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138)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140화(140/143)
140화. 차고 달고 쓴 동전 (33)
막시민의 임기응변은 뜻밖의 논리력과 저도 모르게 설득되고 마는 변칙적 전개로 이름났지만 이날은 상황이 달랐다. 막시민을 훑어본 직원은 이번에는 빌려 걸친 루시안의 펠리스에게 설득되었다. 보들보들한 최고급 양모에 금빛 브레이드 자수를 놓은 펠리스의 활약으로 직원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대답했다.
“저…… 누굴 말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감히 누가 그런 짓을……. 하여튼 전 아닌 거죠? 진짜 아니거든요?”
“몰라? 아는 놈이라고 감싸는 거 아니야?”
“진짜 아니거든요! 정말 몰라요!”
세상의 어느 주방에든 비쩍 마르고 키가 작은 놈은 조리 보조의 8할을 차지했으므로 막시민의 설명만으로 누군지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 꺼져!”
직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달아났다.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막시민은 빨랫줄에 걸린 앞치마 중 가장 지저분한 것을 걷어들고 쭈그러진 조리모자도 집은 다음, 자신은 펠리스와 코트를 벗고 급사용 재킷을 껴입었다. 바지는 없었지만 어차피 검은색이니까 대충 넘어가도 될 듯했다.
루시안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간 막시민은 친구의 코트를 벗기고 앞치마와 모자를 대충 들씌웠다. 그리고 코트를 앞이 잘 보이도록 곱게 접어서 반짝거리는 쟁반에 얹고, 쟁반을 한쪽 손으로 쳐들자 준비가 끝났다.
물론 막시민만.
“우리 이제 뭐 하는 거야? 식당에서 일하는 척하는 거야? 왜?”
“너랑 나라는 탈출범들이 여길 지나갔다는 걸 아무도 모르게 하려는 것뿐이야. 자, 루시안 넌 내 뒤를 따라오면서 큰 실수를 해서 겁먹은 것 같은 표정만 짓고 있어. 말은 전혀 할 필요가 없어. 혹시 해야 될 상황이 와도 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알았지?”
막시민은 말을 끝내자마자 통로로 들어갔으므로 루시안은 왜 그래야 하는지 물어볼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뭐, 막시민이 서두르는 데는 항상 이유란 게 있으니까.
막시민도 이유도 모른 채 계속 따라와주는 친구에게 고맙고 미안하기 그지없었지만 속도전에서 뒤지면 놓치고 말 터라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둘은 곧 조리실로 들어갔는데 내부는 또 다른 아비규환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코앞이었기 때문이다. 요리사와 보조들은 폭풍 같은 속도로 모든 것을 굽고 지지고 섞고 볶아댔다. 서로까지 포함해서.
공기는 뜨끈하고 발치에는 채소 쓰레기와 달걀 껍데기가 차이고, 소스와 기름은 밀가루와 범벅되어 미끈거렸다. 그들 모두가 어찌나 욕을 퍼붓는지 잠시 후면 윤기 나는 등심 덩어리나 통통한 송어로 서로를 쳐죽일 것 같았는데 그 모든 풍경이 구수한 연기에 절여져 있어 흡사 맛좋은 냄새가 풍기는 지옥이라고 부르면 적당할 듯했다.
호텔의 근사한 외관과는 전혀 다른 풍경에 깜짝 놀란 루시안은 막시민의 주의사항을 잊어버리고 몇 번이나 무슨 말을 했지만 사실상 들리지 않아서 상관없었다.
막시민은 그들을 재빨리 지나쳐 가려 했으나 한 조리사가 둘을 발견하고는 갑자기 호통쳤다. 루시안의 쭈그러진 조리모자가 진정 얼간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뭘 하고 있냐!”
막시민은 대꾸 대신 눈을 부릅뜬 채 루시안을 한번 돌아보고, 다음엔 쟁반에 올린 코트를 향해 눈짓했다. 이 시끄러운 곳에서 구구절절 사정을 설명한들 들리지도 않을 걸 서로 뻔히 아는 상황이었다.
조리사는 쟁반 위의 묘하게 근사한 옷가지와 쭈그러진 모자를 쓴 루시안을 머릿속에서 멋대로 결합한 다음 뭔가 황당한 일이 벌어졌음을 수긍했다. 그래서 손에 쥔 서대기로 루시안의 머리를 한 대 때리려 했지만 조리 보조가 때맞춰 밀가루 쟁반을 쑥 내미는 바람에 그 위에 얹어놓게 되었다.
