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132)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134화(134/143)
134화. 차고 달고 쓴 동전 (27)
희미하게 남은 향이 기억을 불러왔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줄 알았는데, 건드렸던 물건은 다 처분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잔만은 그러지 못했다. 소동을 벌인 뒤 바로 뛰어나왔고, 돌아가보니 술집은 문을 닫았으니까.
아라종 블루의 향이었다. 오렌지나무 술집에서 입을 대고 마셨던 그 잔이었다.
“…….”
이스핀이 말을 못하고 있자 상대가 손끝으로 컵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이스핀이 잡았던 손 모양, 입을 댔던 모양이 희미한 빛이 되어 되살아났다. 동시에 이스핀의 입술에도 같은 빛이 떠올랐다. 감추고 있지만 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추적 마법이 걸린 것이다.
남자가 말했다.
“다시는 마법사들을 우습게 보지 마시오.”
심볼리온에서 파견한 마법사였다. 이제 더 부인해봤자 소용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추적당했지? 역시 망한 카페 3층이 너무 유명해졌던 것일까? 아니면 이스핀을 따로 뒤쫓고 있었던 걸까? 막시민만 걱정했는데 자신이 더 부주의했단 말인가?
낭패한 심정을 누르며 대책을 떠올리려 했지만 여건이 좋지 않았다. 어떻게 빠져나갈지, 경로는 쉽사리 그려졌지만 자신은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입었고 주변에는 귀족들이 무도회만큼이나 우글대고 있다. 그리고 상대는 마법사다.
에투알 훈련에서 몇 번이나 주지시키는 바이지만 마법사를 상대할 때의 요령은 단 하나, 속도였다. 중상을 입히면 연약한 자들이라 집중력이 흩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데서 사람을 베고 나서 저 귀족들의 기억에 남지 않은 채 도망칠 방법이 있을까? 추적이라도 당했다가는 장차 외교적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르는데?
동시에 같은 이유로 저자도 이곳에서 강한 마법을 쓰기는 힘들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스핀은 드레스 허리 뒤쪽으로 꽂은 검을 의식하며, 한순간에 뽑아 벨 태세를 갖춘 채 나직이 물었다.
“내가 여기 온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그런 건 몰랐소이다. 그저 운이 좋았달까. 우연히 이 근사한 호텔을 보고 차나 한 잔 마실까 하고 들어왔는데 당신이 눈앞을 지나가지 뭐요. 추적 마법이 걸린 물건만 갖고 있으면 얼굴 같은 건 몰라도 아무 상관이 없거든. 아, 그리고 미리 말해두지만 도망칠 생각은 마시오. 우리한테는 연행 마법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그런 말을 믿을 이스핀이 아니었다. 여긴 지나가다가 무심코 들어올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저런 꼬락서니로는 출입구에서부터 걸러졌을 게 틀림없다.
마법을 써서 어떻게 통과할 수는 있었다 쳐도 그럴 이유가 있어야 했다. 결국 이 호텔에 용건이 있었다는 뜻이다. 뭐였을까? 혹시 막시민이 여기 온다는 것을 알았던 걸까?
그건 물어볼 수 없었다. 저자가 혹시 모른다면 막시민까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멍청한 짓을 해선 곤란했다. 잡혀가더라도 혼자 가야 한다.
“마법을 배우면 운수도 좋아지나 보지? 그런데 이왕 이렇게 만났으니까 좀 물어볼게. 대체 수배는 왜 내린 거야? 날 잡아가서 뭘 하려는 건데?”
“아, 그렇게 위험할 건 없소. 약간의 조사지. 우리가 무슨 악당 소굴도 아니고, 네냐플이 심볼리온의 협약을 어기고 위험한 실험을 진행했다는 증거를 찾으려는 것뿐이오.
무슨 짓을 했기에 학교가 폐쇄될 지경이 됐을까? 그래놓고 단지 간단한 사고라고 억지를 부리며 외부 조사를 기를 쓰고 막는 이유는 뭘까? 최근에 또 수상쩍은 자의 침입이 있었지만 네냐플의 누군가가 숨겨서 내보내줬다는 정황도 포착됐는데, 그 문제 역시 조사를 거부하고 있고, 이런 식으로 네냐플이 무엇 하나 협조를 안 하니까 킵에서도 한 발짝도 못 나가고 있잖소!
