.
한숨이 나올 정도로 아름답고, 정밀하고, 재치 있고, 쓸모없는 물건이었지만 그걸 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상기됐다. 갖고 싶어서, 자랑하고 싶어서, 아무런 실용적 이유도 없이 제 방 침대에 앉아 방아쇠를 당기고 키득거리고 싶어서.
또는 자물쇠 달린 진열장에 넣고 죽을 때까지 바라보기만 하려고.
그들의 우아한 열정과 전혀 다른 긴장감에 사로잡힌 막시민은 손바닥이 축축해질 지경이었다.
막시민과 이스핀이 만난 이유는 저 권총들이었다. 지금까지 플레상스 경이 갖고 있었던 한 정을 쫓느라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엉뚱한 곳에서 두 정이 튀어나왔다. 저걸 어떻게 한다? 경매에 뛰어들어 사들여?
하지만 그런 돈이 어딨냐고.
얼마일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없다. 그렇다고 저것들을 낚아채어 도망칠 수도 없고, ‘이보세요 그 권총 당신들 거 아닙니다. 사실은……’ 하면서 끼어들어 경매를 중지시키려 하면 그냥 쫓겨날 뿐이겠고.
여기서 놓치면 어디서 다시 찾아낼지 알 수 없는데, 그런 것을 누군가가 가져가게 내버려둬? 그 사람이 누군지만 기억해두면 될까?
하지만 여기에서 낙찰받은 사람이 그걸 계속 간직한다는 보장은 없지 않나. 누구한테 선물할 생각이거나, 아니면 부탁을 받고 나왔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사건을 의뢰받은 탐정으로서 놀라운 우연으로 문제의 권총들과 마주쳤는데도 돈이 없어 구경만 해야 한다는 것이 기가 막혔다.
물론 탐정이 돈이 많아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이 소식을 들으면 이스핀의 반응이 어떨까.
답답해진 나머지 막시민은 저 쓸데없이 눈을 반짝이는 인간들한테 왜 이딴 걸 갖고 싶어 하느냐고 대토론을 벌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솔직히 귀엽지만 어쨌든 당신들한테는 쓸모가 없잖아. 대가리에 구멍도 내지도 못하잖아. 어느 날 자살하고 싶어서 꺼냈다가 총알 대신 튀어나온 새를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 웃다가 살아남는다면 조금쯤 쓸모가 있으려나?
그사이 맨 뒷줄 사람들까지 무대에 나왔다가 들어갔고, 교수가 경매 시작가를 알렸다.
“지난번에도 최고의 인기를 누린 끝에 한 정에 12만 엘소에 낙찰된 바 있는, 로잘린다 누오보의 오토마톤 중에서도 최고의 작품 숲 시리즈 두 정 세트, 8만 엘소부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