막시민이 다시 걸어나가자 루시안이 허둥지둥 뒤따라오며 속삭였다.
“우와, 그 물고기가 날 흘겨봤어.”
서대기 눈은 본래 그렇게 생겼다고 말해줄 겨를도 없이 막시민은 문을 밀치고 밖으로 나갔다. 너무 더웠기 때문이다. 갑작스레 서늘한 공기가 밀려오며 이질적으로 하얗게 인테리어한 식당이 펼쳐졌다.
환하게 빛나는 대형 유리창, 알미잔의 초대형 샹들리에, 역시 알미잔에서 주문한 크리스털 화병 수십 개에 꽂힌 흰 수선화와 튤립, 이 모두는 필연적으로 어두운 곳에서 나온 두 사람이 똑바로 눈을 뜨는 것을 방해했다.
막시민은 루시안의 손을 잡아끌며 식당 구석으로 갔다. 눈이 안 보일 때 남의 눈에 띄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끌려가던 루시안도 나름대로 훌륭한 판단을 하고 있었다.
“이 멍청한 식당은 누가 토마토 수프라도 엎질렀다가는 문 닫아야 되겠네.”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으로 간 막시민은 루시안의 모자와 앞치마를 걷어내고 펠리스와 코트를 돌려주며 말했다.
“급한 상황이라 뭘 설명할 겨를이 없어 너무너무 미안하다. 그런 와중에 부탁 하나만 하자. 이제부터 여길 나가서 로비에서 잠시 기다려줘. 그러다가 이렇게 생긴 사람이 식당에서 나오면…….”
미코니스의 주문은 틀림없이 명중했다. 그러나 불꽃이 영향을 준 것은 옆에 구겨져 있던 양탄자와 등갓뿐이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둘 다 연기를 내며 타기 시작했다.
조안느가 기침을 하며 말했다.
“이런 밀폐된 실내에서 불 주문을 쓰는 게 넌 좋은 생각 같았니?”
미코니스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에게는 양탄자가 내는 연기보다 자신의 주문이 적에게 실금 하나 내지 못한 사실이 훨씬 충격적인 듯했다. 이스핀이 말했다.
“이제 똑바로 말해봐. 여기, 결계야? 아니면 이공간?”
“아닙니다. 그냥 눈속임으로 탈출구만 감춰진 겁니다.”
“그럼 창이 있겠지? 그걸 부숴. 전부 질식해서 쓰러지기 전에.”
그 말을 남기고 검을 비껴 들고는 제일 가까운 적을 향해 내달렸다. 정면은 아니고 측면에서, 그대로 잘라 베었다.
츠르륵!
마치 금속을 긁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쇳조각이 바스라져 사방으로 흩날렸다. 조안느도 뛰어들어 이스핀을 엄호하며 다른 것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파삭! 조안느가 소리쳤다.
“안전한 곳에 계십시오! 제가 지키겠습니다!”
이스핀은 들은 체도 않고 다음 것을 베어갔다. 조안느도 별수없이 이스핀과 등을 대고 싸웠다.
둘은 눈부신 연계 공격을 펼쳐 각자 십여 개씩을 베고 부쉈지만 잘게 부서진 조각들은 그대로 허공에 떠 있다가 기류를 타듯 갑작스럽게 움직여 둘의 옷깃이며 손등, 얼굴을 찢어 놓았다. 이스핀의 뺨을 타고 핏방울이 흐르는 것을 본 조안느가 다시 말했다.
“제발 물러나세요. 이건 제 임무입니다.”
이스핀이 낮게 속삭였다.
“로랑한테 옛날 얘기 못 들었어?”
“네?”
“아니다……. 내가 에투알에 미련이 있었나.”
로랑과 동굴에 갇혀 싸웠던 열다섯 살의 기억이 되살아나자 이스핀의 입가에 쓴웃음이 어렸다. 어리고 기백이 넘치던 수련병 샤를로트. 실종된 오빠에 대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때라 고집이 세고 극단적이기도 했다.
그래서 로랑이 고생했지. 평범한 근위병이라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나도 지키겠다’를 바득바득 우겼던 건 어쩌면 최선을 다해 죽어버릴 이유를 찾아내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고, 지금에서야 생각한다.