대체 킵에 각국 군대가 주둔한 지도 일 년이 되어가는데 언제까지 갇혀서 담 너머만 구경하고 있을 건지. 우리는 네냐플이 숨기고 있는 걸 밝혀서 킵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려는 것뿐이니까 당신은 가서 증언만 잘해주면 되는 거요. 아는 대로 솔직하게. 당신은 네냐플 사람도 아니니까 상관없잖소?”
이스핀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마법사를 봤다. 마법사들은 마법을 배우느라 바빠서 정치적 화술 같은 건 익힐 시간이 없는 걸까?
뼈 있는 칭찬과 찬사를 가장한 모욕, 우회적인 협박과 열등감을 자극한 배후 조종 따위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오를리 궁정 사람들에게 익숙한 공녀에게 이 마법사가 한 말은 너무 투명해서 오히려 다른 수가 숨겨져 있지 않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일단, 심볼리온에는 네냐플과 반네냐플 파가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 그중 반네냐플 파가 네냐플을 공격할 구실을 찾고 있다가 이번 학교 폐쇄 사태를 기화로 네냐플의 약점을 잡아 주도권을 쥐고 싶어 하는 것 같고, 그러한 알력이 시작된 이유는 오래된 반감도 있겠지만 직접적으로는 킵에서의 작전 방향에 대한 의견 불일치인 모양이지.
이스핀은 오를란느 군대가 언제, 어떻게 해서 킵에 가게 됐는지 알고 있었다. 그곳의 최근 상황까지는 전해듣지 못했지만 네냐플에서 작전 개시를 반대하고 있다면 아마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길어지면 곤란한 자들도 있겠지. 누굴까? 기껏 병력을 이끌고 킵까지 왔으니 뭔가 공을 세워 제 입지를 넓히고 싶은 지휘관들이 아닐까?
킵에서의 작전 결정권은 마법사들이 갖고 있으니만큼 답답해진 군대 지휘관들 중 누군가가 심볼리온을 움직여보려 획책했고, 그들의 반네냐플 정서를 이용하려는 계획도 세웠을지 모른다.
그렇게 네냐플의 뒷조사를 해서 구린 곳을 찾아내고 발언권을 약화시켜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작전을 굴려보겠다는 건데, 그러자면 문제의 지명 수배자들이 그들에게 유리한 진술을 해주어야 하잖아?
그런데 그럴 얘기가 마땅히 있을까? 이스핀과 막시민이 둘 다 증언대에 서게 된다 해도 해줄 얘기라고는 술 마시다가 발끈해서 프시키를 이용해 혼내주려 한 얘기, 쥬스피앙이라는 마법사가 변덕을 부린 얘기, 뭐 그런 것들뿐이다.
그 결과 네냐플에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네냐플의 교수들이나 알 일이고, 막시민이나 이스핀이 뭘 알겠냐고.
거기까지 생각하던 이스핀은 문득 깨달았다. 프시키다.
킵의 변종 프시키들을 제어하기 위해 모인 마법사들은 프시키를 다루는 힘을 보여준 자신에게 큰 관심이 있지 않을까? 이스핀도 아이언페이스를 추적하는 일만 아니었다면 킵에 가볼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자신의 능력이 변종 프시키에게도 통할지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공은 ‘네가 그런 위험한 일을 할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물론 대공은 딸이 프시키 몇을 다루는 귀여운 힘을 가졌다고 해서 장차 전장이 될지도 모를 킵에 가게 둘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공식적으로 공녀의 그런 능력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심볼리온은 프시키를 다루는 사람이 있다면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다. 킵에서 공세를 시작할 근거를 쌓기에도 좋다.
또한 이 뛰어나신 마법사들은 마법도 모르는 두 지명 수배자들을 손에 넣기만 하면 자기들에게 유리한 진술을 하도록 강제할 방법 정도는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 이제 선택해야 했다. 이자를 공개된 장소에서 베고 도망치는 것과 심볼리온에 끌려가는 것, 어느 쪽이 더 위험하지?
그때였다.
“이분은 누구야? 나한테 남자라도 소개해주려고?”
이스핀과 마법사는 동시에 고개를 들어 테이블 옆으로 다가온 사람을 보고는 눈이 둥그레졌다.
