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139)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141화(141/143)
141화. 차고 달고 쓴 동전 (34)
창을 열어젖히자 찬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바람속에서 그간 지상에서는 보기 힘들던 프시키를 발견한 이스핀은 드디어 반격의 실마리를 잡았다고 생각하며 돌아섰다.
그때 문득, 막시민이 말해준 ‘네냐플이 문을 닫게 된 사연’이 떠오르며 목덜미가 선뜩해졌다. 아니, 잠깐만…….
방안의 저것들은 프시키와 비슷하지만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 혹시 저들도 킵에 있다던 변형 프시키와 비슷한 존재는 아닐까?
그렇다면 프시키와 저들을 만나게 하면……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엄청나게 수습하기 힘든 일이 생기는 것 아니야? 네냐플을 닫게 할 정도면 호텔쯤은 아무것도 아닐 것 같은데?
이 거대하고 화려한 곳이 뭔가에 오염되어 폐쇄되는 상상을 하자 갑자기 신중해진 이스핀은 맞서 싸우는 대신 탈출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고 창밖으로 상반신을 내밀었다. 이스핀이 허공을 향해 무어라 속삭이는 듯하더니 다리를 밖으로 빼며 창틀에 매달리는 모습을 본 미코니스는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이 됐다.
“저기, 저기요?”
이스핀은 대꾸 없이 방 안쪽에 있을 조안느를 향해 소리쳤다.
“퇴각!”
그러더니 진짜로 벽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명령을 듣자마자 싸움을 멈추고 달려나온 조안느가 방 쪽을 경계하며 말했다.
“뭘 놀라. 너도 내려가. 아니면 비키든가.”
그러더니 미코니스를 창밖으로 마구 밀어냈다. 미코니스가 비명을 지르며 덧창에 매달려 늘어지자 조안느는 그를 내버려두고 창턱에 걸터앉았다가 벽 일부가 기묘하게 물렁해진 것을 알아차렸다.
손가락으로 꾹 누르면 자국이 찍힐 것 같달까. 영문은 모르지만 이대로라면 내려가기도 한결 쉬워진다. 공녀님이 이렇게 만든 걸까?
“그럼, 수고해라.”
이스핀과 조안느가 척척 내려가버리자 혼자 남은 미코니스는 어쩔 줄을 몰랐다. 저들처럼 벽을 타고 내려갈 재주는 없고, 순간 이동 주문은 통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문으로 나가자니 괴물이…….
그런데 왜 덮쳐오지 않지?
미코니스는 가짜 벽 너머로 조심스럽게 머리를 내밀고 방안을 살폈다. 그리고 방이 그가 처음 들어왔을 때 기뻐해 마지않던 화사한 호텔방으로 돌아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새하얗던 침대 시트와 베개 위에 구둣발 자국이 요란하게 나 있을 뿐이었다.
겁먹은 걸음으로 더듬대며 걸어들어가던 그의 발에 뭔가가 걸렸다. 주워 들고 보니 파란 보석이 붙은 귀걸이였다.
루시안과 헤어진 막시민은 식당 안을 걸으며 이스핀을 찾았지만 어찌된 셈인지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기 지루해서 잠깐 나갔을까?
또한 그는 테이블 앞에 앉은 귀부인들을 하나하나 살폈지만 쉴리스 백작부인도 눈에 띄지 않았다.
“…….”
막시민은 자신의 판단을 되짚어보았다. 백작부인이 2층 파우더룸에서 막시민처럼 뛰어내려왔다면 식당 밖으로 나갈 시간이 충분했겠지만 귀부인의 품위란 것이 있고 에스코트한 급사도 있었으므로 천천히 걸었을 테고, 일단 어느 테이블에 앉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자마자 도로 일어나서 나가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엇보다 막시민은 백작부인이 안내인으로부터 권총을 건네받아 내려왔듯, 호텔을 나가기 전에 새로운 사람에게 넘기고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고 상상했다. 그러자면 누군가를 만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사람을 꼭 식당에서 만나라는 법은 없겠지만.
그때 식당 입구 쪽에서 사환 대여섯 명이 들어왔다. 그들은 각 테이블로 흩어져 뭔가를 물으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누굴 찾는 거지?
막시민은 누군가가 두고 간 트롤리 한 대를 끌어온 다음 막 손님이 떠난 테이블에서 빈 찻주전자와 찻잔, 접시 들을 쓸어 담았다. 제 코트는 트롤리 아래 칸에 넣고, 급사 재킷을 가다듬은 다음 침착하게 트롤리를 밀고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테이블을 지나치며 들어보니 사환들은 손님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있었다.
