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14)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14화(14/143)
14화.
공녀와 탐정 (14)
4. 프시키
“여기예요.”
그날 밤, 샤를로트는 어제 빠져 나왔던 동굴 앞에 와 있었다. 네이와 함께였다. 밤이 되자 섬은 칠흑 같이 캄캄해졌다. 그리 깊은 밤도 아닌데 아무도 불을 켜지 않아서 그들이 들고 나온 램프 주위로 몇 걸음이 마치 섬의 전부인 듯했다. 머리 위로 금가루 같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을 뿐이었다. 멀리서 꺾어진 풀과 소금 냄새가 불어왔다.
눈앞에는 어제까지만 해도 돌로 된 문이 달려 있던 입구가 있었다. 멀쩡히 열린 채로. 돌문은 간 곳이 없었다. 비탈 아래로 비스듬히 뺑 뚫린 구멍에서는 조금 습하면서 서늘한 공기가 올라왔다. 갯가의 냄새랄까.
동굴이 뚫린 산비탈의 바위는 조금도 움직일 것 같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조금 기가 막혔다. 어제는 밀가루 반죽보다 쉽게 움직인 주제에…….
어제 일을 떠올린 샤를로트가 중얼거렸다.
“땅이 그렇게 제멋대로 움직여서야 어떻게 이런 데서 사는지 모르겠네.”
“살자면 적응하기 마련이죠.”
오늘 낮에 둘러본 섬은 지각변동이 날마다 일어났을 것 같은 풍경은 아니었다. 흙은 검은 편이었고, 식물은 꽤 잘 자라서 안정감 있는 숲을 형성하고 있었다. 북쪽 해안에는 주상절리가 있었지만 언제 생겨났는지 모를 정도로 오래된 것이라 했다.
“그래도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란 거잖아?”
“그럼요. 북쪽 바다로 나가면 이름이 징검다리라든가 뭐라든가 하는 바위섬들이 흩어져 있는데 계속해서 나타났다 없어졌다 한대요. 어떨 때는 수십 개였다가, 어떤 날은 하나도 없고.”
“밀물 때문이 아니고?”
네이가 고개를 저었다.
“밀물,썰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할 규모가 아니에요. 저도 가봤는데 상당히 크더라고요.”
“그럼 그걸 프시키들이 만들었다가 없앴다가 한다는 거야? 왜?”
네이는 버릇처럼 고개를 갸우뚱 하며 말했다.
“제가 알겠어요? 말씀드렸다시피 말이 안 통한다니까요? 섬사람들 말로는 프시키들이 겁이 나서 소란을 피우는 거래요. 또 가끔은 밤 중에 그 섬들에서 불이 켜지기도 한다는데, 물론 거기 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죠.”
번개를 맞은 나무가 불타다가 꺼진다든가, 그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그리 자주 일어날 리는 없다.
“그런데 돌문은 어디로 치운 거야?”
네이가 킥킥거리더니 대꾸했다.
“문이요? 그런 건 본래 없었어요. 여기 사람들은 그냥 날마다 평범하게 쓰는 통로거든요. 문이 있을 필요가 없죠. 그날 프시키들이 멋대로 만들었던 건데, 필요가 없으니 이제 없애버렸나 봐요.”
샤를로트가 하, 하고 어처구니없어 하는 탄성을 내뱉더니 말했다.
“우리를 가두려고 없던 문까지 만들었다고? 정말로 죽일 작정이었던 건 아니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들은 공녀님이 ‘블러디드’를 각성해주길 바랐다고요. 저들의 죽음을 감수해가면서까지.”
샤를로트가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좀 믿어지지가 않아. 프시키들은 내게 힘이 있을 줄 알고 있었다는 거잖아. 대체 어떻게? 그냥 딱 보면 아는 거야? 아니면…… 혹시 오빠한테도 그런 힘이 있었던 건가?”
“아뇨. 베르나르 대공자께는 그런 힘이 없었지만 그분은 공녀님이 타고난 힘을 알고 계셨어요. 물론 그분도 처음부터 아셨던 것은 아니고, 또 모든 것을 아시지도 못했죠. 시간이 너무 부족했어요.”
샤를로트는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그걸 오빠는 대체 어떻게 안 건데? 나 같은 사람이 어딘가에 또 있어서?”
네이가 기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떻게 아셨는지, 그것까지는 저도 모르네요. 블러디드가 또 있는 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제가 만나본 적은 없네요. 대륙이 넓으니 어디에 또 무엇이 숨어 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네이가 손을 뻗어 주위를 가리키는 시늉을 했다.
“프시키는 여기뿐 아니라 세상 어디든 있거든요. 하지만 이곳의 프시키들도 오래전에는 정말 조용 했다고 해요. 여기 섬사람들도 진짜로 존재하기는 하는가 미심쩍어 했을 정도로. 그러다가 대충 삼십 년 전부터 수상쩍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더니, 십여 년 전부터는 폭발적으로 늘어나서 당시의 천 배로 불어났다고 해요. 전 대륙의 프시키들이 여기로 몰려들고 있다는 뜻이죠. 그런데 프시키들은 어린애 같아서 많이 모일수록 시끄러워지는 데다, 또 변덕스럽거든요? 이젠 사람들도 대충 적응한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자고 일어나면 없던 절벽이 불쑥 솟아 있고, 숲이 불타는 것 같아 달려가보면 멀쩡하고,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지면 무척 신경이 곤두서겠죠.”