최악의 실패를 해버리고 나면 그 뒤의 인생은 어찌되는지 열다섯 살은 상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대로 계속 살아가도 되는 걸까? 오빠는 사라졌는데?
그런 엉망진창인 마음을 로랑은 뜯어고치려 들지 않고 인정해주고, 최선을 다해 함께 싸워주었다. 위험천만한 결단을 내린 건 그도 젊고 무모했기 때문이겠지만 그전에도 그후로도, 그래준 사람은 로랑뿐이었다.
하지만 그 일이 떠오른 이유가 조안느의 지키겠다는 외침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 이 상황이 그때와 비슷하다고 느낀 까닭이다. 정체 모를 적…… 그때 그 프시키들도 돌로 된 들개떼로 분화되었다.
혹시 이것들은 프시키인가?
이스핀은 검을 쥐지 않은 왼손을 앞으로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움찔, 하며 허공의 모든 쇳조각들이 멈추었다.
그러나 잠깐이었다.
스사사삭!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허공에 떠 있던 조각들이 바닥으로 내려앉더니 스르륵 녹아 사라졌다. 아니, 그것들이 바닥으로 변했다. 벽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와 똑같다. 동굴 벽으로 변해서 로랑과 자신을 짓눌러 죽이려 했던…….
“물러나!”
조안느도 상황을 알아차리고 침대 쪽으로 물러났다. 바닥이 물결처럼 밀려 일어나는 것을 본 조안느의 눈이 커졌다.
“이건 뭐죠?”
벽도 일렁이며 밀려들어왔다. 둘은 침대 위로 올라섰다. 침대를 중심으로 약 다섯 걸음, 다가온 벽을 향해 다시 한번 명령을 시도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이스핀이 주변을 살폈다.
“미코니스는 어디 있지?”
“벽 쪽에 있었는데 안 보여요. 벽이 삼켰나?”
이제 둘뿐이라면 해볼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오 년 전의 긴장감이 되살아났다. 그때도 절망적이었지만 결국 살아남았다. 하지만 매번 살아남으라는 보장은 없겠지.
이스핀이 찌르기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벽이 가까이 오면 칼로 찔러. 혹시 통할지도 몰라.”
조안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 특기 아시죠? 탈출시켜드릴게요.”
이스핀이 흠칫하더니 미간을 찡그렸다.
“싫어. 난 네 특기가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조안느가 피식 웃었다. 조안느의 특기는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단거리 순간 이동으로 탈출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법사가 아니기 때문에 공간 이동으로 발생하는 반작용의 충격을 상쇄시킬 수가 없고, 대신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상대가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약간의 충격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빈사 상태에 빠질 수도 있으며, 회복 불가의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었다.
“바로 옆일 텐데요, 뭐.”
“밀폐 공간 탈출할 때 충격이 큰 걸로 아는데? 또 옆이 어떤 데인지도 모르잖아. 괜히 특기만 쓰고 탈출이 안 될 수도 있어. 게다가 아픈 몸으로 혼자 남아서 어쩌려고? 절대로 하지 마.”
이스핀은 조안느가 제 옷깃이라도 잡을세라 재빨리 비키더니 가까운 벽을 찔러보기 위해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그런데 이 적들은 오 년 전의 프시키들처럼 적극적으로 공세를 펴는 것 같지 않다. 그때처럼 짓눌러 죽일 기세로 벽이 다가오지 않는데?
이어 검을 휘두른 이스핀은 흠칫 놀랐다. 벽지가 찢어지는 것처럼 벽이 기묘하게 늘어지더니 갑자기 사람의 윤곽이 튀어나왔다.
“여깁니다! 이쪽이에요!”
미코니스였다. 눈속임 벽 너머에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거기 숨어 있다고 안전하진 않았겠지만, 말도 없이 숨어버린 것에 기가 차서 이스핀은 미코니스를 째려봤다.
“너 방금 내 칼에 베일 뻔했거든?”
“안 그래도 쑥 들어올 때 엄청 놀랐네요.”
검이 통과하는 느낌으로 벽이 가짜임을 알아차린 이스핀은 몸을 내밀어 쑥 통과했다. 그제야 환한 햇살이 쏟아지는 창이 보였다.
그런데 창 너머로 널찍한 마찻길, 그리고 며칠 전 막시민과 서 있던 모퉁이가 빤히 보이는 게 아닌가?
이스핀은 어처구니가 없어 인상을 썼다.
“여기 호텔 안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