“혹시 호텔 뒤편에 가문의 표식이 없는 검정 이두마차를 세우셨습니까? 지금 부득이한 상황으로 마차를 옮겨야 하는데 마부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어휴, 고작 무단 주차한 얼간이 때문이었잖아.
약간 김이 빠졌지만 어쨌든 트롤리를 차지한 급사란 말을 탄 기사와 비슷한 효과가 있어서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고 주위를 두리번대며 나아가기에 좋았다. 그런 채로 테이블 사이를 누비며 한 바퀴 돌았지만 여전히 백작부인은 보이지 않았다. 어찌된 거지?
왜긴 왜겠냐. 상대가 아직도 같은 옷차림일 거라고 멋대로 확신한 탓이지.
생각을 바꾸자 드디어 눈에 들어왔다. 구석진 테이블에 앉은 한 숙녀의 무릎에 공작색 숄이 놓여 있었다. 드레스는 노란색으로 변했고, 머리 모양까지 잘도 바꿨다. 두 겹으로 걸쳤던 치마를 보디스에서 떼어낸 거겠지?
막시민은 그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주문하신 차 나왔습니다.”
“아직 주문을…….”
백작부인은 고개를 들었고, 막시민과 눈이 마주치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시 마주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막시민은 못 본 체하고 누가 마시다 만 찻잔을 아무렇게나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초조해진 백작부인이 짓눌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급사로 변장하고 나타나다니, 대체 무슨 속셈이야?”
“그쪽도 근사하게 갈아입으셨군요. 마치 가장무도회 같네요?”
“장난은 집어치우고 그만 사라져. 재미없으니까.”
“왜요? 여기가 아까 말씀하신 접선 장소가 아니란 말씀입니까? 전 그런 신호로 이해했는데요?”
“…….”
그때 한 사람이 백작부인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앉아도 될까 묻기는커녕 인사조차 없이. 마치 마부 같은 복장을 한 늙수그레한 남자였다. 그런 자가 백작부인에게 예도 갖추지 않고 불쑥 물었다.
“테레제, 오늘 기분은 어때?”
‘테레제’라고 불린 백작부인은 입술을 짓씹으며 대답했다.
“좋아.”
“잘됐군.”
마부 차림의 남자는 찻주전자의 온도를 재는 체하고 있는 막시민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백작부인만이 긴장해서 흘끔대고 있을 뿐이었다.
“뒤뜰에 마차를 놔뒀어. 알아서 타고 가.”
“……알았어.”
막시민은 아무렇지도 않게 식어빠진 차를 남이 먹던 잔에 따르고, 우유인지 설탕인지 묻는 것처럼 백작부인을 쳐다봤다. 하지만 어차피 설탕만 남아 있었으므로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각설탕을 세 개나 처넣었다.
그렇게 그랑도프 역사에 남을 망한 차를 제조한 뒤 트롤리를 어느 기둥 옆에 장식품처럼 척 가져다 놓고 돌아와 남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제야 놀란 남자가 막시민을 봤다.
“넌 뭐야?”
“아, 우리 초면이죠? 저로 말할 것 같으면 백작부인께서 조금 전에 경매장에서 아름다운 장난감을 훔쳐 안전하게 달아나시도록 무상으로 일조해드린 공범 되겠습니다.”
백작부인이 파르르 떨며 막시민을 봤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공범?”
“그럼 아니었나요? 여기서 두 분이 만난 이유도 그것 때문 아닙니까? 한 장면 나오고 사라질 배역인 제가 부스러기라도 얻어 가려고 덤비는 걸로 보셨다면 유감스럽지만 바로 정답입니다. 아까는 잘도 도망치셨는데, 세상에 공짜가 어딨습니까?”
“……너희도 나갈 사정이 있었던 것뿐이잖아?”
“별로 그런 사정 없었습니다. 기다리기가 귀찮았을 뿐이지.”
남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가 백작부인을 봤다.
“이건 누구야? 무슨 일이 있었어?”
“그냥 정신 나간 사람이야. 빨리 가.”
그렇게 말하며 백작부인은 손을 내려 치맛주름 안쪽에서 뭔가를 끄집어내려 하다가 갑자기 얼어붙었다.
“…….”