마법사는 얼핏 착시가 일어날 정도로 번쩍이는 은빛 드레스에 놀랐고 이스핀은 상대의 얼굴 때문에 놀랐다. 이런 데서 보리라고는, 그리고 드레스 차림으로 마주칠 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에투알, 조안느 드 도벨은 여유롭게 둘을 훑어본 다음 이스핀 곁에 붙어 앉더니 새침하게 말을 이어갔다.
“에이, 근데 너무 늙었다. 내 타입도 아니고. 얘, 나 머리 저렇게 넘긴 남자 싫어하잖아.”
다 좋은데…… 저런 드레스를 어디서 구했담.
옷감도 광택 도는 오간자인데 거기에 붙은 은스팽글이 어찌나 현란한지 가장 무도회에나 어울리려나 싶을 정도였다. 훈련으로 다져진 몸에 키도 훤칠한 조안느가 입으니 화려함도 두 배다.
하지만 그건 고전적인 예절을 선호하는 오를란느 궁정 출신의 공녀님께서 한 생각이고, 실제로는 식당 안의 수많은 귀족들이 조안느의 드레스를 흘끔대고 있었다. 평소 검은 제복에 머리를 질끈 올려 묶은 조안느에 익숙했던 이스핀만이 인지부조화를 일으켰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 초 뒤, 이스핀의 얼굴에 응석부리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언니, 왔어? 오늘 드레스 멋있네. 근데 이 사람, 언니 소개시켜주려고 부른 거 절대 아니고 제멋대로 여기 앉더니 가질 않네. 어쩌지?”
“뭐라고?”
조안느한테서 ‘이게 미쳤나’ 하는 눈빛을 받은 마법사는 당황했다.
“자, 잠깐. 난 단지 심볼리온 마법사 회의의 명을 받고 이, 이분을 모시러…….”
연행하겠다던 말이 어느새 모시러 온 것으로 바뀌었다. 조안느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늘씬한 키로 상대를 내려다보며 귀족 특유의 오만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 내 귀여운 동생한테 감히 무례를 저지른 건가? 심볼? 마법사? 난 그런 건 모르겠고 관심도 없어. 고귀한 분들이 지켜보시는 곳에서 창피당하고 싶지 않다면 썩 물러나도록.”
“그럴 순 없소. 왜냐하면…….”
설명하기가 복잡하다고 생각했는지, 마법사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이스핀의 팔을 붙들었다. 그런 채로 무슨 주문을 외우려 했지만 조안느가 더 빨랐다.
테이블 위의 찻잔을 낚아채어 끼얹어버리자 그자는 주문이고 뭐고 잊고 제 얼굴을 감싸쥐며 비명을 내질렀다.
“으악!”
사방에서 사람들이 웅성대며 쳐다보고 급사도 두 명이나 달려왔다. 조안느가 이스핀을 부축해 일어나며 말했다.
“이자가 제멋대로 숙녀께 접근하여 감히 희롱하려 하기에 참지 못했을 뿐이다. 품격 높은 그랑도프에서 이런 자의 출입을 제지하지 못하다니 심히 유감스럽군.”
이때 조안느는 실제로 분개했기 때문에 급사가 움찔할 정도로 사나운 눈빛이었다. 곧 달려온 지배인을 향해 같은 말을 내뱉은 조안느는 이스핀을 데리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때 정신을 차린 마법사가 이를 악물며 룬을 내뱉었다.
“타리크, 크펜, 시아!”
파란 불꽃이 이글거리는 기둥이 나타나는 것을 모두가 보았다. 마법에 익숙하지 않은 자들에게 강한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마법사들이 공공장소에서는 사용하기를 꺼리는, 상급 주문만이 쏟아내는 빛이다.
당장 사방에서 비명이 울리며 몇 명이 기절하고, 나머지는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는 소동이 벌어졌다. 우아하게 앉아 있던 귀족들이 차를 엎질러가며 허둥지둥 달아나는 꼴은 꽤 구경거리였지만 그걸 즐길 여유가 있었던 사람은 없었다.
상급 주문은 마력의 대상이 아닌 자들에게도 비이성적인 혼란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뛰어난 마법사는 그것까지도 막도록 주문을 설계하지만, 그 수준이 안 되는 자들은 마법을 쓸 장소를 잘 골라야 한다.
몇 초 뒤, 기둥은 그 자리에 선 세 사람을 빨아들이고는 깨끗이 사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