“그런 지경인데 왜 섬을 떠나지 않는 거야?”
“이 섬사람들은 몽타뉴하고도 교류를 안 할 정도예요. 게다가 말도 안 통한다고요. 어딜 가겠어요?”
오를란느에서 이들만큼 고립된 지역도 달리 없을 것이다. 샤를로트는 납득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물었다.
“하지만 도움을 청할 순 있었을 거 아니야?”
“대공 전하께 호소해서 프시키들을 싹 잡아달라고 하지 그랬느냐고요? 말씀드렸다시피 여기 사람들은 자기들이 프시키를 섬기고 돌보는 제사장들이라고 생각해요. 프시키를 보지 못하던 시절부터 그랬다고 하니까. 그러니 그들에겐 이 모두가 감수해야 할 일인 거죠. 그리고 프시키는 의외로 사람을 직접 해치지는 않는답니다. 프시키한테 물어본 건 아니지만 뭐 어쨌든, 지금까지는 그랬다는 거예요.”
그렇게 말한 네이는 킬킬 웃어댔다. 다소 음산하게. 이런 곳에서 오래 머물러서 그렇게 된 건지, 레코르다블 사람은 원래 그런 건지 모르지만 네이는 살짝 미친 것 같은 데가 있었다.
“말리바 할머니가 그러더군요. 낮에 빨간 옷 입은 할머니 보셨죠? 프시키의 뜻을 가장 잘 알아듣는다는 할머니인데, 최근에 프시키들이 난폭해져서 거의 미쳐 돌아갔대요. 그런데 공녀님이 오시니까 순식간에 얌전해졌다나요. 블러디드는 프시키를 지배하니까. 그리고 프시키들도 그걸 원하니까. 어제 동굴 속에서 벌어진 일도 누군가가 시킨 게 아니에요. 프시키들이 자발적으로 벌인 일이었다고요. 다시 말해 블러디드는 우리 같은 사람이 봐서 아는 게 아니라 프시키 들만이 알아보는 것 같아요.”
샤를로트가 미간을 찡그렸다.
“지성이 있는지조차 모를 자들인데 지배를 원하고, 나를 두려워하면서 나를 불러다 주길 원하고, 살고 싶어 하면서 저들을 죽여버리는 내 힘을 각성시키고, 대체 왜? 왜 그렇게 모순적으로 구는 거야? 내가 그들에게 뭘 해줄 수 있는데?”
네이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키득 키득 웃었다.
“그거야말로 프시키들만이 알겠죠. 그러니까 참 이상하지만 조금 애처롭기도 하달까. 공녀님을 몹시 사랑하는, 그래서 공녀님 손에 죽고 싶어 하는 작고 찬란한 새들 같네요. 이 세상에 무슨 일인가가 닥친다는 걸 알아차린 카나리아들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절벽에 제 머리를 부딪쳐 가면서까지 뭔가를 알리고 싶은가 봐요. 그게 뭘까.”
네이는 그렇게 말하며 앞치마에 달린 커다란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무언가를 꺼내어 내밀었다. 받아들고 보니 돌덩이였다. 꽤 컸는데도 그리 무겁지는 않았다. 마치 속이 빈 것처럼.
“어제 동굴에 들어가서 찾아내어 온 거예요. 깨뜨려보세요.”
샤를로트는 돌을 쥐고 바위벽에 한 차례 부딪쳤다. 그러자 겉 부분이 과자처럼 부서져 내리더니 안에서 살구씨만 한 검고 반들거리는 덩어리가 나왔다. 돌에서 나왔지만 꼭 과일의 씨앗처럼 보였다.
“그걸 프시키의 ‘심장’이라고 해요. 어제 거대하게 뭉쳐졌던 프시키들이 죽었을 때 나온 것이죠.”
까만 덩어리를 손끝에서 굴려보던 샤를로트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심장이라고? 프시키는 생물이 아니잖아? 아니, 물론 살려는 의지를 가진 것 같긴 했지만…….”
샤를로트는 그것을 집게손가락으로 들고 램프에 비춰 보았다. 손에 검은 것이 조금씩 묻어나는 걸 보면 마치 역청을 뭉친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촉감 자체는 딱딱했다. 그리고 기분 탓인지 모르지만 미세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물론 생물은 아니죠. 음식을 먹지도 않고, 번식하지도 않고, 수명도 없고, 어제처럼 그런 식으로 죽지 않는다면 사실상 영원히 사니까. 그런데 두려움도 있고, 예지도 있고, 저들끼리 자리다툼도 하고, 그런 걸 보면 무생물은 또 아니네요. 하여튼 그 심장이라는 걸 모든 프시키가 갖진 않아요. 사실상 대부분에겐 없죠. 어제처럼 서로 합쳐져서 거대하게 변했을 때에만 생겨나는 것 같아요. 그래봤자 이렇게 작디작지만. 그런데…….”
네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대공자께서는 이것과 차원이 다른 것을 갖고 계셨어요.”
네이가 두 손을 벌리더니 어린애 머리통만 한 크기를 만들어 보였다. 샤를로트의 눈이 약간 커졌다. 네이가 속삭이듯 말했다.
“크고, 뜨겁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심장.”