치맛자락 사이를 이리저리 더듬는 손이 떨렸다. 손놀림이 점점 빨라졌다. 이윽고 앞으로 꺼낸 손바닥 위에는 루시안의 펠리스에서 빼낸 묵직한 금장 핀이 놓여 있었다. 막시민은 무표정하게 그걸 힐끔 보더니 말했다.
“오, 멋진 핀이네요.”
백작부인이 고개를 홱 쳐들며 막시민을 쏘아봤다.
“너지? 어떻게 한 거야? 빨리 말해!”
“제가 뭘요? 전 그저…….”
그때 남자가 갑자기 막시민의 손목을 움켜잡으며 속삭였다.
“네놈이 무슨 농간을 부렸는지 모르지만 테레제의 추측이 근거가 없진 않겠지. 당장 내놔. 손목 부러지기 전에.”
막시민은 놀라는 시늉을 했다.
“설마 백작부인께서 귀여운 장난감을 잃어버리신 건가요? 그렇게 공들여 훔쳤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가져가서 박살을 냈어야 하는데. 그분께서 얼마나 실망하시겠습니까? 화가 나서 장난감 대신 여러분의 머리를 박살내는 일이 없다면 좋을 텐데요. 그 속에는 씨앗도 뭣도 없으니 말이죠.”
“……뭐?”
남자의 얼굴에 번진 당혹감은 거짓이 아니었다. 백작부인도 마찬가지였다. 막 권총을 잃어버려 크게 낭패한 터라 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두려움.
그걸 보며 막시민은 확신했다. 이자들은 아이언페이스의 부하다.
“복잡하게 빙빙 돈 데다가 당사자도 바뀌었지만 결국 이렇게 그랑도프 호텔에서 만나게 됐군요. 아이스크림과 홍차를 시켜야 하나? 오브리는 잘 있습니까? 하긴 우리 할아버지보다는 잘 계시겠죠?”
“네놈…… 그 손자로군.”
“이제 아셨습니까? 당신네들은 팀끼리 정보 공유를 잘 안 하는 모양이네. 시간이 없으니까 용건부터 빨리 말하도록 하죠. 교환을 하고 싶네요. 당신들이 원하는 것과 우리 할아버지를.”
남자와 백작부인의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말했다.
“대담하긴 한데 멍청하군. 그럴 필요가 있겠나? 난 이미 네놈을 잡고 있는데.”
“물론 그렇긴 하지만 권총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 않습니까? 날 잡아 물통에 넣고 헹군다고 그게 나오진 않을 텐데. 그리고 난 멍청이가 아니라 이폴레트의 손자고, 할아버지는 중요한 물건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다니지 말라고 하셨죠.
할아버지가 삼 년 전부터 당신들을 추적해 많은 것을 캐낸 덕택에 일하기도 아주 수월하네요. 당신들이 지금 당장 내 제안에 응하지 않는다면 물건은 오늘 안에 고고미술학 아카데미의 하브라스 원장의 손으로 되돌아가게 될 겁니다.”
“…….”
남자는 막시민을 쏘아보며 이것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가늠해보려 했다. 자신 있게 미소까지 짓고 있는 애송이는 과연 얼마나 주도면밀할까? 어디까지 일을 꾸몄을까?
무슨 생각을 하든, 그들은 이길 수 없었다. 권총이 없었기 때문에.
남자가 말했다.
“오늘 밤에 아르크벨 성으로 와라. 권총을 가지고, 혼자서.”
백작부인이 경악한 표정으로 남자를 봤다.
“무슨 소리야! 이 녀석을 잡아가면 어떻게든 알아낼 수 있어!”
“이놈의 할아버지도 그럴 줄 알았지만 아니었잖아!”
“둘이 되면 얘기가 다르지! 고문실에 마주앉혀놓으면 십 분 만에 털어놓게 돼 있어!”
그때였다. 막시민조차 예상 못 한 일이 벌어졌다.
“겨우 다시 만났군, 리프크네 군. 친구들하고 차 한잔하시나?”
등뒤에서 나타난 또 다른 남자가 마지막 남은 의자에 앉더니 막시민의 다른 손목을 붙잡았다. ‘리프크네’라는 이름에 놀란 막시민이 쳐다보니 남자는 구면이었다. 경매장에서 봤던 회색 코트의 남자다.
“갑자기 사라져서 얼마나 허둥지둥했는지 알아? 사람이 위험한 일을 하게 만들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